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
이 영화는 내게 몇 번의 다른 시각으로 다루어진 영화이다. 첫 번째 이 영화를 접한 것은 "사랑! 해보셨습니까?" 라는 문구가 가슴에 와닿아 재미없어 보이는 이 영화를 일부러 극장에서 본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재미'라는 부분은 찾을 수 없었으나 일상을 꾸밈없이 표현한 점에 쉽게 영화에 빨려들 수 있었다. 그때는 그저 감독이 보여주는대로 영화를 보았었다. 두 번째는 명절날 TV특집극으로 방영된 것을 부분부분 보았는데 처음과는 다른 점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마지막으로 '재미없는' 이 영화를 본 것은 며칠 전인데, 마침 영화와 관련된 레포트를 제출하라는 교수님의 '미션'을 '컴플리트'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때는 나와 이 영화가 '학점'이라는 관계에 놓여있었기에 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각으로 이 영화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영화에 문외한이 내가봐도 이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는 사실에는 동감한다. 비평가들에게 상을 받을만큼, 감독의 의도는 잘 숨겨지고 사회의 부도덕한 부분들은 잘 발라놓았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숨긴 것인지, 영화에 개입을 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허나 이 영화가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운 사랑', '조건없는 사랑' 만은 아니란 것을 영화를 보며 느낄 수 있었다. 먼저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거기에 놓여진 이들의 '관계' 에 대해 이야기하려한다. 여기서 관계는 단순히 '섹스'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회로부터 심지어는 가족들에게까지 철저하게 외면 받은 종두.
그는 형(兄)을 대신해 징역까지 살았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종두는 단지 가족들에게 그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일 뿐. 그를 안쓰럽게 여기는 사람은 세상에서 그를 사랑하는 유일한 존재인 그의 어머니. 그러나 그러한 어머니조차 이젠 늙어 그를 감싸주지 못하고 형 집에 얹혀있는 자신의 처지조차 눈치를 보는 지경이다. 모두에게 버림받은 종두이지만 그의 마음에 인간성은 남아있었다. 어쩌면 그 인간성 때문에 사회로부터 뒤쳐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종두는 꽃을 사들고 공주의 집으로 찾아간다. 허나 여기에도 종두의 가족들과 똑같은 그들의 가족이 있다. 초라한 아파트에 스스로 제 몸 하나 건사할 줄 모르는 중증뇌성장애를 앓고있는 공주 혼자만을 남겨둔 채로. 월 20만원이나 주고 공주의 뒤치다꺼리를 맡기긴 했지만 말이다. 그것만으로 그들의 의무는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분양 받은 장애인 아파트로 떠났다.
영화에서 알 수 있듯이 종두는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이다.
그가 꽃을 들고 공주의 집에 찾아간 것은 순수한 마음에서였지, 애초부터 흑심을 품고 간 것이 아니란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상황은 묘하게 흘러간다. 종두는 공주의 집으로 찾아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니 아무도 없진 않았다. 공주는 있었다. 그렇게 텅 빈 아파트에 종두는 자신처럼 버림받은,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공주를 만난다. 더군다나 버려진 듯한 그 아파트에는 누가 쉽게 찾아올 것 같지도 않다. 이런 상황이 되자 종두는 자신의 속에 내재되어있던 욕망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고, 공주를 겁탈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완강한 저항에 종두는 곧 포기하고 만다. 종두는 자신의 전화번호를 남겨둔 채 그 곳을 떠난다. 외로우면 전화하라는 말과 함께...
처음에는 이 부분을 쉽게 합리화하려 했었다. 감옥에서 몇 년이나 억압받아온 그의 욕구들에 의해, 남자라면 쉽게 그렇게 될 수도 있으려니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남자라면 당연히...', '그러한 상황이라면...' 이러한 생각조차 극히 일방적인 생각이 아닌가? 공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을 사랑해주는 유일한 존재인 아버지마저 빼앗아간 장본인에게 자신의 영혼마저 빼앗기는 격이 아닌가? 만일 여기서 많은 여성단체들과 장애인 단체들의 비난에 걸맞게 공주가 완강하게 저항하지 않았거나, 그럴 수 없는 입장이 되어 강간이 성공하였더라면 어땠을까? 혹은 그녀가 사지가 멀쩡한 정상인이었다고 해도 그렇게 쉽게 종두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시작으로 생긴 사랑이 아름답다고 볼 수 있는가?
이러한 비난은 사실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그러한 부분들을 적당히 이용하고 있다.
다행히 종두가 강간에 실패함으로서 관객으로부터의 미움을 덜 받을 수 있었다. 일부 시각에서는 종두의 눈에 공주가 '예쁘게 보여서' 그렇게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 영화를 아름답게만 보려는 사람들의 시각인 것 같다. 중증장애로 자신의 몸마저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공주를 처음보고 반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면 이제까지 거리에서 보아온 다른 여자들에게는 그런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하지만 영화든 현실이든 모든 면에서 어떠한 가능성도 있긴 마련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짚어 모든 것을 이야기하려고 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이 부분 외에도 이 영화에서 둘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할 부분이 많으니 여기선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어느 날 저녁 그에게 전화가 온다.
전화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공주. 비록 자신을 욕보이려 했지만 종두는 그녀에게 관심을 보인 유일한 남자이다. 그리고 그녀가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이자 사람이었다. 그녀는 함께 있어줄,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오아시스 그림 속에 비친 공포의 그림자로부터 구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둘의 관계는 완전하게 달라진다. 공주의 전화로부터 종두는 어느 정도는 용서를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의 일방적인 관계와는 달리, 공주가 종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
이제 이들에게 새로운 관계(서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친구)가 시작된다.
여기서 종두에게 인간성이 상실되었다면 그의 말대로 그녀를 예쁘게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것을 자신의 욕정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을 것이다. 허나 종두는 그녀를 '공주마마'라 부르며 자신의 공주님처럼 모신다. 종두는 그녀를 정성스레 보살펴주고 그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그들의 사랑을 키워나간다. 그에겐 그녀의 추한 행동들과 모습들이 보이지 않는가보다. 그래서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그녀와 함께 즐거운 데이트를 즐긴다. 휠체어를 타고 그녀와 함께 산책도 가고 거리를 돌아다닌다. 버스를 타기도 힘겹고 식당에 들어가 식사 한 끼 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사랑하는 그녀와의 시간이기에 종두에게는 즐겁기만 하다. 어쩌면 종두는,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준다는 것 자체에 인생의 의미를 가진 건지도 모르겠다. 공주로 인해 확인 받은 스스로의 가치를 말이다. 그에게 있어 또 다른 관계가 형성되는 순간이다. 서로에게 필요해서 찾는 존재에서 사랑하는 존재로서의 발전을 말이다. 종두는 자신의 연인을 자신이 속한 유일한 집단 즉, 가족들에게 소개하려고 한다. 이젠 둘 만의 관계에서 모두에게 인정받고 가족의 구성원들에게도 공주의 존재를 인정받으려 한다. 그들과의 새로운 관계(연인으로서의,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되기 전의 소개) 또한 모색하는 것이다. 종두는 어머님의 회갑잔치에 공주를 데리고 간다.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를 가족들에게 보인 자리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과는 다른 공주와 관계 맺기를 거부한다.
공주는 자신의 눈을 통해 종두와 데이트를 한다.
자신의 마음을 통해 그녀는 장애를 극복하고 종두에게 장난도 치고, 투정도 부리고, 춤도 춘다. 비록 좁은 아파트에서 휠체어에 앉아 몸을 흔드는 게 고작인 그녀의 춤이지만 그녀에겐 꽃을 뿌리며 축복해주는 이도 있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작은 코끼리도 등장한다. 현실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녀에게 그녀를 지탱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그녀만의 세계였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을 틔여나가는 둘은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공주는 다시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웠는지, 종두를 보내는 것이 아쉬웠는지 종두에게 자신의 아파트에서 자고 가라고 한다. 그리고 종두에게 연인들이 "함께 자자는 것이 어떤 의미인 줄 몰라요?" 하며 육체적 관계를 요구한다. 나는 여기서 종두의 순수함과 공주의 완전한 용서를 보았다. 공주가 '함께 자자' 고 했을 때 종두는 그것 이상의 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 자신이 첨에 저질렀던 잘못을 때문에 행여나 공주가 상처받지 않을까 그는 알면서도 모른 체 한 것이다. 그리고 공주가 자신을 허락했다는 것은 그를 완전히 용서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허나 여기서 공주의 가족들이 나타나게 되고 종두는 강간범이 되어 경찰서로 끌려간다.
공주는 사실이 아니라고, 진실들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감정이 격해질수록 주체하기 힘든 자신의 몸 때문에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다. 가족들은 두 사람의 의견은 듣지도 않은 채 자신의 원하는 바만 얻으려 -공주네 가족은 합의금을, 종두네 가족은 종두가 그들의 눈에서 사라져 주길- 한다. 애초부터 그들에게 공주와 종두는 그런 관계였던 것이다. 공주의 가족들에게 공주는 이득만을 가져다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별다른 가족애는 없었다. 물질적으로 계산되는 득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대신 그들은 공주에게 월 20만원으로 대체될 수 있는 따스한 보살핌을 주었다.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공주와 그들의 관계는 무난하게 유지되는 것이었다. 종두와 그들 가족의 관계 역시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종두의 가족들은 종두가 문제를 피우지 않는 것이 그들의 관계를 해치지 않는 길이었다.
이 영화를 이어가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실타래같은 관계들.
이 영화가 모토로 내세운 '사랑! 해보셨습니까?' 의 사랑마저 그러한 작은 관계들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음에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감독은 종두와 공주의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의 끈을 종두의 욕망에서부터 풀고 나와서 공주의 용서로서 이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지독한 외로움과 사회와 가족으로부터의 소외는 그 끈을 강하게 이어주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이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 종두를 강간에 성공하지 못하게 한다.
영화를 통해 보는 전혀 영화같지 않은 우리의 일상.
우리의 삶이 저렇게 가슴아픈 것이었나 싶을 정도로 너무도 솔직해서 영화를 보고나서 느껴지는 상쾌함이 없는 영화. 이것은 우리의 삶이 조건없는 사랑이나 끈끈한 정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관계와 그것이 스스로에게 미치는 영향에 의해 시작되고 유지되는 것임을 이 영화가 보여주기에 그러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의 관계맺음은 종두와 공주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인데, 그들의 관계는 스스로의 이해(利解)에 따라 톱니바퀴처럼 잘 돌아간다. 사랑까지도 그것에서 비롯된다. 영화에 한해서만 해당되는 얘기라면 좋겠지만 말이다.
첫댓글문제의식의 출발은 깔끔하구요. 네 그렇겠죠. 장애인과 전과자라고 하는 장치가 소외당한 이들의 상처핥기를 정당화할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창동 감독 특유의 의미추구가 너무 많은 장치로 오히려 퇴색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사랑은 동정이 아니라는 말도 함께 덧붙입니다 :)
첫댓글 문제의식의 출발은 깔끔하구요. 네 그렇겠죠. 장애인과 전과자라고 하는 장치가 소외당한 이들의 상처핥기를 정당화할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창동 감독 특유의 의미추구가 너무 많은 장치로 오히려 퇴색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사랑은 동정이 아니라는 말도 함께 덧붙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