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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해당시 살인자들의 행동강령이다.
1. 군측(君側)의 간신을 제거하여 국정을 바로잡는다 선전하고,
2. 대원군을 명목상의 영수(領袖)로 추대옹위(推戴擁衛)하고 대궐에 들어가 명성황후를 시해(弑害)하되,
3. 행동 부대의 표면에는 훈련대를 내세워서 그들의 쿠데타처럼 가장하며,
4. 일체 악행의 전위대(前衛隊)로는 흉포 무쌍한 일본의 민간인 낭인부대(浪人部隊)를 내세우되, 그들의 엄호(掩護) 및 전투의 주력은 일본수비대가 담당하며,
5. 대원군 옹호를 위한 별동대로는 일본 조계(租界) 경비의 경관대도 동원한다.
얼마나 악날하게 그날의 일을 계획했는지 알수있다. 명성황후시해전날인 10월7일촬영한것으로 추정되는 한성순보사(비밀아지트) 앞에서 촬영한 사진!
이들 살인범들은 신문사11명 , 순사 8명 , 통역관 6명 , 상업 5명 , 농업 5명 , 외교관 3명 , 겐요사[우익단체]3명 , 교원2명 , 무직 2명 , 의사 1명 , 저술업1명 , 승려 1명 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당시 나이를 보면 50대 2명 , 40대 9명 , 30대 20명 , 20대 16명 , 10대 1명 입니다.
출신지역은 구마모토 21명 , 나가사키 4명 , 가고시마 4명 , 후쿠오카 4명 , 도쿄 2명 , 가니기와2명 와카타2명 , 시가시마 2명 , 지바구치 1명 , 나가자키 1명 , 이와테 1명 입니다.
아래의 살인자들은 확실히 그 죄악이 나타난者[놈]들입니다. 그외에 확인이 되는즉시 업데이트하겠습니다.
살인자 1. 메이지 일왕[ 明治日王] 1852년 11월 3일 - 1912년 7월 30일
본명은 무쓰히토(睦仁)이다. 일국의 국모를 살해하는일에 나라의 수장인 일왕이 몰랐다고 하면 그 누가 믿으랴 또한 명성황후 살해 사건이일왕에게 보고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이 점을 알려준다. 명성황후 상해 사건 지휘자들이 일왕의 측근이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해준다. 살해범들은 히로시마 재판소에서 석방되자 마자 전 일본에서 구국적 영웅으로 대접하는 분위기로
살인자 2.
이토 히로부미 이등박문[伊藤博文] 1841. 10. 14 일본 스오 구니[周防國]~1909. 10. 26 중국 만주 하얼빈[哈爾濱]에서 대한제국 우국지사안중근 에게 저격 사망.
오른쪽 대한제국 의민황태자 이은
우국지사 안중근은 재판장에서 이토의 죄상을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1905년 11월에 한일협약 5개조를 체결한 일, 1907년 7월 한일신협약 7개조를 체결한 일, 양민을 살해한 일, 이권을 약탈한 일, 동양평화를 교란한 일 등 15가지로 제시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밝혔다.
살인자 3. 미우라고로[三浦梧樓] 1846 일본 야마구치 현[山口縣]~1926.
1870년 일본 병부 권소승
1895년 10월 8일 일본인 지식인들을 앞세우고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명성황후를 난자살해하고 유길준(兪吉濬) 등의 친일파를 중심으로 한 제4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을 구성했다. 명성황후살해사건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일어나자 히로시마[廣島] 지방재판소의 예심에 회부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곧 풀려났다. 1910년 추밀원 고문관이 되었으며 정계의 원로로 활약했다. 대한민국 국민이 절대 잊지않는 대한민국의 영원한 원수이다.
살인자 4.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角五郞] 1836. 1. 16 일본 나가토 구니[長門國] 조슈[長州]~1915. 9. 1 도쿄[東京].
메이지 시대[明治時代:1868~1912]에 일본을 지배한 과두제 정치체제의 일원이었다. 무사 가문 출신인 이노우에는 나중에 일본 최초의 총리가 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소년시절부터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
1900년 국민동맹회를 결성해 ‘조선 장악’을 주장했으며 조선 북부와 간도 지방에서 줄곧 지형조사와 정탐활동을 했다. 생전에 “내가 죽으면 장백산(백두산)에 뼈를 묻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1909년 병사했다
최근 그 의 외손자가 명성황후의 릉에 살인자 후손들과 참배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용서받을 일이 아닙니다. 천번만번 사죄를 하여도 절대 용서해서는 안됩니다.
살인자 6. 이에이리 가기치[家入嘉吉] 당시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인들의 사진을 많이 찍어 후손에게까지 그 사진이 전해지고있습니다.
현재 칼집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칼날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대한해협에 버렸다고합니다.
살인자 7.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육군 포병소좌 출신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 당시 일본 전권공사의 수행원이었고, 이후 조선으로 건너와 궁내부와 군부의 고문으로서 많은 조선인 관리들과 친교를 맺고 있었다. 을미사변 이후 정부 요인들조차 그에게 굽신댈 정도로 유명해졌다고 하며, 1897년부터는 중국에서 낭인 생활을 했다
살인자 8. 시바 시로우[柴四朗]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 책임자 1892년 중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에는 김옥균의 후원자 노릇도 했다. 을미사변 이후인 1898년에도 다시 중의원에 당선됐고 이후 10선 의원이 됐다. 1914년에는 내각 외무성 참정관을 지냈다.
살인자 9.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1894년 조선으로 건너와 부산에서 을미사변 이후인 1902년에는 제국당으로 출마해 중의원 의원이 된 뒤 줄곧 당선돼 14선 의원이 됐다. 1925년 가토 내각에서 체신상이 됐고 뒤에 내상도 역임했다. 1932년엔
살인자 10. 사세 구마테쓰[佐瀨熊鐵] 의사 출신으로 조선에서 경무청 의무(醫務)등을 지냈으며 1902년 중의원에 당선됐고, 1905년 일진회의 을사조약 찬성 선언서를 기초하기도 했다. 1906년엔 한국 농상공부 촉탁이 돼 평양에서 무연탄광 개발에 참여했다. 다케다 한시(武田範治)는 ‘조선 사정 전문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던 문필가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에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에는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 일진회를 조종하면서 ‘합방’ 운동을 전개했다.
살인자 11. 토오 가쯔아키[藤勝顯] 일본 쿠시다 신사에 보관중인 토오 카쯔아키의 칼 이 칼에는 "一瞬電光刺老狐(일순전광자노호-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 라는 글귀가 선명히 적혀있다.
살인자 12.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공사관 서기
살인자 13.
살인자 14. 오사키 세이키치[大崎正吉]
살인자 15. 동경제국대학 법학부출신의 엘리트 지식인이다.
살인자 16. 미즈노 렌타로[水野練太郞]
살인자 17. 스기야마 시게마루[衫山茂丸] 우익이자 일본 정계의 흑막.
살인자 18. 나카무라 다테오
살인자 19. 다케다 한시[武田範治] ‘조선 사정 전문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던 문필가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에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에는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 일진회를 조종하면서 ‘합방’ 운동을 전개했다.
살인자 20. 하나부사 요시타다 Hanabusa Yoshitada [花房義質]
살인자 21. 후지카쓰[寺崎泰吉] 그가 1045년 8월 15일 광복절 이후 죽었을때 집에서 길이 120cm 가령 되는 칼이 하나발견되었다.
살인자 22. 데라자키 야스키치[一名 高橋源次] 한성 신보 주필 , 살해단 대장
살인자 23. 마쓰무라 다쓰키
시해당시 사카나시 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임하고있었습니다.
위사진은 다쓰키의 공적비[살해 실토비]의 일부로써 조국을 위해 조선국모를 살해했다라는 내용의 비문입니다.
살인자 24. 기쿠치 겐조[菊池謙讓] 신문기자 모자를 든 인물 다시 서울로와 성동구 신당동에서 살았다고합니다. 147cm 의 작은키에 칼을 허리에 차면 바닥에 끌려 등에 메고 다녔다고합니다.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된 칼은 전쟁중 잃어버렸다고합니다.
살인자 25.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
살인자 25. 아기를 안고있는 남자 시부다니[澁谷文英]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사건에 살해단을 도와 도성출입금지령을 해제하는 데 참여하였던 일련종 승려 조선측 가담자.
살인자 . 우범선[禹範善] '씨없는 수박'우장춘 박사의 아버지 1857~1903 '을미사변' 후 일본 망명시절 우범선 일가의 모습. 가운데 어린이는 나중에 육종학자로 이름을 날린 우장춘 박사이며, 오른쪽은 우범선의 일본인 아내 사카이 나카 한말의 개화파 무인으로서 일찍부터 친일 근대화를 주장한 인물이다. 1895년에 우범선은 휘하의 장병을 이끌고 명성왕후의 살해(을미사변)에 참여했다.
훈련대 제2대대 병력을 차질없이 동원한 것은 물론이고 명성황후의 시신 ‘처리’도 그가 맡았다.
일본정부의 사주를 받은 者들에 의해 시해된 후 불태워진 명성황후의 시신은 타고 남은 재는 궁궐 내 우물에 버려졌고 유해 일부는 우범선의 지시로 휘하의 윤석우(尹錫禹)가 땅에 묻어버렸다. 증거인멸을 위해서였다.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하던 중, 1903년 독립협회 부회장을 지낸 바 있는 고영근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이로써 고영근은 대한제국으로부터 포상되었다.
살인자 . 조중응[趙重應, 법부대신] 1860(철종 11) 서울~1919. 본관은 양주(楊州). 초명은 중협(重協). 아버지는 택희(宅熙)이다. 명성황후 시해 가담. 고종 퇴위 강요. 민족반역자
1985년 명성황후 시해.폐비조칙을 강요,행.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고종의 강제퇴위를 주동했으며 10월에는 궁궐 경호의 책임자가 되어 고종황제와 순종황제를 감시. 1909년친일지 <법정신문> 발간. 자작. 1910-19 중추원고문, 1916 대정친목회 및 한성부민회 회장 일훈 1등 대욱장 1910년 한일합병 후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수여. 1916년 친일단체인 대정친목회와 한성부민회의 회장.
살인자 . 이주회 [李周會]1843~1895 ●약력
동학농민군 진압한 명성황후 시해 주범 후에 체포된 뒤 대역죄인으로 1895년 12월 19일 처형당하였다.
살인자 . 이두황 [李斗璜] 1858 서울 ~ 1916.
●약력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는 등 반일적 정책을 취하는 명성황후를 일본 낭인패와 군을 동원하여 학살한 을미사변에 훈련대를 이끌고 광화문의 경비를 맡았다. 그 후 아관파천이 일어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이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일본으로 피신해 일본 정부의 비호하에 1907년 특사가 되어 귀국, 친일파를 심으려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배려로 중추원부찬의가 되고 전라북도 관찰사 겸 재판소 판사가 되었다. 국권피탈 이후에도 전라북도장관으로 죽을 때까지 재임하였다.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서위와 거액의 상여금을 일제로부터 받았다. 살인자 . 이진호[李軫鎬] 창씨개명 : 李家軫鎬 1867~1943 1867년 서울 출생
을미사변 당시에는 훈련대 제3대대장이었으며, 훈련대 해산 후 친위대 제2대대장이 되었다.
살인자. 윤석우[尹錫禹] 우범선의 명령에 따라 명성황후의 유해를 정전(正展)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지고 가서 땅속에 묻었다 고종 32년 1895년 11월 14일 재판에의해 교형에 처해졌다.
살인자. 박선[朴銑] 고종 32년 1895년 11월 14일 재판에의해 교형에 처해졌다.
살인자. 이범래[李範來]
살인자. 조희연[趙羲淵]1856∼1915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정토군'(征討軍) 조직.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군을 도운 공로로 군무대신 서리. 1895 명성황후시해사건 때에도 군무의 요직에 자리 협조. 1896년 2월 조희연은 유길준 등과 함께 인천으로 가서 일본으로 망명. 1910년 한일'합병' 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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