빈센트 반 고흐에게 / 안영희
한 잎 지난해의 일력마저 지운 벽에다가
조간신문에서 오려낸
당신의 사진을 붙였습니다
읽히지 못한 시를 쓰는 일이
가슴을 얼음 날이 되어 도려낼 때
살아서 단 한 점의 그림밖엔 팔지 못했다는
반 고흐 당신을 올려다봅니다
생전에 당신을 모독하고 짓밟았전 이들의
저 떠들썩한 속죄의식 전 세계 최고가의 그림 값
더는 못 견뎌 제 손 들어 꺼 버린
서른 일곱 처절한 목숨의 불꽃
밀밭가 묘지 위로 100년의 강물 흘러간 다음
비로소 도착한, 저 진실의 완행열차 요란한 경적소리에
왜 내 살 속 깊은 곳곳마다에 핏물 번져 들고 있습니까
이 한 세기의 다음 세상
마지막 한 사람마저 낙엽 지운 내 마음 빈 벽에다가
순수의 벼랑 끝 영혼 당신의 초상화를 걸었습니다
가도 가도 혓바닥 휘말려 드는
이 사막 가운데서 내 手話를 걸고 싶은
오직 한 사람
- 안영희 시집 <내 마음의 습지> 2008
어쩌자고 제비꽃 / 안영희
비바람 치는
함덕 바닷가 덮쳐오는 시퍼런 파도에
잇대어 있었네
현무암 낮은 돌담으로 방풍을 친
무덤들 틈새에 있었네
내 곱은 손에 뜨거운 카푸치노 한 잔을 건네준
까페 올레는
사람이 그리운 어린 딸과 흰 털 강아지
레이스 앞치마의 아낙
머리채 나꿔채고 옷깃 파 헤집는
광란의 바람 속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며
죽은 자들의 마을 고샅 겨우겨우
차를 돌려 나왔네
어느 날 길길이 뒤집힌 저 바다가 난파시킨
애처롭고 위태했던 생애들은, 사지 접힌
저 사람들은 누구누구들이었나
늦은 겨울 비바람 포효하는 함덕 바닷가
검은 유택들 비집고
어쩌자고 제비꽃 저 한 포기
사과 / 안영희
사과밭을 지날 때면
국어선생님 생각이 나네
나를 만나면 가만히
사과 볼의 소녀야, 하고 불러주던
열다섯 살 생각이 나네
몰랐었네 그 때는
8월의 과수원에는 하얀 봉지를 쓴
프란체스코 묵언의 수사들이 산다는 것
견디며, 죽은 듯이 견디며 건너야 하는
폭약의 여름이 있다는 것
사과 볼의 소녀야, 불러주던
국어선생님의 기억이 슬픔일 줄은
한 알 사과가 탐스레 익기까지
발치아래 수많은 낙과와 몰린 짐승처럼 깜깜하게 우는
태풍의 밤이 있을 줄은
이 오랜 행려의 뒤
행여 그 국어선생님
사과 볼의 소녀야, 나직하게 나를 불러준다면
내 마음 크렁크렁 사과빛 붉은
눈물이 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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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날 달려가보는 마음의 사과밭이 있다.
소녀적 국어 선생님으로 환치되는 아련한 사과향 추억을
꺼내어 볼 때마다 태풍의 밤이며 폭염의 여름이며
힘겹게 건너온 삶을 돌아본다. 한 알 사과가 붉게
익기 위해 건너왔을 한 세상. 그 묵언의 수사들이 살던
과수원은 지금도 안녕한지... 폭약의 여름으로 표현되는
젊은 날의 열정이 남아있는 한 소녀는 있다.
아직도 꿈을 빚어 구워내며 시를 구워내며 노래하는
그 소녀, 시인의 삶이 나직하게 ‘사과 볼의 소녀야!’ 하며
부르는 삶인 것을. 아줌마 몸빼바지도 사과향 그 소녀의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으로 춤을 추는 날이다.
아, 상큼하다.
(필자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