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소리
제일 가든 앞
철망담장에 몸을 기댄
넝쿨장미 나무
넋이 나간 모습이다
비를 맞고 또 맞은 모습
바람을 맞고 또 맞은 모습
속수무책 당하고만 있던 모습이다
꽃을 피우던 열정
가시를 세우던 자존심
그들을 모두 버린 모습이다
푸르기만 하던 은행나무 감나무
목련나무도 수척해 있다
유학
아궁이 안으로 뛰어드는 불길
그 불길을 부지갱이로 툭툭 치며
나는 혼자 말을 했다
'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불이나 때고 있을 때가 아닌데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야 하는데 '
하지만 나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는 선생님이 나를 위로 했다
미국으로 여행을 가면 그것도 유학이라고
견문을 넓히는 것이 유학이라고
주전자 식당
한강 유수지로 가는 길목
주전자 식당이 있다
밥을 팔고 술을 팔고 고기를 굽는 집이다
그 집에 오는 손님들은 대부분
그 동네에 사는사람들이다
낯에 일을 했거나 일이 없어 놀았거나
저녁이 되면 주전자식당에 모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그집에 오지 않으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 날이고
그들이 그집에 모이지 않으면
그날의 정보가 뒤진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어느날 가끔
그집 남자가 손님들에게 시비를 건다
그것이 남자가 여자에게 관심을 사는 사랑법이다
그때마다 그집 야자가 나와 손님들에게 굽신댄다
그것도 여자가 해야되는 일중의 일이다
술에 취해서 그런다 양해를 해달라
손님들은 별 관심없이 언제나 처럼
밥을 먹고 술을 먹고 고기를 먹는다
여자의 등에 업힌 아기가 힘이든다
구면상
장마비가 내리는 칠월 한 달
내내 그림을 그렸다
10호 캔버스에 아홉사람의 얼굴을 그렸다
배우를 그리고 가족을 그리고 친구를 그리고
그룹전에 출품 할 그림이기에
시간의 제한을 받고 그렸다
초벌 칠을 하고 재벌 칠을 하고
세 번 네 번 다섯 번 째의 색을 입힐 때 부터는
긴장을 하고 그렸다
환경이 다르고 나이가 다른 사람들이기에
각각 다른 마음 을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림이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 때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개인의 표정능 괜찮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화롭지 못했다
다시 그린다 해도 더 좋아질 확신이 없고
시간도 없었다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눈이 아팠다
나에게 남은 에너지가 모두 고갈됐다
갑자기 삶이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정운빌라
긴 장마가 끝나고
햇볕이 쨍 든 날
주택가 정운빌라 주차장에
낯선 투럭이 들어온다
점심을 먹은 남자들이
트럭 위에서 쪽잠을 잔다
그들에게 바람이 솔솔 불어준다
가을을 알리 듯
맴미 소리가 시원하다
그곳을 지나는 여인이 빙그레 웃고
잠을 자던 한 남자 한 명이
실눈을 떴다가 다시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