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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좋은하루‥… 。 원문보기 글쓴이: ∑ 뽀뽀댁앞집남자
이 자료들은 정확히 71~74년 사이의 자료들입니다
70년대초 명동 거리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척 붐비네요
지금도 옛모습이 남아있는 곳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매주 일요일이면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되어 마음것 활보할 수 있었지요
지나가는 짚차가 아직도 다니는것 보면 무척 튼튼한 차인가 봅니다
세운상가? 신세계 백화점? 잘모르겠네요
서울 시내 한 복판인것 같습니다
잘아시죠 영화배우 신성일님 = 젊었었을때 멋진 모습입니다
퇴근 길이면 대포집에 들러 막거리 한잔 쭈~악 커억!
ㅎㅎㅎ
무작정 시골에서 상경한 소년입니다.. 순경이 사연을 듣고 있나봅니다
이분도 아마 지금쯤 40대 후반이겠지요..돈벌로 서울로~서울로 많이들 모여들었지요
생활이 어러울때라 직장이나 종교 단체에서 합동 결혼식을 많이 올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이낳고 오래살다가 나이들어 결혼하신분도 많았지요.웨딩드레스는 꿈도 못꾸고 한복차림의 결혼식이 많았답니다
매년 열리는 전국 우량아 선발 대회입니다
예전에는 못먹어서 아이들은 무척 외소하던 때라 이런 대회가 무척 인기 었답니다
다이얼식의 전화기하며 앞에 보이는 타자기 무척이나 정겹지요
저때는 컴퓨터가 없는 시대라 타자기 자격증을 꼭따야 했답니다~
창포에 머리감고 액운을 쫒고 개울에 멱감으며 ~아련한 추억들이지요
이때는 열차를 몇칸씩 전세내어 수학여행를 떠나곤 했지요
사실은 돈이없어 못가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수학 여행지에서 신나게 고고를 추고 있는 단발머리 여학생들 모습이 무척이나
예쁩니다
이당시 전국에 휘몰아 첫던 고고 열풍 대단했었지요
아침 출근길 많원 버스 한번 탈려면 필사적으로 버스에 달라 붙어야
했습니다
노약자들은 밀려서 다음버스 또 다음 버스 ~ 줄서기가 없었던 시절이 었습니다
어느 보육원의 밀가루 죽만 준다는 당시 기사 내용입니다
못먹어서 오는 병이며 주변에 너무도 많았습니다..위에 저분도 지금 50세정도는 되셨겠네요
피곤한 서민들의 피로를 씻어주시던 분들입니다
좌측 송해/000/김상국/서영춘/000선생이 시네요
그때는 외그리도 겨울이 추웠던지 마당에 있는 수도를 새끼로 동여매고
천으로 덮어서 어는걸 방지했지요 ,,, 뜨거운 물이나 종이에 불을 붙여 물이 나올때까지 녹이다 세수도 못하고 출근 하던일들....
충무로3가 액스트라들......영화가 번성하던 시절이라
아침이면 무작정 이곳에 모여 영화사에서 뽑아가 줄때를 기다리는 인력시장이었습니다
33층인가요? 당시는 동양에서 3번째 높이의 빌딩으로 명물이었지요
예방주사= 여름철이면 장티푸스/수두/콜레라등 예방 주사를 보건소에서 일일이
찾아다니며
길거리에서 놓아주었지요~어른들은 모이고 아이들은 도망가고~ 그땐 전염병도 외그리 많이 성행했는지....
전화 당첨되도 1년 이상은 기다려야 설치가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한집에 자녀가 보통 7~8남매= 많은집은 10남매였지요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 아이를 많이 낳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일손 부족으로 경제성장이 어려웠을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직장 마다 학교마다 아침 조회 시간 국민체조 시간이지요
아침에 라듸오를 통해서 전국에 방송되면 구령에 마추어 하나 둘 셋넷 ~ ㅎㅎㅎㅎ
아마도 서민들 가슴속에 영원히 힘들고 슬픈 추억이 남아있을 연탄입니다
퇴근길에 한두장 사서 새끼줄에 꿔어 들고와 부억 아궁이에 피운던 시절을요
연탄 가스로인해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잃은 분들을 매면 겨울이면 접했었지요~
모자가 무척 이색적이지요
놀이 기구가 많지 않던 시절 축구공 하나면 인기짱 ~최고의 놀이였지요
지하 수천미터에서 목숨을 걸고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위해 애쓰신 분들입니다
갱속이 무너지고 산소가 끊히고 가스가 폭팔하고 참으로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답니다
일거리가 부족하던 시절이라 목숨걸고 일하시던 분들이 많았습니다
안전 장구는 했는지 아래쪽 안전 시설은 되있는지 무척 아슬 아슬
합니다
주택공사에서 발행하는 당시 주택 복권 한장에100원 일등700만원하던
시절입니다
길거리에서 이름도 짖고 풀이도 하고 토정 비결도 보고 오랜 추억으로 남아있는
장면이지요
지금 신어도 멋에서는 뒤질 수없는 예쁜 구두죠?
지금 아도 디자인이 유행에 밀리지 않을것 같은 구두들
많지요^^*
74년 북괴가 남한으로 파고 내려온
1차 땅굴 발견당시 모습입니다
0년된 제무시 트럭 보셨나요?
차명:제무시 (나이 약61세 추정)
정확하겐 G.M.C 이죠 (5톤차량) 6륜 구동
미국의 유명한 자동차 회사 제너럴
모터스사에서 44년경 제작되어 우리나라에
해방무렵에 들어왔다고 한다....,(사진 떠블클릭 크게 보실 수 있음)
6.25 동란시에 군용으로 쓰다가 미군이 두고 간것들이 대부분이며 60년대에 전량
폐기 처분될뻔 하였으나,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우리나라 지형과 건설 현장에
적당 하다고하여, 지금것 명맥을 유지 하고있다
이 트럭은 6륜 구동에 덤프까지 되며 국내 어느 트럭들과 힘의
대결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6륜= 앞,중간,뒤바퀴 모두가 동력이 전달 되어 같이 구름)
현재 험악한 산악 지방과 어떤 트럭도 다니지 못하는 어려운 곳들만 일익을 담당 하고있다
이 차의 경우 현재 최고 속도75킬로 미터까지 달릴 수 있다고한다
원래는 휘발유 차로서 힘으로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고 한다
(기름값 문제로 현재는 경유차로 개조)
경사 45도까지도 거든히 올라갈 수 있으며, 엔진이 타이어 높이보다 높이
올라앉아 있어서
웬만큼 깊은 개울, 진흙탕, 모래밭 못가는 곳이없다
산판에 나무를 약20톤까지 싣고 계곡 진흙탕/눈길에 빠지면 앞에
감긴 와이어를
나무에 감고 동력을 구동시키며 동시에 6륜도 가동되어 어떠한 곳이라도 빠져 나올 수 있다
이 차의 주인 어른은 현재 70세되신 분으로 중고차로 구입 한지가 만40년
됐다고한다
(차주말=구입당시 이 차나이 약30여년이라고함)
가장 힘든 것은 부품을 구하러 며칠식 전국을 뛰어 다니며 고생이 심한다고
한다
핸들은 원래 등나무 덩굴이나 나무 종류로 둥글게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기존 핸들은 파손되어 현대식 차량 핸들로 바꾸었음.
비록 오래 됬지만 계기판을 보면 속도계/유량계/메타기/열감지기등 있을건 다
있다
보턴식 라이트/안개등/미등/내부등이 이색적이다.
차주께서 워낙 아끼는 애마라 그런지 매년 고사를 지내는가보다, 실타래가
운전대에
묶여저있다, 핸들은 파워가 아니라 죽먹고는 작동 시키기가 쉽지않다
차량도 오래 되다보니 의자도 낡아서 현대식 의자로
바꾸었으며,클러치/브레이크/
엑셀레타 는 그대로인것 같다
엔진의 옆모습이 세월의 흔적 많큼이나 부품도 나이가 들어 보인다
또한 이 차량들 대부분이 덤프 트럭이며 우리나라 대형트럭 어떤차도 가지 못하는 어려운
환경에서 운행되고 있다는것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현재 우리나라에 몇대 남지 않은, 역사의 귀중한 자료로 남을만 한
차량입니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계시는분들 있으시면 댓글로 부탁드립니다^^*
강원도 홍천군 내면 자운리를 지나치다 발견하여 양해를 구하고 촬영한 것입니다.
주인 어르신께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다시 한번 말씀 드리면 정확히 5톤에 6륜구동 차량입니다***
"70년대 오줌도 수출했다!.
이 자료들은 정확히 75~76년 사이의 자료들입니다.
모두가 힘겹게 살아온 과거를 돌이켜 보고자 합니다.
보시고 보충 설명이나 당시 정보들을 뎃글로 달아주시면 정리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오줌 한 방울이라도 통속으로....화장실에 이런 문구가
극장/터미널/기차역/유원지/학교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곳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었지요
소변기 아래에 커다란 말통을 받혀두고 수집하여 수출하였답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 정부에서 추진하는 취로 사업에 일 1만8천명씩
몰렸으며
남자 일당850원 여자530원으로 꽤 좋은 수입이였습니다
기억나시죠? 빵모자 털실로짠 저 모자 하나면 추운겨울도 거뜬이 보낼 수 있었답니다
프로 레슬러= 국내 최초이던가요? 여성 레슬러가 등장 하여 인기 짱이였지요
너무도 살기 힘들었기에 자식만이라도 실컷 배불리 먹고 ,부디 부자집으로
입양가라고
보육원이다, 고아원이다, 늘 아이들로 넘처 났답니다
먹고살기 힘들어서,,젊은들의 원치 않은 임신 등으로 산부인과들이 한때는 호황을
누리던 시절이었으며, 처녀막 재생 수술이 유행 하던 시절이기도 했지요
산아 제한을 위해 보건소에서 담당자들이 가정마다 직장 마다 찾아다니며
계몽활동을 폈답니다
서울 시민의 젖줄인 팔당땜 모습입니다
교통 수단이 열악하여 아침 저녁이나 시골 장날은 뻐스 한번 타려면 힘센 사람
순으로 ...
약한 사람은 밀려서 못타면 다음차 기다리고,,, 밀어부치는 안내양도 무척 강해 보입니다
절미운동= 전국적으로 부두막에 조그만 단지를 두고 밥지을때마다 쌀통에서
퍼온쌀을
한숟 가락씩 떠서 단지에 모아 두었다가 한달에 한번 한곳에 모아 좋은일에 쓰고했지요
이곳이 새마을 사업이 최초로 시작된
청도군 방음리 마을입니다
시작 전에 찍은 모습임..
남대문 시장 화재 (당시 대형 화재였음)
이때만 해도 부모 공경심이 대단하여 나들이때면 늘 자녀들과 꼭 부모님들을
모시고 다녔답니다.
미류나무 가지치기 작업하던 유엔군을 북괴군들이 도끼로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랍니다
구타 당하는 유엔군...
여름 피서철 여행을 떠나는 젊은이들이 역사 홈에서 식사 중인것
같습니다
시계가 귀한 던 시절에 수리점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생년월일을 입력하면 바이오리듬을 알려준다는 컴퓨터 무지 신기 했지요
백색/청색/흙색 전화기= 신청하면 보통 1년을 기다려야 개통이
되었으며 백색전화기는
권리금만 보통2백만원 했답니다
통행금지= 11시넘으면 요소 요소에 검경이 배치되고 12시 땡하면 단속을
시작하여지요
영일만에 석유가 나온다는 보도가 터져 나오면서 전국민을 흥분하게
만들었어지요
고속버스안내양= 고속버스타면 사탕도 주고 음료수도 주고 했답니다
남북 냉전 시대에 일본 조총련계 동포들이 분단 후 첨으로 고국방문을 하는
모습입니다
울산 현대 조선에 입항한 초총련계 동포들= 당시 획기적인
대사건이었지요
이무렵에 국민들 영양 보충과 식생활 개선을 위해 이땅에 들어온 식용황소
개구리입니다
무게 500~700그램 우측 토종 개구리와 큰 차이를 보입니다
고층 장비가 없어 창밖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꽃잎처럼 떨어져서 운명을 달리 하였지요
공병 수집소= 빈병 1개 2~7원에
사들였으며 빈병 주으러 많이들 다녔지요
놀이 공간이 부족했던 이때는 공원 유원지 어디든 모이면 즐겁게... 추억과
낭만이 있었습니다
맨션 분양 광고입니다
쓰레기 매립장이 부족한 탓에 골목마다 연탄재가 골치덩이였지요
온 동내 남여 노소 모두가 물지게로 물을 길러서 논에다 퍼다 부었지요
농기구가 없을때라 모내기도 손으로.. 지게로 저서 나르고...
구두 수선하는곳이 많았습니다.. 월 최고30만원까지 수입 올리신 분들도
많았답니다
중요 요지에는 폭력배들이 거의다 지배했지요
30년전 대천 해수욕장
지금은 보기드문 여인숙입이다....이때만 해도 여관은 보기 힘들었지요
공산품이 발달하면서 각종 생필품들이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서소문로 포장마차= 이때 부터 본격적으로 포장 마차가 우후 죽순 많이도 생겨
났지요
퇴근 길이면 제일 먼저 들렀다가 집으로 퇴근 하곤했지요
안양천= 한번 건너는데 5원입니다.. 개인이 놓은다리 돈을 받았답니다
60년대 아이들 모습!.
이 자료는 69년도 아이들의 생활상을 담은 사진들입니다.
당시는 가난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힘겹게 살아오신 이분들은,
현재 50을 전 후 한 연세들이 되셨을겁니다..
고무신에 양말도 신지않고 지게로 나무를 지고 있는 모습이 가슴 찡합니다
바람이 불면 힘에 부처서 지게와 함께 넘어지고 굴러서 다치기도하고....
지게가 조그마한것이 앙증맞네요
갯벌에 앉아서 무엇인가 캐고있는 모습입니다
지금도 이 학교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공부도 하고 소도 키우는 모습이 아련한 옛추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겨울철 따사로운 양지쪽에 앉아서 책들을 많이 읽곤했지요
학교 다녀오면 부모님 일을 돕는게 당연 지사로 알고 살았습니다
돼지에게 죽을 먹이고있네요.
동생은 아버지 장화 신고 너무커서 질질 끌고 다녔지요 ㅎㅎㅎ
등교길 모습입니다,판자집/토담집에 초가지붕 ....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한 걸음에 운동장으로 달음박질.....
당시 잡지에 실렸던 삼남매 연탄배달 기사입니다
무척이나 가슴아픈 기사였습니다 만, 당시는 다들 이렇게 어렵게 살던
시절었답니다.동생은 연탄 내리고 누나는 나르는 모습이네요
순창의 초등학교 모습입니다(사진에 소개 글)
책 보자기= 모든 학생들이 책 보자기에 책과 도시락을 둘둘 말아서 허리나
어깨에 매고 학교를 다녔으며 책가방들고 다니는 학생들은 보기힘들었지요
도시락에 김치국 물이흘러서 책장이 빨갛게 물들곤 했답니다
햑교다녀 오면 부모님 일부터 거들고 주로 밤에 호롱불 밑에서 웅크리고
앉아 꾸벅 꾸벅 졸면서 숙제를 하였지요,
숙제하다 그냥 책상에 엎드려 잠이들고.....
학교 다녀오면 들로 산으로 소먹이로 다니곤했지요
돌아올땐 소먹이풀을 지게에 가득지고 한 손엔 소 고삐를잡고..
등교길 징검다리를 건너는 모습입니다
친구들 집 앞을 지나칠때면 지나는 아이마다 "ㅇㅇ야 학교가자! 라고
크게 소리처 부르곤 했지요
하나같이 빡빡머리에 이발비도 아끼고 머리에 이 생기는것도 방지하고..
나무 책상에는 가운데 줄을 그어놓고 사물이 서로 못넘어오게
다투기도 했지요
선생님과 찍은 추억의 모습들입니다
길 거리에서 순경 아저씨로 부터 교통지도를 받는 모습입니다
아! 저기 여고생의 모습입니다
아스라히 멀어저간 추억속의 교복....
피로회 복제를 팔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체국 홍보 사진과 지금은 볼 수 없는 삼륜 자동차입니다
나무 따게(삽)라고 생각이됩니다, 이름이 생각안납니다
삽질하는 여학생입니다
학교 다녀오면 연탄불도 갈고......
용돈을 벌려고 껌이나 피로 회복제를 팔러 다니기도 했지요
요즘은 학교 다녀오면 학원이다 머다해서 가사일을 하는 학생들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예전엔 공부 보다도 부모님을 도와 일하는게
우선이었답니다, 문론 일 때문에 결석도 잦았지요
빙상대회 사진입니다
강원도 속초 모 초등학교에 장애를 가진 친구를 매일같이 학교까지 대려다
주며 돌봐주는 모습입니다(자전거를 개조한 휠체어)
때로는 엎어서 학교까지....
여자친구도 역시...
요즘 보기드문 장면에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학교 다녀와서 거름치기도 하고...
새끼도 꼬고....
읍내까지 하교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 마치고 시장에 들러 장보기도 했지요
학교 다녀와서 물지게도 지고....
목욕을 즐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멀리 물놀이하는 아이와 달려가는 아이하며 무척이나 정겹습니다
요즘처럼 계절별로 옷이없고 보통 겨울 옷과 여름 옷 두 종류여서인지
날씨는 여름인데 두 아이는 아직 겨울 옷같네요
우리 어머님들의 모습입니다
수십리 길을 걸어서 장보러 다니곤했지요
당신께선 굶주린배를 끈으로 한번더 꼬옥 조여 매시고 끼니도 굶고
수십리 먼길을 다녀 오시곤 했습니다
흔히 볼 수있었던 개천가의 움막들입니다
교실이 부족하여 노천에서 공부하는것은 예사였지요
이곳에도.......
이밝은 표정들이 조국 근대화에 견인차 역활을 했나봅니다
대도시의 어느 초등학교 졸업식 모습입니다
시골과는 많은 차이가 나지요
짚으로 지붕을 덮기위해 용마름을 짜는 모습입니다
가난하고 힘들어도 표정 많큼은 너무도 천진 난만하고 순수해 보입니다
운동회 모습입니다
수업 시간에 어린 동생을 학교에 대리고 나와서 공부 하는 모습입니다
부무님이 들에 가시면 어린 동생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도시의 어느동네 한 모퉁이같습니다
가난했던 시절 허리가 휘어지고 뼈골이 부서지도록 자식들위해 고생하신
우리 모두의 어머님이 십니다..
위 사진에 나오신 분들은 배고픔과 어려운 환경속에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지금의 후손들에게 풍요로움을 물려주신 고마운 분들입니다
다시한번 님들의 숭고함에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퍼가시는 분들께서는 훼손이나 상업을 목적으로는 사용하지마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