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정헌의 목숨을 건 동료애는 최근에 보기 드문 휴머니즘의 극치이다
국내외 산악계에서 ‘센 놈’으로 통하는 박정헌이 촐라체 5,300미터 지점에서 조난을 당했을 때 그는 갈비뼈가 부러졌고 여기저기 찢긴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후배 최강식은 두 다리가 부러졌고 한쪽 발목뼈는 자리를 이탈하여 덜렁거렸다. 그때 그도 인간이기에 “자일을 끊어버리자……”는 갈등이 마음속에서 요동쳤다. 그러나 혼자 살자고 후배를 버릴 순 없었다. 앞으로 내려가야 할 길이 천 길이나 남았어도 끝내 후배와 함께 가야 했다. 모든 이들이 그들의 죽음을 추측했을 때 그는 후배를 부축하고, 안고, 업고서 빙벽을 타고 암벽을 넘어 결국 살아 돌아왔다. 혼자 버티기도 힘들었던 그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보여준 자일파티에 대한 동료애는 최근에 보기 드문 휴머니즘의 극치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벽이 쳐지고 그 속에 고립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그가 보여준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삶을 환기시켜주는 청량한 바람이자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소중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2. 박정헌이 세상을 향해 열어젖힌 그 길은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보여주었다
히말라야 고봉, 길 없는 곳에 길을 열었던 박정헌은 이번 조난에서 극적으로 탈출함으로써 세상을 향해 새로운 길을 열어젖혔다. 그가 온몸을 부대끼며 낸 그 길은 끝내 고통과 절망에 무릎 꿇지 않은 한 인간의 장대한 기록이다. ‘그’라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 목숨을 놓고 싶었던 순간, 모든 것을 버리고 싶었던 순간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불굴의 의지와 굳건한 동료애로 거대하고 가혹한 자연에 맞서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살아간다는 게 남루하기만 한 우리네 일상에서 그가 열어놓은 이 길은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존엄성을 알게 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도 그 길을 따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는다.
3. 박정헌을 통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알게 된다
잘린 그의 손을 대신해 그의 이야기를 구술하고 천 매가 넘는 원고를 만들 때 그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러나 그는 손과 발에 붕대를 친친 감고도 환한 미소로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읊어 나갔다. 그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었을 때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산(山) 같은 남자, 박정헌 앞에서 우리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를 통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그들의 생환 앞에서 삶의 경건함을 만날 수 있었다. 생명이 경시되는 오늘날, 함부로 자신의 삶을 폐기처분하는 이들에게 그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야 할 미담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각자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며 어떤 절망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알 게 될 것이다.
목숨을 건 죽음으로부터의 탈출, 그 9일간의 기록. 그리고……
1박 2일 알파인 스타일로 계획된 촐라체 정상 등정
2005년 1월 13일 박정헌은 후배 최강식과 함께 해발 6,440미터 촐라체 정상을 향해 등반을 시작했다. 아직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동계 시즌에 촐라체 북벽을, 그것도 알파인 스타일(셰르파 없이 1~3명이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정상까지 바로 올라가는 것)로 새로운 길을 내며 오르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1박 2일로 계획된 이 등반은 빙벽에 매달려 하루를 비박(Bivouac, 한지에서 텐트 없이 밤을 보내는 것)하고 내처 정상으로 오르는 짧은 일정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예기치도 않은 난관을 뚫고 사흘 만인 1월 16일 오전 11시에 정상을 밟을 수 있었다. 다소 늦었지만 그들은 정상을 밟았고 촐라체 북벽에 새로운 기록을 새겼다.
촐라체는 에베레스트 서남서 17킬로미터, ‘남체 바자르(Namche Bazaar)’ 북동쪽 1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히말라야 산군 가운데 하나다. 에베레스트 서쪽을 길게 휘돌아 흐르는 쿰부(Khumbu) 빙하의 마지막 집결지, 촐라(Chola) 호수 서쪽에 우뚝 솟아 있다. 1982년 봄, 영미 합동대가 남서릉으로 초등했고, 1984년 미국대가 북동스퍼를 타고 알파인 스타일로 정상에 올라 2등을 기록했다. 한국대는 1994년 가을 대구학생산악연맹이 파견한 박무택, 원영진 대원이 남릉으로 처음 등정했다. 북벽 등반에 성공한 팀은 1995년 프랑스대가 유일하다.
하산 도중 최강식, 크레바스에 빠져 25미터 아래로 추락
정상의 바람은 몸을 날릴 것처럼 거셌고 예사롭지 않은 구름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박정헌은 하산을 서둘렀다. 늦어진 일정으로 하산 길은 새로운 길을 뚫기보다는 노멀 루트를 선택했다. 문제없이 내려오던 중 해발 5,300미터 지점에서 뒤따르던 최강식이 입구가 눈에 가려져 있던 크레바스(Crevasse, 빙하나 설계에 균열이 생겨 갈라진 틈새) 속으로 추락한다. 순간 박정헌은 피켈을 얼음에 박으며 제동을 걸었으나 피켈은 날아가고 몸은 여기저기 휩쓸리며 아래로 끌려갔다. 정신이 아득해지던 그 순간 기적적으로 추락이 멈추었다. 그러나 이미 최강식은 크레바스 속 25미터 아래로 떨어진 상태였다.
자일을 끊을 것인가,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그 순간 일어난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
최강식의 추락으로 박정헌은 끼고 있던 안경이 부서지고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안경이 없는 그의 시력은 0.3, 최강식 역시 추락 과정에서 빙벽 여기저기에 부딪혀 두 발목이 부려졌다. 이때부터 그들의 사투가 시작되었다. 우선 최강식이 크레바스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발목이 부러진 몸으로 최강식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크레바스 18미터 지점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입구를 막고 있는 오버행(Overhang, 암벽의 일부가 처마처럼 앞으로 돌출된 부분)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박정헌 역시 갈비뼈가 부러진 몸으로 자일 끝에 매달려 있는 최강식의 몸무게를 견디는 것은 죽음 같은 고통이었다. 그 순간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가 일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 바로 최강식과 연결되어 있던 자일을 자르는 것이었다.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사는 것이 자일파티의 운명인데 그는 갈등했고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우리는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3시간여의 사투 끝에 결국 최강식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 크레바스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중상자의 몸이었고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등반 이후 네 번째 비박을 맞았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아침이 밝았지만 상황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민가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아직도 1,000미터가 넘는 암벽과 빙벽 지대를 지나야 했다. 물과 음식을 구경한 지 벌써 며칠이 지나 있었다. 자일로 서로의 몸을 연결하고 빙벽과 사투를 벌이던 그들에게 또 한 차례의 시련이 다가왔다. 박정헌이 발을 헛디뎌 50미터가량 아래로 미끄러진 것이다. 눈가가 찢어져 피가 흘렀고 어깨에도 부상을 입었다. 게다가 설맹까지 겹쳐 박정헌은 눈이 보이지 않았다. 칼날 같은 그곳 빙벽 지대에서 그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그때 그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어보였다. 그들은 배낭을 버렸다. 빙벽을 내려가는 데 필요한 도구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버렸다. 그리고 최강식은 박정헌의 두 눈이 되고 박정헌은 최강식의 두 다리가 되어 빙벽 지대를 벗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민가는 찾을 수 없었고 다섯 번째의 비박을 맞이해야 했다. 배낭이 없었으므로 비박장비도 없었다. 그냥 맨몸으로 영하 20도의 추위와 싸우며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산이 그들을 버리려는 순간 생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그들을 살렸다
1월 18일, 암벽 지대는 벗어났다. 그러나 최강식의 다리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떤 극단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박정헌은 최강식을 두고 먼저 하산하기 시작했다. 빨리 민가를 찾아 구조를 요청하는 것이 둘 다 사는 길이었다. 3시간여 만에 박정헌은 야크 움막을 발견했다. 그러나 야크 움막은 비어 있었고, 그는 구조를 요청하지도 못한 채 움막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혼자 남겨진 최강식은 눈이 쌓이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박정헌이 구조를 요청한다 해도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구조조차 어려워질 것이다. 최강식은 기기 시작했다. 5시간을 네 발로 기고 몸을 굴려서 드디어 박정헌이 쓰러져 있는 야크 움막에 도착했다. 모진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그들은 드디어 안전지대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꺼져가던 생명의 불씨를 다시 태울 수 있었다.
하늘로 날려 보낸 여덟 손가락
박정헌과 최강식은 조난당한 지 5일 만에 구조되었다. 성한 곳 하나 없는 몸으로 한국에 도착했을 때 그들에게는 또 다른 날벼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빙벽과 사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손가락이 동상에 걸리고 조난으로 제때 치료를 하지 못해 손가락들은 건포도처럼 검게 말라비틀어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박정헌은 손가락 여덟 개와 발가락 두 개를 잘라야 했고 최강식 역시 아홉 손가락과 발가락 대부분을 잘라야 했다.
히말라야 고봉의 정상이 아닌 마음의 정상
손가락 여덟 개를 자른 ‘거벽전문등반가’ 박정헌은 더 이상 암벽에 매달릴 수 없게 되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산밖에 몰랐고 산에 오르는 것이 전부였던 그는 인생을 다시 설계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치료를 하는 동안 그는 눈에 보이는 히말라야 고봉들의 정상이 아닌 마음의 정상을 찾아 질문을 던지곤 했다. ‘나는 왜 산에 올랐는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