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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북정맥 제 11 구간 산행기
(하풍고개 ~ 하고개)
1. 산행일자 : 2007년 10월 7일 04 : 00시(일요일)
2. 산 행 지 : 남산(222m) - 충남 홍성
3. 날 씨 : 맑음
4. 참 석 자 : 강동규, 박봉하, 박상호, 안상경, 윤희원, 이용준, 이태인, 장현옥(8명)
5. 산행계획
[1] 총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 총산행 약 16.2km, 7시간 20분 정도
[2] 구간별 거리
하풍고개(80m)--1.2km--꽃밭굴도로(70m)--1.8km--생미고개(96번도로,60m)--4.3km--아홉사리골(70m)--1.5km--갈마도로(80m)--3.2km--신성역도로(60m)--1.0km--꽃조개고개(21번국도, 80m)--1.4km--남산(222m)-수리고개(95m)--1.8km--하고개(29번국도, 90m)
[3] 소요시간
① 수원(04:00)∼서해안고속∼광천(06:00/아침/06:40)∼장곡리∼신풍리(07:00)
② 하풍고개(07:30) → 꽃발굴고개/화계리1구(07:53) → 생미고개(08:55) → 아홉골고개(10:20) → 열녀난향묘(10:35) → 갈마고개(10:50) → 포장도로(11:03) → 162.5봉/삼각점(11:32) → 54번철탑(11:41) → 신성역(12:05/점심/12:50) → 꽃조개고개(13:20) → 남산팔각정(13:45) → 수리고개(14:00) → 맞고개(14:20) → 64번철탑(14:35) → 66번철탑(14:43) → 하고개(14:50)
③ 하고개, 29번국도(15:30) ∼ 홍성IC ∼ 서해안고속도로 ∼ 수원(18:00)
■ 탈출로 : 광천읍 백마식당(041-641-2607), 택시(041-641-2047, 011-433-3131)
6. 산행의 실제(산악대장 제공 자료)
① 수원(04:10) ∼ 서해안고속 ∼ 홍성(05:30/아침/06:10) ∼ 609번도로 ∼ 신풍리(06:40)
② 하풍고개(06:55) → 꽃발굴고개/화계리1구(07:22) → 생미고개(08:13) → 아홉골고개(09:15/09:30) → 갈마고개(09:50) → 161.9봉/삼각점(10:33) → 신성역(11:18) → 꽃조개고개(12:01/12:17) → 남산 팔각정(12:36/12:45) → 맞고개(13:09) → 하고개(13:44)
③ 하고개, 29번국도(14:10) ∼ 하리(14:25/새우와 식사/16:00) ∼ 서해안고속도로 ∼ 수원(18:30)
7. 산 행 기
[1] 산행 전 회원들의 動靜
산악대장이 이번 11구간은 비교적 짧게 잡았다. 지난 산행 때 遠 거리, 雨天으로 계획대로 진행을 하지 못한 구간(하풍고개↔생미고개 : 3km)을 포함하여 총 산행 거리 16.2km로 7시간 20분, 남산 222m가 가장 높은 峰이라고 한다. 일반 산행에 버금가는 거리와 소요 시간이고 산 高度는 평지나 다름없다. 평소 대장이 산행 계획 수립을 생각하면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끝에는 어떻든지, 지금 당장 맛있는 것이 좋다는 뜻)」는 속담 같이 가볍게 산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딱 마음에 와 닫는다.
10월 1일, 카페를 방문 해 보니 네 명이 산행 신청을 했고(심마니, 윤희원, 박봉하, 김미환) “점심 도시락 준비하지 마세요! 아침식사는 광천에서 해장국으로, 점심은 신성역에서 청운대학교 근처(차량 10분거리) 중국집으로 배달시켜 해결하겠습니다.”는 산악대장의 글과 산타님의 “우리를 중국집으로 배달해서 먹나요? 아니면 중국집에서 음식을 배달해서 먹나요? 옆에서 읽던 우리 초딩이 뒤집어지듯 웃으며 하는 말, "엄마를 배달시킨다면 가지마세요." / “오랫만에 가는 여권민원실. 찾을 수 있을까? 그런데 여권 민원실 아직도 그곳에 있을까? 만약 여권 민원실이 이사 가면 우리도 그곳으로 가야하나요? 오랫만에 금북 가려니 궁금한 것이 참 많습니다.”라며 은근한 신청 글이 올라 와 있다.
10월 2일 안상경교장선생님과 강동규, “갑니다. (필리핀 로타리 회원방문이 예정됐었는데 비자가 안 나와서 이달 24일에나 온다나......)” 10월 4일 “저도 참가합니다.”라고 이태인 총무님의 신청 글이 올라 와 있다.
자주 산행에 참여 하는 「노승애, 김명자」부장도 참여할 것으로 기대를 했었는데 바쁜 일이 있는지 소식이 없다. 이번에는 11명이 산행을 하게 되는 모양이다. 강사장, 이총무, 참 오랜만에 정맥 산행에서 대하는 것 같다.
10월 6일 밤, 카페를 다시 방문해 보니
○ 산행하는날 전국적으로 비가많이 온다는데 다음 주로 연기하면 안대나요 비가 오면는 저는 못가는 데 ~??? 10 . 05 (김미환)
○ 홍성지역 비 올 확률이 오전에는 30%이고, 오후에는 60%이니 우의 준비하세요. 10 . 06 (산악대장)
○ 내일 비 안옴- 기상 관상대 말하고 내말 중에 누가 맞나 내기혀요... 10 . 06 (총무)
○ 누가 납시는데 감히 비가 내리겠습니까? 그래도 온다. 10 . 06 (심마니)
○ 어느분께 얼마쯤 베팅을 해야 내일 회원들 거나하게 한잔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잠이 안옴. 10 . 06 (산타)
날씨 때문에 說往說來다. 어쨌거나 일기 예보에 비가 온다고 했으니 비를 대비한 산행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물 2병, 산행 후 갈아입을 옷, 스펫치, 우의를 챙겨 산행 준비를 하고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2] 산행 직전의 모습
10월 7일 03시 기상, 간식(삶은 계란)을 챙겨 배낭에 넣고 夜-밤 逃走라도 하듯 집을 나와(03 : 40분경) 산행 출발지인 경기도 여권 민원실로 향했다. 비올 것을 걱정하던 김미환사장이 보이지 않는다. 포기를 한 모양이다.
산악대장과 총무님의 차에 分乘하고 산행 기점인 홍성으로 출발(04 : 10분경)했다. 동수원 TG를 통과하여 고속도로(서해안)로 올라붙자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05 : 30, 광천읍 도착하여 추어탕으로 아침 食事 床을 받았다. 保養食으로 아침 식사를 준비한 것으로 보면 산행이 생각보다 녹녹치 않나보다.
식사 후 택시 2대를 호출하여 한 대는 먼저 하풍고개로 출발시키고, 나머지는 차를 이동시키기 위하여 『하고개(산행 종착지)』로 향했다.
가는 도중 李총무,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혹 배낭에 넣어두었나 신호음을 보내 보았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집으로 연락, 사모님에게 핸드폰을 찾아보라 부탁하고 조금 기다리니 핸드폰 벨이 울린다. 李총무, 식당에서 걸려온 전화란다. 가던 택시를 되돌려 식당으로 갔는데 사모님으로부터 온 전화를 잘못 들은 모양이다. 약간의 소동이 있은 후 다시 하풍고개로 향했다.
택시 기사의 이야기가 장황하다.
우리 모양 정맥 산행을 하는 친구가 있는데 산행 이야기를 들어보면 넋 나간 사람이나 하는 산행이란 생각이 든다는 이야기며 홍성의 한우 단지, 내포문화, 남당리 새우 축제 등 잠시도 입을 쉬지 않는다.
[3] 11구간 산행 들머리 장곡면 신풍리『하풍고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하풍고개』에 도착(06 : 50분경)했다. 먼저 온 팀은 출발한지가 오래인지 보이지 않는다.
『하풍고개』가 위치한 장곡면 신풍리는 ‘백제 때는 사시량현(沙尸良縣)에 속했었다. 신라 때는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인 신량현(新良縣)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초엽에 여양현(驪陽縣)에 속했다가 뒤에 홍주에 속했었다. 조선 초엽엔 홍주군(洪州郡)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홍주군(洪州郡) 성지면(城枝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신리(新里) 중방리(中方里) 상풍리(上豊里) 하풍리(下豊里) 정동(井洞)과 분토동(分土洞) 산양리(山陽里)의 각 일부와 오산면(烏山面)의 광제리(光濟里) 일부를 병합하여 신리와 상풍(上豊)의 이름을 따서 신풍리(新豊里)라 이라고 부른다.
06 : 55, 신발 끈을 단단히 졸라매고 밭 사이 길로 들어섰다. 묘를 지나 3분여를 지행하니 뽕나무 밭이 나온다. 아직도 이 지역(홍성)에는 누에고치(잠견 : 蠶繭)를 치는 모양이다.
뽕나무 밭 끝자락에 다다르니 성황당 같은 돌무더기가 있고 넓은 농로가 아래로 나 있다. 넓은 농로를 따라 내려가니 먼저 도착한 대원들 밤을 줍기에 餘念이 없다. 見物生心이 발동됐으니 예정대로 산행이 진행될까 걱정이 된다.
앞서가던 산악대장, 가던 길 멈추고 지도를 살핀다. 길을 잘못 가고 있는 모양이다. 뽕나무 밭 끝자락으로 되돌아가 좌측 희미한 길로 들어서니 정맥 표시기가 보인다.
지난 산행 때 대장은 오서산으로 가고 후미로 오면서 공덕재를 지나면서부터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던 생각이 난다. 오늘은 대장이 앞서 길 안내를 하기 때문에 염려야 없지만 야산으로, 밭 가장자리, 마을 골목길을 더나들다 보면 마루금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을 것인데 목적지까지 잘 갔으면 좋겠다.
[4] 꽃밭굴 고개
大邱 徐氏 墓 갈림 길에서 좌측으로 진행, 농로, 밭 가장자리를 지난다.
07 : 20, 시멘트 포장도로 고개에 도착했다. 이 고개는 중방마을과 꽃밭굴 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꽃밭굴 고개』라 부르며 장곡면 화계리(花溪里)에 속한다. 꽃밭굴 마을을 『꽃밭들』이라고도 하는데 꽃이 많이 피는 곳이라 꽃밭들 또는 화전(花田)이라 부른다. 옛날에 황판서가 이곳에 살 때에 꽃 같은 여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5] 생미고개
포장도로 지척에는 독립유공자 윤형중, 윤익중, 윤낙중, 유의석 묘소가 있다. 독림유공자 윤형중 외 3인의 묘를 잠시 살펴보고 포장도로를 지나 밭, 묘지, 송림, 畜舍 등을 지나다 보니 길에 밤이 至賤으로 떨어져 있다. 농촌 일손이 딸려서인가, 떨어진 밤을 줍는 사람도 없다. 物慾에 눈이 어두우면 알바는 따 놓은 堂上이라 생각하면서도 앞서 가는 대원들을 따라가며 잠시, 잠시 밤을 주워 장부장, 안교장에게 건넨다.
07 : 47, 밀양 박씨 成順 묘를 지나 우측으로 진행, 소 사료용으로 심어 놓은 수수밭을 통과하고 숲을 지나 農路로 내려서 잠시 휴식을 가졌다.
08 : 14, 2차선 포장도로 인 『생미고개』에 도착했다. 『오미(梧尾)』 서남쪽의 마을을 「성산(城山), 산양(山陽)」이라고도 부르는데 땅이 기름져서 좋은 쌀을 생산하는 마을이라 『생미(生米)』라고 부른다고 한다.
『오미(梧尾)』마을을 오산(五山)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을에 외딴 산이 있으므로 오미(梧尾) 오산(五山)이라고 부르며 아래쪽에 자리한 마을은 하오(下梧)라고 부른다. 오미(梧尾)는 옛날에 광주안씨(廣州安氏)한 사람이 오동나무를 많이 심고 키웠던 마을이라고 한다.
2차선 포장도로를 가로 질러 가면 『신동마을 표지석(53, 큰나무회 증)』이 세워져 있고 마루금은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오른다.
신동리는 백제 때는 사시량현(沙尸良縣)에 속했었다. 신라 때는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인 신량현(新良縣)에 속했으며 고려 초엽엔 여양현(驪陽縣)에 속했다가 뒤에 홍주에 속했었다. 조선 초엽엔 홍주군(洪州郡)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홍주군(洪州郡) 성지면(城枝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동리(東里) 신곤리(新昆里) 녹문리(鹿門里) 성중리(城中里) 아동(牙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신곤(新昆)과 동리(東里)의 이름을 따서 신동리(新東里)라 하여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에 편입되었다.
[6] 장곡 3.1운동 기념비
신동마을 표지석을 지나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3분여를 오르면 통신 중계탑이 나오고 2분여를 더 가니(08 : 15분경) 도로 우측에 「장곡 3.1운동 기념비」와 「애국지사 김동하 추모비」가 나온다. 도로의 옆이라 금방 눈에 띈다.
이 기념비(충남 홍성군 장곡면 도산리 산492-5)는 1994년 8월 1일 장곡 3.1운동 기념 사업회에서 건립했고 장곡 3.1운동유족회가 관리를 하고 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 선포식 시위에 참가했던 윤익중이 독립선언문 100여 매를 가슴에 품고 귀향, 윤태형, 김상호, 최석환, 서갑용 등 30여명의 동지들에게 전국적인 항일운동의 실상 설명하고 10여 일간의 은밀한 밀회 끝에 각 동리마다 조직책을 선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제작 배포하고, 일시에 대대적인 항일 시위를 결행할 것을 모의했다.
동년 4월 1일 밤부터 장곡면 전역의 산상마다 봉화가 올려지고 4월 4일 밤에는 화계,광성리 등에서 100여명이 신풍리 뒷산 매봉산에서 봉화를 올리면서 타종에 의해 일제히 만세를 외쳤으며 4월 7일에는 도산리 뒷산에 300여명의 시위대가 집결하여 김동하, 한성철의 일제 만행 규탄 연설과 독립선언문 취지 서명 후 일제히 태극기와 목봉을 들고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서고와 금고에 들어있는 악성 문서를 끄집어내어 불사르고 유리창 틀을 뜯어냈으며 면사무소를 불살랐으며 인근 일경주재소 유리창을 다 깨버렸다. 그 후 200여명이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 소요죄, 기물 파괴 죄, 폭력 죄 등으로 1년에서 10년이라는 옥고를 치르고 벌금, 태형 등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7] 홍동면 홍원리 畜舍 마을
「장곡 3.1운동 기념비」공원을 잠시 살피고 묘지군을 지나 08 : 25분경 시멘트 포장도로 Y자 갈림 길(마을 쪽으로 버스 運行路 표지판이 세워져 있음)에서 좌측으로 이어진 마을길을 따라 계속 진행했다.
08 : 40, 마을 시멘트 포장도로 4거리, 축사가 계속 이어진다. 아침 택시 기사가 홍성의 한우 단지는 강원도 횡성보다 그 규모가 훨씬 크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아무래도 마을을 벗어나기 전에는 축사에서 풍겨 나오는 향내를 계속 맡아야 할 것 같다. 잠시 길을 지나가며 맡는 우분(牛糞) 냄새를 맡기도 어려운데 家畜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견디는지 모르겠다.
08 : 50, 사슴농장, 은천 농장 삼거리를 지나도 시멘트 포장도로는 계속 이어진다. 윤사장, 가도 가도 이어지는 축사와 시멘트 포장도로를 걷는 것이 싫증이 났는지 ‘산에는 언제 오르느냐’고 산악대장을 채근(採根)을 한다.
08 : 55, 홍원리 하원마을 삼거리에 도착했다. 홍원 침례교회를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홍원리』는 「조선시대 말엽에는 홍주군 번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상원리, 하원리, 상송리, 모전리와 적덕리, 하구리, 운동 홍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홍거와 상원의 이름을 따서 홍원리라 해서 홍동면에 편입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을 지나다 보니 『미생물 환경 자원 이용 연구원(주)』이 있다. 아마도 가축의 사료 등을 생산하는 회사인 것 같다.
09 : 10, 고개 마루에 올랐다. 멋진 3층 집 한 채가 있는데 마당도 넓고 정원수도 잘 가꿔 놓은 것으로 보아 부호(富豪)의 별장 같다.
[8] 원천리 『아홉골 고개』
09 : 15, 드디어 지루하던 시멘트 포장도로도 끝나고 축사도 보이지 않는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가는 『아홉골 고개』에 도착했다. 포장도로를 건너기 직전에는 『성원마을 방죽골』과 『운용 오리농장』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도로 건너편에는 『아홉골 / 원천리 중원마을, 1999. 10. 20』표지석과 그 뒤로 버스 정류장, 『독립 유공자 황윤성 묘 800m』표지판, 그리고 농가 한 채가 있다.
『원천리』 ‘조선시대 말엽에는 홍주군 번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세천리, 중원리, 종현리, 시목 등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중원과 세천의 이름을 따서 원천리라 하여 홍동면에 편입이 되었다’고 한다.
지루한 시멘트 포장도로와 축사를 벗어난 것이 너무 후련하다. 도로변 그늘에 배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며 각자 준비해 온 간식을 꺼내 놓는다. 강사장은 가래떡에 꿀을 준비해 왔고 장부장은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는다. 일반 산행 중 산마루에서 장사꾼이 지고 온 아이스케키를 먹어 본적은 있어도 정맥 산행 중 아이스크림을 먹어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목안으로 넘어가는 감촉이 너무 시원하다. 장부장, 지난여름 8월 정맥 산행 때 더위로 心身고생 많았던 모양이다.
[9] 갈마고개
아홉골 고개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도로를 횡단하여 외딴 농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 좌측으로 방향을 잡고 농로를 따라 가기를 10여분, 농로 4거리가 나온다. 4거리에서 직진을 해서 3분여를 더 진행하니(09 : 43분경) 『烈女 蘭香의 墓』가 있다. 묘를 지나 밭 가장자리를 지나가니 밤나무의 밤송이가 아람이 벌여져 밤이 금세 떨어질 것 만 같다.
밭을 지나 7분여를 직진하니 포장도로가 나오고 도로 건너편에는 『공수마을』표지석과 광천읍 표지판도 세워져 있다. 『갈마고개』에 도착(09 : 50분경)했다.
『갈마고개』는 홍동면 원천리에 있는 고개로 광천읍과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역말에 역정(驛丁)이 있을 때 말이 목을 축이던 못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항시 역마(驛馬)가 자리해 있던 마을인데 말이 목을 축이던 마을이라고 해서 『갈마(渴馬) 갈마지(渴馬地)』라 불렀다고 한다.
※ 역말 : 조선 때 금정도(金井道)에 딸린 역정(驛丁)이 있었다 하여 역말이라고도 부른다. <출처> 내고장 홍성/향토문화 자료실
공수마을은 본래 홍주(홍성)군 번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월곡동, 공수동, 빙질리와 시목동, 중원리, 죽림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월곡과 죽림의 이름을 따서 「월림리」라 하여 홍동면에 편입 되었다가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광천읍에 편입되었다. 「월곡, 공수, 죽림, 빙질」등 4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공수마을 역시 축사로 가득하다.
[10] 신성역 가는 길
공수마을 벗어나니 농로가 나온다. 5분여를 진행하면 농로 갈림길,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진행을 하다 잠시 숲길을 가니 차선이 없는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포장도로를 건너 7, 80cm쯤 되는 도로 옹벽을 올라 소나무 숲으로 접어들어 山峰을 오른다. 축사지역을 벗어났는가. 숨소리도 다소 커지며 이마에 땀도 맺힌다. 비로소 산행을 하는 것 같다.
10 : 15분, 산마루에 올라 잠시 휴식, 잠시 휴식을 취하고 10여분을 더 올라보니(10 : 30분경) 삼각점이 있다. 지도에 표시된 161.9봉이다.
10 : 35, 능선을 따라 나가니 전망도 툭 터진다. 능선 아래로 제법 큰 마을도 보이고 아시아 시멘트 공장과 저수지 등도 보인다.
10 : 40, 송전탑, 소나무 숲, 임도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 묵혀 둔 밭을 지나니 손질이 잘 된 묘 여러 기가 나온다.
산악대장, 약 20여분을 더 가면 점심식사를 시켜 먹기로 한 『신성역』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산행의 종착지인 『하고개』는 늦어도 14 : 00시면 도착할 수 있는데 점심을 시킬 것인지 의견을 묻는다.
시간을 보니 신성역 도착이 11 : 10분경이라 점심시간은 너무 이르고 각자 지니고 있는 간식을 먹으면 『하고개』까지 가는데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점심 배달은 취소를 시키고 과일, 계란, 떡 등 각자 가진 간식을 모두 꺼내 점심 식사를 대신하며 느긋하게 휴식을 가졌다.
묘지 능선 마루부터는 내림 길이다. 아시아 시멘트 공장을 드나드는 기차인지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도 눈에 띈다. 큰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는 신성역 근처에 도착(11 : 15분경) 했다.
철길을 건너 역 대합실을 나왔다. 역무원도 없는 모양이다. 대합실을 무단으로 통과해도 누가 제지하는 사람도 없고 기차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열차 시각표를 보니 하루에 통일호만 세 번 정착하는 것으로 돼있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나 볼 수 있는 시골 簡易驛이다.
[11] 꽃조개 고개
신성역을 빠져나와 역 앞 마을로 진입했다.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갑자기 찾아든 침입자라 몹시 경계하는 소리다. 개 팔자 상팔자라 하는데 그래도 밥값은 단단히 하겠다는 심산이다.
골목을 따라 가다보니 막다른 골목이라 다시 돌아 나와 언덕 붉은 벽돌 집 옆으로 올라보니 마루금 표시기가 팔랑거린다. 봉 오름 길이 다소 가파르다. 모처럼 다리에 힘을 주고 산봉에 올랐다.
11 : 35, 능선 봉 삼거리에서 좌측 넓은 길로 진행했다. 평탄한 길이라 급한 숨소리도 금세 진정되고 땀방울도 이내 마르고 만다. 능선 끝 민둥묘(11 : 40분경), 내림 길, 앞서가던 대장 걸음을 멈추고 지도를 꺼내본다. 삼거리로 되돌아가야 된단다.
11 : 40, 평탄한 능선, 능선 끝 묘, 내림 길, 길을 잘못 감,
11 : 50, 삼거리로 원위치, 우측 내림 길 희미한 길로 접어들었다. 峰 아래고 아파트도 보이고 도로와 집도 듬성듬성 보인다. 지금까지 정맥 산행을 하면서 알바를 했던 공통점, 갈림길에서 넓은 大路와 直進을 선택한 것이 화근이었다. 넓고 곧게 잘난 길은 동내 사람들의 길이지 산꾼들의 기이 아닌데도 번번이 大路와 直進을 택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편한 함을 구하는 욕심 때문일 것이다.
11 : 53, 아파트 뒤 절개지 능선에 내려섰다. 잠시 능선을 따라 나가보니 홍성 남부 우회도로 신설 공사로 산이 잘려 30여 m의 급경사 절개지가 생겼다. 마루금은 직진하여 까치모텔로 가서 『꽃조개 고개』마루로 내려서야 하는데 갈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되돌아 나와 아파트 옆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바꿔 21번 도로로 내려섰다.
12 : 05, 꽃조개 고개 마루에는 예산 2km, 홍성 3km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도로 건너편으로 마온모텔과 주유소가 보인다.
『꽃조개재』는 홍성군 구항면 마온리에 있는 고개로 옛날에는 고개에 진달래가 많이 펴서 꽃의 동산을 이루었는데 봄철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꽃구경을 하며 즐기던 고개라고 한다.
21번 4차선 도로를 횡단하여 홍성 남부 순환도로 고가 다리 아래서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며 휴식을 가졌다.
[12] 『만해 한용운 동상 공원』과 『남산』
이제 바로 앞에 우뚝 솟은 남산만 오르면 그 다음은 룰랄라 내림 길이고 3, 40분 내에 『하고개』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12 : 18분,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오른다. 그리메 식당 앞을 지나 계단을 밟고 오르니 「한용운 선사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만해 한용운 동상 (卍海韓龍雲銅像)』은 만해 한용운 선사 동상 설립 추진 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충령사 옆에 ‘선생의 훈업을 새 시대 민족정신의 지표로 삼고 홍성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홍주혼의 구심점 강화를 목적으로 1983년 9월 8일 공사를 착공하여 1985년 12월 2일에 공사를 완료하였다고 한다.
우선 급한 데로 동상을 중심으로 단체 사진 촬영을 하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만해 한용운 동상 (卍海韓龍雲銅像)공원을 지나면 소나무 숲 속에 야외 강당이 설치되 있고 숲을 벗어나면 『충령사』가 있다.
야외 강당에서 바로 남산을 오르는 넓은 길이 있는데 좌우로 각각 5기의 돌탑을 세워 놓았다. 돌탑을 벗어나면 남산 오르는 계단이 이어진다.
오늘 산행 중 가장 높은 산(해발 222m)이다. 좁은 간격으로 설치된 계단을 밟고 오르면 남산 정상 80여m 전쯤에 마루금 표시기가 좌측으로 매달려 있는데 남산 전망대가 그리 멀지 않는 거리가 마루금을 잠시 벗어나 남산 정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12 : 36, 남산 정상 도착, 팔각정에 오르니 전망대답게 홍성읍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팔각정을 중심으로 체육시설도 돼 있고 의자도 마련 돼 있다.
홍성읍 오관리에 위치한 『남산』이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일리는 없지만 홍운표(단국대 국문과 교수-국어정보학회 회원)님의 「재미있는 우리말 어원」에서 『남산』은 『앞산』이란 의미를 가진다고 풀이를 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오른 이 산도 홍성읍 앞에 있는 산이라 『남산』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았나 싶다.
<참고자료> 애국가 가사 중의 '남산'은 '앞산'이란 의미
애국가 중의 또 한 가지 '남산'의 의미를 모르는 분이 무척 많습니다. 어느 고장을 가나 '남산'은 있습니다. 서울의 남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가 살고 있는 천안에도 남산은 있습니다. 이 '남산'은 '남쪽에 있는 산'으로 알고 계신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남'은 한자로 지금은 '남쪽'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원래 '남'은 '앞 남'이었습니다. 즉 '남산'은 '앞산'이란 의미입니다. '앞에 있는 산'이 곧 '남산'입니다. 그리고 '북'은 '뒤 북'이었었습니다. 그래서 '북망산'에 간다는 것은 '뒷산'의 묘지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출처> 홍윤표, 재미있는 우리말 어원 중에서
[13] 『수리고개』와 『맛고개』
약 10여분 남산 정상에서 휴식을 갖고 다시 발길을 되돌려 정맥 길로 접어들었다.(12 : 46분경) 남산 내림 길로 10여분, 안부를 지난다.(12 : 58분경) 『수리고개』다.
홍성읍 옥암리에 있는 고개로「동리(東里)」에서 「구항면(龜項面) 마온리 수리너머」로 가는 고개를 『수리고개』라고 한다. 이 고개에 서낭당이 있었기 때문에 『서낭당고개』라고도 부른다.
13 : 10, 포도밭을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인『맛고개』를 통과하고 2분 뒤(13 : 12분경) 63번 송전탑, 오름 길 → 13 : 17, 묘지군 → 13 : 35, 64번 송전탑을 지나니 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산행 종착지, 『하고개』가 멀지 않은 모양이다.
13 : 36, 철조망,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나니, 앞서가던 박사장과, 안교장 밤 줍기에 몰입 해 있다. 작은 밤톨이 발갛게 널려 있다. 그냥 지나치기 아까워 몇 알을 주워 바지 주머니에 담으니 금세 불룩하다. 7, 8분 주웠는데도 비닐봉지에 반이 찬다.
[14] 『하고개』와 『궁리』포구
13 : 44, 66번 송전탑 통과 → 13 : 46, 절개지 좌측 시멘트포장도로로 내려서지 아침에 지났던 29번 도로가 보이고 차들이 속력을 내 달린다. 해태상을 지나 14 : 00시, 대성석재가 있는『하고개』에 도착했다.
『하고개』는 홍성읍 구항면 황곡리에 있는 고개다. 일명 『하우고개, 황우고개』라고 부르는데 옛날에 홍주목사(洪州牧使)가 홍주읍내(洪州邑內)를 바라보기 위해 자주 올랐던 고개이며 홍주를 지나 서산으로 가는 행인들이 쉬면서 말과 소에게 풀을 먹이고 사람은 한숨 돌리는 고개라 하여 『하고개, 하우고개, 황우고개』라 부른다고 한다.
평탄한 길, 짧은 산행 시간이었지만 14 : 00라 배에서 소식이 온다. 아침, 택시기사에게 소개 받은 『남당리』 옆 포구 『궁리』로 이동하여(하리수산집) 대아 소금구이에 소주잔을 부딪치며 뒤풀이를 하는 것으로 11구간 산행을 종료했다.
[15] 정맥 11구간 산행은
○ 축사 마을과 야산을 넘나들며 금북정맥 산행 중 가장 편한 길, 낮은 봉을 산행하면서도 길 찾기가 난감했던 산행이었다.
○ 머리가 아프도록 牛糞의 香을 맡은 산행이었다.
○ 천안, 진천, 청양 천주교 성지를 자주 접했는데 이번 11구간(홍성 지역)에는 독립운동 유적지가 유별나게 많다. 내고향 홍성의 인물 자료를 보니 ① 구국/충의 77분 ② 종교 / 문화 63분 ③ 명환/공신 58분 ④ 효열 / 선행 73분이 수록 돼 있다. 충절의 혼이 살아 숨쉬는 내포의 중심지가 홍성이라 하는데 이번 산행은 구국, 충의, 나라 독립과 종교 등 민족의 선각자들이 살아 활동했던 역사의 현장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산행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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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장곡면 화계리(花溪里)
♣ 눈치 : 장곡면 화계리(長谷面 花溪里) 1구에 자리한 마을이다. 옛날엔 산과 들에 눈이 많이 내리고 겨울엔 꿩이 많이 돌던 곳이라 눈치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 옥계(沃溪) : 꽃밭들 서북쪽의 마을을 풍수설에 따르면 마을의 산수가 수려해서 큰 인물이 나올 곳이라 옥계(沃溪)라고 부른다.
♣ 장고배미 : 장곡면(長谷面) 화계리(花溪里) 1구에 자리한 마을이다. 옛날에 장고 한 개 값을 주고 산 땅에 마을이 생겼다 해서 장고배미라고 부른다.
<참고자료 2> 독립운동가 윤형중(尹衡重)
윤형중(尹衡重 1895. 6.23~1935. 7.18),충남 홍성,3.1운동, 훈격 : 애족장(90)
공적 : 충청남도 홍성(洪城) 사람이다. 1919년 윤기순(尹己順)과 함께 고향인 장곡면(長谷面) 화계리(花溪里)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이날 500여명의 독립만세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도산리(道山里)에 있는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10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8월형에 벌금 20원(圓)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또한 1923년 1월에는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운동에 동생 윤익중을 통하여 재정지원을 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형사사건부(부산지방법검찰청)
<참고자료 3> 장곡면 신동리
♣ 성중(城中) : 성지면(城枝面)의 중앙지대에 자리해 있다 해서 성중(城中)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 신곤(新昆) : 옛날 이 근처에 묘를 쓰려면 여러 문중에서 이곳에 묘소를 설치하였다가 묘를 썼다하여 신곤(新昆)이라고 부른다 한다.
♣ 노루메기 : 날에 노루가 많았던 지역에 마을이 생기면서 노루메기라고 불렀다 하는데 마을 지형도 노루의목처럼 생겼다 한다.
<참고자료 4> 충남 홍성의 독립운동가 : 황윤성
성 명 : 황윤성(黃允性 : 1879. 6.16~1919. 5. 6 )
출생지역 : 충남 홍성
대표공적 : 3.1운동
공훈서훈 : 애국장(91)
공적내용 : 충청남도 홍성(洪城) 사람이다. 홍성군 홍동면(洪東面)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거사하기 위하여 인근 각 부락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1919년 4월 8일 야간을 이용하여 일제히 독립만세 소리를 높이 외치며 시위하도록 하고 이 기세를 이용하여 주재소를 습격하여 강제 연행되어 있던 동지들을 탈출시키기로 결의하였다. 거사일인 4월 8일 밤에 세천 부락은 청광산에서, 주원 부락은 석삼봉에서, 월현 부락은 수현봉에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고 봉화를 올리며 시위하다 주재소를 습격하여 연행자를 석방시켰다. 그리고 『왜놈들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연창 하면서 시위하다 귀가하였으나 이튿날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태형을 받았다. 그 후 심한 고문의 여독으로 신음하다가 그해 5월 6일 4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수형인명부(1919. 5. 6 홍성경찰서)
<참고자료 5> 홍성읍 신성리
○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개음리(介音里) 신리(神里) 사성리(巳城里) 월천리(月川里)의 각 일부와 번천면(番川面)의 세천리(世川里) 종현리(鍾縣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신리(新里)와 사성(巳城)의 이름을 따서 신성리(新城里)라 하여 홍양면(洪陽面)에 편입되었다
♣ 사성골 : 신성리에 꽃봉산이란 산이 마을을 두르고 있는데 산의 협곡이 뱀과 같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해서 사성골 배암성이라고 부른다.
♣ 신리 :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 정씨 한 사람이 벌판을 개척하여 새로 마을을 이루었는데 새로 마을이 생겼다 해서 신리(新里)라고 부른다.
<참고자료 6> 번천면(番川面, 현재 홍동면 원천리)
♣ 번천면(番川面)터 : 번천면(番川面)은 조선 때 구룡(九龍) 외 30여 개 리를 관할하는 면청(面廳)이 이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번천면(番川面)의 자리는 일찍부터 개화되어었었다. 홍주군(洪州郡)의 농경지로서도 개간된 농토가 많아서 많은 민중들이 부유하게 살았었다. 그래서 벼슬길의 문을 두들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홍주군에서 번천면(番川面)의민중이라면 여유있고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그리고 충성심이 강한 사람들로서 조선 선조 때의 이괄의 난 때는 쳐들어오는 난병(亂兵)의 무리를 뚫고 홍주성(洪州城)으로 들어와선 임득의장군(林得義將軍)과 함께 최일선에게 적을 무찌르는데 앞장서기도 했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풍부한 삶에서 풍요로운 인심 속에 살던 번천면(番川面)도 조선 말엽에 이르러 차츰 쇠퇴해 갔으나 인심 좋은 고을로 옛날부터 손꼽히는 지역이다.
<참고자료 7> 구항면 마온리
백제 때는 결기군(結己郡)에 속했었다. 신라 때는 결성군(潔城郡)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결성군(結城郡)에 속했었다. 조선 초엽엔 결성현(結城縣)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결성군(結城郡) 두암면(斗岩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요동(堯洞) 온동(溫洞) 마근동(麻根洞)을 병합하여 마근(麻根)과 온동(溫洞)의 이름을 따서 마온리(麻溫里)라 하여 홍성군(洪城郡) 구항면(龜項面)에 편입되었다.
♣ 마근동(麻根洞) : 사방이 막혀있는 마을이라 마근동(麻根洞) 마근골 마궁말이라고 부른다.
♣ 온동(溫洞) : 온배미라고도 부르는 마을인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서 온화한 마을이라 온동(溫洞) 또한 온배미라고 부른다.
<참고자료 8> 한용운 선생 생가지
• 도지정 기념물 75호
• 소재지: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2
한용운은 1879년 이양공 한명진의 19세손인 청주인 한응준과 온양인 방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에서 출생하였다. 민적에 기록된 이름은 정옥이며 불문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유천이라고 하였다.
독립운동가이며 승려이고 시인이신 만해선생은 1919년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으로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추가한 분이시며 이름은 태원, 호는 만해, 법호는 용운이다.
1944년 6월 2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하셨다.
결성면 성곡리 한용운 생가지에는 생가복원에 이어 사당을 건립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으며, 주변 정비 사업을 계속 추진 중에 있다.
2007. 10.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