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학파
(Soviet Cinema School)
1. 소비에트 학파의 배경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후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영화 제작과 배급체계 역시 새로운 정부의 목적에 봉사하는 실질적인 생산을 위해 엄격히 통제되기 시작하였다. 사기업을 포함한 모든 사유 재산을 국유화하는 당국의 조치에 많은 개인 제작사들은 저항했고 정부 관리 아래 운영되는 극장에 대한 영화 공급을 중단해버렸다. 하지만 1918년 7월에 국가 교육 위원회 영화분과는 생필름의 공급을 엄격히 통제해 버렸고 그 결과 제작자들은 자체적으로 생필름을 비축하거나 기재를 챙겨 국외로 빠져나갔다.
1921년에 러시아는 방대한 기근을 비롯하여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생필품의 생산과 배급을 위하여 레닌은 몇 년 동안 사기업을 운영을 허용하는 신 경제 정책(NEP)을 시행했다. 그러자 영화의 경우 해외로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제작자들이 보유하고 있던 생필름들과 기재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레닌과 스탈린은 영화의 선동적이고 교육적인 힘을 잘 알았다. 1922년 레닌은 “모든 예술 가운데 우리에겐 영화가 가장 중요하다.” 라고 선언하였는데, 특히 무성영화의 경우에는 대중들의 상당수가 문맹이고 서로 다른 방언을 사용하는 현실에서 교육을 위한 이상적인 시각 매체였다. 정부가 처음에 지원한 영화들은 1922년 5월에 시작된 베르토프의 뉴스 연속물인 <키노 프라우다>와 같은 뉴스 영화들이었고, 이는 ‘선동 열차’라고 불린 형태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상영이 이루어졌다. 우연히도 다수의 소비에트 영화 감독들은 바로 이 시기부터 그들의 작업을 시작했다. 또한 1919년 국립 영화학교의 설립은 소비에트 학파의 성립과 무한한 영화적 실험을 가능하게 했다.
사실 이러한 실험은 영화에만 독자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혁명의 영향은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실험적인 요소를 권장하였다. 이러한 실험의 기원은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방법을 언어에 적용했던 1912년 러시아 미래주의자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약간 수정을 거쳐 혁명 이후의 구성주의 운동으로 변화한다. 유럽 모더니즘 예술의 추상적 형식에 영향을 받은 이 혁명 이전의 운동은 기술에 대한 신뢰와 고정된 의미의 제거에 노력하였다. 혁명 이후 구성주의자들은 과학 기술에서 변화의 엄청난 잠재력을 보면서 새로운 질서를 옹호하였고 그 질서 속에서 예술과 과학과 기술이 노동자, 예술가, 지식인과 협력하여 새로운 비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결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생산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이같은 새로운 인식은 새로이 출현한 1920년대 소비에트 영화에 쉽게 포용되었고, 모든 노동자들이 소비에트 공화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자 노력하고 하는 메시지를 영화를 통해 확산하고자 했던 정치적 당면 과제와도 훌륭히 들어 맞았다.
2. 소비에트 학파의 경향
소위 소비에트 영화의 아버지는 자신의 몽타쥬 이론을 제시한 레프 쿨레쇼프이다. 쿨레쇼프의 이론은 각각의 쇼트의 의미는 그것이 놓인 맥락에서 도출되며 그 쇼트를 다른 시퀀스에 둠으로써 그 맥락이 변하면 쇼트와 시퀀스의 전체 의미도 변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이것으로부터 그는 충돌과 갈등이 모든 시각적이고 영화적인 기호들에 내재한다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즉 영화의 쇼트는 앞 뒤에 오는 쇼트들과의 관련 속에서 의미를 획득하고, 이 쇼트들의 충돌이 관객의 마음 속에서 제 3의 의미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텅빈 테이블에 앉아있는 가난한 여자와 아이 쇼트들 사이에 먹을 것으로 가득찬 테이블에 앉아있는 자본가의 쇼트를 삽입하면 이것은 관객의 마음 속에서 자본가 계급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억압으로 읽힐 것이다.
쿨레쇼프의 몽타쥬 이론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세볼로프 푸도프킨, 알렉산더 도브첸코 등과 같은 동시대의 영화 감독들에게 엄천난 영향을 주었다. FEA(Factory of the Eccentric Actor)를 형성했던 감독들은 쿨레쇼프의 몽타쥬 체계로부터 소외 효과의 원칙을 발전시켜 나갔는데, 이들은 낯선 맥락에 사물이나 인물들을 배치함으로서 관객을 소외시켜 이미지의 의미를 관객이 곰곰히 생각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모든 젊은 감독들이 몽타쥬 방식에 대해 꼭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푸도프킨은 쇼트가 벽돌과 같아서 씬이나 시퀀스를 이루기 위해서는 함께 합쳐져야 한다고 믿었던 반면, 에이젠슈타인은 최대의 몽타쥬 효과는 쇼트들이 서로 완벽하게 조응하지 않을 때, 그리고 그 쇼트들이 관객에게 충격을 줄 때 얻어진다고 말하며 이를 반박했다. 에이젠슈타인에게 몽타쥬는 관객들로 하여금 스스로 사고하게 하는 지적 몽타쥬를 의미했는데, 그는 인간들을 사물이나 다른 살아있는 형식들과 상징적으로 대비시킴으로서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영화 <파업(1925)>에서 소 도살자는 파업자들을 학살하는 자들과 상징적으로 대비된다. 에이젠슈타인은 성격화를 회피하는 대신 그가 ‘전형화 typage’ 라고 불렀던 상징적 표현들을 택한다. 따라서 배우는 단지 영화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았으며,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노동 계급 전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베르토프는 그들과 달리 기록영화적이며 사실적인 형태를 띤 ‘카메라의 눈’ 방식을 선호하였다.
소비에트 학파의 이러한 몽타쥬 실험의 시기는 1925- 33년으로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는데, 쇠퇴하게 된 주요 원인은 러시아 정부의 정서적 통제가 몽타쥬 양식의 사용을 억제하는 압력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에이젠슈타인과 도브첸코는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난해한 방식을 사용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스탈린 통치하의 러시아 정부는 모든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영화를 장려하였다. 그래서 모든 양식적 실험이나 비사실적인 주제는 비판되고 통제되었다. 소비에트 몽타쥬는 베르토프의 <열광(1931)>과 푸도프킨의 <도망자(1933)>와 같은 작품의 개봉을 마지막으로 1933년에 끝이 낫다고 할 수 있다.
3. 대표적 감독과 작품들
1) 알렉산더 도브첸코
교육받지 못한 농가 출신의 우크라이나인 도브첸코의 영화에는 마르크스주의적 색채와 그의 무성영화를 다른 소련 영화 감독들과 구별되게 만드는 특이한 이민족적이고 신비한 요소들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 몽따쥬는 다른 감독들에 적용되었던 것처럼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몽타쥬를 사용하는 방법은 매우 달랐다.
그의 중요한 세 편의 무성 영화 - <즈베니고라(1928)> <무기공장(1929)> <대지(1930> - 에서 긴 시퀀스들은 원형의 구조를 이루며 그들 자체로서 이상할 만큼 완전하여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 같다. 그는 씬 안에서 쇼트들의 관계보다는 시퀀스 안에서의 씬들 관계를 강조하였다. 수많은 다양한 씬들은 짧은 경향이 있으나 그 안에 포함된 쇼트들은 종종 길게 지속된다. 또한 대조적이고 생략적인 결합은 매우 예외적인 분위기와 진술의 추이를 이끌어 낸다.
그의 초기 영화에 일관되게 흐르는 의도는 명백히 시적이다. 그러나 그의 상징과 은유들은 강요되거나 순문학적이진 않은데, 그것들은 인간과 흙이 친밀하다는 착상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전체로서의 인생을 보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 선전선동은 없다. 그를 가장 강렬하게 끌어당긴 것은 편집자들의 가위질에 의해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가 포착할 수 있는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움 이었다.
2) 세볼로프 푸도프킨
푸도프킨은 쿨레쇼프의 자연주의적 성격화와 몽타쥬 원칙에 따라 대중적인 내러티브 영화들을 제작하였다. 쿨레쇼프가 그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했는데,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는 몽타쥬의 잠재력을 연구하는 쿨레쇼프의 일련의 실험들을 같이 했다. 푸도프킨이 쿨레쇼프보다 더 위대한 감독이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스승의 통찰력을 설명하고 보여주는 이론서들 -<영화 기술><영화 연출> - 을 저술하기도 했다.
푸도프킨은 주요 무성영화들 - <어머니(1926)> <성 페테르스부르그의 종말(1927)> <아시아의 돌풍(1928)> - 에서 그가 터득한 것들에 대한 완전한 형식을 부여하였다. 푸도프킨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감정과 독립된 정체성을 갖는 개인들이며, 그의 플롯 구성은 러시아의 혁명적 상황 속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헐리우드 영화의 선악 대결 구조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의 영화들은 에이젠슈타인의 고도로 지적인 호소와는 달리, 즉각적인 갈채를 받고 우리의 정서 깊숙한 곳으로 침투한다. 또한 그의 영화의 힘은 몇 해가 지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 듯하다.
3)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에이젠슈타인은 일본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강렬한 관심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후에 영화에 대한 그의 심오하고 박식한 이론의 내용이 되었다. 그는 일본의 상형문자에 매혹되었는데, 도출된 두개의 상징이 결합하여 영화의 쇼트들처럼 제3의 다른 의미를 제공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첫 장편 극영화 <파업(1925)>은 공장을 배경으로 한 노동자들이 집단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이다. ‘군중의 몽타쥬’는 이제 놀라운 시각적 대조와 물리적 영향력을 지닌 쇼트들과 함께 빠르고 리듬감있게 편집되었다. <전함 포템킨(1925)>은 현란스러움을 없애고 풍부한 상상력을 단련시킴으로서 그의 첫작품보다 진보하였다. 이 영화는 꽉짜인 견고한 극적인 방향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작품을 구성하는 다섯 시퀀스는 고전 비극의 일련의 막들이 축적해 가는 힘을 가지고 진행된다.
에이젠슈타인은 언제나 운동성을 통해 작품을 만든다. 그러나 프레임 안에서의 움직임의 양과 편집의 신속함이 부가되기 때문에 카메라의 움직임은 거의 없다. 대신 그의 편집 방법이 요구하는 대로 상당수의 카메라가 다양한 공간에 배치된다. 최고조로 극적인 행동의 순간에는 각 쇼트들의 두 프레임 정도로 짧고 그 내용은 때때로 공포스러울 지경이다.
<10월(1928)>은 그의 가장 뛰어난 성과들 중 어떤 면, 즉 그의 ‘지적 몽타쥬’의 수준에 올라있기는 하지만 너무 스케일이 커서 그 기념비적인 의미가 단지 부분적으로만 이해될 뿐이었다. 이후 그는 내용보다 형식에 집착한다는 이유로 공개적인 수치를 당했으며 자신의 이전 행위들을 비난하도록 내몰린다. 하지만 그가 남긴 엄청난 양의 이론적 글은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여전히 영화 이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독일 표현주의
(German Expressionism)
1. 표현주의의 배경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더 이상 군국주의적인 선전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어진 독일 영화계는 세 가지 유형의 영화 제작에 집중하였다. 하나는 1910년대 초에 나타나 국제적 인기를 모은 장르로서 스파이와 탐정, 이국적 배경을 담은 일련의 모험물들이었고 두번째는 동성애나 매춘 등을 ‘교육적’으로 다룬 영화들,마지막으로 전쟁 전에 만들어졌던 통속적인 이탈리아 역사 서사물들을 모방한 영화들이었다. 이 마지막 유형의 영화들이 UFA(Universum Film A.G : 1917년에 참전 지지 영화를 후원하기 위해 만든 거대 영화사) 에 재정적인 성공을 가져다 주었는데, 1919년 에른스트 루비치의 <도바리 부인>은 독일 영화를 세계 영화 시장에 재등장하게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일부 소규모 영화사들 중 에리히 폼머가 이끄는 <데클라 비오스코프(Decla-Bioscop)>사는 두 젊은 작가 칼 마이어와 한스 노비츠가 가져온 독특한 시나리오를 영화화 하는데, 당시 전위 운동의 하나로 처음 미술에서부터 나타난 ‘표현주의’ 사조를 영화에 도입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이 그것이다. 소액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미국과 프랑스, 그 밖의 나라에서 대대적인 선풍을 일으키면서, 표현주의 양식을 모방한 영화들이 대거 만들어지게 한 표현주의 영화의 효시였다.
표현주의 영화의 성공은 독일의 전위적 작업이 주로 상업 영화계 내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규모 영화사들 뿐만 아니라 UFA와 같은 대회사도 표현주의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것은 이 영화들이 미국 영화들과 경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 독일 영화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영화들로 폭넓게 인정받았다.
2. 표현주의의 경향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표현주의 회화’라고 할 수 있었다. 주로 촬영과 편집에 기반하는 프랑스 인상주의 양식과는 대조적으로 독일 표현주의는 미장센에 크게 의존했다. 표현적 의도에 따라 형태는 비현실적으로 왜곡되고 과장되었으며, 배우는 자주 진한 분장을 하고 갑작스럽게 느리게 또는 불규칙하게 동작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미장센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전체 구성을 위하여 회화적으로 상호작용한다는 것이었다. 인물은 단지 세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시각적 요소를 이룬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에서 표현주의적 양식화는 광인의 왜곡된 시각을 전달해 주는 기능, 즉 주인공의 시각이 투영된 세계를 의미했다. 하지만 표현주의가 하나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자 영화감독들은 표현주의적 양식을 더 이상 광인의 서사적 시점으로서 동기부여를 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1922)>와 같은 공포영화나 공상적인 이야기들, 또는 프리츠 랑의 <니벨룽겐(1924)>같은 대하 서사극에서 양식화된 기능을 하였다. 사실 표현주의 영화에는 세트 디자이너의 영향력이 아주 컸는데, 당시 독일 스튜디오의 디자이너들은 주연배우보다 더 많은 액수의 급료를 받았으며 그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한 독일 표현주의 영화인들의 가장 뛰어난 공헌 중에 하나는 보다 본격적으로 카메라 움직임을 이용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연극적인 동작을 기록하는 객관적 수준에 머물러 있던 카메라는 주관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달리거나 비틀거리고 환각에 의해 어지러워하거나 고통스러워 할 수 있게 해방되었다. 이는 대상을 취급하는 방법에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전에는 결코 다룰 수 없었던 주제나 인물에의 접근을 가능하게 했다.
특수 조명에 대한 공헌도 간과할 수 없다. 첫째 로우 키(low-key) 조명의 새로운 유행을 들 수 있다. 촛불로 밝혀진 방, 어두컴컴한 계단, 밤거리, 캬바레 그리고 독일 영화의 야행성 인간들 등으로 인해 스크린은 갑자기 어두워졌다. 두번째는 키 라이트(key light)의 사용이었다. 키 라이트는 대개 장면 안의 광원으로부터 나타나는 세트상의 가장 밝은 빛인데, 표현주의 영화인들은 한 쇼트 내에서 조명을 덜 받는 것들 가운데 하나의 밝은 부분이 존재하게 되면 그것이 관심의 중심부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또 프레임 전반에 걸쳐 균형잡힌 다양한 조명의 집약이 이루어 진다면 미학적으로 훨씬 더 만족스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스크린 위로 시선을 이끌고, 주요 요소들을 돋보이게 하고 덜 중요한 것들에 의해 강화시켜 주는 질서정연한 구성에 들어맞는 조명 배치를 통해 그것을 만족 시키는 방법을 익혔다.
독일 표현주의가 사라지게 되는 데는 여러가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1920년대 초의 천정부지 인플레로 독일 영화사들은 자국의 영화를 값싸게 다른 나라로 수출함으로서 국외에 표현주의 제작에 실제적인 이득을 가져왔다. 반면 마르크 환율의 폭락은 독일 영화사들로는 외국 상품을 구입하는데 감당하기 어려웠고 자연 수입을 감소시켰다. 그러나 1924년 미국의 다우스 플랜은 독일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고 외국 영화도 빈번하게 들어오게 됨으로서 거의 10년간 독일이 피할 수 있었던 외국 영화와의 경쟁을 불러왔다. 또한 표현주의 영화의 제작비 또한 치솟고 었었는데,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는 엄청난 비용이 든 서사물로서 UFA를 한층 더 재정적인 곤궁에 빠뜨리게 된다.
3. 대표적 감독과 작품들
1) 프리츠 랑
1890-1960.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1921년 <피곤한 죽음>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다. 1922년 초기 걸작 중 하나인 <도박사 마부제 박사 Dr. Mabuseder Spieler>를 만든 이후 미국에서 활동하는데, 1935년부터 <인간 사냥꾼> <교수형 집행관의 죽음> <공포의 성> <망토와 비수> 등의 도시 범죄영화들을 만들었다. <이유 없는 의심>을 끝으로 다시 독일로 갔다가 오리엔탈리즘에 심취하여, 1959년 인도를 배경으로 한 <벵갈의 호랑이> <힌두묘>를 만든다. 1960년 <마부제 박사의 천개의 눈>을 끝으로 감독생활을 마감했다.
2) F.W 무르나우
1888-1931. 1919년 <푸른 옷을 입은 소년>으로 데뷔하여 1922년에는 <노스페라투>를, 1924년에는 <마지막 웃음>을 발표한다. 그 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말년에는 기록 영화 작가인 로버트 플래허티와 <타부('28)> 등을 공동 제작한다. 독일 표현주의부터 시작하여 실내극 영화까지, 독일 초기 영화사의 한 획을 긋고 있는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3) 로베르트 비네
1881-1938. 1912년 코미디 배우로 데뷔하여 베를린의 "레싱 극장"에서 배우, 작가, 연출가로 활동한다. 코미디 영화 <아우 피로몬과 형 리스레(1916)>를 발표하면서 제작자들에게 인정받게 되고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 등의 걸작을 남겼지만, 이후 와 (1923) 등의 작품은 큰 관심을 끌지는 못한다. 주제의 독창성과 배우들에 대한 독특한 연기 지도에도 불구하고 종종 상업적이란 평가를 받았으며, 자신의 성향을 드러낼 수 있었던 독일 영화 전성기에 살다간 풍운아적 인물이다. 1938년 유작 을 남기고 파리에서 사망했다.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
(French Poetic Realism)
1. 시적 리얼리즘의 배경
1930년대에 프랑스의 두 영화 독점사였던 파테와 고몽의 해체는 소규모 독립 영화 제작사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1935년 이후에는 전체 프랑스 영화의 90%를 소규모 독립영화사에서 만들어졌는데, 이는 프랑스 영화 산업에 있어서 행운이었다. 독립 영화 제작자와 감독들은 이 기간에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었고 대영화사의 배급망 뿐 아니라 그들의 스튜디오와 기술까지도 이용할 수 있어 프랑스 영화의 독자적인 미학을 확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독립 영화인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장 비고, 마르셀 까르네, 줄리앙 뒤비비에, 장 르노와르 등을 포함하는 한 집단은 시적 리얼리즘 학파라는 이름으로 묶여진다. 헐리우드 메이저들이 1차 대전후 국제 시장을 완전히 석권한 상황에서 이들은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쇠퇴해가던 프랑스 영화의 국제적 명성을 되살렸다.
또한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은 인민 전선의 부상과 몰락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민 전선은 1936년에 권력을 쥐게 되는 좌익 연합 정당이었다. 낙관적 분위기 속에서 이 정당은 사회적 개혁의 발판으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은 경제적인 문제와 전쟁 위협으로 온전히 수행될 수 없었다. 이 정당은 1000일 동안 권력에 머물렀지만 출범 6개월 후에 이미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개혁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그대로 시적 리얼리즘의 영화에서 재현되었다. 장 르노와르의 <랑쥬씨의 범죄(1935)><인생은 우리에게 달려있다(1936)> 등은 인민 전선에 대한 초기 낙관론이 그려져 있으며 마르셀 까르네의 <안개 낀 부두(1938)><새벽(1939)>과 르노와르의 <게임의 규칙(1939)> 등은 인민 전선의 쇠퇴와 전쟁의 불가피성에서 느끼는 비관적인 경향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2. 시적 리얼리즘의 경향
시적 리얼리즘 영화는 미장센을 강조한다. 실내 장식이나 세팅 그리고 조명에는 치밀한 주의가 기울여졌지만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은 거의 받지 않았다. 시적 리얼리즘은 다큐멘터리식의 사회적 리얼리즘이 아니라 하나의 재창조된 리얼리즘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이 리얼리즘은 스튜디오를 기반으로 하는 매우 양식화한 것이다. 예를 들어 파리의 일부분이 스튜디오 내에서 재창조되는데, 이것은 거의 비현실적인 리얼리즘이다.
미장센을 양식화한 이 리얼리즘은 내러티브 내에서는 시적 상징주의와 조화를 이룬다. 내러티브는 숙명론으로 가득차 있고 일반적으로 남성주인공에게는 불운한 운명이 지어져 있다. 영화의 디제시스는 잘 짜여져서 주인공 분위기에서 파멸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고통을 당하는 남성의 미장센이다. 세팅, 몸짓, 움직임, 유무언의 의사소통 등은 모두 이 파멸의 상징이다. 조명효과도 마찬가지다. 측면 조명은 주인공의 얼굴에, 부분 조명은 그가 자신을 발견하는 공간에서, 그에게 상징적인 가치를 갖는 대상물에는 하이라이트 조명이 사용된다. 특히 여기서 대상물들은 영화에서 그것들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에 대해 주인공이 반응함으로서 그의 파멸 상태를 가늠하게 한다. 이 대상들은 영화 전체를 통해 영향을 주며 상당히 추상적인 상징으로 기능한다.
영화 과정의 모든 측면들이 잘 결합해 이러한 시적 리얼리즘의 분위기를 창조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은 이 영화들이 공동 작업의 결과였다는 점에 있다. 감독뿐만아니라 시나리오 작가도 있었고, 무대 감독, 조명 전문가, 영화 음악을 위한 작곡가도 있었다. 예를 들어 마르셀 까르네는 그의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써준 시인 자끄 프레베르와 함께 일했으며 그의 무대 감독은 알렉산더 트로네르였고 조셉 코스마는 그의 단골 작곡가였다.
3. 대표적 감독과 작품들
1) 장 르노와르
1894-1979. 아버지는 인상파 화가, 형은 배우인 예술가 집안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도시적 문화와 전원의 자유로움 속에서 보냈다. 엑상 프로방스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 공부했으며, 1910년대 후반 채플린과 스트로하임의 영화를 보고 감독이 되기로 결심한다. 영화와 프랑스의 시적 리얼리즘 시대의 화려한 개화에 선도적 역할을 했는데, 프랑스 정신의 인간성과 예술적 기교를 전형화하는데 주력했다. 러시아에서 개발된 몽타쥬 기법을 자기식으로 해석하고 여기에 딥 포커스, 소리와 시각을 일체시키면서 영상의 풍부함을 확대시켰다. <나나(1926)>를 최고작으로 꼽기도 하나 <암캐(1931)>에서 <게임의 규칙(1939)>까지의 30년대 작품들이 대표작으로 이야기 되어진다. 1941년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5편의 작품을 연출했으나 평균작 수준이란 평가를 받았다.
2) 장 비고
1905년 파리 태생으로 복잡한 가정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 보냈는데, 아버지는 호전적인 무정부주의 운동가로 그의 나이 12살 때 감옥에서 사망했고, 어머니는 발작으로 병원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영화 제작 단계에서 장 비고의 재정적 어려움을 가장 많이 도와주었고 그의 모든 작품에서 촬영을 맡은 보리스 카우프만과 함께 <니스에 관하여(1930)> <따리(1931)> <품행제로(1933)> <라따랑뜨(1934)> 단 네 작품을 만들고 1934년 29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개인적 자유에 초점을 맞춘 이들 영화는 시적 리얼리즘의 강렬한 매력을 보여주었다.
3) 마르셀 까르네
마르셀 까르네는 시인이며 시나리오 작가인 자끄 프레베르와 공동으로 그의 걸작들을 만들었다. 그들은 함께 시적 리얼리즘의 전형을 완성하였는데, 숙명적인 사랑의 주제와 꽉 짜인 극적 구조, 그리고 실제 현실 세계를 환기시키는 상징적인 스튜디오 개조물들이 그들의 독특한 미학적 특징을 이루었다. 그들이 만든 2편의 위대한 영화 <안개 낀 부두(1938)><새벽(1939)>은 사회를 향한 어둡고 절망적인 그들의 시각을 일관성있게 보여주고 있다. <새벽>은 노동자층의 권익을 위해 애쓰는 프랑소와즈가 같은 이름을 가진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서 겪는 고통을 묘사하고 있다.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Neo - Realism)
1. 네오 리얼리즘의 배경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는 범죄와 비도덕적인 것이 영화에 담겨서는 안된다는 지침을 내려 놓았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들은 현실과 유리되어 있었으며 오직 이탈리아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웅대한 대하 사극물과 감상적인 상류 계급 멜로 드라마 -후에 ‘백색 전화 영화 white telephone movie’ 라고 불린- 의 제작에 편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면 좋은 현상도 있었는데 그것은 유명한 ‘치네치타 스튜디오’가 설립되고 ‘이탈리아 영화학교’가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훨씬 중요한 것으로 몇몇 영화 감독들이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면에서 파시즘에 대항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네오 리얼리즘의 존재는 이처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처들에 대해 이들 감독들이 느꼈던 불만에도 일정 부분 빚지고 있다. 그래서 루키노 비스콘티의 1942년작 <강박 관념>을 네오 리얼리즘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스콘티도 1930년대 프랑스의 장 르노와르 밑에서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운동의 전조라고 인정되는 영화 <토니(1934)>에서 조감독 생활을 하게 된 좋은 기회가 있었다. <토니>는 프랑스에 사는 이탈리아 이민 노동자가 한 여성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인해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실화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르노와르는 비직업 배우를 고용하고 야외 촬영을 했으며 현장음을 그대로 살려 사운드 트랙으로 삼았다. 영화는 입자가 굵고 사실적이었으며 게다가 현장의 잡음들이 다큐멘터리적 핍진성을 강화했다.
1943년 무렵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은 종말을 맞고 있었고 1944년 연합군이 이탈리아를 점령했다. 파시즘이 몰락하자 노동 계급과 도시인의 궁핍한 삶의 조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들은 현실의 거친 모습들을 담으려고 했고, 관객들의 현실을 통해 관객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원칙들은 영화의 스타일과 내용에도 스며들었으며 사회적 현실, 즉 전후 이탈리아에 만연한 빈곤과 실업에 그 초점은 맞춰졌다.
2. 네오 리얼리즘의 경향
네오 리얼리즘의 토대를 이루는 전제들은 그 운동의 주요한 창안자 중 한 사람일 뿐 아니라 대변인이기도 했던 시나리오 작가 세자르 자바티니에 의해 매우 강력히 주창되었다. 그는 한 유명한 회견에서 네오 리얼리즘의 내용과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네오 리얼리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며 독창성이라면 ‘이야기’의 필연성이 인간의 좌절을 감추는 유일한 무의식적 방법이었다는 것과 그런 종류의 상상력이 단지 생생한 사회적 현실들 위에 생명이 없는 공식을 추가하는 기술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영화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거나 화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해 있는 현실과 실재하는 것을 정확히 있는 그대로 숙고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한다.”
네오 리얼리즘 영화는 먼저 리얼리티를 위해 문학작품의 각색이 아니라 현실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며, 둘째 사회적 현실에 초점을 맞추었고 셋째 이러한 리얼리즘을 확보하기 위해 지방 사투리도 그대로 놓아둘 정도로 대화와 말을 자연스럽게 놓아 두었다. 또한 비직업 배우의 기용과 야외 촬영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위의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영화는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1948)> 밖에 없다.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는 문학 작품을 각색했고 <무방비 도시>는 스타 배우 안나 마냐니를 기용하고 3개의 소형 스튜디오 세트를 사용해 조건을 완벽하게 따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1945년 치네치타는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어 있었고 녹음 기재는 귀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촬영은 실제 장소에 의존했고 그들의 영상은 기록 영화처럼 거칠었다.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 역시 성질이 다른 자투리 필름들로 촬영되었다. 또한 거리나 건물 내에서의 촬영은 이탈리아 촬영 기사들로 하여금 헐리우드 삼점 조명 체계와는 다른 가능한 조명 상황으로 촬영하게 했다. 대사를 후시 녹음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감독들은 소수의 스탭으로 현장 촬영과 카메라 움직임을 사용할 수 있었고, 이러한 현장 작업이 허용하는 연기와 배경에 대한 즉흥적인 결정은 미장센과 카메라 움직임에 어느 정도 자유를 주었다.
내러티브에 있어서도 네오 리얼리즘은 비교적 관습적인 플롯 구성을 거부하고 그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기존의 백색 전화기 영화나 헐리우드의 폐쇄된 내러티브와는 대조적인 열린 성격을 갖게 되었다.
영화 운동으로 볼 때 네오 리얼리즘은 10년을 지속했다. 그러나 네오 리얼리즘 최후의 작품을 데 시카의 <지붕(1956)>으로 꼽는다면 14년으로 늘어난다. 어떤 의미에서 네오 리얼리즘은 1950년대 초 소멸되었다. 전후 이탈리아가 다시 번영을 맞기 시작하자 당시 이탈리아 정부는 이탈리아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작품은 모두 상영이 금지되었고 은행의 대출도 통제했다. 방대한 규모의 영화 제작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제 유명해진 네오 리얼리즘 감독들은 보다 개인적인 관심사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네오 리얼리즘의 소멸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뒤에 유럽, 미국, 인도 등의 영화 제작 관행에 미친 영향력은 압도적이었다.
3. 대표적 감독과 작품들
1) 로베르토 롯셀리니
<무방비 도시>는 1943-4년에 로마 사람들이 겪었던 실제 사건들을 기초로 했다. 이 시기는 연합군 부대가 로마에 입성하기 전이며 여전히 독일의 통제하에 있던 때였다. 롯셀리니는 다양한 원천으로 재원을 끌어모아 비밀리에 영화를 만들었는데, 돈은 계속 부족했고 제작 조건은 믿을 수 없이 원시적이었다. 기술적이고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는 다른 이탈리아 영화 제작자들로 하여금 동시대의 현실을 다루는 그 개념들과 방법을 추구하도록 고무시키는 하나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나타났다.
1934년부터 영화 작업을 해온 롯셀리니는 무솔리니의 정권 아래에서 백색 전화기 영화류의 작품을 만들어 오다가 시나리오 작가인 세르지오 아미다이와 페데리코 펠리니와 함께 혼란스런 이탈리아의 실상을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 한도의 것으로 보여주려고 했고 그 거친 아름다움과 강렬한 정서는 이전의 어떤 것보다 앞서는 것이었다.
롯셀리니는 곧이어 네오 리얼리스트의 양식과 의도를 갖고 있는 다른 주요한 영화인 <전화의 저편(1946)>을 선보였다. 이 영화는 여섯 개의 개별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정복자들과 피정복자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에서 연합군이 취한 군사적 행동을 추적하고 있다. 지도들과 뉴스릴 필름이 부분들을 연결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그 극적인 삽화들이 더 큰 역사적인 맥락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최초의 불신으로부터 점차 친밀한 관계로 진전되는 복잡하고도 가변적인 미국과 이탈리아 관계의 어떤 국면을 스케치하고 있다. 영화 전체는 자발성을 통한 솔직함과 활력을 실현하고 있는데, 롯셀리니의 양식은 제재와 그에 대한 작가로서의 태도를 완전하게 견지해 나가는 것이었다.
2) 비토리오 데 시카
비토리오 데 시카는 감독이 되기 전 1930년대의 유명한 영화 배우였다. 감독으로서 그의 최초 작품은 시나리오 작가 자바티니와의 첫 공동 작업인 <어른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1943)> 였는데, 비스콘티의 <강박관념>과 동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사실주의적인 경향이 어느정도 비교가 될만 하였다.
전후 네오 리얼리즘의 선상에서, 그는 군인들의 구두를 닦고 뚜쟁이질을 하고 암시장에서 물품을 팔며 근근히 생계를 이어나가는 로마 소년들의 이야기인 <구두 닦이(1946)>를 만들었고, 1948년 네오 리얼리즘의 이상에 가장 가깝다고 평해지는 <자전거 도둑>을 내놓는다. 얼마동안 일할 수 있는 최초의 기회를 갖게 된 실업 노동자가 일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전거를 도난당한다. 이야기를 도둑질로 이끌어 가는 사건들과 자전거를 되찾으려는 시도는 영화 속에 함축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비판을 포함하여 완전하고 의미있는 예술작품에 충분한 ‘플롯’을 제공한다. 또한 주인공과 그의 아들이 자전거를 찾는 과정을 추적하는 동안 언뜻 보기에는 우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탈리아 사회의 다양한 측면들이 묘사되는데, 고도의 절제와 능숙함이 화면 속에 분명히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그 착상이 기록영화에서 보여지는 이전의 방법들에 기초하고 있지만, <자전거 도둑>의 정서적인 풍부함은 상당할 정도로 보통 사람과 그의 어린 아들의 묘사에 의존하고 있다.
3) 루키노 비스콘티
루키노 비스콘티의 <강박 관념(1942)>은 <무방비 도시>가 나타나기 전 네오 리얼리즘의 전조라는 것이 인정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그 영화의 주제 내용보다도 의도적으로 단조롭고 매끄럽지 못한 그 자연주의적 양식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1948년 그는 <흔들리는 대지>라는 네오 리얼리즘의 걸작이라고 인정되는 작품을 만들었으나 이 경우에는 주로 양식보다는 오히려 그 제재와 제작 방법에서 네오 리얼리즘적이었다.
<흔들리는 대지>는 독점적인 지배를 행사하는 상인들에 의해 가난에 시달리는 한 시실리 어부 일가에 대한 영화로, 공산당의 후원을 받아 전적으로 현지에서 야외 촬영되고 비직업 배우를 기용하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실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들이 극단적인 양식화의 형식에 기대고 있는데, 어부들은 조심스럽게 장식적으로 모여있고 그들의 움직임은 안무에 따라 이루어진다. 조명은 풍부한 대비로 정교하며 마치 스튜디오에서 찍은 것처럼 조절되고 배치되어 있다. 다른 네오 리얼리스트들의 영화들보다는 그리스 고대 연극에 더 적합할 것 같은 장면들도 보인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였고, 그의 후속 작품에서 볼 수 있듯 ‘바로크식 원근도법’이라고 불리는 것에 더욱 정통하였다.
프랑스 누벨 바그
(Nouvelle Vague)
1. 누벨 바그의 배경
스탠리 카우프만은 프랑스 누벨 바그의 근원을 ‘파리’라는 장소에서 찾으려 했다. 예술가들의 새로운 예술에 대한 대담성의 전통을 150년간 지니고 있었고, 젊은 영화광들에게 과거의 명작들을 보여줌으로써 체계화된 영화사를 제공했던 시네마떼끄가 있었으며, 순수 영화적인 이론이나 미학적 기준을 형성하고 다듬고 고수했던 <까이에 뒤 시네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프랑스 특유의 영화적 전통의 바탕 위에 전후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인식이 첨가되면서 누벨 바그가 탄생할 수 있었던 필연적 요소를 집약시킨 표현으로서 이러한 환경을 통해 자라난 세대가 곧 전후 프랑스 영화 세대였다.
50년대 말 프랑스의 영화 제작자들은 TV 앞에 모여 있는 관객들을 영화관으로 불러들이는데, 끌로드 오땅 라라(Claude Autant Lala)의 영화처럼 많은 돈을 들이는 영화가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런 생각을 두 가지 요소가 더 자극했는데, 그 하나는 지원법(loi d'aide)이다. 이것은 죽어가는 영화 산업을 회생시키기 위해 1948년에 채택된 우수 영화 선정 제도인데, 1955년과 1959년에 개정되었다. 이 법안은 실제로 용기있는 영화 제작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는데, 프랑소와 트뤼포의 단편 <개구장이(1958)>는 500만 프랑의 제작비를 들여 450만 프랑의 상금을 받았으며, 끌로드 샤브롤의 <아름다운 세르쥬(1958)>는 4,600만 프랑 제작비가 들어 3,500만 프랑의 상금을 받았다.
다른 하나는 제작자들이 10대 관객을 확보하기 위해 젊은 감독들을 기용했다는 것이다. 당시 젊은이들은 그들 부모 세대와 반대되는 비상투적인 새로운 영화를 원했다. 이들이 품고 있던 불만은 사춘기와 연관되기도 하지만 또다른 의미에서 지속적이며 치열한 사회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나타내 주기도 한다. 니콜라스 레이의 <이유없는 반항>이나 엘리아 카잔의 <에덴의 동쪽>이 1955년 미국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프랑스 젊은 감독들은 이런 청교도주의와 방종 간의 갈등에는 별 흥미가 없었고 그들 나름대로 대중을 이끌려고 했다.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의 <밀회(1955)>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해 주었는데, 루이 마르꼴레이는 “프랑소와 사강보다 2년 전에 아스트뤽은 부패가 심하고 견고한 기반을 상실한 세계의 공허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젊은이들의 깊은 좌절로 인해 비애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 라고 했다. 게다가 프랑스의 젊은 감독들은 불만에 찬 사춘기의 소년보다는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에 더 이끌렸다. 미국의 젊은 관객이 제임스 딘이나 마릴린 먼로 같이 자기 연민적이고 다소 상처입은 것 같은 배우들을 요구했던 반면 프랑스의 젊은 관객들은 브리짓드 바르도를 요구했다. 로제 바딤의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1956)>에서 그녀는 괴로운 경험 속에서도 상처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프리 섹스의 개념을 실현했다.
누벨 바그는 20년대 독일 표현주의나 2차대전 후 네오 리얼리즘처럼 응집력있는 영화 운동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1954년 1월 <까이에 뒤 시네마>지 31호에 프랑소와 트뤼포의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글이 도화선이 된 것은 분명하다. 그는 먼저 당시의 프랑스 영화가 깐느나 베니스의 입상을 목적으로 한 ‘질의 전통(tradition de la qualite)’에 기대어 심하게 병들어 있음을 지적했다. ‘질의 전통’은 유행처럼 저명한 소설가의 작품들을 영화화하던 경향을 말한다. 이처럼 소설의 각색화로 인한 영화의 제작으로 인해 당시의 감독은 다만 각본화된 시나리오나 촬영대본을 충실히 필름으로 옮기는 기술인, 직업적 고용인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영화에서의 감독의 위치를 재정립하기 위해 ‘작가 주의(politique des auteurs)’을 대두시킨다. 이로써 영화 작가(auteur) 란 촬영 중에 자신의 개성이나 정신 상태를 반영하는 감독으로 확실한 위치를 점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경량의 16mm 동시녹음 카메라와 동시 녹음 장비인 나그라의 개발은 영화의 개인화와 일반화에 크게 기여하여 영화의 주인으로서의 감독 위치를 확고하게 했다.
2. 누벨 바그의 경향
프랑스어인 ‘누벨 바그’는 1950년대 후반 좌파적 성향의 주간지 <렉스플레스(L'express)>의 편집장 프랑소와 지루가 새롭게 떠오르는 청년 계급을 가리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통상적인 관례인 기성 감독 밑에서 수업을 마치지 않은 까이에 그룹의 평론가 출신들(프랑소와 트뤼포, 끌로드 샤브롤, 장 뤽 고다르 등)이 대거 영화 현장으로 진출하면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이른바 ‘청년 영화’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누벨 바그의 기초가 되는 것은 샤르트르와 까뮈의 실존주의 철학인데, 특히 까뮈의 <이방인>은 누벨 바그의 경향과 접근 방식의 원형인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들은 논리도 정의도 질서도 없는 세계 속에서 동기도 불확실하고 방황하는 듯한 행동을 한다. 누벨 바그 영화 역시 잘 짜여진 각본이라기 보다는 무계획성, 자의성 등이 그 특징이다. 엄격한 서술의 제한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은 시간적 순서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감정의 지시에 따른 시간과 공간 구성을 가능케 한다.
이들은 배우들의 즉흥 연기를 장려하고 야외 촬영의 잇점을 이용하고 스튜디오 안에서의 작업에 따르는 제약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작업을 위해 새롭고 가벼운 장비를 사용했다. 미학적으로 누벨 바그는 영상의 새로운 형식, 매우 유연한 영화 문법 -몽타쥬, 촬영기의 움직임, 새로운 연기 지도 등의- 을 만들어 냈다. 일반적으로 누벨 바그의 전형적인 빠른 몽타쥬는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시키고 전통적인 영화에서의 평행적이거나 대위법적인 몽타쥬보다는 훨씬 큰 진실성을 지향하고 있다. 또한 줌(zoom), 스톱 모션, 달리, 긴 패닝, 시간적인 화면 재구성 등은 당시 획기적이고 새로운 영화 문법이었다.
누벨 바그 영화인들에게 있어서 영화는 현실처럼 리얼하지는 않지만 재미있는 훌륭한 어떤 것이라는 명제에 충실하다. 누벨 바그 영화 속에 나타나는 것처럼 영화는 인생을 모방하는 예술이라기 보다는 예술 자체를 모방하는 예술이었다.
파스칼 보니체는 이렇게 쓰고 있다. “누벨 바그는 민첩한 촬영기의 이용에 의해 영화를 거리로 나가게 한 면과 프랑스 영화 제작소의 낡은 미학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어떤 반항이라는 면에 있어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이 반항은 영화의 혁명에 이르지 못했으며 진보적 프랑스 영화에 토대를 제공하지도 못했다. 주제에 있어서도 기존의 영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었고 당대의 절박한 사회적 문제들을 회피하고 있었던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3. 대표적 감독과 작품들
1) 프랑소와 트뤼포
초기 트뤼포 영화들은 영화의 기술적인 면과 인간과의 관계를 자유라는 주요한 예술적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다루었다. 주인공들은 반항자로서 외로워하며 관습적인 사회 규범을 답답하게 느껴 주위와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400번의 구타(1959)>의 주인공 앙뜨완느는 위선적이고 냉담한 어른들에 의해 감옥과 같은 학교로, 학교와 같은 감옥으로 다녀야 했다. <피아니스트를 쏴라(1960)>의 주인공 샤를르 꼬레는 연주회장의 피아니스트가 누릴 수 있는 명성과 행운을 일부러 버리고 작은 술집에서 일한다. 그에게는 그곳이 더 자유롭다. <쥘과 짐(1961)>에서 까뜨린느는 아내, 주부, 어머니라는 모든 사회 규정에 대해 매우 불편해 한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자살한다. 트뤼포의 초기 작품은 시간적 변천의 추이나 감정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과감히 생략했다. 그의 이러한 생략법은 논리적으로 구성된 영화에 부족한 강렬함, 자연스러움, 경쾌함을 부여한다.
또한 그는 스톱 모션이나 슬로우 모션 등의 영화적 형식들을 혼합하기를 좋아했다. <400번의 구타>의 마지막 부분에서 감화원을 빠져나와 바다로 뛰어가는 앙뜨완느의 길고 주관적인 트래킹 쇼트 뒤에 소년의 앞을 응시하는 스톱 모션은 소년의 앞에 놓여있는 불확실한 미래를 의미하는 듯하다. <피아니스트를 쏴라>에서는 대담하게 불쑥 한 장면을 삽입시킨다. 주인공은 “나의 어머니는 급사할 것이다” 라고 저주한다. 그 다음에 난로 옆에 있는 늙은 부인이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으로 뒹구는 장면이 삽입된다. 그는 거기에 어떠한 해석도 주지 않은 채 이야기로 다시 돌아간다.
트뤼포의 초기 흑백영화와 그 후 10년간의 컬러영화는 다른 성격을 띄고 있다. 트뤼포의 컬러 영화는 그가 흑백 영화에서 보여 준 비관주의를 파기하고 인간과 사회 전체, 개인적인 정서와 예술적인 소명 사이의 종합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의 후기 영화의 주제는 교육과 예술에 관한 것이다. 이 두 주제는 그의 초기 영화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의 후기 작품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2) 장 뤽 고다르
트뤼포의 영화가 주제와 기술적인 면에서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 고다르의 영화는 변화가 많고 혼합적이며 다양한 사상과 영화적 법칙을 혼합하는데 있어서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경험을 비논리적이고 불가해한 것으로 본다. <비브르 사 비(1962)>에서의 갑작스럽고 우연한 죽음, <네 멋대로 해라>에서의 우연한 살인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한편 고다르는 브레히트적 장치와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브레히트의 전제는 예술과 인간의 문제는 엄격히 논리적인 것이고 분리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대부분의 영화는 바로 이런 브레히트의 거리두기, 소외의 사상에서 출발하고 있다. <네 멋대로 해라>의 점프 컷과 갑작스러운 장면 전환, <남성, 여성(1966)>에서의 대안적 사운드 사용 등이 그 예이다.
한편으로 그는 비유적이고 은유적인 우화를 즐긴다. 반면에 구체적인 사실과 인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즐기기도 한다. <비브르 사 비>의 매춘부, <중국 여인(1968)>에서 모택동 사상에 심취한 학생들의 연설, <1+1(1969)>에서의 급진적 정치와 민주적 정치에 대한 토론 등이 그것이다.
고다르의 영화적 경향은 1968년 5월 혁명 이후 정치적 개입으로 인해 변화한다. 그는 어떤 예술 작품이나 영화도 어떻게, 왜 만드는 것인가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것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점차로 깨닫기 시작했다. 고다르의 영화에 중요한 영향을 준 것은 제 3세계의 영화들이었다. 이 영화들은 파리 혁명 후 처음 유럽에 나타났는데, 적극적인 정치적 행위를 옹호하고 단결된 노동자 계층의 관중에게 정열적으로 접근하는 이들 영화는 유럽 지식인이었던 고다르에게 충격이었던 것이다.
3) 기타 감독들의 영화에 대해
트뤼포나 고다르 정도는 아니지만 다른 프랑스 감독들도 1960년대 누벨 바그를 장식했다. 알랭 레네는 영화 편집자와 기록 영화의 감독으로 출발했다. 1959년 그의 첫 극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은 섬세하고 세련된 문학성, 복잡한 구성, 시적 언어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는 소설을 각색하여 영화화하지는 않았지만 마그리트 뒤라스, 알랭 로브그리예 등의 작가들에게 그의 영화 시나리오를 부탁했다. 그의 서술구조는 트뤼포나 고다르의 영화에서보다 더 자유롭게 시간과 공간의 점프 컷과 생략으로 진행된다. 레네의 영화에는 삶과 인간에 대해 매우 슬프고 냉담하고 죽음의 기미를 띤 어떤 것들이 내재한다.
끌로드 샤브롤은 <까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가 중 처음으로 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사촌들(1959)><아름다운 여인들(1959)><암사슴(1968)>과 같은 영화들에서 그는 주인공들의 성에 관한 열정과 정교하도록 세밀하고 숨막히는 부르조아 사회의 환경과의 흥미로운 대위법적 긴장을 보여주고 있다.
루이 말은 누벨 바그 감독 중 가장 절충적인 영화 기법을 사용했다. <지하철의 아이들(1960)>은 레이몽 끄노 소설의 문학적, 언어적 익살을 재창조하기 위해 영화적 트릭을 사용한 유쾌하고 비논리적이며 활발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놀라움과 자유, 자연스런 것과 구속받지 않는 것에 대한 찬가이다.
로제 바딤의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는 1959년의 일련의 작품들에 선행하는 것이다. 바딤은 브리짓드 바르도를 스타로 만든 거칠고 노골적으로 성을 묘사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그의 다음 영화들은 지나치게 화려하고 성에 대해 점잖은 척 하며 추파를 던지는 무미한 영화들이었다.
자끄 드미는 <쉘브르의 우산(1963)>에서 진부한 멜로 드라마적인 플롯을 택하여 가능한 모든 기법으로 이 프롯을 꾸몄다. 이 영화에서는 계속 노래가 흐르는데, 가장 평범한 일들조차도 미셀 르그랑의 화려한 음악이 꾸며준다.
드미의 부인인 아그네스 바르다는 전적으로 다른 성격의 감독이다. 그녀는 예술가를 둘러싼 문제와 행복하고도 완전한 삶의 어려움에 대해 탐색하며 따라서 그녀의 작품은 사려깊고 세심하다. <5시부터 7시까지의 끌레오(1962)>와 <행복(1965)>에서 주인공들은 여자이거나 예술가이다. 그리고 그들의 문제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과 타협하는 것이다.
영국 프리 시네마
(Free Cinema)
1. 프리 시네마의 배경
‘프리 시네마’는 린제이 앤더슨이 1956년에 국립 영화 극장에서 상영하기 위해 자신이 기획한 일련의 다큐멘터리들과 단편 영화들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 낸 용어이다. 1956-9년에 여섯 개의 프로그램들이 있었으며, 프랑스와 폴란드 작가의 작품도 포함한 이 영화들을 관통한 기본적인 에토스는 모두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즉, 이것들은 영화 산업 밖에서 만들어졌으며, 동시대를 비판한 이 영화들의 진술이 전적으로 개인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강조했으며 감독들은 그들의 작품에서 표현되는 가치들을 위해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6년은 영국에 있어서 정치, 문화적으로 중요한 해였다. 결국은 실패하고 만 수에즈 운하에 대한 공격으로 대영제국의 오만이 실추되고, 그 결과로 정부조직 전체의 신용이 떨어졌다. 그 체제 안에 존재하는 좌파 노동당 또한 집권 보수 주의자 만큼이나 과실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1956년은 소련의 헝가리 공격 등으로 인해 많은 지식인들이 마침내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낀 해이기도 하다. 부분적으로 이런 사건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신좌파 New Left’라는 젊은 세대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이론과 인민의 삶의 전체적인 질에 영향을 줄 사회의 기본적인 재조직화에 더욱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의 정신으로부터 야기된 다양한 매체를 다루고 있던 예술가들 중 많은 사람들이 노동 계급 출신이었는데, 그들은 계급체계의 고정성과 불평등에 대한 그들의 공격적 태도로 말미암아 ‘성난 젊은이들 Angry Young Men’이라고 불리워 졌다. 존 오스본의 희곡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1956)>가 연극 무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을 시발점으로 같은 시기 연극들은 모두 때때로 귀에 거슬리는 분명한 사회 비평과 하층 계급을 배경으로 하게 되었으며, 또한 이러한 조류는 문학(소설)을 거쳐 드디어 영화에 까지 이르게 된다.
2. 프리 시네마의 경향
프리 시네마는 운동이라기 보다는 영화에서의 하나의 경향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첫째 프리 시네마 프로그램 자체가 국제적이었고 당시 젊은 영화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 가운데서 취사 선택하여 모아진 것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두번째 국가적으로 보아도 프리 시네마 영화들은 소수의 영화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비록 그들이 공통된 이상을 공유하긴 했지만, 소위 이 운동를 창시한 린제이 앤더슨, 카렐 라이츠, 토니 리차든슨의 작품을 제외한 다른 영화인들에게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들이 공유한 생각 가운데 두가지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먼저 다큐멘터리 영화는 모든 상업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둘째 이것들은 더욱 휴머니즘적이고 시적인 접근 방식을 가지고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프리 시네마는 존 그리어슨보다 1930년대 험프리 제닝스의 다큐멘터리 전통으로부터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다큐멘터리와 단편 영화들의 가장 큰 특징은 일상 생활과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그들의 믿음이다. 그들은 특히 노동 계급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프리 시네마의 출현에 관련해서 또하나 중요한 점은 이들이 1946년 앤더슨이 창간한 영화 비평지 <시퀀스>의 필자였다는 것과 이 잡지의 글들로부터 프리 시네마의 기풍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잡지는 영국 다큐멘터리의 순응성과 무감동에 대해, 그리고 장편 영화의 틀에 박힌 양식과 미학적 실험 부재에 대해 비판하였다. 앤더슨과 라이츠는 자신들의 글에서 영화의 내용보다는 스타일을 연구하고 영국 영화가 고전 내러티브 영화에 집착하는 것을 개탄하였다.
앤더슨, 라이츠, 리차든슨 이들 세 작가를 잇는 공통점은 이들의 작품이 개인과 집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과 편집에서 느리고 빠른 리듬의 병치를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재즈가 노동 계급 하위 문화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리드미컬한 편집은 실제로 재즈와 밀접한 함축 관계를 갖고 있었다. 또한 이들을 잇는 또다른 공통점은 그들의 영화 스타일의 연속성이다. 이것은 6편의 프리 시네마 영화 가운데 4편이 카메라맨 월터 러셀리에 의해 촬영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1956년에 상영된 단편영화는 앤더슨의 <오, 꿈의 나라>, 라이츠와 리차든슨이 공동 연출한 <엄마가 허락하지 않아요(1955)>, 로렌자 마제티의 <함께(1956)>였고, 그후 앤더슨의 <크리스마스를 제외한 모든 날(1957)>, 카렐 라이츠의 <램베스의 소년들(1958)>을 끝으로 진정한 의미의 프리 시네마 운동은 단명하게 된다.
하지만 프리 시네마로 비롯된 1950, 60년대 영국 영화는 영국 관객이 처음으로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유럽식의 자유로운 개인 영화를 접할 계기 였을 뿐 아니라 젊은 감독이 영화계에 진출해서 영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 대표적 감독과 작품들
1) 토니 리차든슨
프리 시네마의 중심 인물 중 가장 먼저 장편 영화를 만든 토니 리차든슨은 존 오스본의 희곡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를 1956년에 왕립 극단 공연으로 연출하여 각광받았고, 1959년 동명의 작품을 장편 영화로 만들었다. 이 후에도 리차든슨과 희곡 작가 오스본은 공동으로 우드폴 프로덕션을 세우고, <연예인(1960)> <장거리 주자의 고독(1962)> 등의 사실주의 영화를 여러 편 만들었다.
그의 1961년작 <꿀맛>은 쉘라 델라니가 쓴 희곡으로부터 나왔는데, 복잡한 심리적인 관계들과 중산 계층의 존경할 만한 관습 안에서 존재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한 집단의 성취되지 않은 욕구들을 다루고 있으며, <장거리 주자의 고독>은 범죄에 빠져 감옥에 보내진 한 하층 계급 젊은이의 삶, 좌절된 야먕, 원한을 그리고 있다. 재미있고 상당히 의미있는 리차든슨의 이러한 사회적 사실주의 장편 영화들은 특히 훌륭한 연기에 의해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출발점인 사실주의 영화에서 멀어져 갔는데, <톰 존스(1963)>는 필딩의 18세기 소설에 다소 충실한 작품이다.
2) 카렐 라이츠
단편 영화 제작 시절부터 토니 리차든슨과 주로 같이 작업하던 카렐 라이츠는 사회적 사실주의 장편 영화들 중 단 한 작품만을 감독하였는데, 이 역시 리차든슨의 제작에 힘입어서 였다. 알랜 시리토의 대중 소설을 바탕으로 한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1960)>은 노동 계급의 반란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는 작품으로 기록 영화적인 의도가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데, 그것은 상황에 가해지는 것보다는 오히려 상황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이야기와 납득이 가도록 자연스러운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다. 주로 동료들의 작품을 제작하기만 했던 라이츠는 이 영화의 연출 이후로 사실주의 영화에서 멀어져 갔다.
3) 린제이 앤더슨
린제이 앤더슨은 비록 프리 시네마 집단의 지도자이며 대변인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그들 중 마지막으로 장편 영화에 뛰어들었다. 데이비드 스토리의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그의 첫번째 작품인 <즐거운 인생 This Sporting Life (1963)>은 60년대를 대표하는 사회적 사실주의 영화지만, 한편으로는 주관적 사실주의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67년 작 <하얀 버스>에 이어 <만약 If (1968)>은 공립학교에서 일어난 폭동을 시적이고 폭력적이며 때로는 우습게 다룬 판다지물로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이후 그는 <행복한 인간(1973)> <기념식(1974)> 등의 영화를 만들며 프리 시네마 정신을 시종일관 유지해 나간다.
후기작인 <브리타니아 병원(1982)> <8월의 고래(1987)> 등도 주제와 배경 면에서 다르긴 하지만, 초기 영화들과 같은 사회적인 비판의 충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뉴 저먼 시네마
(New German Cinema)
1. 뉴 저먼 시네마의 배경
나치 정부는 1933년에 권력을 잡은 후 영화 산업을 장악했는데, 나치가 패배하자 그와 함께 독일의 영화 산업도 붕괴하였다. 서방 점령국들(특히 미국)은 엄격한 검열로 독일 영화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미국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커다란 독일 시장을 장악하는 기회로 삼았다. 이로 인해 독일 영화는 자립성을 상실하고 영화 시장에는 저급한 헐리우드 오락 영화가 넘치게 되었다.
1949년 공식적으로 동독과 서독이 나뉘고 나자 서독 정부는 신용 융자를 제공함으로서 영화 제작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였지만, 1950년에서 1956년 사이에 독일(서독)에서는 만들어진 많은 영화는 그리 특별하지 않은 것들이었고 좀처럼 영화 시장은 활성화 되지 않았다. 57년이후 텔레비전과의 경쟁이 증대되자 이 작은 성장 기간마저도 끝이 났고, 1961년 영화 산업은 최저점에 떨어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 영화의 홍수 속에서 자란 일군의 젊은 감독들은 1962년 오버하우젠 영화제에서 “이제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 며 기성감독들이 사용한 제작비의 절반으로 더 좋은 영화를 만들 것을 주장하는 ‘오버하우젠 선언’을 한다. 즉 이제는 1950년대의 전통적인 로망이나 드라마풍을 거부하고 의식적이고 기록영화적인 새로운 스타일을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오버하우젠 선언 후, 정부가 대안적 영화 작업을 지원하도록 설득하기 까지는 얼마 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1964년 젊고 경험없는 감독들에게 무상 융자를 제공하기 위해 ‘청년 독일 영화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이러한 조치는 신독일 영화를 위한 돌파구가 되었다.
드디어 알렉산더 클루게의 첫 장편 <옛 소녀>, 폴커 슐렌도르프의 <젊은 퇴를레스> 등의 많은 중요한 영화들이 개봉된 1966년은 뉴 저먼 시네마의 기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많은 영화들이 주요 영화제에서 수상하였고 다른 나라들도 갑자기 독일에서 무엇인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2. 뉴 저먼 시네마의 경향
뉴 저먼 시네마는 긴밀하게 통일된 운동은 아니었지만, 광범한 형식적 양식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독일어 사용권 국가들의 가까운 과거와 당대 상황들을 탐구하게 되면서 대부분 사회적, 정치적으로 동기 부여되었고 장 뤽 고다르를 위시한 프랑스 누벨 바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들 역시 단편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했고 전세대의 영화를 거부한 데서 그러하다. 하지만 뉴 저먼 시네마 감독들은 영화 형식에 대해 서로 유사한 접근 방식을 취하게끔 이끄는 중심적인 이론적 또는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신 주로 유리한 제작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공통의 필요에 의해 결속되어 있었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1974)>, 알렉산더 클루게의 <강자 페르디낭(1976)>, 그리고 집단 연출 작품인 <가을의 독일(1978)> 등은 각각 인종주의, 파시즘, 그리고 정치적 검열을 포함한 독일 전반의 상황이라는 관점에서 그 당시 독일을 치열하게 들여다 본다.
그리고 일련의 감독들은 극소수의 관객들을 위해 극히 실험적인 작품을 창작했다. 이를테면 베르너 쉬뢰더의 <마리아 말리브란의 죽음>은 유명한 가수의 삶에 대해 오페라풍의 명상을 부여했는데, 양식화된 세트, 의상, 그리고 주위 환경은 표현주의적 전통을 상기시키는 반면 캠프 주변의 분위기는 미국의 독립영화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감각파’라고 일컬어지는 경향도 있는데, 이들은 정치적인 참여로부터 우울하고 시적이며 심지어는 신비스럽기까지 한 영상들을 추구한다. 베르너 헤어조그는 이들 중 핵심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영화들은 독일 낭만주의와 신비스럽고도 압도적인 자연관으로 복귀한다. <아귀레, 신의 분노>에서 헤어조그는 권력을 열망하느라 미쳐버린 영웅적인 탐구자를 제시하고 <카스퍼 하우저의 수수께끼>는 헛간에 묶인 채 생활하는 순진한 젊은이가 주인공이다. 이 두 편의 영화는 관객에게 자연에 대한 황홀경의 탐구를 제시한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많은 뉴 저먼 시네마 감독들은 외국에서 작업하거나 더욱 국제적이고 대중적인 관객을 목표로 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헤어조그는 <노스페라투(1978)>를 미국 20세기 폭스사의 재정 지원을 받아 제작했으며, 미국, 남미, 유럽 등지에서 활동의 폭을 넓혔다. 쉘렌도르프의 <양철북(1979)>은 미국에서 상영된 가장 성공을 거둔 외국 영화 가운데 하나이다. 1982년 이들 중 가장 활동적이었던 파스빈더의 죽음과 그 외 감독들이 여러나라로 분산해 버리면서 뉴 저먼 시네마는 사실상 끝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3. 대표적 감독과 작품들
1)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파스빈더는 쉘렌도르프의 1969년 영화 <바알>에서 조연으로 출연한 배우 겸 감독이다. 유학파와는 달리 독일 안에서만 영화를 공부하고 만들었던 그는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이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처럼 멜로 드라마 형식을 빌어 일반인들이 영화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면서도 사회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이야기해 독일 영화인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파스빈더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언제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으로, 뒷골목 깡패들, 동성애자, 외국인 노동자, 창녀, 노인들이다. 그 주인공들을 나치 시대와 미국 점령기 그리고 1970년대의 독일 사회에서 그려왔다.
그러나 <사계절의 상인(1971)>이후로 그는 고전적 멜러 드라마의 형식과 양식을 수정하는데,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폭스와 그의 친구들>은 현란한 화면구성, 색채 전략, 그리고 비틀리고 비꼬인 플롯과 함께 나오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파스빈더는 양식화와 사실주의의 혼합이 가져오는 것은 어떻게 때때로 권력의 미시정치학에 의해 인간관계들이 결정되는가에 대해 관객으로 하여금 반추하도록 강요한다고 믿었다.
1982년 서른 여덟의 나이로 요절한 파스빈더는 뉴 저먼 시네마 전체를 대표했고, 그의 죽음과 함께 뉴 저먼 시네마는 끝이 났다고 칭송되어 진다.
2) 폴커 쉴렌도르프
독일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킨 사람 중 하나로 1966년에 그의 최초의 장편 영화 <젊은 퇴를레스>를 만들었고, 그 이후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1975)>는 그의 아내 마카레타 폰 트로타와 공동 각색, 연출한 것으로서 도피 중인 한 정치 활동가와 함께 밤을 보내고, 그 결과 당국과 인기있는 언론 기관에 의해 추적을 당함으로써 굴욕감을 맛보아야 하는 한 젊은 여자의 이야기이다. 귄터 그라스의 최초의 소설을 각색하여 만든 <양철북>(1978)은 뉴 저먼 시네마 최고의 국제적인 성공작이다.
3) 빔 벤더스
뉴 저먼 시네마의 마지막 세대로, 로드 무비 3부작인 <도시의 앨리스> <그릇된 행동> <시간의 흐름 속에서>를 통해 서독의 상황을 차갑게 그린 빔 벤더스는 분단, 미국 문화, 도시의 삶 등 심각한 주제를 마치 고행하듯 그려낸다. 그의 대표작인 <베를린 천사의 시>는 독일 통일을 예언한 듯한 작품으로 그의 영화 중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또 다른 로드 무비인 <파리 텍사스>에는 그가 주로 다루는 소재인 현대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잘 나타나 있다. 이후 그는 계속 로드 무드를 통해 '길 위의 방황'으로 여러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브라질 시네마 노보
(Cinema Novo)
1. 시네마 노보의 배경
1950년대 초 브라질의 정치 상황은 1930년대 신국가 체제(Estado Novo, 1937-1945)를 주창하던 바르가스 대통령이 재집권에 성공하여, 민주화가 진행되고 정치 및 문화 활동이 신장되기 시작한다. 이에1952년과 53년 각기 리우 데 자네이루와 상파울로에서 브라질 영화인들은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영화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하는데, 이 회의에는 알렉스 비아니, 로돌프 라니, 도스 산토스 등이 참석했다.
그러나 1954년 바르가스의 갑작스런 자살로 인해 쿠비체크가 정권을 잡게 되는데, 쿠비체크는 전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로 ‘개발 중심의 국가주의’를 주창했다. 하지만 이 이데올로기는 사회, 정치적 통제를 내포한 것이었기 때문에 지식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로써 중산 계급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정치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고 그들의 예술을 브라질 사회의 변혁을 위한 도구로 만들 결심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국가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토론이 모든 집단의 논의 과제였는데, 1955년 시네마 노보의 씨앗이라고 불리는 도스 산토스의 <리우 40도>가 만들어진다. 산토스는 이 영화로 브라질 영화계에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의 기법을 소개했는데, 세계 최대 규모의 마라카나 축구장과 빈민가의 풍경, 관광객이 바라보는 리우시 중심가와 그 이면에 자리잡은 빈민촌 등 이 영화의 주인공은 지금껏 브라질 영화에는 등장한 적이 없었던 ‘브라질 민중의 삶’이었다. 이후 산토스를 위시한 글로베르 로사, 뤼 게라 등에 의해 협의체가 형성되었으며, 시네마 노보라 불린 영화를 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64년 3월 군사 쿠데타는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검열을 강화하는 등 강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 시기 시네마 노보 그룹은 다가올 쿠데타를 예견하지 못한 지식인, 개혁의 과정에 힘을 실어주지 못한 중산층의 이기심과 근시안에 대한 반성으로 인해 그들의 관심사를 지방에서 도시로, 부랑하는 농민이나 도시 빈민에서 중산 계급을 다루게 된다. 1968년에 이르러 군부 독재가 더욱 강화되고 브라질 국민 전체가 신경쇠약에 걸려 있었으며, 고문이 일상화 되었다. 따라서 영화인은 자신의 의견을 곧바로 표현할 수 없게 되었고 점점 그 응집력을 잃어가게 된다.
2. 시네마 노보의 경향
시네마 노보는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도스 산토스의 <리우 40도>의 경우처럼, 물론 픽션이고 가공된 이야기였지만 독립 제작, 비전문 배우의 기용, 스튜디오가 아닌 실제 현장에서의 촬영 등 일상의 생활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 뒤 1960년대에 이 운동은 보다 급진적이었고 영화 협력체가 만들어져, 가난, 굶주림, 폭력의 현대 브라질에 어울리는 혁신적인 미학을 추구했다. 이 운동의 영화인들은 인민주의적이고 혁명적이었다. 인민주의적이었던 것은 이 영화들이 역사와 신화, 그리고 민속 문화와 융합되어 있었기 때문이고, 혁명적이었던 것은 공민권을 박탈당한 사람들과 소작인들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인민주의 적 옹호가 대부분의 브라질 국민들이 처한 가혹한 현실 조건에 대해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무력한 것이라는 것을 이 영화들이 명백히 밝혔기 때문이다.
글라우베르 로샤는 1965년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 공동체 속의 제3세계’라는 심포지움에서 ‘굶주림의 미학’ 이라는 말로 브라질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다른 국가에서의 작업과 어떤 차별성을 갖는 지를 설명했다. 빈곤의 상황을 바라보는 카메라는 처참한 삶의 현장 앞에서 문제를 생각하고 살펴보는 듯 멈추며, 마음보다는 머리로 감성보다는 이성으로 관조하듯이 움직인다. 이렇듯 새로운 미학과 한 대의 카메라를 들고 굶주림의 한가운데에서 일하는 것이 바로 시네마 노보의 정신이었다.
3. 대표적 감독과 작품들
1) 글라우베르 로샤
로샤는 러시아의 에이젠슈타인의 작품과 이론 그리고 표현 방식에 영향을 받은 서사적인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그의 영화는 질적으로 강하고 폭발적인 영향을 일으켰고 따라서 브라질 영화는 그의 작품 이후 변화하게 되었다. <검은 신 하얀 악마(1964)>와 <죽음의 안토니오(1969)>는 브라질 밖으로 가장 널리 배급된 영화들인데, 모두 브라질 북동부의 불모지대를 배경으로 산적 집단에 관한 신화의 근원과 극단적인 가난에서 생겨난 신비스러운 종교를 탐구한다. 특히 <검은 신 하얀 악마>는 극렬한 민족주의와 양식화된 의식의 결합, 폭력과 광란의 표현으로 인해 혼란스런 인상을 주며 우리들 대부분의 문화적 경험에는 완전히 낯선 일종의 야만적인 환각으로 화면을 밝힌다.
<죽음의 안토니오>를 개봉한 후 로샤는 억압적인 정치 상황으로 인해 브라질을 떠나야 했고 1970년대를 외국에서 보냈다. 1976년 귀국한 후 그의 마지막 극영화인 <지구의 나이(1980)>를 남기고 1981년 갑작스레 죽었다. 그는 가장 논쟁적인 시네마 노보의 대변자이자 걸출한 이론가요 실천가로 기억되는 영화 감독이다.
2) 도스 산토스
산토스는1955년 시네마 노보의 효시로 불리우는 <리우 40도>로 브라질 영화계에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을 소개하면서 데뷔했는데, 시네마 노보의 많은 감독들 중 누구도 그의 풍부한 다작 - 총 14편- 을 흉내 낼 수는 없다.
그의 1963년 작 <황폐한 삶(1963)>은 시네마 노보의 여러 걸작 중에서도 손꼽히는 수작으로 브라질 북동부를 배경으로 한 가난한 시골 농민 가족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농지 개혁 문제에 대한 국가적인 논의가 한창 제기되던 때 제작되었는데, 산토스는 심각한 농촌 현실과 문제를 거론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에게 영화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꿈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후 <사랑을 향한 굶주림(1968)>을 만들 즈음 산토스는 초기 언더 그라운드 영화 운동 뿐 아니라 두번째 시기를 맞는 시네마 노보 운동에 대한 고뇌에 찬 자기 반성을 갖게 되고, 1970년대 중반 이후 그는 민중문화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여 <오굼의 부적(1974)><기적의 천막(1977)><길 위의 인생(1980)> 등을 만들었다.
3) 루이 구에라
구에라는1950년 유럽으로 가서 1952-54년 사이에 파리 이덱(IDHEC) 에서 영화를 공부한 유학파이다. 브라질로 돌아온 그는 시네마 노보의 주역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총(1963)>을 완성한 후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하였다.
<총>은 브라질 동북부 지방의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마을 주민들의 보호와 부자들의 식량 창고을 지키기 위해 군대가 파견되고, 그로 인해 마을 사람들과 군인들이 겪는 갈등에 관한 내용이다. 이 영화의 주제는 농부와 파견된 군인들 간의 정치, 경제적인 갈등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군대 내부의 갈등이다. 군대는 농부와 지방의 세력 사이에서 억압적인 중재자 역할을 하는데, 결국에는 그들의 대립을 격화시키고 만다. 이 영화는 그 형식에 있어서도 분절적이다. 가뭄과 빈곤의 농촌 풍경은 농부의 숙명론과 수동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반면에 군인은 동적이고 복잡한 현대 사회를 대표하고 있다.
그는 1967년 다시 유럽으로 가 <달콤한 사냥꾼>을 만들었고 1975년 모잠비크 독립을 축하하기 위해 고향에 들른 후 <가을(1975)>로 다시 한번 은곰상을 받았다. 79년 모잠비크 최초의 극영화이며 모잠비크 해방을 다룬 <학살에 관한 기억>을 만들었다. 브라질로 돌아온 그는 극작가와 작사가, 배우도 겸해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아귀레, 신의 분노>에 출연하기도 했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
(New American Cinema)
1.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배경
1960년대 미국은 연좌 데모와 시위, 행진, 폭동 등에 의한 시민권 운동과 학생 파업, 참가 거부 등에 의한 베트남전 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저항 운동과 함께 소위 청년 문화라고 불리우는 것이 생겨났는데,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물질 축적만을 추구하고 서로의 관계에 있어서 정직과 예의가 결핍되어 있는 그들 부모 세대들과 획일화된 교육 체계, 거대 산업과 공모된 정부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 속에서의 무관심, 자기 만족, 순응주의 등 너무도 배타적인 관심 영역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들은 머리를 기르고 성의 구별이 모호한 -과거의 전통과는 다른- 옷을 걸침으로써 자기들의 단결을 표시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사회로부터 일탈하여 마약이나 히피 문화에 빠져들어가기도 했다. 또한 그들이 부도덕한 전쟁이라고 여기는 것에 미국인을 개입시키고, 미국 내의 빈곤과 불공평, 인종 차별을 방관하도록 한 정치-경제 구조를 활발히 공격하였다.
이 시기의 정신은 ‘청년 영화 youth films’ 혹은 ‘현재 영화 now film’ 라 불리우는 영화들 속에 반영되었으며, 저항 운동의 열기가 줄어들기 전까지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그 영화들은 구세대와 갈등하는 젊은이와 그들의 새로운 생활 방식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이제 극장의 주요 단골 손님이 된 청년 관객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때로 그것은 젊은 영화감독들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들은 모두 어떤 방법으로든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탐구하였고, 몇몇은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또 외국에서 들어오는 당시의 영화들처럼 여러가지 형식을 -전통적 허구 양식과 함께 기록 영화나 실험적 양식이나 주제 등을- 결합시켰다.
이러한 흐름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1967, 아서 펜)> <졸업 (1967, 마이크 니콜스)> <이지라이더 (1969, 데니스 호퍼)>의 공개와 함께 ‘뉴 아메리칸 시네마’ 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2.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경향
이들은 영화를 오락을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객들에게 자극을 주고 생각하게 하며 심지어는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본 것에 혐오감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청소년 비행 문제, 항의 데모, 마약 문제, 시민의 권리 투쟁, 경찰의 잔학성과 편협성 등과 함께 빈민가를 완벽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그들은 또한 현대 세계의 혼란상을 포착하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많은 영화들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했다든가, 극단적인 편견과 객관성의 부족으로 결함이 많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한 영화들은 전통적 가치를 공격하는 한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내용이 기괴하고 대담하고 통렬할수록 흥행 수익은 더욱 높아졌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젊은이들이 미국의 영화를 좌우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감독들과 제작자들 조차 젊은 세대층이었으며, 그들은 노골적인 언어와 나체의 묘사, 그리고 생생한 성 행위를 묘사하는 대담한 이야기를 선택하고 또 그러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많은 당대의 감독들이 표현하는 주제들은 복잡한 것이었으며, 그들이 야기한 의문점들은 항상 심오한 것들이었다. 이 시기의 주요 작품들 중에서 하나의 특징있는 주제나 중심적인 것을 정확하게 지적하기는 어렵다. 1960년대의 영화들은 그 당시의 모든 면을 반영하고 의문시했던 것들이었다. <불리트(1969)><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야생화(1969)> 같은 영화들은 폭력에 대한 인간의 냉담함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 다른 영화들은 금지된 사랑의 영역을 우선적으로 다루기도 했는데, <조지 수녀의 살인(1968, 로버트 올드리치)> <하사관(1969)> <계단(1970)>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아서 펜의 <앨리스의 식당(1969)>, 마이크 니콜스의 <졸업(1968)> 등은 그 시대의 대표적인 문제였던 세대 간의 차이를 다루었다. <푸트니 스우프(1969)>와 <미디엄 쿨(1969)>은 가족과 사회 간의 불화합을 파헤쳤으며, 특히 <미디엄 쿨>은 자치 문제에 대한 논쟁을 다루었다.
특히 <이지라이더>는 18세부터 25세 젊은 관객들에게 선호의 대상이 되었는데, 당시의 유행가 가사에 나타난 것과 같이, ‘미국을 찾아서’ 마리화나와 환각에 젖어 오토바이를 타는 두 명의 젊은이는 청년 문화의 우상으로 여겨졌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보니와 클라이드처럼 빌리와 캡틴 아메리카는 고지식한 사람들과 남부의 촌놈들에 의해 죽는다. <이지라이더>는 그와 관련된 주제를 다룬 장편 영화들을 많이 만들게 하였으며, 그들 중 일부는 당대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에 대한 비판에 있어 훤씬 간접적이었다.
3. 대표적 감독과 작품들
1) 아서 펜
1922년 필라델피아 태생으로 TV 코미디와 쇼 프로를 통해 경력을 쌓았고 이후 1958년 <왼손잡이 건맨>으로 데뷔했다. 1967년에 만든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흔히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포문을 연 작품으로 말해지지만, 아서 펜의 의도가 그렇게 새로웠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영화들은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잘 짚어내는 '해부적인 시각'으로 유명하다. 그는 폭력과 권력, 권위의 문제에 집착하는 감독이며, 비교적 건강한 권위를 표현한 <추적(1966)>, 권위에 대한 일그러진 상(象)인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그리고 <작은 거인(1970)>이나 <표적>에서 보여지는 합법적 폭력들은 그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케 한다. 그에 대한 비판은 그가 해부에만 관심이 있을 뿐 아무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지만, 대안 제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닌 듯하다.
2) 데니스 호퍼
1936년 캔자스 주 다지 시티 태생으로 12세부터 아역 배우로 활동했다. 또한 <이유 없는 반항(1955)> <블루 벨벳(1986)> <워터 월드(1995)> 등 모두 74편의 영화에 출연한 악역 전문 배우로 유명하다. 한편 그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1967)>의 아서 펜과 <졸업(1967)>의 마이크 니콜스 감독과 함께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꼽힌다. 1969년에 40만 달러를 들여 만든 <이지 라이더>로 깐느 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고, 제작비의 40배인 16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두었다. <라스트 무비(1971)> <칼러스(1988)> <체이서(1994)>등 모두 7편의 영화를 감독했다.
홍콩 뉴 웨이브
1. 홍콩 뉴 웨이브의 배경
1970년대의 홍콩 영화는 추문회의 골든 하베스트(Golden Harvest)사가 등장하면서 새롭게 시작된다. 당시 쇼 브라더스는 삼류 폭력 영화와 외설 영화 등을 제작하며 거대한 신체를 가누지 못하고 있었는데, 막후 참모였던 추문회가 런런쇼와 심한 견해 차이를 견디다 못해 따로 독립해 골든 하베스트사를 차린 것이었다. 이 때부터 홍콩 영화는 상업적으로 크게 변모하면서 세계시장으로 나가는 길이 열리는데, 그것은 홍콩 영화의 중요한 시장 정책의 하나인 스타 시스템을 통해서 였다. 이소룡을 내세운 <당산대형(1971)> <정무문(1972)> <용쟁호투(1973)> 등은 일본,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각국에 신드롬을 일으키며 본격 쿵후 영화의 시대를 열었고 거대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1973년 이소룡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쿵후 영화의 붐은 급속도로 식어버린다.
1972-74년에 걸친 홍콩 사회는 대형 뇌물 사건으로 인한 경제 불안과 기존 정부에 대한 불신 풍조 등으로 몹시 불안한 사회였다. 이러한 불안한 사회 위기와 맞물려 허관문의 코미디 영화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는데, 소시민의 모습으로 일종의 사회적 무정부주의 웃음을 보인 <귀마쌍성(1975)> <매신계(1978)> 등이 그 대표작이다. 허관문의 코미디 영화는 무엇보다 홍콩 사회의 자화상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70년대 후반에 이르면 성룡과 홍금보 등 우스꽝스럽고 괴이한 쿵후 코미디 영화 - <취권(1978)> <소권괴초(1979)> 등- 가 등장해 관심을 끈다. 하지만 이러한 코미디 시리즈들은 인기에 편승한 수많은 모작을 탄생시키면서 그 세력을 잃어가는데, 초반의 신선함이 사라지고 어수선하고 소란스런 분위기로 가면서 코믹 쿵후물 자체가 홍콩 영화의 주류로서의 자리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단순한 오락물로서의 코미디 영화들이 사라지면서 홍콩 영상 문화에 커다란 지각변동 분위기가 일어난다. 그것은 TV 쪽에서 먼저 시작됐는데, 이른바 ‘홍콩 뉴 웨이브’라고 일컬어지는 30대 초반의 젊은 감독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4,50년대 홍콩에서 출생하여 어려운 홍콩의 60년대를 겪으면서 성장했으며 외국에서 체계적으로 영화 공부를 하고 돌아온 해외 유학파들이었다. 먼저 TV로 입문한 이들은 서구의 영화 이론과 작품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고 더욱 진지한 자세로 자신의 작품에 몰입해 갔다. 정확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그들의 세계관은 실험적인 기술의 시도와 세련되게 다듬어진 세밀한 시각적인 요소의 활용을 통해서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 졌다. 그러나 계속될 줄 알았던 홍콩 TV의 황금기는 갑작스럽게 종결되고 많은 스탭들이 TV를 떠나 영화로 한꺼번에 흘러들었다. 이로써 홍콩 영화는 과거의 구습을 타파하고 기존의 가치들에 도전하며 새로운 형태를 띄게 된다.
2. 홍콩 뉴 웨이브의 경향
홍콩 뉴 웨이브 감독들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전통과의 결별이다. 이들은 이전 세대 감독들과는 달리 홍콩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홍콩식 교육을 받은 홍콩인들이었다. 이전에 등장한 감독들은 대부분 대륙 출신, 특히 상하이 영화 산업에서 일하다가 홍콩으로 넘어온 사람들이라 항상 대륙에 대한 향수나 미련이 영화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뉴 웨이브 감독들은 이전과는 다른 의식이나 경험, 기억을 가지고 그것을 영화에 투사했다. 그들은 서구에서 영화교육을 받아 미학적인 영역에서 좀더 서구화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홍콩인의 관점으로 문제와 사회적 쟁점을 보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전 감독들이 보여준 중국 문화가 아니라 홍콩 문화가 그들의 준거틀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단순히 대중적인 문화에 토대를 두는 것이 아니라 전통 속에 존재하는 홍콩 무산 계급의 미학을 반영했으며 문화 자체를 변화시키려 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나타난 몇가지 대표적인 변화를 살펴보면, 첫째 영화의 미학적인 면에서 홍콩의 현실인식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감으로서 광동어 영화가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는 점, 둘째 작품성이 높아졌으며 작업과정 전반에서 기술 스탭들이 더욱 분업화되고 그 중요성이 인식되었다는 점, 셋째 산업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관념이 구체화되고 마케팅 개념이 바뀜으로서 몇 십년동안 홍콩 영화시장을 양분해 오던 쇼 브라더스와 골든 하베스트가 위협을 느낄 정도로 독립 프로덕션의 성장세가 확연해 졌다는 점 등이다.
하지만 홍콩 뉴 웨이브는 젊은 세대들의 높은 창작 열기와 기술적인 부분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기는 하였지만, 상업적 압력과 영화 산업에 대한 기업적인 인식으로 인해 문화 운동의 기틀을 확고히 마련하지는 못했다. 또한 뚜렷한 역사의식과 문화적인 깊이가 있는 영화들을 만들지 못했고, 그래서 새로운 문화 운동으로 발전하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홍콩 뉴 웨이브의 자극은 기존의 오락만을 지향하던 성향을 변화시켜 예술 영화를 고집하는 감독들의 등장을 부추겼으며 다양한 특징들의 감독을 낳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다양한 감독들의 존재로 인해 1997년 중국 반환 전까지 급속한 발전과 활발하고 자유로운 창작 분위기를 가질 수 있었다.
3. 대표적 감독과 작품들
1) 허 안화
허안화는 <풍겁(1979)>으로 영화에 데뷔했는데, 어떤 ‘망령’을 주제로 한 이 영화를 통해 점프 컷과 미장센, 절묘한 스토리 텔링을 사용함으로서 다이나믹한 심리 묘사를 보여주었다. 이후 광동 오페라단의 귀신 소동을 그린 <당도정(1980)> , 이국의 위험한 상황 아래서 살아가야 하는 두 베트남계 중국인의 이야기를 그린 <호월적고사(1981)> <투분노해(1982)> <객도추한(1990)> 등 대표작들을 만든다.
<풍겁>과 <당도정>이 현대 홍콩과 과거 중국의 비교 속에서 오늘 홍콩의 주체성을 묻고 있다면, <호월적고사>와 <투분노해>는 무대를 베트남으로 옮겨 패망한 베트남의 운명과 1997년 이후 다가올 홍콩의 미래를 비교하면서 홍콩의 시대 정신을 담고자 했다.
허안화는 홍콩이라는 상업 장르의 영화 생산지에서 ‘작품’을 했다는 것으로 홍콩 뉴 웨이브의 대표자로 인식되고 있다.
2) 방 육평
방육평은 홍콩 영화 산업 속에서 장르 영화에 대항해 유일하게 리얼리즘 영화를 고집하는 홍콩 뉴 웨이브 중에서도 특별한 감독이었다. RTHK 방송국 시절부터 리얼리즘 영화를 만들었던 방육평은 1981년에 진검의 영화인 <부자정>을 리바이벌하여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아버지를 그린 영화를 만들었다. 이 우울한 홈 드라마에서 그는 홍콩이 산업화되어 가면서 힘을 잃어가는 ‘가부장의 권위’를 눈물겨운 사정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는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다루면서 사실성을 위해 배우 아닌 실제 인물들을 기용한 <반변인(1983)>을 만들어 리얼리즘 영화를 추구하였다. 이후 다큐 드라마 형식을 띤 <미국심(1986)> <무우(1990)> 등을 통해 49년 이후 홍콩의 사회문제, 이민, 산업화, 가부장제의 붕괴, 신세대의 고민과 갈등의 진솔한 파노라마를 담아냈다.
3) 서 극
홍콩을 하나의 미스테릭한 유령도시로 생각하는 서극은 스튜디오에 인공물들을 세워놓고 그 ‘거짓’ 속에서 홍콩의 소우주를 찾으려는 노력을 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신경질적인 긴장감과 아나키스트적인 도덕관이 주를 이루는데, <접변(1979)> <제일유형위험(1980)><도마단(1981)> 등의 작품은 주인공이 아무런 이유없이 사건에 휘말리는 모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1983년 그는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 SFX 팀을 초청, 옛 중국 이야기에 테크놀로지를 결합시킨 환상적인 SF검술영화 <촉산>을 만들었으나 외국에서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홍콩 내에서 철저하게 외면 당했다. 그는 한계를 느꼈고 그 부담은 ‘상업적인 예술영화’보다 ‘진짜 상업 영화’ 를 만들어야 하는 위기로 다가왔다. 결국 그는 과거의 심각했던 작품 분위기와 달리 오락적이며 재미 위주의 경향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그는 홍콩 영화에 SFX를 본격 도입했으며, 홍콩 느와르를 만들어 냈고, 검술 영화를 부활시켰으며, 헐리우드 뮤지컬을 북경 오페라와 접합시키는 등 홍콩 영화 시스템을 바꿔놓은 개척자로 기억되고 있다.
중국 제5세대
1. 중국 제5세대의 배경
1965년 11월 문예 비평가 야오 웬웨인이 사회학자이며 경극 작가 우한이 쓴 <해서파관(海瑞罷官)>에 대하여 문예지 <문회보>에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라는 비평을 게재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중국 대륙은 “문화혁명”이라는 전례없는 회오리 바람 속에 휘말리게 된다. <해서파관>은 처음에는 그저 하나의 공연일 뿐이었으나 그 내용은 황제를 마오 쩌뚱으로, 해서를 펑 더화이로 바꾸어 볼 수 있는 풍자적 정치성이 있었다. 그러자 당시 등 샤오핑에게 권력을 양도하고 물러나 있던 마오 쩌뚱에게 지앙킹, 캉성 등이 이를 정치 문제시 하도록 호소하고, 군 중앙지 <해방군보>와 당기관지 <인민일보>에 이 문제를 게재하면서 확대시킨다. 이어 당 핵심인물들을 반사회주의자로 규탄하는 학생시위가 터지고 유혈 충돌이 발생하면서 결국 당정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고 극도의 혼란, 불안, 무질서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이에 마오 쩌뚱은 군의 개입을 결정하고 공산당 내의 반대파들을 숙청, 살해했으며, ‘인민으로부터 배운다’는 기치 아래 청소년들을 농촌과 공장으로 보내게 된다. 마오 쩌뚱 일가의 정권 회복 운동이며 청소년을 선동한 정풍 운동의 모양을 띄었던 이 “문화대혁명”은 혁명이념파의 이러한 외면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불신과 불안, 비탄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영화는 사상 유례없이 위축된다. 당시 모든 가치관의 척도가 되던 마오이즘에서 벗어나는 가치들은 일제히 ‘적’으로 간주되고 과거의 모든 영화는 비판되었다. 이 시기 영화들의 내러티브 구조는 참과 거짓, 생산과 파괴, 문화와 원시 등의 이항대립적인 단순도식의 틀을 가졌고 이로서 결국 영화는 리얼리즘의 본 궤도에서 벗어나 형식주의, 단순주의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파쇼적 상황하에서 새로운 영화 제작자들은 문화혁명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기존 영화에 대해 비판적 관심으로 반기를 들어야 했고 예술에 정치 권력이 간섭함으로서 중국영화는 그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맞게 된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살벌한 폐허 위에서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학생과 시민들은 결국 1976년 4월5일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를 일으켰고 같은 해 마오 쩌뚱의 사망은 중국에 있어 새로운 역사의 장을 마련하였다. 사실 10년간의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중국의 사회문화계는 말 그대로 초토화 상태였다. 영화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영화인들이 군대와 농촌으로 쫓겨나 있었고 그동안 제작된 영화도 연간7-8편의 마오 쩌뚱 사상을 선전하는 획일화된 영화가 전부였던 것이다. 문화혁명이 끝난 후 자유화 물결은 여러 분야에서 문혁을 청산하려는 움직임으로 구체화 되었다. 그동안 금지되었던 많은 영화들이 해금, 복권되었고, 1966년부터 1978년까지 문을 닫았던 베이징 영화 아카데미도 다시 수업을 재개하였으며, 문화혁명기에 현장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던 20대 초반의 학생들을 받아들여 전문적인 영화 인력의 충원을 시작했고 그동안 영화를 만들 수 없었던 30대 전후의 젊은이들이 대거 영화 산업에 유입되었다. 바로 이들, 문화혁명 기간 동안 청소년기를 보내고 문혁 이후 영화공부를 한 1982년 베이징 영화 아카데미의 졸업생들이 바로 제 5세대의 근간을 이룬다.
2. 중국 제5세대의 경향
중국 제5세대 역시 과거 선배들의 영화관을 파괴하면서 등장했다. “영화는 젊은이의 예술이다. 영화에는 창조적인 힘이 필요하고 항상 새롭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장 예모의 말은 이들 제5세대의 영화관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데, 이들은 전통을 답습하지 않고 역사, 현실, 인생에 대한 예술가의 진지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과 이성에 대한 재발견의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부조리에 처한 인간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예술의 현대성을 추구했으며 영화 자체의 표현 방법을 개척하고 양식의 독자성을 추구했다.
사실 제5세대 영화의 공통적인 특징을 한마디로 말한다는 것은 어렵다. 이들의 영화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이전 세대와는 다른 ‘다양성’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공통된 기본요소를 지니고 있다. 문화혁명 중에 하방(下放)되어 10년간 농촌이나 군대에서 노동을 했으며 문혁으로 비롯된 중국 현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특이한 경력의 세대인 것이다.
이들 제5세대의 사상적, 내용적 특징에 대해 영화 감독 우쯔녀우는 “첫째 제 5세대 영화는 국가보다 인민에 관심이 더 크고, 둘째 현재 생활의 리얼리티보다 민족 문화에 관심이 더 많으며, 셋째 사회비판이나 정치 문제 등 민감한 부분에 대한 언급을 가급적 피하고 운명, 종교 등 삶의 진실에 더 치중하고, 넷째 시청각 요소의 표현 영역에 더 관심을 가진다”고 요약하고 있다.
제 5세대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새로운 영상 언어의 형식적 특성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줄거리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 이전 세대의 작품들에서는 스토리가 가장 중시되었다. 사건의 인과 관계 및 등장인물의 운명은 영화의 플롯 속에 적절히 적절히 배치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 5세대는 당시 중국 관객들에게 익숙했던 전통적 스타일에서 벗어나 이전까지의 중국 영화들과는 판이한 시각으로 다루었다. 예를 들어 첸 카이거의 <황토지(1984)>나 <해자왕(1987)> 등의 스토리를 기술하는 것는 어려운 일이다. 또한 스토리가 있다해도 그 스토리 자체는 영화 사상을 표현하는데 중요한 요건이 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찾아볼 수 있는 형식적 특성은 쇼트와 쇼트의 연결에 있어 기교가 없다는 점과 불균형한 화면구성이다. 즉 제 5세대 감독들은 시간, 공간과 사건의 관련성을 유지하기 위해 화면과 화면을 조합하는 일이 적으며 구도에 있어서도 파격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장 준자오의 <하나와 여덟>은 바로 이 화면의 균형을 깨뜨린 구도와 조형에 의해서 주목을 받게 된 작품이기도 한데, 이 영화는 이러한 화면의 조형에 의해 비틀리고 억압된 인간의 내면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광선과 색채의 사용에 있어서도 그들은 독특한 방법을 사용한다. 제 5세대의 감독들은 영화의 구성요소로서의 색채에 관해 깊이 고려하고 있다. <황토지>의 황갈색, 황지엔신의 <흑포사건>의 붉은 색과 흰색, 장예모의 <붉은 수수밭>의 붉은 색 등은 영화 자체 내에서 모티브를 한층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를 내며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제 5세대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특징들은 종전의 중국영화에서 놓쳤던 주제와 그것의 접근 방법을 신중히 찾으려는 노력이며, 이는 헐리우드와 소련의 영향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유롭고 독특한 영화에 대한 욕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5세대들은 찬사와 함께 여전히 한편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제5세대가 비판을 받는 부분은 동시대의 삶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을 끊임없이 억누르고 있는 문화혁명의 그림자를 지나치게 의식하면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 그 비판의 원인이다. 하지만 이들 제5세대가 사상의 자유로운 해방으로 인간성의 가치를 회복하고 영화를 정치적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그들의 전통에서 찾은 독특한 영상 미학으로 영상예술의 본질적 측면을 탐구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제5세대가 그들의 영화 속에서 이루어낸 커다란 성과인 것이다.
3. 대표적 감독과 작품들
1) 첸 카이거
첸 카이거는 중국의 역사와 개인의 삶을 대비 또는 투영하면서 중국인의 과거와 현재를 다각도로 조명하며 특히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표현하면서 우화적, 직관적, 철학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스스로가 중국인이기에 중국의 전통을 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여러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문화 혁명과 현재의 개방 정책에 이르는 자신의 경험들을 특정의 이데올로기로 구속지우려 하지 않는다. 그는 상징을 이용해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있지만, 단지 그가 경험한 시대적 변화를 영화 속에 진실하게 담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의 초기작품 <황토지><대열병><해자왕>이 자신의 실체험을 근거로 한 지난 과거에 대한 반성을 뜻하는 작품이었다면 4년여의 공백 기간을 가진 이후의 작품인 <현 위의 인생>이나 <패왕별희>는 현재의 보편적 중국인에 대한 잊혀지고 지워져 버린 주체성 회복을 위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표현에 있어서 과거의 상징은 극의 구조에 더욱 의존한다.
2) 장 예모
<황토지> <대열병> <노정> 등 대표적인 제5세대 영화들에서 촬영감독을 맡아 충격적인 영상미학을 보여주었던 장예모는 <붉은 수수밭>으로 감독에 데뷔했다. 그는 특히 인간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분출하며 여성의 심리 묘사에 탁월하다. 여성에 대한 관점은 제5세대 중 장예모가 가장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여성 이미지는 힘있고 독자적이고 강한 존재로 부각된다. 그의 영상은 강렬한 색채와 자연광 사용으로 뛰어난 사실성과 극적 효과를 주며 제5세대 중 가장 유머감각이 뛰어난 사실적 이야기 구성을 보여준다. <국두> <홍등> <귀주이야기> 등 장예모 작품의 내러티브 구조는 중국적이기 보다는 서구적 취향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3) 티엔 주앙주앙
티엔 주앙주앙은 82년 졸업 후 <홍가(紅家)> <9월> 등의 작품을 공동 연출하고 독립 연출 첫 작품인 <사냥터에서>를 발표하여 대담한 다큐멘터리 기법의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요리스 이벤스에게 절찬을 받았다. 역시 다큐멘터리 기법의 <말도둑>은 티벳 사람들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그려 인류학적 보고서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의 작품 중에 가장 주목을 받은 <푸른 연>은 관찰자적인 구성과 유머, 아이러니 등으로 중국역사를 담담하게 그려냈다. 인간의 내면, 인간의 정신 세계에 특히 관심을 둔 그의 영화들은 제5세대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파격적인 내용적 특징을 갖는다.
대만 뉴 웨이브
1. 대만 뉴 웨이브의 배경
1970년대에 대만도 급속한 경제 성장을 보이는데,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 후 대만 정부는 다른 여타 예술 장르와 더불어 영화에도 다양한 투자를 실시한다. 1978년 경부터 시네마떼끄와 유사한 영화 도서관의 설립, 금마장 영화제를 통한 영화인들간의 경쟁의식 조성 및 관객에 대한 다양한 영화 소개, 정부에서 합작 투자한 영화사를 통한 제작비 지원, 좋은 영화 장려 제도 등이 정부에서 실시한 주요한 사업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시적인 투자보다도 가장 중요한 개혁 의지는 영화 검열법의 실질적인 폐지와 다름없는 검열의 대폭적인 완화에 있다. 우리나라의 문화관광부에 해당하는 신문국에 장송츄가 국장으로 취임하면서 검열제도를 상당히 완화하며 구 영화검열법의 폐지에 가까운 조치를 취하였다. 이전의 검열법 하에서는 공무원들만이 검열에 참석했으나 두 사람의 민간인이 참석하여 과거의 권위적인 검열에서 상당히 자유롭고 느슨한 명목상의 검열만이 실시되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영화진흥공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중앙전영공사가 이 무렵에 창설되었는데, 여기서 기획실을 맡고 있던 우니엔쩐 같은 이는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 작업을 겸하면서 신인감독들이 작품을 연출할 기회를 계속해서 제공했다. 에드워드 양이나 코이첸 같은 해외 유학파는 물론 국내에서 계속 영화 작업을 하고 있던 후 샤오시엔이나 천 쿤호우 등의 재능을 인정하고 다양한 영화 창작의 여건을 만듦으로서 다양한 관객층의 요구를 수용하고 대만 뉴 웨이브가 자리매김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인해 국내의 문제들은 산재해 있었는데, 전통적인 가치관의 몰락이라든가 산업화 과정 속에서 발생한 인간의 소외 의식 등이 전반적인 문제점으로 남아있었다. 따라서 영화 감독들은 국내의 문제점들과 현실적인 부분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경제 발전 과정 속에서 발생한 과도기적 상태의 문제에 접근하는 현실 인식의 작품들이 다양하게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만 특유의 사회적 현실들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젊은 감독들에 의한,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 인간성 회복을 지향하는 작품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2. 대만 뉴 웨이브의 경향
대만의 첫 뉴웨이브 영화는 1982년에 제작된 옴니버스 영화 <광음적고사>이다. 에드워드 양, 타도우첸, 추안잉, 코이첸 4명의 신인 감독이 각 에피소드별로 연출한 이 작품은 신문이나 방송매체들이 새로운 영화라는 평가를 내렸고, 평론가들도 동시에 찬사를 던졌으며 관객들의 호응도 좋아 흥행면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다른 나라의 영화 산업이 분업화가 제대로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대만에서의 영화 상황은 특이할 정도로 초보적이고 단순한 형태를 띄고 있었다. 직업적인 배우조차도 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으며 국내에서의 영화 제작 자체가 산업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절대적인 영화인력의 부족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따라서 제작자, 기획자, 시나리오 작가, 감독, 평론가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호 공존체계와 단결, 상호 공존의 사고가 발생했는데, 서로 동료 감독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기도 하고 실제 소설가나 신문기자를 영화 속에 같은 직업으로 등장시키는 경우도 허다해했다.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의 상호 공존의 사고는 상호간에 자극을 주며 역동적인 현상을 일으켜 대만 영화가 현재에 안위하지 않고 발전적인 힘을 지닐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의 예와 같이 대만 뉴 웨이브의 작가들도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처하고 자신들의 미학적 선택에 따라서 인공적인 세트 촬영보다는 로케이션 촬영을 선호했다. 대만 뉴 웨이브의 미학 자체가 사실적인 것을 선호하는 리얼리즘적 경향이 강했으므로 로케이션 촬영을 통해 얻어진 화면들은 분위기를 생생하게 재현함과 동시에 환경과 인물, 자연의 조화에 있어서도 장점을 제공했다.
또 과거에는 후시 녹음을 통해 표준어인 북경어 하나만을 사용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실제의 언어생활과는 다른 방향의 녹음 작업이 실시되어 왔지만, 대만 뉴웨이브 감독들은 알아듣는 데 혼란이 온다고 할지라도 상황이나 직업, 나이, 배경 등 역할에 따라 그에 맞는 언어를 사용케 했다. 후 샤오시엔의 <비정성시>의 경우를 보더라도 북경어와 대만 고유의 사투리를 비롯해 대륙에서 넘어온 인물들이 그 배경에 맞는 다양한 언어를 구사한다.
그리고 다른 대만 뉴 웨이브의 특징 중의 하나는 스타 시스템의 배제이다. 1980년대 이전의 대만 영화는 몇 명의 스타를 이용한 상업적 배설물에 지나지 않았다. 스타는 곧 흥행이라는 상업적 사고의 틀을 깨고 신인과 아마츄어 배우들을 골고루 기용하여 역할에 맞는 배역을 설정한 것은 작품의 질적 향상과 더불어 영화의 사실감을 높이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80년대 대만 뉴 웨이브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대만의 영화 산업 체계 속에서 뉴 웨이브의 지속적인 발전이 결코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뉴 웨이브를 꽃피운 전세대 감독들의 뒤를 이을 만한 감독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것은 현재의 대만 영화가 안고 있는 큰 어려움을 반증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미국 영화의 홍수 속에서 대만 영화는 개봉 극장조차 잡기 힘든 상황에 빠져 있으며 이러한 어려움들은 젊은 영화인력들이 영화를 떠나 다른 영상 산업으로 옮겨가게끔 하는 결과를 나았다.
근래들어 대만 영화계는 그 틀을 깨는 새로운 시도라고 볼 수 있는 작품들이 독립 제작의 형태를 지니고 나타나면서 기존의 대만 영화가 갖고 있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고 있다.
3. 대표적 감독과 작품들
1) 후 샤오시엔
후 샤오시엔의 초기 영화들은 대만 뉴 웨이브 영화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인 성장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펭쿠이 섬에서 온 소년(1983)>으로부터 <동동의 여름방학(1984)><동년왕사(1985)><연연풍진(1986)> 까지의 네 편의 영화는 그의 성장기 4부작으로 불리운다. 이 영화들은 사춘기 주인공이 그 자신이나 사악함, 혹은 세계의 본질에 대한 의미있는 지식을 얻는 경험을 통해 매우 고통스러운 실존의 위기를 경험하는 교양소설의 영화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인간의 보편적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이 문제를 추상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세하게 사회적 맥락과 연결함으로서 농업 사회에서 새롭게 산업사회로 변모해가는 대만에서의 성장이라는 집단적 체험으로 재구성해 냈다.
쓰라린 청소년기의 기억에 대한 후 샤오시엔의 일관된 관심은 <비정성시(1989)>에서 대만 근현대사와 만나면서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된다. 이 영화는 1945년 일본 식민 통치로부터의 해방에서부터 1949년 본토를 마오 쩌뚱 군에게 내준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건너와 눌러앉기 까지의 대만 현대사를 토착민 4형제의 가족사를 통해 그리고 있다. 이후 그는 전통 인형극의 장인이 가족과 일과 식민 통치에 시달리면서도 장인 정신을 견지해 나가는 삶의 궤적을 세심하게 그려나간 <희몽인생(1993)>, 영화를 촬영하는 대본과 영화 장면을 통해 하나의 현재와 두개의 과거가 맞물리면서 대만 현대사의 새로운 모습을 담은 <호남호녀(1995)>를 통해 근현대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었다.
2) 에드워드 양(양 덕창)
에드워드 양은 현대화된 대만의 일상에 드러난 모더니티라는 자신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실종’이라는 모티브로 대만의 10년간을 통과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기 연민의 슬픔과 감상주의의 표정을 내면의 붕괴로 담아낸 데뷔작 <해탄적일천(1983)>과 타이페이에서 동거하는 어느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불안을 느끼고 결국 헤어져서 새로운 상대를 찾는 영화 <타이페이 이야기(1985)>를 만든 이후 그는 도시화와 산업화를 겪으며 변화해 나가는 와중에서 삶에 대한 소속감없이 살아가는 여러 인물들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인 <공포분자(1986)>를 만들었다. 항상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산업 사회 속의 도시, 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는 항상 불안하다. 그들은 언제나 고독하며 치유할 방법조차 찾지 못한다. 이러한 인간관계와 개개인의 심리 상태를 에드워드 양은 냉정하고 심각한 자세로 접근해 나간다.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 역시 1960년대 초 외래 문화가 급속하게 유입되던 당시의 타이페이를 무대로, 대륙에서 넘어온 외성인과 본토인 사이의 대립과 아무런 가치적 판단 기준 없이 미국 문화 속에 젖어사는 청소년들이 겪어야만 했던 사회 혼란기를 그리고 있다. 다분히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주제에 접근하는 에드워드 양의 작품세계지만 그의 작품에서도 대만의 역사와 사회 변화를 인식하고 재해석하며 영화작업에 임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3) 왕 퉁
왕 퉁은1942년 중국 북동부 출신으로 1949년에 가족이 모두 타이페이 외곽으로 이주했다. 국립영화학교 재학시절 쇼 브라더스 사에서 아르바이트로 그림을 그린 것이 인연이 되어 영화계에 입문해 여러 영화의 미술감독을 거쳐 1981년 <협잡꾼>으로 데뷔한다. 그는 다른 뉴 웨이브 감독에 비해 나이가 많았으며 낙후한 대만 영화계의 현장에서 자란 인물인데, 간결한 이야기 전개, 역동적인 영상 등 상업 영화 틀 속에서도 뉴 웨이브의 후광없이 자수성가했다.
그후 그는 미술감독의 경력을 살려 탐미적인 역사물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대만 영화의 거목으로 인정받은 계기는 1987년작 <허수아비>에서 <바나나천국(1989)> <돌아오지 않는 산하(1992)> 로 이어지는 대만 역사 3부작이다. 특히 허수아비는 대만 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웃음과 소박함과 풍자의 품격을 지닌 블랙 코미디로 대만영화의 걸작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