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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유곡(栗里遺曲)
-김광욱
1
도연명 주근 후에 또 연명(淵明)이 나닷말이*,
밤마을 녜 일흠이 마초와 틀시고,
도라와 수졸전원(守拙田園)*이야 긔오 내오 다르랴.
도연명이 죽은 후에 또 연명(淵明)이 나타났다는 말이
밤마을의 옛 이름과 더불어 공교롭게도 같구나.
돌아와서 전원에서 살고자 하는 우직한 태도와 본성이야말로 그와 내가 다르겠는가.
* 도연명 주근 후에 또 연명(淵明)이 나닷말이: (옛날 도연명이 은거해 살던 율리라는 마을과 작자가 살고 있는 있는 마을 이름이 맞춘 듯이 일치하니) 죽은 도연명이 다시 나로 태어난 것이란 말인가?
* 수졸전원(守拙田園): 자신의 옹졸함을 지키기 위해, 즉 자신의 분수에 맞게 살기 위해 전원으로 돌아가 은거함
[해설] : 지은이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밤마을[栗里]에 은퇴하여 살면서 지은 '율리유곡'의 첫 연이다. 점층법의 표현이 인상적이고, 자신을 '귀거래사'를 지은 도연명을 자처하였다. 옛날 도연명이 살던 마을 이름도 율리였다. 이해타산에 너무나도 얽매인 현대인의 맹성을 위한 타산지석이 될 만도 하지 않은가.
2
공명(功名)도 잊었노라 부귀(富貴)도 잊었노라
세상 번우(煩憂)한 일 다 주어 잊었노라
내 몸을 내마져 잊으니 남이 아니 잊으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공명(功名)도 부귀(富貴)도 잊어버렸다.
그리고 세상의 번거롭고 걱정되는 일도 모두 잊어버리고
마침내 나 자신까지도 잊어버렸으니, 남이 나를 아니 잊을 수 있겠는가?
[해설] : 속세를 잊고 산수 자연 속에서 자연의 섭리대로 무위의 경지와 탈속한 은사의 심경을 노래했다. 점층법과 반복법을 써서 세상과 인연을 끊으려는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어 작가의 고고한 자세를 읽을 수 있다.
3
강산 *한아(閑雅)한 풍경 다 주어 맛다 이셔
내 혼 님자이니 뉘라서 톨소니
남이야 *숨꾸지 여긴들 화 볼 줄 이시랴
고요하고 아름다운 강산의 풍경을 다 나에게 주었기에 그것을 다 맡아 가지고 있으니
모든 것이 내 것이요 내가 그 임자다. 그러니 누구와 다툴 것인가?
남이야 나를 욕심쟁이다 심술궂다 하더라도 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남에게 나누어 줄 일이 있겠는가.
* 한아(閑雅)한 풍경 다 주어 맛다 이셔: 고요하고 아담한 풍경을 다 주길래 맡아 있어
* 숨꾸지 여긴들: 심술궂게 여긴들
[해설] : 옛 사람들은 자연과 벗하는 생활을 나타낼 때 풍월주인, 서호주인 등으로 표현했다. 곧 지신이 자연의 임자임을 자처하면서 그 속에서 소요자적하는 생활을 하나의 이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김광욱도 이를 닮아 자기가 자연의 임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4
헛글고 싯근 문서 다 주어 후리치고
필마(匹馬) 추풍에 채를 쳐 돌아오니
아무리 매인 새 놓이다 이대도록 시원하랴.
흩어져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문서를 모조리 집어 내던지고
한 필의 말을 타고 가을 바람을 스치면서 채찍을 쳐서 고향으로 돌아오니
아무리 갇혔던 새가 놓인다고 한들 이처럼 시원할 수 있겠는가.
[해설] : 공무에 매어 복잡한 문서 속에서 살다가 모두 다 집어치우고 자유의 몸이 되어 훌훌 고향으로 돌아온다. 새장 속에 갇혀 있던 새가 자유를 얻은들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늘 그리워하던 전원 생활을 눈 앞에 두고 신명이 나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때는 가을이어서 오곡백화가 향기롭게 익어 가고 논밭에서는 풍년가도 들렸을테니 그 모두가 작가를 환영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5
질가마 조히 씻고 바위 아래 샘물 길어
팟죽 달게 쑤고 저리짐채 끄어내니
세상에 이 두 맛이야 남이 알까 하노라
질가마(흙으로 구워 만든 가마솥)를 깨끗이 씻고 바위 아래에서 샘물을 길어다가
팥죽을 달게 쑤고 절이 김치를 꺼내어 먹으니
세상이 이 두 맛(팥죽과 절이 김치)이야 말로 남이 알까 두렵노라.
[해설] : 대단치 않은 음식인 팥죽과 절이 김치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하며 남이알까봐 걱정하고 있다. 전원생활의 즐거운 식생활과 안빈낙도의 생활을 노래했다. 또한 궁핍할 때 지은 것으로 보여 강인한 작자의 생활욕을 엿볼 수 있다.
6
어와 저 백구(白鷗)야 무슨 수고 하나슨다
갈숲으로 바자니며 고기 얻기 하는고야
나 같이 군마음 없이 잠만 들면 어떠리
어와 저 갈매기야, 무슨 수고 하느냐?
갈대숲으로 오락가락하며 고기를 얻으려 하는구나.
나처럼 딴마음이 없이 잠만 들면 어떻겠니?
[해설] : 당시의 위정자들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 권력[고기]를 찾아 혼탁한 정계[갈숲]를 헤매는 정치인[백구]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산림에서 '군마음' 없이 은거[잠]하는 화자 자신의 모습을 대비시킴으로써 정치 현실을 풍자하고 있는 연이다.
7
최행수 쑥달임 하세 조동갑 꽃달임 하세
닭찜 개찜 올여 점심 날 시키소
매일에 이렁성 지내면 무슨 시름있으리.
8
모첨 기나긴 해에 해올 일이 아주없네
포단에 낮잠 들어 석양이 지나 깨니
문밖에 위 뉘 아함하고 낚시가라 하나니.
9
삼공(三公)이 귀타 한들 이 강산과 바꿀소냐
편주(片舟)에 달을 싣고 낚대를 흩던질 제
이 몸이 이 청흥(淸興) 가지고 만호후(萬戶侯)인들 부르랴
세상에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같은 높은 벼슬이 귀하다고 한들 어찌 이 자연과 바꿀 수 있겠는가?
조각배에 달빛을 가득 싣고 낚시대를 던질 때에
내가 맛보는 이 맑은 흥취야말로 만호의 식읍(食邑)을 갖는 제후의 부귀영화를 부러워 하겠는가.
[해설] : 옛 사람들은 삼공불환차강산(三公不換此江山)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아무리 삼정승의 부귀영화라도 이 자연과는 바꾸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 작품도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12
세(細)버들 가지 꺾어 낚은 고기 꿰어들고
주가(酒家)를 찾으려 *단교(斷橋)로 건너가니
온 골에 행화(杏花) 져 쌓이니 갈 길 몰라 하노라.
가는 버들의 가지를 꺾어 낚은 고기를 꿰어들고
술집을 찾으려고 헐어진 다리를 건너가니
온 골짜기에 살구꽃이 떨어져 쌓이니 갈 길을 몰라 하노라.
*단교(斷橋): 끊어질 듯 낡은 다리
[해설] : 낚은 고기를 들고 술집을 찾아가던 화자가 골짜기에서 행화가 지는 모습을 보면서 발길을 옮기지 못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13
대막대 너를 보니 유신하고 반갑고야
내 아이 적에 너를 타고 다니더니
이제란 창 뒤에 섰다가 날 뒤세우고 다녀라
대나무 막대기(아이들 적에는 죽마가 되고, 늙어서는 대지팡이가 되는 막대기) 너를 보니 신의가 있고 믿음직하며 반갑구나.
내가 아이 적에는 너를 타고 다녔더니
이제는 창 뒤에 서 있다가 날 뒤에 세우고 다니는구나.
[해설] : 지은이의 호가 죽소인 것으로 미루어서도 그는 대를 몹시 좋아했나 보다.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는 대, 사철을 한결같이 푸른 대는 옛부터 지사의 절개에 곧잘 비유되었다. 결이 곧아서 쭉쭉 곧게 쪼개져 나가는 것에서 '대쪽 같은 성품'이라는 말도 생긴 것이다. 그 대를 어린 시절에는 대말을 만들어 말놀이를 하고, 늙어서는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의지하고 다닌다. 죽장망혜로 산천을 유람할 때도 대는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대는 인생의 반려가 되었다.
14
뒷집의 술쌀 꾸니 거츤 보리 말 못 차다
즈는 것 마고 띠허 쥐비저 괴아내니
여러 날 주렷든 입이니 다나 쓰나 어이리
▶ 작품 해설
인조 때 우참찬(조선 시대 정이품 문관)을 지냈던 글쓴이가 만년에 도연명의 ‘귀거래’를 본받아 율리라는 경치가 빼어난 곳에 은거하면서 지은 14수의 연시조로, 벼슬을 떠나 전원과 자연 속에 살아가는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노래한 작품이다. 작가는 당대의 정치 현실에도 무심하지 않아 나라를 위해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을 칭송하고 있지만 자신은 강산풍월을 두고 갈 수 없다고 하면서 정치 현실보다는 자연에 높은 비중을 두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주제: 자연을 벗하는 풍류 넘치는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