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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곡:포스트89예술영화의 휘황과 몰락 劉玉玲
문화적 곤경과“제우스의 황금비”
사실80년대 후기, 중국 대륙 예술 영화의 창작은 이미 곤경에 처해 있었고 정체에 빠져 있었다. 1987년 천카이거의“아이들의 왕”과 장이머우의 “붉은 수수밭”이 칸과 베를린 영화제에 각각 출품되었고, 장이머우는 대상을 거머쥐었다. 그 후 대륙 영화계의 5세대는 세계와 중국 대륙에 의기양양하게 등장했고 휘황찬란한 시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처음 생각한 것과는 달리5세대는 이 화려한 악장에서 갑자기 연주를 멈춰버렸다. 1988년부터 중국 현대화가 갑자기 가속화되기 시작해서 전 사회에 걸쳐 정치체제의 개혁을 요구하는 대중의 목소리가 들끓었고 이것이 이상주의와 희망의 열기구를 띄워 올렸기 때문이었다. 광희가 스며든“우환의식”속에서 역사 감각은 희박해지고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5세대가 유독 좋아했던, 중후하고 견실한 황토지는 하룻밤 사이에 쪽빛의 문명/서구문명에 휩 쓸린,거대한, 표류하는 섬이 되었다. 그래서 5세대식의 역사 서시는 오늘이 아닌 어제와 관련있는, 낡은 이야기로 변했던 것이다.(283-284)
좁은문
8/90년대 교체기 대륙 예술을 영화5세대는 확실히 “죽느냐 사느냐”라는 햄릿식 문제를 마주하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즉, 계속해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기회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반항자의 입장과 자세를 철저히 포가하고 관변의 화법과 권력 담론을 동일시하고 “주선율”령화의 제작자가 되어야했다. 혹은 대륙 영화 시장의 수요에 굴복하고, 대륙의 수억에 달하는 일반 관객의 감상 취미와 애호에 자신을 동일시하며, 일상생활의 이데올로기 및 전통 도덕의 평판과 화해해야 했다. 그것이 아니면 소명될 운명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즉, 영원히 창작을 접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던 바로 그때 갑자기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해의 예술 영화의 제작자 와 투자자가 대륙의 이 생기 왕성한 예술가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284-285)
5세대는 여전히 시장화로부터 도망질 수 없었고 투자자가 요구하는 투자원금 화수와 이윤 획득을 위해 서구, 특히 유럽의 예술 영화 시장과 마주해야했다. 그러나 1987년 이전, 유럽 예술 영화 시장에 이르는 문은 아직은 서구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중국 대륙 영화에게 활짝 열려있지 않았다. 자격을 심사해서 결정하고 출입을 허락하는 것은 결국은 소수로 한정될 서구의 대규모 국제 예술 영화제였다. 유럽 3대 영화제인 칸, 베니스, 베니스, 베를린에서의 수상은 틀림없이 권위 있는 통행중 이었다. 해의 투자와 세계 영화제에서의 수상은 대륙 예술영화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반드시 통과해야 할 좁은 문이었다. (285-286)
“붉은 수수밭”, “아이들의 왕”계시록
1987년, “붉은 수수밭”, “아이들의 왕”이 유럽 영화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90년대 대륙 예술 영화의 창작에 있어 분명 진지한“계시록”이었다.“아이들의 왕”은 천카이거가 “황토지”,“대열병”의 뒤를 이어 만든 3부작 가운데 하나다. 당시 중국 영화 평론가들은 작품에 나타난 그의 예술적 조예나 문화 품격뿐 아니라 모든 것에 있어서 장이머우의 처녀작 “붉은 수수밭”을 능가했다고 보았다. 사람들은 천카이거가 5세대 영화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산임을 인정했다. 영화에서 천카이거는 80년대 대륙의 역사적 반사 운동이 처한 문화적 곤경을 심각히 드러냈고, 아울러 5세대 특유의 “공간이 시간을 압도하는” 표현 방식을 극한까지 밀고갔다. 그러나 장이머우가 “붉은 수수밭”에서 5세대의 언어 풍격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5세대의 역사/문화의 비판적 입장은 민족 신화의 허구로 변모하였다. 그것은 “선사”의 미개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다루었다. (286)
내재적 유배
“계시록”은 사람들에게 중국 영화가 “세계로 나아가는 데” 있어 필요충분조건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었다. 그것은 성질도 다르고 방식도 다르고 느낌도 다른 “동방” 적 경관이어야 했다. 서구는 자기 문화의 복제품을 원하지 않았다. 또 동방의 현대문명에 관한 어떠한 표현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질화된 자기나 지시적인 것이어서는 되고 반드시 문화 논리와 상식 시스템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독해 가능한 것이어야 했고 서구 문화에 의해 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것은 반드시 본토적인 중국, 즉 “향토 중국”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반면에 본토 문화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되었다. (287-288)
“붉은 수수밭”,“아이들의 왕”을 통해 나타난 계시록은 제3세계의, 그리고 동방의 지식인/예술가가 벗어날 수 없는 문화적“ 숙명”, 탈식민주의 문화의 잔혹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성공적으로“세계로 향하는” 좁은 문을 통과하려면 그들은 반드시 서구 예술 영화제 심사위원들의 심사와 선택의 기준에 맞추어야 했다. 중국 대륙 예술 영화의 감독들은 구원을 얻고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반드시 동일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민족 문화와 민족적 경험을 관조의 대상으로 내몰아야 했고 그 구원을 타자의 담론과 표상의 화려함과 아름다움 속에 묻어두어야 했다. (288)
이중적 동일화 가운데 역사적 경관
“복장” 장이머우
90년대의 대륙 영화계에서 “붉은 수수밭”,“아이들의 왕”의 계시가 더욱 본질적이고 직접적이 된 이유는 장이머우가 가진, 기적과도 같은 유혹과 매력 때문일 것이다. 장이머우는 영화계의“복장”이라 할 수 있다. 5세대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었고, 그가 촬영기사로 참여했던“황토지”,“대열병”은 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그는 감독으로서는 처녀작인 “붉은 수수밭”을 통해 일거에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289)
1990년 장이머우가 감독한“국두”는 비록 칸에서는 좌절을 맛보았지만 유럽 대륙을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되어 중국 영화가 아카데미영제의 경쟁에 뛰어든 선례를 남겼다. 1991년 그의 “홍등”이 다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되었고 아울러 베니스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하였다. (289-290)1992년 장이머우는 “귀주이야기”로 다시 베니스 경재부분에 뛰어들어 금사자상을 획득하였다.(290)
이중의 문화적 시야
장이머우는 성공적으로 서구의 중국에 대한 문화 은막의 동일시를 이루었다.“국두”,“홍등”에서 보여준 동방. 중국의 역사적 경관은 여전히 서구 방식의 역사/시간의 발전과정 바깥에 외재하는 공간이다. 이번에 공간화한 역사는 아득하면서 역사 속에 우뚝 솟은 황토지가 아니고, 처량한 아름다움을 지닌 나비 표본이었다.(291) 장이머우의 성공은 동방문화의 표상을 가지고 서구 문화에 아첨한 끝에 총애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 장이머우의 영화는 “중힁으로 교착하는 시선”이 모이는 곳이다.(291)
본토의 문화적 동일시
대륙 작가 류헝의 소설“복희 복희”를 각색한“국두”는 대륙 본토의 문화적 시야에 대륙의 역사문화 반사 운동이라는 주제를 부활시켰다. 영화의 주요 플롯은 여전히“좋은 남지는 좋은 처를 얻지 못하고 무뢰한이 미인을 얻는다” 라는 심근 문학의 전형적 서사 모티브를 취하고 있다. 양진산은 권력과 재산을 빌어 여인을 강점한다. 비록 이것이 확실히 이름뿐인 점유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아비”의 형상이 정말로 부재하게 되자, 오히려 부자의 질서에 충실한아들, 반역자의 핏줄인 아들이 더욱 젊고 강인한 생명을 바탕으로 “아비”의 사업을 이어받는다. 그래서 상당히 아이러니한 의미를 지닌“관을 막는” 장면은 일곱 번 곡을 하며 먼지를 털어내는 텐칭, 쥐더우와 여섯 차례에 걸쳐 방향을 바꿔 위를 올려다보는 카메라 앵글, 눈을 어지럽히는 햇빛 아래에서 갑자기 보이는, 관 위에 단정히 앉아 사자의 위패를 손으로 받치고 있는 어린아이 텐바이등과 교체되면서 미극과 순환의 느낌을 더하고 있다. 영화에 두 번 출현하는“딸랑땅랑 종소리”라는 동요는 부권과 질서의 최후의 승리를 순환적으로 증명했다. (292)
서구적 시야 속의 동방의 거울상
장이머우는 동방의 아들살해 이야기를 위해 고적“천공개물”을 참조하여 낡은 염색공장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정욕과 잔혹함에 관한 이 이야기는 옛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조형 공간으로 옮겨져 연출되었다. 대부분의 대낮 장면에서 염색공장 전체는 황금색 빛을 발하고 있고 폭포 같이 떨어지는 염색천은 고풍 짙은 염색도구에 가벼운 운동감을 더하고 있다.(298)
소설을 영화로 바꾸면서 장이머우가 행한 가장 중요한 각색은 주인공 양텐칭의 죽음이었다. 원작에서는 텐칭이 텐바이가 보내는 하루하루의 냉혹한 시선을 참지 못해 결국 벌거벗은 채 물독에 빠져죽는다고 묘사돼 있을 뿐이다. 이는 서사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쥐더우가“오늘 내가 너에게 다털어 놓으마. 양텐힝 그 사람이 네 친 아빠다!”라고 공개한 후 본토적 동일시에서 나타나는 아들살해 모델은 잠재적으로 서구 문화 시야 속의 오이디푸스/아비살해의 정경으로 바뀌었다. (296)
성별과 종족
“국두”와“훙등”역시 이중의 동일시에서 나타나는 역사적 경관을 성공적으로 담아냈다. 영화 앞머리와 끝머리에 나오는 주훙색 초서는 여름에서 그다음 여름으로, 1년 중 사계의 변화가 이루는 시간의 순환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네 번째 부인 쑹롄을 집에 들이는 것부터 다섯 번째 부인 원주를 맞이하기까지 사건은 순환적으로 일어난다. 셋째 부인 메이산의 피살과 넷째 부인 쑹롄의 실성은 루쉰이 말한 소위 역사의 “식인 의 잔치”와 동일 한 것이다.“훙등”에서 천씨 저택은 명실상부한 박물관으로 고건축이자, 그 자체가 곧 한 “개” 의 문물이었다. (297)등을 커고끄고 덮는 해위, 장명등, 황혼녘 뜰에서 해하는, 들 침소를 정하는 의식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발바닥을 때라는” 풍속과 함께 나온다. 상당히 아이러니한 의미를 지닌 경극의 종고 소리와 애도라는 주제가 단긴, 반주와 가사없는 여성의 허밍 음과 무혈의 혹은 유혈의 학살을 주제로 하는 발랄한 동요, 그리고 황혼녘 끊이지 않고 귓가를 맴도는 발바닥을 때리는 몽둥이의 리듬이 옛 중국의 죽음의 환무와 비어있는 의식을 표현하고 있다.(298)
차안과 피안의 사이
천카이거-함락과 도하
가장 저명한 대륙의 영화음악 작곡가 자오지핑은 일찍이 장이머우를 대륙영화계의“천재”로, 천카이거를 5세대의“영수”로 부른 적이 있다. 80년대, 5세대가 갑자기 대륙 문화 시야에 나타나 빠른 속도로 그리고 대세를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영화의 면모를 바꿔놓았을 때, “황토지”,“대열병”,“아이들의 왕”등의 작품을 잇달아 내놓은 천카이거는 당연하다는 듯이 5세대의 영수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그러나8.90년대 교체기에 장이머우가 서구 영화계로 진출하여 연전연 승하자, 천카이거는 “나의 홍위병시대”라는 책을 통해깊은 생각에 빠진 자의 추억을 보여주었을 뿐 시종 고상하고 심오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곤란에 처한 침묵으로 일관했다. 중국을 떠나2년간을 미국에서 보낸 뒤 천카이거는 마침내 그리 많지 않은 외자를 끌어다“현 위의 인생”을 찍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들고 칸으로 간 그는 또 다시 고배를 마셔야했다.만약“아이들의 왕”과 “붉은 수수밭” 이 유럽 영화제에서 얻은 상반된 성과가 대륙 예술 영화의 운명을 가늠할 수 있는 계시록이었다고 한다면,“현 위의 인생”은 제3세계 예술가의 문화적 숙명에 물든 몇 줄기의 비극적인 색채라는 문화적 현실을 보여주었다. 사실 영화“현 위의 인생”에서 천카이거는 입이 다물어지지않을 정도로 돌라운, 칠보로 치장된 발코니와 종횡으로 이정표가 퍼져 있지만, 더 이상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는 막다른 길을 만들어냈다.(300)
병치와 혼재
이중적 흑은 다중적인 문화적 동일시가 장이머우의 중국적 역사 경관을 만들어냈다면, 종힁으로 교착하는 눈빛은 천카이거의 예술 세계를 산산이 찢어 놓았다.“현 의의 인생”은 결코 천카이거가 말한 것처럼“아주 단순한 영화”로“사람은 한 번 살 뿐”이라는 주제를 표현 한 게 아니었다. 반대로 그것은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지닌, 지나치게 복잡한 영화였다. 역사 비판 및 현실에 대한 사명감으로 인해 천카이거는 대륙의 전형적인 심근/반사소설 작가로 알려진 스톄성의 명작“삶은 현과 같다”를 선택했다.(301)
본토의우언에서 역사적 수난자인 늙은 가수는 오히려 영화에서“선선”으로 추앙받는다. 그는 사막과 거친 파도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소박한 중국 민간고사와 민요가 아닌“과보”,“여왜”,“대우”등 민족 창세와 구원의 신화를 읊조렸다. 그러므로 이는 역사의 수난자 이야기가 아니라 선지자 이야기였으며 적어도 선지자가 말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민족 역사 속 임의의 단락이 아닌 민족 신화의 새로운 한 페이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역시 탈주 중 그물에 걸린 게 분명하다.(302)
천카이거는 민족 문화만이 중요하다는 오만함 속에서“삶은 현과같다”라는 본토의 우언을 고쳐썼다. 게다가“현 위의 인생”은 단지 민족적, 문화적 신화만이 아닌 구원과 문화 사도의 신화였다. 우매한 촌민 사이에 계투가일러났을 때늙은 선선은 높은 곳에 올라 “인간의 노래”를 불러 그들을 화해시켰다. 이는“성경.마태복음”장면과 인도주의 계몽 담론을 혼합한 것이다. 그러나 “현과 같은 삶” 의 비극적 종결 이후에도, 노인은 계속해서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동방의“환희의 찬가”였다.(302)
감복과 “구원”
“현 위 인생”의 몰락은 확실히 천카이거의 예술적 삶을 위급한 지경으로 몰고 갔다. 천카이거는 반드시 서구에서 성공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장이머우가 “방식을 바꾼”“뀌주이야기”에서 본토적 동일시 가운데 온정어린 뀌의를 만들어내 시작하고, 현대의 “향토 중국”에 대한 서구의 기대 속에서 소박한 인정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때, 천카이거는 영화“패왕별희”의 촬영에 들어갔다. “현 위의 인생”에서 천카이거가 추구하는 와중에 잃어버리고 탈주 도중에 오히려 그물에 걸린 꼴이었다면,“패왕병희”는 민족 문화를 잃어버린 이러한 상황을 확인하고 제3세계 예술가가 처한 문화적 숙명에 굴복한 결과물이었다. (303)
당대 중국의 정치적 풍경이 끼어든 것이었다. 이것은 전방위적이고 본질적인 내재적 유배였다. 그러나 이러한 서구적 시야속의 동방적 경관에 대한 동일시가 일어났음을 알려주는, 여자 역학을 맡은 남성 배우 청뎨이의 형상은 천카이거가 굴복하는 문화적 위치를 절묘하게 상유했다. 즉, 남성이지만 역사의 폭력과 거세 속에서 그리고 문화라는 마의 거울 속에서 그는 “순수한 동방의 여성”이라는 형상이었으며, 관상자에게 기쁨을 주고 상을 주는 사람으로 하여금 욕망하게 만드는 “남자”였다. 특히 천카이거가 그의 남성 중심적인 방식으로 리비화의 원작에 나오는 청뎨이/된샤오로우의 관계와 같은 동성애적 요소를 고쳐 쓰고 해체시 켜버린 후 청뎨이/우희/양귀비는 순수한“동방의 기이 한 풍경”,대륙 비평자가 말한“남녀추니 문화”로 바뀌었다. 천카이거를 정복한 칸은 결국 천카이거에 의해 정복되었고 천카이거는 철저히 굴복하고 잃어버린 후에야“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민족 문화의 신생과 사명, 중국 대륙의 사회 현실은 영화 서박 및 종결부에 나오는 빈 극장 밖으로 확대되었고. 이들 양자가 교차하고 이어지는 궤적을 찾기는 지난한 일이 되었다. (304)
나비 표본
장이머우가 화려한 길을 걸었고 천카이거가 가시밭길에서 영광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은 탈식 민 문화의 현실을 보여준다. 민족 문화 및 표상을 서구 단론 권력에 굴복시키고 동일화시키면서 그들은 그들의 작품을 통해 서구가 가지고 있었던, 오독과 맹점으로 가득한 동방에 대한 시야를 보충하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현란하고, 민첩한 움직임을 보이는 동방의 나비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 나비를 죽이는 못도 만들어냈다. 좁은 문을 통해 나아가면 좁고 작은 구비길이 펼쳐진다. 그들의 영화는 본토적 시야 가운데 새로운 규범과 모델, 즉 차안/동방에서 피안/사구로 가는 데 참조해야 하는“전통”이 되었다. 골드 러쉬 마냥 점점 더 많은 해외 영화제작자들이 대륙으로 몰려들었고 점점 더 많은 5세대, 심지어4세대 감독 및 작자들이 장이머우와 천카의 모델을 주목하고 실천하기 시작했다. (305)
천카이거와 장이머우는 벤야민이 말한 세게 문화 시장의“문인”과 동일화되고 있으며,형태를 갖춰가는 역사 과정에 몸을 두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길은 결코 필자가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