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글쓰기의 시작은 데생, 즉 묘사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제 어린 시절에 그림을 꽤 잘 그린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미술 선생님이 교탁 위에 세워놓은 석고상을 그리는데, 나는 두 시간 걸려서 그리는 걸 다른 친구들은 이삼십 분에 다 그렸다면서 내가 그리는 것을 구경합니다. 눈썹 하나를 세 번 관찰하고 나서 선 하나 긋고, 여러 번 보고 한 번 그리고 이런 식인데… 딴 애들은 한 번 보고 단숨에 눈·코·입을 그리는 거예요. 그러니 자연 우스운 꼴의 그림이 되지 뭡니까. 글쓰기도 이모저모 대상을 살펴본 연후 꼭 거기에 맞을 표현을 찾아야 합니다. 글쓰기의 데생 방법으로는 감각적인 표현·변용(變容)하는 표현·비유적인 표현 세 가지를 권하고 싶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히 말해야겠군요.
감각적인 표현이라 하면 시각, 청각, 미각, 촉각, 공감각의 표현들입니다. "잎 지고 잎 피는/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반짝 건너가는 햇살" ―시각, "나직이 물 끓는 소리가/ 마냥 귀를 적신다" ― 청각, "희끗희끗 내리는 일악장의 무반주 첼로 연주곡" ― 공감각 같은 것 말입니다.
변용하는 표현은 대상을 비틀거나, 현실의 소재를 약간 달리 손질함을 뜻합니다. 내 이야기를 쓰면서 슬쩍 남의 얘기를 가져와서 보태기도 하고, 비유적인 표현의 방법은 직유, 은유, 의인 등 아주 많지요.
예를 들어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 집」
여기서 "…밤들아, …안개들아, …촛불들아"는 의인화한 표현, "장님처럼"은 직유입니다. 바람 부는 여름날에 청모시 적삼을 입고 나룻배로 강을 건너가는 여인을 박목월 시인은 "모란 여정(牧丹餘情)"이란 시에서 "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이라고 썼습니다. 은유의 표현입니다. "석탄"을 "검은 침묵에 생성하는 꽃"이라 표현하는 건 공감각과 은유를 곁들인 것입니다. 구체어+추상어, 비생명+생명의 방법으로 은유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현대시의 생명은 은유에 있다고 말한 시인도 있답니다.
여섯째, 상상력을 확대하기입니다. 문학은 상상력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예술입니다. 시는 더욱 그렇습니다. 상상력이란 과거에 체험한 어떤 이미지를 되살려내는 능력이지요.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로 바뀌고 또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일, 이것이 상상입니다. 나사 하나가 우연히 주방에서 발견됐다고 합시다. 이로부터 상상력을 발동하기로 합니다. 싱크대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는데 그 나사가 빠진 구멍이 보이지 않습니다. 매우 중요한 모임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잊고 있습니다. 그 모임이라는 나사 구멍에서 빠져 있는 것입니다. 집에서 나왔는데 어디선가 집으로 내게 중요한 전화가 걸려옵니다. 나는 그것을 모르는 채 딴 일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리고 기억의 한 귀퉁이에서 나사 하나가 슬그머니 빠져 나옵니다. 연상과 유추의 거듭되는 이러한 상상력이 한 편의 시로 쓰여질 수 있습니다.
어디서 빠져나왔을까
아침에 방을 쓸다가 빗자루에 걸려
뒹구는 나사 하나
주방에서 발견된 쇠붙이
팥알만큼 작지만
아무래도 위험한 누락
전기밥솥의 수상한 밑창에도
싱크대의 경첩에도
빠진 구멍이 없는데
누가 나를 찾았을까
내가 외출하고 없는 동안
빈 아파트에서 울렸을 전화벨 소리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시간에
나는 빠져나왔을까
시내버스에 앉아서
휴대폰을 귀에 대고 껄껄거리는
낯선 사내의 뒤꼭지를 보다가
문득 퓨즈가 나가버린
내 기억의 나사 하나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리엘리 나의 하느님.
― 졸시 「누락」
일곱째, 시 쓰기는 할 말을 감추는 일입니다. 꼭 하고 싶은 말을 시에다 직접적으로 쏟아내지 말아야 합니다. 두 남녀가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눈이 맑고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그대로 "너는 눈이 참 맑고 아름답구나." 이러면 코미디가 됩니다. "네 눈 속에 내가 빠지고 싶다."고 하는 게 시적 표현입니다. 시는 할 말을 숨기고 감추는 데 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독자가 생각하면서 찾아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 감정을 꾹꾹 누르고 참아서 간접적으로 돌려 함축적으로 표현할 때 시를 읽는 이가 공감하는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지용 시인의 "유리창"을 예로 들어봅니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이 "유리창"은 어린 자식을 잃고 밤에 창밖을 내다보며 슬퍼하는 애절한 아버지의 심경을 쓴 시입니다.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내 아들은 저승으로 갔구나. 너는 폐를 앓다가 끝내 내 곁을 새처럼 날아가 버리고, 여기 남은 아비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다. 인생이 이렇듯 허무한 것이냐. 밤 유리창에 비치는 흐린 그림자에서 너를 떠올리니 더욱 가슴 아프구나." 이러면 시가 안 됩니다. 시를 쓰는 이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완곡하게 표현해야 읽는 사람이 제대로 느끼게 됩니다.
끝으로 한 말씀만 덧붙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모름지기 인생이나 현실에 대하여 자기 주관이 확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안목으로 현실을 파악하고 사물의 의미를 해석하는 일, 그것이 그 사람의 글에 나타날 때 "개성"이 됩니다. 호박 같은 세상을 호박같이 둥글둥글 살아간다, 이런 것도 개성이라 할 수 있겠지요. 자기보다 나이도 한참 아래인 대통령을 위해 생신 축하의 시를 써주고 세계 일주 여행의 선물을 받은 어떤 저명한 시인도 있습니다만, 저는 결단코 그런 개성을 추구하는 시인은 참다운 시인으로 생각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