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기도 짙은 어둠이 산과 마을을 덮고 있다. 사람들은 어둠을 헤치며 주지봉 오름길을 찾아 모여들었다. 플래시를 비추어 가며 산자락을 오르기 시작했다. 커다란 바위가 있는 산 중턱에 이를 무렵 사람들의 얼굴이 보일 듯 말 듯한 미명이 비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복 많이 받으세요. 초면 구면을 가릴 것 없는 인사를 나누며 횡목의 계단 길을 올라간다. 함께 오르던 아내는 저만치 처져 버렸다. 처음으로 가풀막이 심한 주지봉을 오르는 아내가 남들처럼 오르기는 애초에 무리다. 그러나 아내는 포기하지 않았다. 새 아침 새 해를 향해 빌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는 모양이다. 주지봉을 오르는 사람들의 행렬은 이어진다. 못고개마을 쪽에서 오르기도 하고, 솥골마을 쪽으로부터 올라오기도 했다. 가쁜 숨을 다스리지 못해 죽을힘을 다해가며 오르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커다란 상자를 멜빵에 꿰어 메고 오르기도 하고 배낭을 짊어진 채 늠름히 오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등짐을 지고 오르는 사람들은 마성청년특우회 회원들이다. 떡이며 술과 과물(果物)을 메고 올라온 것이다.
주지봉 정상에 올랐을 때 미명은 가시고 해돋이를 예비하는 새벽빛이 온 누리를 덮었다. 아내도 숨을 몰아쉬며 올라온다. 특우회 회장을 비롯한 회원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정상에 섰다. '특우회'란 청년회에서 청년의 연륜을 보낸 사람들이 다시 모인 지역 봉사 단체로, 새해를 맞을 때마다 지역의 해맞이 행사를 주관해 오고 있다고 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세요. 악수를 나누며 덕담을 주고받는다. 오늘 해가 몇 시에 뜬다고 했지요? 곧 뜨겠지요. 이제 제상을 차립시다. 청년회 회원들은 정상 한 자리에 자리를 펴고 앞쪽에 물상도 듬직한 돼지머리를 좌정시킨다. 그 옆엔 커다란 떡판에 담긴 시루떡을 펼쳐 놓고 대추, 밤, 곶감, 건어물, 과자 등도 차례로 진설한다. 해가 여태 안 보일까? 저길 봐요. 누가 동쪽의 오정산 마루를 가리킨다. 구름이 짙게 끼어 있었다. 지금 몇 시지요? 여덟시가 다 되어 가네요. 해가 벌써 떴을 시간이에요. 일기예보에서는 구름 사이로라도 햇빛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저렇게 많이 끼어서는 햇빛 샐 틈이 있어야지. 맞아요. 그래도 저 구름 속에 해가 떠 있을 겁니다. 밝은 해가 떠 있다고 생각하고 제를 올립시다. 마성 사람들의 믿음이요, 의지였다. 그 풍요롭게 석탄을 캐내던 탄광들이 하나, 둘씩 문을 닫아가도, 마침내 모든 탄광들이 문을 닫을 때도, 석탄을 실어 나르던 기차가 기적 소리를 멈추었을 때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던 마성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험난하게 부침해 온 세월 속에서도 마성벌을 굳건히 지켜온 마성 사람들의 의지였다.
특우회장이 제물 앞에 두고 해 떠올 동녘을 향해 꿇어앉았다. 집사가 술을 따른다. 강신, 참신의 예에 이어 초헌을 올릴 때, 축관이 독축(讀祝)을 한다.
"유세차 병술년 정월 초하루 새해 벽두에 마성면 특우회 회원 일동과 주민 일동은 지역의 영산 오정산으로 솟아오를 희망찬 새 해를 정성을 다해 맞이하고자 주지봉 정상에 주과포를 진설하고 천지신명께 고하나이다……."
지역과 지역민의 안녕과 번성을 빌었다. 농사짓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 모두 올해는 좀 잘 살게 해주시고, 모두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시고……. 천지신명의 어깨가 참으로 무거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이 새해 새 아침에 이 높다란 산봉우리에서 비는 커다란 소망은 천지신명이 꼭 돌보아주시리라고 믿는다.
지역의 한 기관장이라고 나에게도 헌작의 기회를 주었다. 잔을 드리고 손을 모아 읍례(揖禮)로 절을 한다.
"올해도 이 마성벌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게 해 주시고, 그리고, 그리고……"
나만의 소망을 지역민들의 제대(祭臺)에서 빌기가 송구스러웠다. 가슴 가장자리에 뜨거운 무엇이 솟는 듯했다. 해는 뜨지 않았지만 구름 빛은 차츰 밝아져 갔다.
"우리 지역의 발전과 우리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빌면서 만세 삼창을 하겠습니다. 다 같이―."
"만세! 만세! 만세!―" 목청을 다해 불렀다. 그리고 힘찬 박수를 쳤다. 박수 소리는 산마루를 돌아 산 아래의 마을로 들로 퍼져 나갔다. 우리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떡과 술잔을 함께 나누며 음복을 하고 다시 덕담을 주고받는다.
"자, 다 같이 힘차게 내려갑시다. 산 아래 못고개 마을회관에 떡국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솥골에서 올라온 분도 다 같이 못고개 쪽으로 내려갑시다."
밝은 해가 둥실 뜬 걸로 생각하고, 그 해를 향해 한껏 빈 소망들을 가슴마다 가득 안고 173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며 내려간다. 주머니 속의 전화벨이 울린다. 그것은 구름 속으로부터 해가 솟아 나오는 소리였다. 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버지 새해에 더욱 건강하십시오." "지난밤에도 전화했잖냐?"
"좋은 꿈 꾸셨습니까?" "꾸었지만 말 안 할란다."
"저희들이 아버지 어머니를 위해서 좋은 선물 준비했습니다." "뭐냐?"
"손주 놈이 할아버지 할머니 뵐 날을 기다리고 있대요. 한 달쯤 되었답니다."
"뭐라고? 왜 이제 이야기하는 거야!?"
"아버지 어머니께 새해 선물로 드리려고요. 어제는 입이 가려워 혼났습니다."
해가 밝게 비치는 것 같았다. 햇살이 아내와 나의 온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드디어 어린것을 품에 안아볼 수 있게 되는가. 언뜻, 기쁨을 속에만 깊이 간직해 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누설해서는 안 될 커다란 기밀처럼 느껴졌다. 그놈을 품에 안는 날 크게 한 번 웃으리라 생각했다. 아들이 제 처와 연을 맺어 산 지 3년째, 얼마나 기다리던 그놈인가.
마을회관으로 내려와 부녀회원들이 끓인 떡국을 함께 나눈다. 그믐날부터 육수를 끓이며 정성 들여 준비했다고 한다. 만두를 함께 넣어 알고명을 얹은 떡국이 참 맛있다. 회관의 방과 마당에는 해맞이 객들로 꽉 찼다. 모두들 떡국을 맛있게 먹고 있다. 우리 내외를 위한 축복의 자리 같았다.
"사람 사는 것 같습니다. 늘 이렇게 붐비면 얼마나 좋아!"
못고개마을 이장님의 말이다. 두어 해 전만 해도 마을에 육십여 호는 살았는데 지금은 거의 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도 집집이 하나 아니면 둘, 마을 사람들 다해야 마흔 명 정도에 모두 노인들뿐이라며 마을의 앞날이 걱정이라고 했다.
며느리가 시집을 오던 날, 아들 둘에 딸 둘쯤은 낳아야 된다고 당부했었다. 이제야 그 중 한 놈을 볼 수 있으려는가. 마을회관에 어른, 아이 함께 둘러앉아 덕담을 주고받으면서 떡국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며, 손자 서너 놈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 주고받으며 함께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 중에는 투정을 부리는 놈, 밥알을 흘리는 놈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먹여 주고 닦아줄까. 상상만 해도 즐거운 그림이다.
"자! 올 한 해도 자알 살아봅시다. 모두 건강하고요."
인사와 악수를 나누며 모두들 집으로 돌아간다.
마을공원의 커다란 상수리나무 가지 사이로 하얀 햇살이 비쳐오고 있었다.♣(20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