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배우라는 직업은 사라질 것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자동화 기계가 공장으로 밀고 들어올
때, 많은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었다. 새로운 시스템은 새로운 인력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디지털 혁명이 빠른 속도로 진행중인 우리 시대의
영화에서도 곧 허구의 배우들이 현실의 배우들을 밀어내지 않을까? 걱
정된다.
3D 애니메이션 [슈렉]을 보면 이젠 컴퓨터 그래픽이 실제 인간의 표
정이나 느낌을 전혀 거부감 없이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상
으로 창조된 배우들이 현실 속의 배우들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릴 날이
곧 올 것이다. 그들은 배우 노조 파업도 하지 않고 출연료 더 올려달
라고 신경전을 벌이지 않아도 된다. 연기를 못해서 NG를 내는 일도
없다. 인기 컴퓨터 게임을 영화화 한 [툼레이더] 속에도 허구로 창조된
배우들이 출연하는데 실제 인간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스필버그의 드림웍스에서 만든 [슈렉]은 올해 칸느 영화제 공식 경
쟁부문에 출품되었다. 애니메이션이 칸느의 경쟁 부문에 오른 것은 극
히 예외적인 일이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으로서는 50여년 만에, 그리
고 애니메이션으로서는 28년만에 칸느 경쟁부문에 오른 [슈렉]은 그만
큼 작품성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놀라운 흥행성
을 갖고 있다.
슈렉의 괴물 이미지는 사실 수많은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하는 낯
익은 캐릭터이다. 그런데 [슈렉]에서는 그 낯익음을 뚫고 신선한 모습
으로 재무장되어 있다.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늪지에 혼자 살고 있는
슈렉은, 녹색의 덩치 큰 괴물이고 사람들이 접근하기 무서워하는 끔찍
한 용모를 갖고 있지만, 숲 속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용에게
납치된 피요나 공주를 찾는 모험의 길을 떠난다.
여기까지는 흔한 줄거리이다. 다른 캐릭터들과 차별화 되지 않는다.
하지만 슈렉이 특별히 영웅시되거나 미화되지 않는다는 점에 오히려
인간적 매력이 있다. 그는 덩치는 크지만 엄청난 초인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혜가 뛰어나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지도 못한다.
외모는 특이하지만 슈렉의 내면은 평범하다.
[슈렉]은 실사 영화로 치자면 일종의 버디 무비이다. 남자 2명이 전
면에 배치되어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성격이 전혀
다른 캐릭터가 충돌을 빚으면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한다. [슈렉]에서도
당나귀 덩키의 대조된 캐릭터가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킨다. 수다스러
운 덩키와 과묵한 슈렉, 작고 빠른 덩키와 커다랗지만 느린 슈렉, 이런
대조가 자잘한 잔재미를 부여한다.
[슈렉]에는 또 온갖 동화들의 캐릭터와 서사구조가 패러디 되어 있
다. 심지어 마카레나 춤의 동작도, 영화 [매트릭스]의 공중부양 360도
회전 발차기 신까지 패러디 되어 있다. 일곱 난쟁이와 공주들의 이야
기인 [백설공주], 12시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모든 것이 호박과 초라한
짚으로 변해버리는 유리구두의 [신데렐라], 그리고 숲 속의 전설 [로빈
후드], 거짓말하면 코가 늘어나는 [피노키오],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
는 [마녀 삼총사], 피리를 불며 쥐들을 불러모으는 [피리 부는 아저씨],
또 [피터팬] 같은 다른 동화의 캐릭터가 잡탕처럼 한데 헝클어져 있다.
바로 이 점이 [슈렉]에 기묘한 정서를 환기시켜 준다.
전설의 탑 속에 갇혀 잠을 자고 있는 피요나 공주 역시 마찬가지다.
슈렉이 당나귀 덩키와 함께 힘든 모험 끝에 구해내지만, 동화와는 이
야기가 다르다. 동화 속에는 왕자가 용을 죽이고 공주에게 입맞춤을
하면 공주가 깨어나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용은 아직 죽지 않았고, 더
구나 당나귀 덩키에게 반해 열심히 구애를 하고 있다. 공주 역시 공중
제비를 돌며 발차기를 하는 뛰어난 무술의 소유자이다.
[슈렉]의 미덕 중의 하나가 해피엔드를 상투적으로 강요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런 영화의 결말이야 안봐도 뻔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주인공들이 험난한 여정을 마친 뒤 행복하게 끝나는 것으로 마무리된
다. 하지만 [슈렉]에서는 다르다. 밤이면 뚱뚱하고 못생긴 괴물로 변하
는 마법에 걸린 피요나 공주는, 진실한 사랑의 키스가 필요하다. 우리
는 슈렉이 공주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마침내 영화
의 마지막, 모든 것이 평정되고 난 뒤 슈렉과 공주가 키스를 할 때, 당
연히 마법이 풀리고 피요나 공주는 해가 저물어도 아름다운 공주로 남
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슈렉]은 이러한 일반 관객들의 기대와 예측을 외면하고 여
전히 뚱뚱한 모습 그대로 피요나 공주를 만들어 놓는다. 하지만 그렇
다고 해서 피요나에 대한 슈렉의 사랑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점 때문에 [슈렉]의 인간적 매력이 있다.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목소리 연기이다. 동영
상의 질감을 배가시키는데 목소리는 커다란 역할을 한다. [슈렉]의 성
공요인 중의 하나가 목소리 연기자들의 뛰어난 연기에 있다. 거대한
괴물 슈렉 역에 [오스틴 파워]의 엽기 첩보원 오스틴을 맡았던 다재다
능한 마이크 마이어스가 맡았고, 슈렉의 짝꿍 당나귀 덩키 역에 코미
디의 황제 에디 머피가 맡았다. 또 피요나 공주는 카메론 디아즈가
맡았는데 이 세 주연의 목소리 연기는 정말 일품이다.
[슈렉]의 감독은 앤드류 아담슨과 비키 젠슨이다. 남녀 2인조로 이루
어진 이 팀의 호흡은 기기 막히다. 하지만 그들을 지휘한 사람은 스필
버그와 함께 드림웍스를 설립한 제프리 카젠버그이다. 디즈니사에 잇
을 때 [인어공주][알라딘][라이언 킹]을 만들어 흥행 성공시켰던 애니
메이션 산업의 귀재인데, 드림웍스로 옮긴 뒤 [이집트의 왕자][엘도라
도][치킨 런] 등을 만들었다. 현재 그는 또 다른 3D 애니메이션 [터스
커]와 1800년대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한 2D 애니메이션 [스피릿]을
준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