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청빈 운동과 탁발 수도회
1181년, 프란치스코는 중부 이탈리라의 아시시에서 부유한 의류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잔치와 향락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기사의 영예가 탐이 나서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가 아시시로 돌아왔는데, 이때부터 그의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어느날, 성 다미아노의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는 "내 교회를 다시 세워라"라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때 그 교회는 쓰러져 가고 있던 참이었다. 처음에 프란치스코는 교회 건물을 수리하려 들었으나, 주님께서는 가난한 그리스도를 닮아 절대적인 청빈 속에서 복음적인 삶을 통해 교회를 재건하라고 하셨다.
프란치스코는 11명의 동료들과 함께 로마로 가서 그들이 만든 단순한 생활 규칙을 허가해 줄 것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청하였다. 규칙이라야 성서에서 얻어 온 몇 줄 안되는 간단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교황은 처음에는 주저하였지만, 프란치스코가 로마 교회의 기둥을 들고 있는 꿈을 꾸게 되자 그 규칙을 윤허하고 그들로 하여금 지방 주교들의 허락이 있으면 어디서든지 설교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프란치스모의 친구인 성녀 글라라가 프란치스코회의 한 분원으로 "가난한 글라라회"를 창설하였고 이 수도회 역시 번성하였다.
이것이 가톨릭 교회사 상 가장 위대한 개혁이 이루어진 효시이다. 프란치스코의 작으마한 공동체에서 시작한 이 수도회는 중세를 통틀어 가장 거대하고 영향력이 큰 종교 단체로 성장해 갔다. 이것은 그 수나 영향력에 있어, 동시대 그 어느 수도회와도 견질 수 없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코의 증거자들은 특히 교회가 부유해 지고 사제들 일부가 부패하였던 그 시대에 꼭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는 결코 교회나 사제들의 결점을 보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하느님의 작품이라 생각하고 사랑하렸으며 전적으로 교회에 충성하였다. 비록 개인적으로는 가난하고 엄격하였으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창조물을 찬송하였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특별한 흠숭을 바쳤다. 크리스마스 구유를 처음 만든 이도 그였다. 또 그는 당시의 수많은 이단과는 달리 성사 특히 성체성사를 지극히 사랑하였다.
죽음에 이르게 되자, 하느님께서는 프란치스코에게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그의 몸에 새긴 성흔(聖痕)을 주셨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그렇게도 사랑한 사람에게 꼭 알맞은 선물인 것이다. 그는 죽은 지 2년 후인 1226년에 시성되었다.
도미니코 구즈만은 1170년에 태어난 스페인 사람이다. 사제로 서품 받은 그는 알비파 이단 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다시 교회로 회두시키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는데, 그들을 회두시키는데는 지적 훈련을 쌓은 토대 위에 강력한 설교와 이에 곁들여 가난하고 단순한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표양을 보이는 길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의 제자들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을 채택하고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1216년에 "설교 수도회"의 결성을 허가받았다.
도미니코는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였다. 그는 설교할 때나 미사를 집전할 때 종종 눈물을 흘렸고 제자들에게는 오로지 "하느님의" 이야기만을,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이야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1221년에 죽었고 1234년에 사성되었다.
프란치스코회와 마찬가지로 도미니코회도 교회의 쇄신, 이단들의 회두, 지적 오류의 수정 등의 업적을 이루는데 있어 13세기의 위대한 본산이었다. 다른 종교 단체들 특히 새로 창설된 가르멜회와 아우구스티노회 같은 수도회들도 이 위대한 쇄신의 세기에 동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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