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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이 없는 분들을 위하여 - 제 3대열 |
어떤 사람이 막 떠나려는 기차에 헐레벌떡 뛰어와서 가까스로 올라탔습니다. 아직도 숨이 가빠 헐떡이며 땀을 씻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놓치실 뻔 하셨는데 ...잘 뛰셨군요.”
“네! 그렇고 말구요. 이 열차를 타지 못했더라면 4시간이나 무료하게 기다려야 했을 테니까요.”
4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진대 하물며 영원을 위해서라면 최선을 기울일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오늘날 인류는 현세에서의 행복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계획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앞에 놓인 영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역사가 분명히 증거 해주고 있는 사실에도 아랑 곳 없이, 죽은 다음에 있게 될 심판을 무시한 채, 마침내 큰 구렁 저편에 있는 지옥에서 발버둥치게 될 몸서리치는 불행을 도외시 한 채, 인류는 이제 불행의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으며, 하나님도, 죽음도, 심판도, 하늘나라도, 지옥도 없는 양 살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우심으로 자칫하면 헤어날 수 없는 영원한 불행의 문턱에 서 있는 당신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이 사실을 믿든지 혹은 믿지 않든지 간에 이상 말씀드린 것이 바로 당신의 운명이요, 모습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영원의 문제에 대하여 외면하지 마십시오. 미루는 것은 자신을 도둑 맞는 것이고 살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 미루는 일이 열흘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양 속담에 “미루는 것은 포기하는 것과도 같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이 영원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미루고 계신다면 당신은 영원토록 후회하게 되실는지 모릅니다.
“차차라는 길은 영원이라는 마을로 인도한다”는 스페인 격언이 있습니다. 더이상 거리를 배회하거나 방황하는 사람처럼 영원의 문제에 대하여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대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이렇게 말씀드릴 때 어떤 분은 “천만에요. 저는 결코 제 영혼에 관해 무관심하거나 내버려두고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다만 제 마음이 제 구원을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아니랍니다. 다만 제 마음이 구원을 확신할 수 없는 것뿐이지요”라고 말씀하시면서 반발을 느끼실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제 2대열에 끼여 여행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확신할 수 없다는 분을 위하여 - 제 2대열 |
확신할 수 없다는 것도 앞서 말씀드린 관심이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불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불신으로 말미암아 영원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죄와 타락에 빠졌습니다. 또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섭리를 불신하는데서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게 되는 것임으로 무관심과 불확신은 본래 불신을 모체로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얻고자 갈망하는 당신을 위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당신이 이 문제로 얼마나 고민하고 계시는지를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아울러 이처럼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보다 진지하고 더욱 관심을 쏟는 만큼 오히려 당신은 영원토록 구원 얻은 것을 확신하기까지 불안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다 얻고도 자기의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인자한 아버지의 외아들이 항해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들이 탄 배가 거센 풍랑으로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 아버지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 안전하다는 확실한 소식을 듣기 전 까지는 결코 마음을 놓지 못하고 안타까워할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이 어느 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밤은 깊었고 날씨도 추운데 달빛도 없어 길이 험하고 도저히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갈래 길에 다다랐는데 마침 저쪽에서 어떤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길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글쎄요, 저 길로 가시면 맞을 상 싶습니다만 저도 초행이라서 확실히는 모르겠는걸요. 부디 길을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면 당신은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으실까요?
어두운 밤, 초행에 향방을 모르고 간다는 것은 점점 당신에게 불안과 초조를 더해 줄뿐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에 대해 염려하고 초조한 나머지 침식을 잊게 된다거나, 심한 갈등이나 초조감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은 결코 이상스러울 것이 없으며 ,오히려 우리의 영혼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재물을 잃게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건강을 잃게 된다는 것은 더욱 불행한 일이지요.
그러나 영혼을 잃게 된다면 이야말로 돌이킬 수가 없는 영원한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확신을 얻기 원하는 분에게 - 제 1대열 |
이제 당신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는데 도움이 될 만한 세 가지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행 16:17)
둘째로, 구원에 관한 지식(눅 1:77)
셋째로, 구원에 관한 기쁨(시 51:12)
언뜻 보면 말씀드린 세 가지 사실이 서로 비슷한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와 각각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아셔야합니다. 즉, 구원의 확신은 없지만 구원의 도리는 잘 알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구원을 얻었으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 분이 있는가하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에 따르는 기쁨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분들도 상당히 많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1.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
성경을 펴서 출애굽기 13:13절의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봅시다.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너의 아들 중 모든 장자된 자는 다 대속할지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와 함께 삼천여년 전에 있었던 일을 상상해 봅시다. 하나님의 제사장과 어느 가난하기 짝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대화가 그들 곁에 떨면서 서있는 어린 나귀에 관한 것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스라엘 사람은 “사정 말씀을 드리려고 왔는데요, 제사장님, 제발 이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실 수 없을까요? 이 약하고 어린것이 제 첫 나귀새끼 올시다. 저도 율법에서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 하신 말씀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대속할만한 어린양이 없는데, 제 나귀의 생명을 살려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제발 부탁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딱 잘라 말합니다.
“사정은 딱하지만 안될 말씀입니다. 엄연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물론 대속할 어린양이 있다면 모르겠소만......양이 죽든지 아니면 반드시 나귀의 목을 꺾든지, 다른 방도란 없지 않겠오?”
“이젠 다 틀렸군요. 마지막 한 가닥의 기대마저 사라져버렸어요.”
그 때 옆에서 이 딱한 사정을 듣고 있던 친구가 “아무 염려하지 말게나. 내가 해결해보겠네. 언덕 너머 우리 집에는 집을 나가서 길을 잃은 적이 없는 어린 양이 한 마리 있는데, 이제껏 제멋대로 집을 나가서 길을 잃은 적이 없는 양이어서 아주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다네. 내 부지런히 가서 그 양을 끌고 올 테니 잠시 기다려주게나”
마침내 나귀를 대신하여 점 없고 흠없는 양의 피가 단 아래 뿌려지고 양의 몸은 불살라졌습니다. 비로소 제사장은 가난한 사람을 쳐다보며 “이젠 그 나귀를 데리고 평안히 돌아가시오. 목을 꺾지 않아도 되었으니 참 기쁘겠소. 양이 대신 죽었으니 나귀는 털끝만큼도 다칠 필요가 없소. 당신의 친구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시군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상 말씀드린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게 되는 경륜을 깨닫게 됩니다. 제사장이 나귀의 목을 꺾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듯이 당신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은 당신의 범죄한 머리를 꺾을 것을 선언하십니다. 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은 가난한 이스라엘 사람을 위해 그의 친구가 예비해 주었던 양처럼 대속 제물이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당신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는 없으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어린 양, 독생자를 통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세례 요한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외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갈보리로 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의로운 분이셨지만, 불의한 자를 대신 하셔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벧전 3:18) 과연 주님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롬 4:25)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경건치 않은 자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을 손상시키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하심으로 공의와 거룩을 나타내시게 됩니다.(롬 3:16) 오직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구주를 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당신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믿고 의지하십니까?
“예! 저는 가련한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셔서 제가 받을 심판을 이미 받으셨다는 귀한 말씀을 확실히 믿습니다.”라고 당신이 마음 중심에서 고백하신다면(오! 이 고백을 지금이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이미 희생물이 되어 죽으셨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이미 그리스도를 제물로 받아주셨으므로, 즉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공로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죄가 없는 자로 인정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확실히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입니다.
이 얼마나 고맙고도 단순한 구원의 길입니까! 또한 이 구원의 섭리야말로 얼마나 위대하십니까! 과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며,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보배로우신 영광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벌레 같은 인생, 구더기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다니....
이 얼마나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십니까!
사랑하는 독생자로 하여금, 찬양을 받아 마땅한 이 모든 구속 사업을 이루게 하심으로 불쌍하고 가련한, 나같은 죄인이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축복을 누리게 해주시고, 영영 주와 함께 행복을 누리게 해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찬양, 찬양, 찬양을 드립니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시 34:3)
너무 크고 엄청난 구원을 믿음으로 값없이 받아야 한다니까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주저하며 받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림으로 그 대가로 구원을 받도록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족을 누리시며, 그 아들의 죽으심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죄를 담당하시기에 충분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시고 누구든지 그를 주님으로 믿는 자에게는 심판을 걷으시고 영생을 주시어 영원토록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을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렇지만 당신께서는 아직도 의문이 사라지지 않은 채 “물론 저는 자신의 행실이나 능력, 또는 율법을 의지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속의 공로만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구원의 확신이 없으니 어찌된 일일까요? 한 때는 구원받았다고 장담을 할 것 같다가도 얼마 못 가서 모든 소망이 사라져버리는 데는 아주 미칠 지경이랍니다. 마치 제 마음은 폭풍 속에서 닻을 내리지 못한 채 파도 따라 출렁이는 베와도 같은데 어찌하면 좋을까요?”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당신의 착각을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닻을 배 안 어느 구석에 붙들어 매어 놓고 배가 안정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께서도 너무나 잘 아시겠지만 배를 안정시키려면 닻은 배의 밖에 든든한 곳을 골라 매는 것이 상식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구원의 확신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달려 있는 것이며, 당신의 기분(감정)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변덕을 부리는 느낌, 감정, 기분으로 확신을 얻으려고 하니 이만 저만 착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사실을 믿는 믿음만이 우리의 안전이 되는 것을 아시면서도 여전히 잘 변하는 감정으로 확신을 얻으려고 하시는 것이 큰 잘못입니다.
2. 구원에 관한 지식
그렇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이 영생 얻었다(=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분명히 알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5:13절의 말씀을 먼저 조금 바꾸어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기쁜 느낌(감정)을 준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위 글과 아래 기록된 본문을 대조하셔서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유월절 밤, 곧 애굽의 장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큰 재앙을 내리시던 밤 수많은 이스라엘 장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생명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출애굽기 12장 참조)
그들 중 두 가정만 찾아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첫째 집에서는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처럼 죽을 상이 되어 불안해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집 장남이 우리에게 귀띔을 해줍니다.
“오늘밤에 죽음의 사자가 우리 집을 지나갈 것입니다. 장자는 다 죽는다고 했으니 제가 어떻게 될지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습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그는 이어서 “요행히도 죽음의 사자가 우리 집을 지나쳐 버리고 새벽이 밝아온다면야 제가 안심할 수 있지만, 그때까지 장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옆집 친구는 확신한다고 장담하고 있지만, 외람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쨌든 이 지루한 밤이 지나 보아야 알 일이지요.”
“그렇지만, 당신들이 믿고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던가요?”
“물론 가르쳐 주셨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점도 흠도 없는 1년된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렇지만 누가 알아요? 만에 하나라도 재앙을 만나게 된다면 어쩌겠어요?”
이번에는 불안에 떨고 있는 첫째 집을 떠나 옆집으로 가 봅시다. 언뜻 보기에도 그들은 첫째 집의 침울하고 불안한 분위기와는 딴 판이었습니다. 그들은 허리에 띠를 띠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서서 구운 고기를 먹으면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요. 죽음의 천사가 다니고 있는 이 밤에 모두들 이처럼 즐거워하고 계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어찌 기쁘지 않겠어요? 이제 내일 여호와께서 떠나라고 명령만 하신다면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애굽의 종살이에서 풀려나게 될텐데요.”
“그렇지만 이 밤이 가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오늘밤이야말로 애굽 전국을 휩쓰는 심판의 밤이 아닙니까?”
“물론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우리 큰 아이는 아주 안전하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신대로 어린양을 잡아 피를 뿌렸거든요.”
“그렇지만....바로 옆 집 사람도 그렇게 했지만 여전히 불안해하던데요?”
“그래요?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넘어가리라]고 분명히 약속해 주셨거든요.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리가 없지않아요? 대문에 뿌린 피 때문에 안전하고 약속하신 말씀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이 두 집 중에서 어느 집에서 어느 집 아들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되십니까? 기뻐하고 있는 두 번째 집이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두 집은 모두 안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집 안에서 어떻게 느끼고 있던 간에 (기뻐하는가 불안해하는가를 보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뿌려진 피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실로 당신께서 구원을 확신하려고 하신다면, 하루에도 수 십, 수백 번도 더 변하는 감정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고, 만고불변의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뿌려진 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흘려주신 보혈 외에는 우리를 멸망의 심판에서 안전하게 보호해 주실 수 없으며,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 외에 확신할 수 있는 근거로 또 다시 없음을 명심하십시오.
한 농부가 농토를 빌리려고 물색하던 차에 자기 집 근처에 좋은 농장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사용 허가를 해달라고 지주에게 부탁을 애 두었습니다. 그러나 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지주에게서는 아무런 회답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웃 사람이 찾아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저 농장은 당신에게 사용 허가를 해 줄 것 같아요. 작년 크리스마스 때만해도 지주가 당신에게 선물을 푸짐하게 보내왔고, 지난 번에는 그분이 차를 차고 지나가면서 당신을 보고는 친절하게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손을 흔들기도 했지않았어요?”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농부의 마음은 희망에 부풀어 올랐고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 다음날 이 농부는 다른 이웃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이웃 사람은 “아직도 농장 사용 승낙을 받지 못하셨다지요? 실은 지주와 친한 사람이 그 농장을 부탁했다는데 요즈음 그 사람은 문턱이 닳도록 지주의 집을 드나든다던데요. 모르긴해도 금년에 당신이 그 농장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농부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아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한 때 희망으로 부풀었던 가슴이 이제는 절망으로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어제는 기뻐서 날아갈 듯 했는데 오늘은 온통 걱정과 근심 밖에 남지 않은 것입니다. 불안한 가운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우체부가 편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지주에게서 온 편지였기 때문에 얼른 펴서 읽어 내려갔습니다. 몇 줄을 읽어 내려가는 농부의 얼굴에는 미소가 넘쳤습니다. 농부는 환호성을 울리며 아내를 불렀습니다.
“여보! 이젠 됐어! 이젠 안심해도 돼. 이 편지를 보라구! 이제는 누가 뭐래도 상관이 없어요. 지주의 말 한마디면 대법원 판결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편지에는 “이번에 부탁한 사람이 많았으나 당신에게 허락하기로 결정했습니다.”라고 똑똑히 써있었습니다.
잠깐 생각해 봅시다.
수많은 영혼들이 가련하게도 이 농부와 같이 불안해하며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의견이나, 부질없는 생각으로 당황하고 초조해 하는 것입니다. 의혹과 초조를 물리치고 확신 가운데서 기쁨을 누리게 되는 유일한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과연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불신자에게 멸망을 공고하신 말씀이든, 성도들에게 구원을 약속해 주시는 말씀이든 하나님의 말씀은 만고불변하는 확실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에 24:35절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고, 시편 119편 89절에는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다.”고 말씀했고, 민수기 23:19절에는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하나님께서 보증해주시고 계시기에 하나님의 말씀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단 하나의 열쇠입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믿는 것 외에는 어떤 이론이나 핑계나 주장이라도 쓸데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또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어 불안해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가 하면 자기 감정이나 생각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진 것입니다. 산에 가서 금식 기도하다가 이상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거나, 부흥회 때 실컷 울어본 적이 있다고 해서 그 것이 믿음의 확신을 주는 줄 아십니까? 속지 마십시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으셔야 합니다.
“나에겐 사람의 주장이나 아무런 핑계도 쓸데없고 오직 날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만족! 만족!”
그래도 당신께서는 "그렇지만 제가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라고 반문하실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저도 당신에게 반문하겠습니다.
“당신은 올바르신 분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믿고 의지하십니까?”
을바른 믿음이란 얼마나 잘 믿고 있는가 하는 분량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연 믿을만한 분을 믿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의지하며, 어떤 사람은 옷깃만을 만져도 구원을 받으리라는 단순하고 위대한 믿음으로 의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둘 중에 어느 누가 안전하거나 불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한가지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우리가 얼마나 열심으로 믿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은 쓸모없는 죄인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 놓으신 구속의 공로로만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사실을 신뢰하는 그것이 곧 믿음이요 구원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이제 확실히 아셔야 될 것은 당신이 선한 행위나 엄격한 종교생활 혹은 종교적인 감화나 의식을 잘 지켰다거나, 경건해졌다는 느낌이나,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어려서부터 훌륭하게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당신이 이로 말미암아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일로 인하여 확신을 갖고 계실지라도 그것은 그릇된 확신이요, 마침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연약하기 짝이 없을지라도 이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이상 말씀드린 것들이 자신을 구원해 주리라 확실히 믿으신다 해도 착각이요,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고 증거하셨습니다. 실로 나 자신은 전혀 믿을 수 없을지라도 주 예수님만은 믿고 의지하기에 마땅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당신은 울상이 되어 “저는 확실히 예수님을 제 구주로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가 구원받았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두렵습니다. 혹시 구원받지도 못했으면서 받았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까봐 걱정이 돼서 아예 침묵을 지켜버리곤 해요”하고 말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시다면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어떤 목장을 경영하는 사람이 몇 마리의 양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아빠, 몇 마리나 사오셨어요?” 하고 묻는 딸에게 “열 마리”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이웃 사람이 딸에게 “아빠가 양을 몇 마리나 사오셨니?” 하고 물었을 때 “글쎄요. 아빠가 말씀해 주셨지만 거짓말이 될까 보아서 말씀드리고 싶지 않은데요.”라고 대답했다고 합시다. 이야말로 아빠를 거짓말쟁이로 취급해버리는 처사가 아니겠어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합니까?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긴 하지만 거짓말이 될까봐 두려워 구원받았다고 말하기를 꺼린다고 하면, 아버지를 거짓말쟁이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또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믿어보려고 무던히 노력해왔지만 모두가 허사였어요. 나 자신을 들여다볼수록 확신은 고사하고 내가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었어요. 내가 믿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확증할 수 있을까요?”
친구여! 당신이 믿어보려고 노력하고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지지도 않는 것을 놓고 “아멘! 할렐루야!”를 연거푸 말해도 믿어지지 않을 때에는 어쩌는 도리가 없습니다.
잠깐 귀를 기울이십시오.
어느 날 저녁 당신이 집에서 조용히 쉬고 있는데 이웃 사람이 찾아와서 역장이 철도 사고로 죽었다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지금 찾아와 일러준 그 사람은 인근에 소문이 자자할 만큼 거짓말쟁이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사람의 말을 믿으실 리가 없죠? 만약 제가 “왜 믿을 수 없느냐?”고 반문한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처지인걸요. 누가 그런 사기꾼의 말을 믿어줍니까?”라고 대답하시겠지요. 이로 보건대 믿는 것은 기분이나 감정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말해준 사람의 됨됨을 보아서 믿을 수 있는가 없는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후 바로 이웃에서 장사하는 어떤 분이 찾아와 역장이 화물 열차에 치어 즉사했다는 소식을 다시 전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래도 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서 아마 당신은 그것이 정말 발생한 사건이라고 믿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편 다음과 같은 생각이 났습니다.
“그 사람의 말도 그대로 믿기는 힘들어. 그도 장사할 때 보니까 물건값을 엄청나게 비싸게 팔더군. 늘 밑진다고 말하지만 실은 늘 이익을 많이 본단 말이야.”
그렇다면 당신이 반쯤 믿게 된 것은 당신의 감정이나 맘속의 생각에 따라 된 것이 아닙니다.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식을 전한 사람을 완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전한 소식도 반신반의하는 것입니다.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착잡한 심정에 사로 잡혀 있을 때에 막역한 친구가 찾아와서 동일한 사실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당신께서는 “자네 말이라면 여부가 있겠나? 딱하게도 역장이 교통 사고에 희생을 당했군”하고 말했다 칩시다. “당신께서는 어떻게 그 친구의 말을 고스란히 믿을 수가 있으신지요?”하고 묻는다면 “그야 그 친구와의 사이에는 흉금을 털어놓고 지내는 터인데 피차 이제껏 거짓말을 한다거나 속인 일이 없거든요”라고 대답하시겠지요. 결국 당신은 사건 현장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또한 자신의 맘속에 그럴듯하게 보여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에 의심치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 예수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는데 어찌 못 믿을 것으로 여기십니까?
“만일 우리가 사람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요일 5:9-10)고 분명히 증거 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반면에 아브라함은 사람의 증거보다 믿을만한 하나님의 증거를 받았을 때, 하나님의 증거를 믿음으로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습니다.(롬 4:3)
언젠가 구원의 확신을 갈망하는 한 부인이 전도인에게 찾아와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선생님 도무지 믿어지질 않으니 어쩌면 좋죠?”하고 호소했습니다. 그 때 상담을 하고 있던 전도인은 조용하고도 슬기롭게 반문했습니다.
“그래요? 아주머니께서는 믿을 수 없다는 그 분이 누구시지요?”
그 때에야 비로소 이 부인은 자신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주 예수님과 십자가의 공로를 바라보고 믿는 대신, 그리고 이에 대하여 증거해 주시는 성경 말씀을 의지하는 대신, 자꾸만 자기 자신이 무언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기 속에서 증거를 찾고자 했던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태양을 등지면 그림자가 등 뒤에서 보이지 않는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확신을 얻게 되며, 심령에 불안이 사라지고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하늘나라에 계신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볼 수는 없습니다.
오직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볼 때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완성해주신 구속 사업을 통하여 이미 나를 영원토록 안전하게 해주셨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은 주 예수를 믿는 자에게 영원토록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통하여 완성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완성해 주신 구원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3. 구원을 통한 기쁨
“제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추호도 의심이 없어요. 그렇지만 구원받기 전이나 다름없이 낙심하고 답답해 할 때가 자주 있거든요. 위안이나 기쁨을 송두리째 잃게 될 때도 있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군요.”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위안과 기쁨은 주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심령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도 “육신”이라 불리우는 옛 성품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옛 성품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악한 성품을 가리킵니다. 육신이라 불리우는 옛성품은 어머니의 무릎에서 젖을 빨고 있는 어린 아이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성도의 심령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육체의 소욕을 대항하시기 때문에 언행 심사에 있어서 육신적인 모든 일은 성령님을 근심케 합니다. 주께서 합당하게 여기시는 대로 행할 때 성령님께서는 성도의 심령에서 갈라디아서 5:22절 이하에 말씀하신 대로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등을 풍성히 맺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반대로 믿는 사람이 세상의 방법대로 살며 자기의 생각대로 행동한다면 이는 우리 마음 속에 계시는 성령님을 근심케, 또는 소멸케 하는 일이며 그 생활은 결코 밝거나 힘있게 되지를 못하고 오히려 실패하는 생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속 사업과 당신의 구원은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당신의 행위와 기쁨 역시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가상이지만, 만일 그리스도의 공로가 무효로 된다면 당신의 구원도 무효화 될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당신의 행위가 그릇될 때에 당신의 기쁨은 사라질 것입니다.
물론 첫 번째 논리는 어디까지나 가상에 불과하지만, 두 번째 논리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같은 체험을 했던 것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고...”라는 사도행전 9:31절의 기록과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는 사도행전 13:52절의 기록으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당신께서 구원받은 후에 심령에 참으로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는 당신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이제 자신의 문제점을 발견하셨기를 바랍니다. 당신께서는 구원의 확신과 기쁨이란 전연 별개의 사실인데도 마치 하나인양 혼동하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제멋대로 하여 절제하지 못하고 세속적으로 살게 될 때에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리게 되고 자신도 기쁨을 잃게 되는데 이를 구원의 확신과 관련시켜 생각하셨기 때문에 확신마저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당신의 구원은 당신을 위해서 이미 이루어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있는 것으로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기쁨은 언행 심사간 주께서 합당히 여기는 대로 행함으로 즉,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통해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리지 않았는데 달려있기에 이것만은 당신의 책임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릴 일을 저질렀을 때에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아름다운 교제가 중단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맺어진 부자간의 관계가 무효화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드린 대로 부자간에 틈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즉,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나 결코 영적인 교제가 되지 않습니다.)이러한 경우에 교제의 기쁨을 회복하고 불화를 해소하는 유일한 길은 자기 자신을 살펴보고 죄를 자백하는 것뿐입니다.
당신의 자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럴 때 당신은 자녀의 언행과 표정에서 이 사실을 역력히 엿볼 수 있게 되겠지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리광을 부리며 태연자약하던 아이의 얼굴에 불안한 빛이 서려있고 행동이 어색하며 자꾸만 부모의 낯을 피하려 들 것입니다. 이제 이 아이가 해야 할 일은 부모님께 솔직히 잘못을 자백하여 용서를 받는 길 밖에 없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쉽사리 자백하지 않은 채 울며 버틴다고 부자간의 교제가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오직 부모님께 자백하면 용서해 주신다는 확신으로 겸손하게 자백해야 할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순간부터 자백하고 용서를 받기까지 이 아이에게서 기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일순간에 모든 기쁨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이는 잘못을 저지름으로 더 이상 교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자간의 관계마저 끊어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자 관계는 출생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자간의 귀한 교제가 어린 아이의 행실로 인하여 중단된 것 뿐입니다.
이 아이가 뉘우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자초지종을 부모님께 자백할 때에, 용서해주고 달래주며 위로해 주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때에야 비로소 이 아이는 다시금 부모와 스스럼없는 교제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윗이 그의 충신이었던 우리아의 아내와 큰 죄를 범했을 때 “주의 구원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소서”(시 51:12)라고 간구했던 사실은 이 진리를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시무룩해서 앉아있는데 갑자기 "불이야"하는 소리가 났다고 합시다. 그럴 때에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의 아들이 불에 타 죽도록 내버려두시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겠지요? 아마 당신은 그 아이를 제일 먼저 데리고 뛰쳐나갈 것입니다. 혈연 관계를 통한 사랑과, 교제가 주는 기쁨은 이처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범죄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원만한 영적 교제가 중단되고 자백하기 전까지 즉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통화할 때까지는 결코 구원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통회와 자백이 있었다면 죄사함을 받게 될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요일 1:9)고 확실히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맺어진 생명의 관계보다 더 강한 것도 없으며, 더 아름다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힘과 지옥의 세력이 힘을 합쳐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롬 8:38-39)
그렇지만 불순종의 생활은 쉽게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어놓으며, 당신의 기쁨을 앗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당신께서 확실히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거듭난 것이 확실하면서도 잠시 동안만이라도 심령이 답답하며, 기쁨이 없고 고민하고 계시다면, 주님 앞에 마음을 낮추시고 자신을 반성해 보십시오. 당신에게서 기쁨을 앗아간 도둑을 발견했을 때에는 즉시 빛 가운데 드러내십시오. 다시 말씀드려서 왜 내가 기쁨을 잃게 되었는가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 당신의 죄를 자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도 도둑이 들어와서 노략질 하도록 부주의하고 나태했던 자신을 깊이 뉘우치시기 바랍니다.
결코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즐거움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성도라고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불신자들보다 다소 관대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나 불신자를 불문하고 죄에 대하여 절대 공평하게 다루십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죄는 낱낱이 하나님 앞에 드러났고,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을 때 이미 그 죄값을 담당해주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신자들의 죄의 문제는 단번에, 그리고 영원토록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생은 영원히 멸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2)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주 예수님을 끝내 믿지 아니한 사람은 죄의 대가로 영원토록 불 못에서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구원 얻은 사람이 다시금 죄의 대가로 지옥 형벌을 당하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성령님을 근심케 할 때 교제는 끊어지거나 원만하지 못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달밤에 한 친구가 연못에 비친 달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고요한 연못에는 눈부실 듯 빛나는 은빛 보름달이 찬란하게 비쳤습니다. 그런데 다른 친구가 느닷없이 돌멩이를 연못에 던졌습니다. 쟁반같은 보름달은 순식간에 일그러져 버렸습니다.
“달이 산산조각 나버렸군!”하고 중얼거리는 친구에게 한 친구가 응수했습니다.
“달이 깨어지다니! 무슨 소릴 하고 있나.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나. 달의 모습은 조금도 변한 것이 아닐세. 변했다면 연못 속에 비쳤던 달의 모습에 불과하지. 안그런가?”
이 이야기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마음은 이 연못과도 같습니다. 아무런 장애물이 없으면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위로와 기쁨과 평안을 당신의 심령에 비쳐 주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근심케 할 때에는 순간, 평안과 기쁨은 사라지고 내 마음은 돌멩이가 날아든 연못처럼 어지럽게 흔들리게 됩니다. 이때 당신은 하나님을 근심케 한 죄들을 자백하고 다시 원래 상태로 돌이키셔야합니다. 평화롭고 즐거운 교제가 회복될 것입니다.
이처럼 평안과 불안이 교차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도 연못에 비친 달과 같이 수시로 변하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공로가 변하지 않는 한, 당신의 구원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당신의 심령과 심령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이 변했을 뿐입니다. 당신의 심령이 그리스도의 영광과 주님께서 합당히 여기실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고 죄의 소욕으로 태워져 있다면 성령님께서는 근심하시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정죄하시고 대적하시는 죄악에 대하여 당신께서도 한 가지로 정죄하고 대적하지 않는 한, 당신은 위로와 기쁨을 체험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나”(엡 4:30)고 말씀하신 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순종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사랑하는 독자여!
1. 당신의 믿음이 아무리 연약할지라도 당신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신 주님은 결코 변치 아니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시고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2.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공로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 없나이다”(전 3:14)
3.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24-25)
당신의 구원과 확신의 터가 되시는 주 예수님께서 결코 변치 아니하시기에 당신의 구원은 안전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 끝으로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어느 대열에 서서 여행을 하고 계십니까?
이제 진정 하나님께로 돌이키심으로 이 영원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으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요 3:33)
이 글을 읽는 가운데 당신도 이제부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구원의 확신 가운데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힘있고 만족한 신앙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사랑은 자주 식으며
나의 기쁨은 자주 잃어도
주의 공로는 변함이 없고
내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네.
나와 세상은 늘 변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어
내 평생 의지할 구주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네.
나의 사랑은 늘 식어도
주님 사랑이 내 안식처
온 천하 만물이 다 지나가도
주님의 진리가 날 붙드네.
4. 하늘나라에 가고 있는가? - 윌리엄 맥도날드
검토 : 당신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소망을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아래에서 그 항목을 찾아 ○표 하십시오.
1. 십계명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면 된다.
2. 구제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 된다.
3. 모든 일에 최선의 노력을 하면 된다.
4. 선한 생활을 하면 된다.
5. 선한 사업을 하면 된다.
6. 황금률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면 된다.
7. 십일조나 교회에 연보를 잘 하면 된다.
8. 교회의 교인 명부에 등록하면 된다.
9.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면 된다.
10. 기도하면 된다.
11. 금식하면 된다.
12. 세례(침례)를 받으면 된다.
13. 성찬식에 참석하면 된다.
14. 기독교인 부모에게서 태어나면 된다.
15. 학습이나 견신례를 받으면 된다.
16. 고행을 하면 된다.
17. 임종 도유식(죽어갈 때 기름을 바르는 식)을 행하면 된다.
18. 경건하게 종교생활을 하면 된다.
다음 글을 계속 읽어나가면서 당신이 하늘나라에 가고 있는지 확인(발견)해 보십시오.
⇒ 1번과 같이 십계명을 잘 지키는 것으로 의지하고 있다면 당신은 분명히 하늘나라에 가고 있는 도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았음이니라”(롬 3:20)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갈 3:11)
⇒ 2, 3, 4번과 같이 구제 사업이나 최선의 노력이나 선한 생활을 의지하고 낙관하신다면 당신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딛 3:5)
⇒ 5, 6, 7번과 같이 황금률을 순종하느라 애쓰고 십일조를 비롯하여 연보를 잘했을지라도 당신은 결코 하늘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엡 2:8-9)
⇒ 8, 9, 10번과 같이 교인이 되고 부지런히 집회나 예배에 참석하고, 금식할찌라도 여전히 당신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비록 이 모든 일들이 아주 선하고 그대를 구원하기에 넉넉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 12, 13번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은 완전히 오류와 미혹에 빠져 있습니다. 세례(침례)와 만찬은 이미 구원받은 참 신자들을 위한 것입니다.(행 2:41, 고전 11:23-32)
이 의식은 아무도 구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또 그렇게 뜻하신 것도 아닙니다.
⇒ 14번과 같이 그릇된 소망으로 당신의 영혼을 안위하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구원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12-13절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혈통으로 나지 않았다는 뜻은 믿은 부모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구원받기 위해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 15, 16, 17번과 같이 학습이나 고행을 한다고 해서, 또는 임종하기 직전에 기름을 바르는 예식을 행한다고 해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다만 사람들의 고안에 불과하며 또 이것들을 의지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낙관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 18번과 같이 유교이든, 불교이든 어느 종교이든 성실하게 믿는다고 하늘나라에 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4:12, 16:25)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전 4:12)
그러므로 앞에 열거한 어떤 방법으로도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불가피한 결론을 얻게 됩니다. 만약 당신이 이 모든 것들을 행한다 할지라도 마지막 천국 문에 들어가려는 당신의 시도는 실패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한 길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대단히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믿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은 그 자신 어느 경우에도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보내어 죄인들의 속죄를 위해 죽도록 하셨습니다. 만일 사람이 다른 방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면 구주께서 죽으셔야 할 필요는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갈보리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을 때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일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두는 다만 우리가 구주의 필요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영접하는 일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하늘 라에 가는 길인 것을 보게 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고”(요 3:36 )
요약해서 말하면 사람은 죄인이며 소위 선행이나 선한 성품이나 개인적 노력이나 어떠한 것으로도 하늘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구원의 유일한 소망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하신 일에 달려 있습니다. 죄인이 구주를 의지할 때에 그는 구원을 얻으며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약속의 하늘나라가 보증됩니다.
자! 이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받아들이셨습니까?
당신은 지금껏 의지하고 있던 죽은 행실을 버리고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에 하늘나라의 소망의 터전을 두시지 않겠습니까?
선택은 당신의 자유입니다. 당신은 앞에 열거한 일들을 계속 의지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그대는 그리스도 없이 지옥으로 갈 것임에 틀림없으며 영원한 멸망 중에서야 비로소 깨닫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심으로 구원을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부디 지혜롭게 그리스도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아래에 기록된 말씀을 당신의 결정과 고백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소망은 나의 주님이시오,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달려 있음을 믿습니다.”
5.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 작자 미상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혼돈된 생각을 가지고 있음으로 여기서는 하나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
1)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요한복음 1:3절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라고 명료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시 같은 장 10절은 “세상은 이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골로새서 1:16절과 히브리서 1:2절을 읽어 보십시오. 분명히 우리 주님은 창조의 대사업을 친히 행하신 분입니다.
6. 영적 양식 - G. 크리스천 와이스 박사
하나님의 말씀에서 영적인 생활은 육체의 생활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생활도 육체의 생활과 마찬가지로 올바른 음식을 조심스럽게 취함으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갓난 어린애를 적당히 돌봐주지도 않고 적당히 돌봐주지도 않고 적당히 먹이지도 않으면 옳게 자랄 수 있을까요? 영적인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성장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영양분을 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는 자라야 됩니다. 베드로는 간구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
모든 생물은 자라기 위해 음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도 그의 무궁한 지혜와 은혜를 따라 우리의 영적 생활에 필요한 음식과 보호를 풍부히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그 음식이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성경에는 심령에 필요한 완전한 영양분이 들어있으며 건강과 성장에 필요한 영적인 비타민이 골고루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순수한 젖, 단꿀, 산 떡, 생명수, 단단한 고기, 각종 열매가 있습니다.(이러한 비유는 모두 성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육체를 위해서 밥을 먹듯이 매일, 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심령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그리스도인은 건장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약골이 되지 말고 거인이 되십시오. 그러나 하루라도 말씀을 먹지 않으면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 진리와 축복을 깨달아서 소화시킬 수 있도록 부지런히 진지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십시오. 닥치는 대로 읽게 되면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누구나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를 성경 읽듯이 되는대로 읽는다면 그 성적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성경을 교과서를 공부하듯이 부지런히 연구하면 성경을 퍽 많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깨닫고자 진지한 노력은 해보지도 않고 성경이 너무 어렵다고 불평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신약을 마태복음 1장부터 시작하여 끝까지 주의 깊게 읽게 되면 놀랄 정도로 성경을 많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진리를 열중하여 상고하면 이상하게도 영적으로 풍만한 양식을 얻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성경을 꼭 깨닫고야 말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성경을 대해 보십시오. 곧 그렇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규칙적으로, 조직적으로 읽으십시오.
시간 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성경을 읽게 되면 마음에 흐뭇할 리가 없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기 위한 일정한 시간을 정해 두십시오.
되도록 이면 성경을 읽고 기도하도록 하십시오. 이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적어도 하루에 15분씩은 성경을 읽어야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인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루에 최소한 15분씩 두 번은 성경을 읽어야 됩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경연구에 하루에 한 시간씩 보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심령에게 밥을 주지 않고 지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돈을 버느라고 너무 바빠서 하루에 세끼 밥조차 못 먹었다며 이런 비극이 또 있겠습니까? 물론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육신 위해 돈을 버느라고 바쁜지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굶겨 메마르게 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 딱한 노릇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비극입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는 성경 학생이 되십시오.
성경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읽으십시오.
성경을 깨닫는 지름길은 성경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입니다. 성경에서 지시하는 명령에 복종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성경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을 깨닫지 못한다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을 알리라”(요 7:17)
성경에서 하신 명령을 알고도 복종하지 않을 때 즉시 성경의 참맛을 잃게 되어 성경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진리의 말씀을 깨달았을 때 즉시 순종하면 더 깊은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누구나 아는 진리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때 즉시 마음이 어두워져서 더 깊은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서글프게도 이러한 사실을 체험한 분이 많습니다. 성경에서 여러분에게 분명히 나타난 명령은 즉시, 의심을 조금도 갖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그 순종을 기점으로 하여 더 깊은 진리를 깨닫고 더 풍성한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언젠가 나의 친구가 이렇게 말함으로써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화를 받았습니다.
“이것도 물론 하나님의 은혜지만, 몇 년 전부터 성경을 읽다가 내게 명하신 것은 즉시 실행하기로 결심했네.”
그제서야 그 친구가 그리스도를 닮고 또 영적인 힘의 큰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통하여 역사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맡겼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
성경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으십시오.
성령님께 진리를 깨달아서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간구하십시오.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사람 마음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읽으면 그 내용을 온전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오직 다윗처럼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말씀을 상고하고 묵상할 때에야 참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2:12-15절까지 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별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영적으로 눈을 뜬 사람만이 영적인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영적인 진리가 담겨진 책입니다.
잠시라도 성경을 보게 되면 성령님께 뜻을 알아서 분별할 수 있게 하여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성경을 읽다가 모르는 말씀이 나오면 주님께 그 뜻의 설명을 부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이죠.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그 분은 성경의 저자시오, 가장 훌륭한 선생이시오, 해설자이십니다. 주님께 간구하시면 들어 주십니다.
성경 주석도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성령님의 도움을 받을 때 가장 심오한 영적 진리를 캐낼 수 있습니다. 학자들이 쓴 주석을 이용하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면 아무리 천박한 사람이라도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서 성경을 깨닫는 특권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 늘 기도하며 마음을 축복해주시는 성령님께 내 맡기고 성경을 읽읍시다. 성경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읽게 되면 심오한 진리를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어려워만 져서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게 됩니다.
성경을 쉬지 말고 읽으십시오.
어디를 가든지 조그만 신약 성경을, 될 수 있으면 조그만 전 성경을 갖고 다니면서 흔히들 대수롭잖게 여기는 짧은 여가를 이용하여 성경을 읽도록 하십시오. 전차나 기차 안에서, 식당에서, 쉬는 장소에서, 틈만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하루를 지내며 육신을 위해 간식을 하듯 영적 생활을 위해 말씀을 틈틈이 읽으십시오. 잠깐이라도 귀중하니 놓치지 말고 말씀을 조금씩 읽어 가십시오. 그래야 갓난아이의 태를 얼른 벗어나 강건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성경을 암기하십시오.
다윗은 오래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하나님의 말씀을 암기하는 가치는 큽니다. 무엇보다 다윗이 말한 바와 같이 말씀을 암기하여 우리의 마음에서 생생히 상기되면 죄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유혹에 빠져 들어갈 찰라, 과거에 암기하였던 말씀이 마음에 떠올라 죄를 짓지 못하게 합니다. 암기한 말씀으로 인하여 강력한 자제력을 갖게 됩니다. 정말 그럴까 하고 의아해 하시는 분은 몸소 체험해 보십시오. 당장 시험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암기하면 남에게 전도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말씀을 사용하시어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의 얘기만으로 논쟁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사용하실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의 말이나 생각은 지루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곧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히 4:12)기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게 됩니다. 입을 열면 즉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올 수 있도록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전도해야 크게 힘을 얻지 못합니다. 특히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권면해야 될 필요가 있을 때 “주께서 말씀하시기를”하며 성경 말씀을 인용할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의 변론과 설복은 힘이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는 말은 상대방에게 확신을 주게 됩니다.
성경을 암기하는 데에 여러 가지 좋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는 가운데서 그 날 특별히 감명을 주었던 성경 구절 하나를 택하여 매일 암기하도록 하는 방법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 구절에는 밑줄을 긋고 시시 때때로 여가가 있을 때 묵상하십시오. 전에 암기한 구절을 복습하십시오. 쉬지 않고 되풀이하여 복습하는 것이 암기의 비결이니까요(하루에 한 구절씩 암기하는 것이 벅차거든 실망하지 말고 일주일에 한 구절씩 하십시오)
암기한 성경 구절을 계속 복습하기 위한 좋은 방법으로는, 명함만한 종이에 그 구절을 써서 갖고 다니며 시간이 있을 때마다 반복하여 복습하십시오.
날마다 성경을 읽읍시다.
1. 조용한 시간과 장소를 찾읍시다.
2. 성경을 읽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합시다.(시 119:18)
3. 성경을 주의하여 천천히 읽읍시다.
4. 읽은 말씀을 깊이 명상합시다.
․대의는 무엇인가?
․하나님(아버지, 예수님, 성령님)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는가?
․내게 주시는 명령과 약속과 경고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과 피해야 할 죄는 무엇인가?
5. 깨달은 말씀과 교훈을 적고, 요긴한 성경 구절은 외웁시다.
6. 주의 말씀에서 은혜를 감사하고 죄를 뉘우치고 각오를 새롭게 하면서 다시 기도합시다.
7. 하나님의 가족으로 성장
당신은 예수님이 당신 인생의 일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당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까? 만약 했다면 하나님은 다음의 것들을 당신에게 약속하십니다.
․ 예수님은 당신의 삶 안에 있다.(계 3:20)
․ 당신은 언젠가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서 살 것이다.(요 14:1-4)
․ 당신의 모든 죄는 사해졌다.(골 1:14)
․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 위대한 모험을 시작했다.(요 10:10)
․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떠나지 않으신다.(히 13:5)
․ 당신은 영원히 하나님의 가족이다.(요 10:28-29)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지금 바로 오늘 당신을 위해 그분이 행하신 것들과 이 약속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어떻게 하나님의 가족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는 것은 그분을 신뢰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당신은 다음의 일들을 행함으로써 하나님 가족의 새 구성원으로서 더 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1. 매일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2. 매일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읽으십시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3. 매순간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4. 매일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십시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 1:28)
5. 교회 예배에 빠지지 말고 출석하십시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