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일상생활 속의 구토...
실존주의 문학을 창시한 이 소설은 출판되는 당시의 상황에서 말하면 기존 문학의 고정된 생각에서 탈출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만들어진 책이다. 구토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존재함에 대한 철학적인 책이다. 사르트르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존재성 즉 실존주의의 사상을 검증하려고 하였다.
사르트르 철학 문학의 출발점이자 데뷔작인 구토는 2가지로 나뉘어 졌다. 즉 존재란 무엇이냐에 대한 성찰이며, 그 진실을 아는 인간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지만 실존적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 일 것 같다는 내 생각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구토는 사물의 존재에 부딪혔을 때의 불안을 실존적으로 묘사하면서 현실의 부조리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르트르는 이런 존재를 깨달았을 때의 느낌을 ‘구토’라고 표현하였다. 아마도 이 구토를 이해하려면 실존, 자유, 주체성 등의 개념을 이해한 후에 읽어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토는 주인공인 앙투안 로캉탱이 사물이나 인간에게서 느끼는 구토감을 일기로 기록하고, 그 이유가 무엇 인가를 추구한 일기 형식의 소설이다. 로캉탱은 조금씩 나라에서 주는 연금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 그는 프랑스의 부빌이라는 도시의 도서관에서, 18세기 프랑스 혁명기의 인물들의 전기를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물가에서 물수제비뜨기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흉내를 내려고 돌을 집는 순간, 갑자기 구역질 같은 것을 느끼고 손을 떼버린다. 이 손 안의 구역질은 그 뒤에도 그에게 자주 나타난다. 그때마다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는 1932년 1월 말부터 약 1개월간(다섯째 수요일까지)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의 생활은 무미건조한 나날들이었다. 그가 하는 일이란 기껏해야 로르봉 후작에 관한 자료들을 정리하거나, 카페에서 들려주는 언제나 가까운 날에란 음악을 듣는 것과 카페에 들려 자기만족을 위해 성생활을 하기도 한다.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혼자만의 생활을 보낸다. 그는 자기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서 그가 살아온 것은 경험이 아니라 말의 잔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와의 공통점을 가진다는 것이 불가능했고, 자기 자신은 과거의 그 어는 곳에서도 정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일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 그는 정녕 한 사람의 전기를 쓸 수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른다.
그가 이러한 난해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옛날 자신과 헤어졌던 여인이 파리에서 만나자고 편지를 보내온다. 안니는 완전한 순간을 실현시키고 싶어 하는 여인이었다. 그는 옛 여인을 만남으로써 자기에게 희망이 생길 수 있을 것이라는 한 가닥의 희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 이상한 감각은(구토) 쉴 새도 없이 일어난다. 그의 손이 닿거나 눈길만 주어도 일어나는 이상한 감각은 그의 몸을 떠날 줄 모른다. 그리고 증오감과 함께 구토를 내뱄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는 공원의 벤치에 마로니에의 나무뿌리를 보며 명상에 잠기다가 마침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구토의 정체를 알아내게 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구토란 사물의 언어에 의해 성립되는 의미나 본질을 박탈당한 무질서였다. 또는 무섭고 음탕한 벌거숭이의 덩어리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언어 이전의 체계였고, 세계를 체험한 본질의 것이었다.’
그가 드디어 생각해낸 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물은 전혀 존재 이유를 가지지 않고, 또 존재의 의지조차 가지지 않은 채 단지 사실상 우연히 거기에 존재할 뿐이라는 것, 즉 하나의 '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실존의식, 이 말은 자기는 남들에 비해 스스로를 여분의 존재라고 생각한다)그는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도 자기가 이러한 생명체인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실존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안니를 만나게 된다. 그녀도 이제는 그 실존의 정체를 알아내고 그녀가 꿈꾸던 완벽한 순간을(완전한 순간)단념한 채, 단지 살아 있는 고독하고 비만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전기집필을 포기하고 부빌을 떠나 파리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언제나 가까운 날에'라는 노래를 들으며, 따뜻한 느낌을 받는다. 그는 그 노래를 만든 작곡가와 가수는 자기처럼 여분의 존재로서 존재하는 죄악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로캉댕은 행복해 한다. 그때 그는 소설을 쓰는 것만이 자기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부끄럽게 위하도록 인간을 깨우쳐줄 의미 있는 소설책을 쓰려고 하면서 이 소설은 끝난다. 모든 존재들을 구제하는 것이 될지 즉, 모든 존재에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여 깊은 절망에 사로잡히나, 소설을 쓰는 것이 하나의 구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느다란 희망을 가지면서 이 소설을 끝맺는다.
이 작품은 부빌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로캉탱의 일기형식을 빌려 쓴 작품이다. 그는 바닷가에 널려 있는 조약돌이나 문의 손잡이 따위 등에도 구토를 느끼는 인물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인간의 내면의식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 작품의 주요 줄거리 인 것 같다. 그는 또 독서광이나 다른사람들, 사물에게 자신이 느끼는 느낌을 토해버리고 싶은 진한 구토감을 일기에 상세히 기술한다. 역겹다. 내 생각이지만, 여기서 구토란 모든 존재물이 어떠한 존재할 이유도 없이, 존재의 의미마저 없이 사실상 그곳에 존재하는 여분의 것 인 것 같다. 나중에 그는 모든 존재에 대하여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궁극적으로 그가 찾아낸 이러한 인간의 절망감을 해소하는 방안이 소설을 쓰는 것이라고 희미한 희망을 갖게 된다.
실존주의의 뜻
실존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원래 ‘본질’에 대한 ‘현실 존재’라는 뜻이다.”
본질은 ‘무엇인가? 참된 뜻은 무엇인가?’를 따진다. 실존은 ‘가능성’을 따진다. 나는 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인터넷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찾아보았다.
요약해보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물건의 경우에는 상대적이지만, 인간존재의 경우에 있어서는 절대적이다. 물건이나 동물인 경우에는 서로 바꿀 수도 있고 얼마든지 대신할 수도 있지만, 인간은 남과 대신 될 수가 없다. ‘나’라는 인간, ‘나’라는 개인, ‘나’라는 주체는 남과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며, 그 자체가 독립하여 존재하는 단독자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대로 남과 바꿀 수 없는 단독자, 즉 있는 그대로의 엄연한 ‘본래적인 자기’를 실존이라 불렀다.”
이런 의미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은 인간의 본능에 의해서 불안과 절망은 극복하기 위한 철학이며, 위기상황에 맞선 인간이 순수한 자기를 되찾으려는 자기회복의 철학이다.
사르트르에게서 실존철학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하나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요, 다른 하나는 '실존은 주체성이다'이다. 그의 실존철학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면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가 등장한 후, 기독교의 세계관이 의심받자 이들의 반격은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면 도대체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였다. 이에 대한 대답은 “한마디로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존재 그 자체는 분명히 존재 한다”는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의식이 있는 존재(대자적 존재, 인간)와 의식이 없는 존재(즉자적 존재, 사물)로 나눌 수 있다. 책상의 경우 미리 정해진 설계도에 따라 목수의 의도대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본질이 실존보다 앞선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그 행동이 순간순간 변화하게 되어, 잠시 후에 어떤 행위를 할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경우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부터 인간의 본질을 미리 생각하고 규정해서 만들어낸 존재, 즉 신은 없다는 그들의 철학이다. 아마도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신의 뜻을 따를 터, 그렇지 않고서야 행동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또 인간을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행동이 가능한 주체적 존재로서 파악하였다.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에 의해서 자기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가는 실존으로서 인간을 파악하였다. 즉 "실존은 주체성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사람은 스스로를 자기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보편적 성질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주체성이 인간 속에서 실현된다는 점에서, 이것을 휴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구토'에서 휴머니즘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데, 이것은 휴머니즘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구토를 읽으면서 처음에는 내용도 빡빡하기만 하고, 무슨 내용인지도 잘 몰랐었다. 솔직히, 내용도 너무 길고 어쩔 때 하는 구토, 반복되는 일상생활, 내가 모르는 사람들.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참고 보기로 결정한 후, 왜 프랑스에서 이 작품에 대해서 필수지필서가 됐는지, 또한 왜 이 작품이 노벨상까지 거론 됐는지 궁금했다. 어느 정도 읽은 후, 인터넷으로 그의 실존주의 철학을 찾아본 후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첫댓글 캬 우리 대일이 장하다 장해 나무아미타불_()_
감사감사 ㅋㅋ아미타불~
대일님 참말로 이 잼없고 지리한 소설을 우째 읽으셨능교 지는 읽을라다가 고마 치아뿠는데예 구마 무진당님 분발하셔야겠심더 이러다간 대일님이 더 글을 잘쓰실거 같아예 ^^ 대일님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고 계십니더
쓴것을 참으며 삼켰습니다
구도적 열절처럼,문학적 열정에 감동 대일 거사님 팅
감사합니다..아미타불
대일이는 정말 장하다! _()_
감사합니다! _()_
문학작품을 읽을려고 시도할때마다 장애가 되는 것은 전개가 너무나 세밀하게 된다는 것에 먼저 지쳐버렸어요. 하지만 계속 읽다보면 끝까지 읽지 않고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문학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의 책들은 그저 대충 눈훓기로 내려가도 뜻이 이해되는 것하고는 다르지요. 책도 스피드시대인가? 대일님~ 정말 멋져요 ^^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다시 되돌아보고 이해하는데에 드는 시간도 만이포함되네여..
대일 부처님 아미타불! 감사합니다._()_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
집을 짓듯이 한 칸 한 칸 돌을 쌓다보면 기초공사가 끝날것입니다. 대일님의 집을 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기초로 하여 잘 짓도록...
정말 멋진 엄마....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