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복싱] 4전5기의 신화 "홍수환" 관련자료:없음 [3197]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5-01 23:06 조회:712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복서! 복서로써의 기량도 최고였지만, 홍수환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복싱을 국내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만든 선수라는 점입니다. 경기에
있어서는 물러섬이 없었고, 불리한 상황의 경기에서 더욱 오기가 발동하는
선수였습니다.
한국전쟁 한달 전인 1950년 5월 26일 서울에서 태어난 홍수환은 1969년 5월 10일
"김상일"과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프로로 전향합니다. 그 후 6연승(1KO승)을 달리며,
국제 경기를 소화해 낼 능력이 있는 복서로 인정받은 홍수환은 1970년 처음으로
가진 원정경기에서는 일본의 "하라다 우시와카마루"에게 10회 판정패를 하면서
첫번째 패배를 기록합니다. 하지만 2개월 뒤 다시 일본 요코하마에서 가진 "오시마
신타로"와의 경기에서는 다시 판정승을 거두며 패배의 충격을 털어냅니다. 그 후
국내선수들과 가진 다섯차례의 경기를 모두 승리로 장식하며 국내 밴텀급 최강으로
자리매김한 홍수환은 1971년 9월 14일 강호 "문정호"를 5회 KO로 제압하고 한국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해 괌으로 원정하여 "코리 살로마"에게 다시 한 차례
판정패를 당하기는 하지만 세 차례 한국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며 1972년 5월 4일에는
"알 디아즈"를 누르고 동양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사실 72년과 73년이
선수로써 홍수환에게는 가장 절정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이 됩니다. 홍수환은
72년에 그에게 첫번째 패배를 안긴 일본의 하라다 전을 포함하여 일곱차례 경기를
가져서 전승에 2KO승을 거두고, 73년에도 한 차례 태국 원정경기 포함 4전 4승
2KO승을 거두며 토탈 11연승에 4KO승을 거두는 쾌조를 보입니다. 홍수환 하면 세계
챔피언으로의 모습밖에는 생각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많고 저 역시 그렇지만,
홍수환의 캐리어에서 가장 멋진 승부중 하나로 73년도 방콕에서 벌어진 "타놈지트
수코타이"와의 동양 타이틀 2차 방어전을 꼽는 분들이 많으신 모양이더군요.
수코타이는 태국내에서 가장 확실한 미래의 챔피언으로 손꼽는 선수였으며 가공할
만한 펀치력을 보유한 선수였다고 합니다. 현지 도박사들이 압도적으로 수코타이의
승리를 점쳤지만, 홍수환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힘으로 맞서며 8회 KO승을
일구어 냈다고 합니다. 홍수환을 근성의 복서로 불리우게 한 경기 중 하나라고들
하네요. 전 못봐서 모르겠습니다.
1974년. 동양타이틀 방어를 두 차례 더 성공적으로 치른 홍수환은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남아공화국으로 원정을 감행합니다 당시 홍수환이 노린 타킷은 WBA 챔피언인
강타자 "아놀드 테일러"였습니다. 1974년 6월 3일 남아공화국 더반에서 벌어진
세계타이틀전에서 홍수환은 테일러를 무려 네 차례나 링에 처박는 등 일방적인 경기
끝에 심판 전원일치의 판정승을 거두고 대망의 세계 타이틀을 손에 넣습니다.
김기수에 이어 한국에서 두번째 세계 챔피언이 된 홍수환은 범 국민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으며, 카 퍼레이드와 의장대 사열을 받기도 하며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여기서 고삐를 늦추지 않은 홍수환은 원정의 피로가 채 풀리기도 전인 그 해 10월
일본의 "쿠로사와 켄조"와 가진 논타이틀전을 판정승으로 장식하고 12월 28일에
"페르난도 카바넬라"에 15회 판정승 함으로써 타이틀 1차 방어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듬해 3월 14일 LA에서 멕시코의 강타자 "알폰소 자모라"에 4회 KO패
하면서 타이틀을 상실하게 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경기 일정이 홍수환에게
지나치게 강행군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챔피언으로 출국했다가 무관이 되어 귀국한 홍수환은 전열을 가다듬고 그해
여름부터 복수를 준비합니다. 한차례 세계 정상을 맛본 홍수환의 기량은 전보다
진일보한 상태였으며 파죽의 7연승(5KO)을 거두며 물 오른 기량을 뽐냅니다. 특히 7
연승 중에는 지금까지 플라이급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태국의 신성 "베니세
보코솔"을 10회 판정으로 꺾고 동양 타이틀을 재탈환한 경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76년 10월 16일, 복수의 칼을 갈던 홍수환은 자모라를 인천으로 불러들여
복수전을 펼칩니다. 경기 초반 아웃복싱을 펼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강타자
자모라를 상대로 맞부수기를 시도한 홍수환은 중반부터 눈에 보이는 우세를
점합니다. 특히 9회전에 홍수환은 자모라를 코너로 몰아넣고 분노에 찬 무차별
공격을 퍼부으며 승리를 눈앞에 둡니다만, 당시 주심을 맡았던 "옥타비오 메이란"이
홍수환의 팔을 나꿔채며 자모라를 사지에서 풀어주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경기 12회에는 끝종이 울리고 코너로 돌아가는 홍수환이 심판의
방조하에 약 20여초동안 무차별 공격을 받습니다. 하지만 홍수환의 다리는 흔들리지
않는 상태였는데, 메이란 주심은 갑자기 자모라의 TKO승을 선언합니다.
타이틀을 거의 손 안에 넣었다가 놓쳐버린 홍수환에게 밴텀급에서의 기회는 더 이상
없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행운이 홍수환에게 다가오는데요. 바로
각 체급 사이에 J 체급이 신설되면서 홍수환에게 챔피언 결정전에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1977년 6월 27일. 국내 라이벌인 "염동균"과 우정의 대결을
벌인 홍수환은 10회 판정승을 거두었고, 10월 10일에는 일본의 "후타로 타나카"를
12회 판정으로 꺾으면서 결정전에 나갈 기회를 잡습니다. 결정전에서 마주친 선수는
바로 파나마 출신의 일명"지옥에서 온 악마"... 헥토르 카라스키야 선수입니다.
이 경기에 대해서는 워낙 여러번 대중매체를 통해서 소개가 되었기 때문에 구구한
설명을 드리는 것이 오히려 귀찮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워낙 유명한 경기이고 다
아시는 사항들 밖에는 저도 아는 것이 없으니까요. 당시 카라스키야는 11전 11승
11KO승을 거두고 있던 강타자였고, 나이는 17년 6개월로 만약 세계 챔피언이 된다면
"윌프레도 베니테즈"가 가지고 있는 17년 8개월의 세계 최연소 챔피언 기록을
경신할 수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어쩌면 홍수환 선수의 4전 5기 신화는 ...
카라스키야가 홍수환보다 10살 가까이 어린 애송이이며, 총성이 난무한 적지에서
벌어진 경기였기 때문에 홍수환 특유의 오기가 발동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1977년 11월 26일의 경기였습니다.
두 차례에 걸쳐 세계정상을... 그것도 모두 적지에서... 차지한 홍수환은 온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고, 홍수환의 그 경기는 무려 20여차례 재방송됩니다.
정확한 기록은 아니지만, 아마도 스포츠 종목 통틀어 단일경기가 20여차례나
재방송된 것은 전무 후무하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이듬해 2월 1일 일본 동경으로
원정한 홍수환은 일본의 "가사하라 유타카"를 데리고 놀며 다섯차례 다운을 빼앗은
끝에 15회 판정승을 거두고 1차 방어에 성공합니다만, 5월 7일 2차 방어전에서
"리카르도 카르도나"에게 12회 TKO패를 당하면서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홍수환
선수는 경기때마다 고질적인 눈부상으로 고전하였으며, 이날 경기도 그 영향이 컷던
것으로 보입니다. KO패가 선언된 후 링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던 홍수환 선수의
안타까운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 하네요.
이 경기 이후, 실질적으로 은퇴를 선언한 홍수환은, 1980년 팬들의 열화같은
성원으로 다시 링으로 돌아와, 복서로써는 보기 드물게 은퇴경기를 벌립니다.
상대는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던 "염동균"이었고 결과는 10회 무승부로
기록되었습니다.
홍수환 선수는 비록 파괴력은 빈약했지만, 상대의 강점에 기죽지 않는 용감성이
있었으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의지가 있는 선수였습니다. 또한
팬들을 즐겁게 하는 복싱을 알고 있었으며 완벽한 기량과 더불어 탁월한 쇼맨쉽까지
갖춘 한국이 낳은 최고의 "프로복서"였습니다.
"조이 맥심"은 파괴력하고는 거리가 먼 선수였습니다. 그는 통산 115전을 싸우는
동안 단 스물한번의 KO승만을 기록한, 중량급 답지 않은 소프트 터쳐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별 볼일 없는 선수였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빈약한 파괴력을 탁월한 테크닉과 영리한 머리로 카바할 줄 아는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 난 복서였습니다.
1922년 3월 28일생인 맥심은 1941년 열여덟살의 나이로 프로로 전향했으며, 초반
11차례의 경기를 승리로 장식합니다. 그러나 그 후 "지미 데이비스"에게 한 차례,
"에자드 찰스"에게 두 차례 패배를 당하면서 프로의 매운 맛을 보게 됩니다.
그는 L 헤비급을 본 바닥으로 해서 활동했지만, 이따금씩 헤비급 선수들과도 주먹을
섞었습니다. 1946년에는 훗날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조 월코트"를 꺾었으며
48년에는 바빈스에게 패배를 기록하기도 합니다 .
1949년 2월 28일, 맥심은 에자드 찰스에게 한 차례 패배를 기록합니다만, 3개월 후
"거스 레스네비치"를 15회 판정으로 꺾고 공석중인 전미 L 헤비급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듬해 1월 24일에는 영국으로 원정하여 일명 "싸움개"로 알려진 "프레디
마일스"를 10회 KO로 꺾고 세계 L 헤비급 정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1951년 5월 30일, 맥심은 헤비급 챔피언이던 천적 에자드 찰스와 다시 격돌합니다.
찰스와 맥심간의 다섯차례 경기중 백미로 손꼽히는 이 경기에서 양 선수는 무승부를
기록하고 맥심은 타이틀 획득에 실패합니다.
다시 본 바닥인 L 헤비급으로 돌아온 맥심은 그의 캐리어 중 가장 빛나는 경기를
치르게 됩니다. 1952년 6월 25일. 맥심은 그의 타이틀을 노리고 미들급에서 올라온
"슈거 레이 로빈슨"과 양키 스타디움에서 맞붙습니다. 이 경기에 대한 내용은 전에
올린 로빈슨에 관한 글에 간략하게 실려 있습니다 .각설하고, 무려 4만8천명이
운집한 이 경기에서, 세체급 석권을 노리는 로빈슨을 상대로 , 맥심은 아웃복싱을
구사하며 로빈슨의 체력을 고갈시키는 작전을 폅니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벌어지는 야외 타이틀 전이었기 때문에, 노장 로빈슨은 급격한 체력의 저하를
겪었으며 결국 14회에 경기를 기권하고 맙니다.
로빈슨을 꺾은 맥심은 그해 12월 17일, 망구스 "아치 무어"에게 패하면서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그 이듬해에 맥심은 무어와 두 차례 경기를 더 벌립니다만, 판정패
함으로써 타이틀 재 탈환의 꿈은 사라지고 맙니다.
맥심은, 1954년 6월 7일, 훗날 헤비급 사상 최연소 챔피언이 된 "플로이드
페터슨"과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며 마지막 불꽃ㅇ들 태우지만만 그
후 6연패를 당하며 결국 1958년 은퇴를 선언합니다.
통산전적 115전 82승 4무 29패 21KO
밴텀급의 두란이라.... 제목을 붙여놓고 보니까 조금 낯 간지럽네요.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다지만 문성길하고 두란하고 비교하기는 조금 무리죠. 잘라서 말하자면,
문성길은 프로복서로써는 미완성 선수입니다. 게다가 프로생활 30여년에 네체급
석권, 100전이 넘는 전적을 쌓은 두란과 겨우 20전 정도 싸운 문성길을 비교한다는
건 조금 낯 뜨거운게 사실이네요.
그렇지만, 제가 감히 문성길을 "밴텀급의 두란"으로 부르는 이유는, 문성길이
조금만 더 프로전향을 일찍 하고 밑바닥부터 단계를 밟아가며 경력을 쌓았더라면,
밴텀급의 두란이 되고도 남을 선수였다는 아쉬움에 있습니다. 끊임없이 샘솟는
체력. 한국이 낳은 가장 완벽한 공격수. 조금만... 아주 조금만 두란과 같은
수비력이 뒷받침 되었더라면.....
84년 LA올림픽 예선전에서 미국의 샤논선수를 박살내며 미국선수중 가장 먼저
예선탈락시키고, 문성길은 가장 확실한 금메달 후보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눈부상을 당하면서 좌절되고 말지요. 항상 절정의 기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올림픽하고는 인연이 없던 문성길은 88올림픽을
노리다가 86아시안게임 이후 프로전향을 선언하고 87년 데뷔전을 갖습니다.
문성길은 아마추어때에도 흥행의 보증수표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특히 라이벌
"허영모"와의 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3분 3라운드의 경기를 보기 위하여 구름같은
관중들이 몰려왔습니다. 이런 선수이니 프로전향의 유혹이 끊일 날이 없었겠지요.
용케 문성길을 스카웃한 88프로모션은 문성길을 금이야 옥이야 기르기 시작합니다.
당시 국내에는 참으로 많은 강자들이 있었습니다. 적어도 세계 랭커급으로 평가받는
선수들만도 셀 수 없이 많았던 밴텀급과 주니어 밴텀급의 르네상스 시대였습니다.
문성길이 조금 일찍 프로로 전향해서 이런 선수들과 대결하며 차분하게 전적을
쌓았더라면 챔피언이 되어서도 더 좋은 전적을 남길 수 있었을텐데.... 1963년생인
문성길은 마음이 급했고, 매니저측에서도 괜한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 노력하는
기색이었습니다.
국내 최단전적 세계 챔피언 을 목표로 한 문성길은, 87년 3월 8일에 "릭 바질로"를
1회 KO로 꺾고 프로로 전향하여 "역시 문성길"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문제는
2차전.
두달 뒤인 5월 17일에 문성길은 "싱노이 싱크룽톤"이라는 선수와 프로데뷔 2차전을
벌리는데요. 싱크룽톤은 국내강호 "장태일"에게 1회 KO패로 무너진 선수여서
문성길로써는 손쉬운 경기가 되리라는 중평이었습니다...만.... 경기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경기는 3회 KO승으로 끝났습니다만, 경기 내내 문성길은
안면을 많이 허용하였고, 강약조절이 전혀 없는 단조로운 인파이팅을 구사하여 많은
전문가와 팬들에게 의문부호를 남겼습니다.
5전 안에 세계 정상에 도전시킨다는 계획은 조금 미뤄지게 됩니다. 경기 내용은
조금 부실했지만 어쨋든 6연속 KO승을 거둔 문성길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판단아래
1988년 8월 14일 태국의 "카오코 갤럭시"를 국내로 불러들여 정상에 도전합니다.
킥복싱으로 다져진 저돌적인 공격과, 파괴력, 그리고 동생 "카오사이 갤럭시"를
등에 업은 카리스마 등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무패의 챔피언 갤럭시와의 대전에서
문성길은 맞대결을 자제하면서 신중하게 경기를 풀어 나갑니다. 조심스런 경기를
벌리며 근소한 점수차로 앞서나가던 문성길은 6회에 버팅으로 경기가 중단되며
채점승을 거두고 WBA 밴텀급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당시의 버팅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링사이드로 밀린 갤럭시에게 문성길이 자세를
낮춘 상황에서 왼쪽으로 더킹하면서 들어가는 순간 갤럭시가 오른쪽 옆구리 공격을
시도하면서 갤럭시의 오른쪽 머리와 문성길의 왼쪽 이마가 부딛치면서 경기가
중단되고 맙니다.
어쨌든 국내 최단전적 챔피언(박찬희의 12전째) 기록을 경신한 문성길은 "에드가
몬세라트"와 "치카이 코바야시"를 각각 7회와 5회에 제압하면서 타이틀 2차 방어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1989년 태국으로 원정하여 가진 전 챔피언 갤럭시와의 3차
방어전에서 11회 두 차례 다운을 당하는 수모 끝에 판정패 함으로써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충격에 빠진 문성길은 강호들이 득실한 밴텀급을 떠나 한 체급을 낮춰 J 밴텀을
노립니다. 그해 11월에 재기전을 가져 2회 KO승을 거두면서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인 문성길은 이듬해 1월 20일 당시 WBC J 밴텀급 챔피언 "나나 코나두"를
다운을 주고 받는 접전끝에 제압하고 두체급 석권에 성공합니다. J 밴텀급에서
예전의 기량을 회복한 문성길은 1993년까지 타이틀 9차 방어에 성공하며 절정의
기량을 선보입니다. 문성길의 방어전 상대로는 전 세계 챔피언인 "길베르트 로만"과
"일라리오 사파타"그리고 "그랙 리처드슨""카를로스 살라자르"등이 있습니다.
문성길의 타이틀 방어전 중 백미는 바로 "나나 코나두"와 가진 3차 방어전 입니다.
스페인 사라고사에서 벌어진 이 경기에서 두 선수는 첫번째 경기와 마찬가지로 한
치도 물러섬 없는 난타전을 벌립니다. 하지만 파워에서 한 수 위였던 문성길은
코나두를 4회 KO승으로 제압하고 방어에 성공합니다.
J 밴텀에서 롱런하던 문성길이었지만, 기량은 점점 하향곡선을 그리는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맷집을 믿고 지나치게 맞는 복싱을 한 탓이었는지 턱이 점점
약해지는 경향을 보였는데요. 결국 1993년 11월 13일 "호세 루이스 부에노"와 가진
타이틀 10차 방어전에서 한차례 다운을 빼앗고도 12회 판정패 함으로써 타이틀을
상실하고 바로 은퇴를 선언합니다.
글쎄요.... 2체급 석권에 타이틀을 열 두차례나 방어한 선수에게 "미완성 복서"라는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문성길에 대한 아쉬움이 너무 크게 남네요. LA올림픽이
끝나고 바로 프로로 전향했으면 적어도 페더급까지 네 체급은 석권할 수 있었으리라
확신합니다. 탄탄한 기본기에 라이트급에 해당하는 주먹을 가진 선수로써는 빈약해
보이기까지 한 프로 전적입니다. 통산 22전 20승 2패 18KO
제 목:[복싱] 로이 존스 Jr 관련기사 관련자료:없음 [3213]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5-04 11:00 조회:617
[해외복싱 화제] `돌주먹' 존스 헤비급 넘본다
WBA-WBC 라이트헤비급 통합챔피언 로이 존스 주니어(30·39승1패 33KO승).
서울올림픽 복싱 라이트미들급 결승서 한국의 박시헌을 일방적으로 두들기고도
은메달에 그쳐국내복싱팬에게 강한 인상을 심은 선수다. 그로부터 10여년.
프로복서가
된 존스는 체급을 올려가며 '내 로라'는 선수를 모두 꺾어
복싱전문가들이 꼽는 '현역 최고 복서'로 성장했다. 이존스가 마침내'링
평정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최중 량급인 헤비급마저 석권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존스는 다음달 5일 IBF 챔피언 레지 존슨(32·39승1무5패.24KO 승)과
미국 빌록시의 '미시시피 코스트 콜로세움'에서 통합전을 갖 는다고 최근
발표했다. 그러나 팬들의 관심은 그가 연말쯤 열릴 헤 비급의
홀리필드-루이스전승자에게 도전하겠다고 밝힌 데 온통 쏠려 있다.
타이슨 이후 '스타부재'에 허덕이는 링에 새로운 스타가 탄생 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어느 전문가도 헤비급 왕자가 되겠다는 존스의 발언을 허풍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 그의 전적은 너무나 화려하기 때문이다. 94년 버 나드
홉킨스를 꺾고 IBF미들급 왕좌에 오른 그는 체급을 올려가며
IBF수퍼미들급, WBC 라이트헤비급, WBA 라이트헤비급을 차례로 석권
했다.복싱사에 남을 대기록이다.
존스의 유일한 1패는 97년 WBC 라이트헤비급타이틀매치때 동급 1 위 몬텔
그리핀에 당한 실격패. 존스는 무릎을 꿇은 상대를 가격했 다는 이유로
타이틀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리턴 매치에서 1회 KO승 으로 간단히
타이틀을 되찾았다.
존스와 싸울 존슨은 92년 WBA미들급 왕좌를 지낸 바 있으며, 98 년
윌리엄거트리를 5회 KO로 제압하고 IBF 라이트헤비급 타이틀을
따냈다.하지만 존스에게는 역부족일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 다.
제 목:[복싱] 한국최초의 세계 챔피언 "김기수" 관련자료:없음 [3224]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5-05 17:04 조회:513
당신이 운동선수라고 가정합니다. 운동선수... 무엇보다 잘 먹어야
죠. 잘 먹어야 훈련도 할 수 있고, 특히 프로 선수라면 좋은 성적을
거둬서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몹시 배
가 고프며 훈련에 지장을 줄 만큼 허기가 집니다.
그런 당신 앞에 한 그릇의 밥이 있습니다. 이걸 먹어야만 당신은 오
늘 해야 할 운동량을 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에게는 당신
만큼 배가 고픈 자식들이 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
들이 말입니다. 이 밥을 자식들에게 먹이면 당장의 배고픔음 면하게
해 줄수 있습니다만, 실질적으로 당신의 생계수단인 운동에 지장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굶주린 자
식들이 보는 앞에서 이 밥을 먹어야 합니다.
글쎄요. 이럴 경우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요. 저 같으면, 자식들 앞
에서 밥을 먹을수 있을것 같지 않네요. 이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
니다. 실제로 "지금 아버지가 먹어야만 너희들을 살릴 수 있다!"고
울부짖으며 밥을 씹어 삼키고는 샌드백을 두드린 결과 세계 정상에
오른 한 선수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한국 최초의 세계 챔피언
김기수 입니다.
김기수 선수는 1939년 9월 17일 북청 태생입니다. 몸 하나로 부와
명예을 얻은 입지전적인 인물이지요. 1960년, 21살의 나이로 야심
차게 참가했던 로마 올림픽 준준결승에서 숙적 "니노 벤베누티에게
패하면서 좌절을 맛본 후, 61년 프로로 전향합니다.
아마에서 이미 기량을 충분히 검증받았던 김기수는 데뷔전부터 10
라운드 경기를 뛰기 시작합니다. 왕년의 명복서로 지금도 많은 권
투팬들이 기억하고 있는 "이 안사노"를 7회 KO로 꺾으며 성공적으
로 데뷔를 한 김기수는, 프로데뷔 두번째 경기에서 한국미들급챔피
언 "강세철"을 10회 판정으로 누르고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강세철과 가진 리턴매치에서도 7회 KO승을 거둠으로써, 명실상부한
국내 최강자로 자리잡습니다.
이듬해, 일본 토쿄로 원정하여 1승 1무를 기록한 김기수는 국제용
선수로써도 손색이 없음을 입증합니다. 김기수는 특히 일본원정경
기를 많이 갖았는데, 아마복싱 국가대표 시절의 해외원정 경험이
많아서인지, 원정경기에서도 여타 선수와는 달리 큰 부담없이 싸울
수 있었습니다. 결국 1965년 1월 10일 일본으로 원정한 김기수는 "
후미오 가즈"를 6회 KO로 제압하고 동양정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동양 챔피언이 된 김기수는 그 후 아홉차례의 경기를 모두 승리로
장식하며, 대망의 세계 정상을 노립니다. 당시 세계 챔피언은 흠집
없는 74연승을 달리던 "니노 벤베누티" 였습니다. 당시 시대적 상
황에 비추어 볼 때, 국내에서 세계 타이틀전을 갖는다는 것은 대단
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엄청난 달러가 소모되는 경기를 치리기 위
해서는 범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필요했었는데요. 김기수의 세계
정상에 대한 의지를 알아본 박정희 씨가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어,
경기는 1966년 6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한
국 내에서 벌어지는 최초의 세계 타이틀 매치였습니다.
온 국민이 때꺼리를 걱정하며 살던 힘들던 시대에 국내 유치된 경
기였기에 김기수는 더욱 의지를 불태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김기수 자신이 너무도 힘들게 운동을 해 온 탓에 하늘이 내린 이
기회를 결코 놓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
이기도 했던 김기수.
장충체육관이 만원사례를 이루고 박정희 의장까지 직접 관전한 이
경기에서 김기수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선전을 펼칩니다. 기량
과 신체적인 조건등 어느 하나 벤베누티보다 나을 것이 없는 김기
수였지만 자신의 기량을 200%발휘하여 벤베누티와 접전을 벌리다,
경기 후반 우세를 잡고 판정승을 거둡니다. 뭐....15라운드에서 링
줄이 끊어지는 희대의 사건등이 있기는 했지만, 경기는 분명 김기
수의 승리였고, 김기수는 한국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 되어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김기수는 세계 챔피언이 되고 난 후에도 미들급 동양챔피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듬해인 67년 9월 30일, 훗날 세계 정
상의 자리에 오르는 "프레디 리틀"을 힘겹게 15회 판정으로 누르고
1차 방어에 성공한 이전과 이후에도 계속해서 동양 타이틀 방어전
을 가졌습니다. 서로 다른 두개의 체급을 오가며 경기를 한다는 것
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겁니다. 결국 68년 5월 26일 이태
리 밀란으로 원정하여 가진 "산드로 마징기"와의 2차 방어전에서
15회 판정패 함으로써 타이틀을 상실하게 되고, 뒤이어 일본 오사
카로 원정해서 가진 "이사오 미나미"와의 동양 미들급 타이틀전에
서도 12회 판정패 함으로써 동양 타이틀까지 놓치게 됩니다. 욕심
이었을까요...?
이후 1969년 3월 1일, 자신에게 1패를 안긴 미나미를 다시 국내로
불러들여 12회 판정승 함으로써 설욕하기는 했지만,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그해 은퇴를 선언합니다.
은퇴 후, 사업가로 변신한 김기수는 선수생활동안 알뜰히 모아온
돈을 적절하게 투자하여 명동에도 건물을 소유한 거부가 되었습니
다. 그야말로 몸뚱이 하나로 일구어낸 성공이라고 할 만 하죠. 힘
들던 시기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살아온 인생. 좀 즐기면서 살 만
도 했건만...1997년 6월 10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김기수. 세계 챔피언으로 롱런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강렬한 인
상을 남긴 선수도 아니지만, 한국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기억해야만 할 선수라 생각합니다. 무에서 유
를 창조했다는 것. 무슨 일이든 처음이 힘든 법이거든요. 한국 선
수가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백인 흑인들과 주먹으로 맞서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하나를 심어준 것 만으로도 김기수의 업적은 인정해
줄 만 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통산전적 37전 33승 2무 2패 18KO
제 목:[복싱] 신이 빚은 복서 "세자르 차베스" 관련자료:없음 [3230]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5-06 09:17 조회:756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훌리오 세자르 차베스"는 아직 은퇴하지 않은
현역선수입니다. 불과 한 달 전인 지난 4월 1일
택사스 엘 파소에서 "바델 스미스"라는 선수를 상대로 4회 TKO승
을 거두고 건재를 과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복싱팬들은 작년
10월 18일 "오스카 델라 호야"에게 무참하게 무너진 경기 이후
"차베스는 이제 끝났다"라는 데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차베스는 1980년 프로에 데뷔했습니다. 2월 5일 "안드레스 펠릭스"
라는 선수를 상대로 6회 KO승을 거두면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차베
스는 데뷔 초부터 통산 100전 이상을 목표로 한 듯 , 거의 초인적
인 체력으로 경기수를 늘려갑니다. 차베스는 1980년에 10승(6KO),
1981년에 12승(11KO), 1982년에 13승(11KO)등, 거의 1달에 한 번
꼴로 경기를 소화시키는 가공할 능력을 보여줍니다. 특히 81년과
82년 사이에는 16연속 KO승을 거두기도 하는데, 이 중 1회 KO승이
다섯번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에도 한 차례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사실 차베스의 연승에는
맹점이 하나 있습니다. 프로전적 12전째(전에 제가 3전째라고 말씀
드렸는데 그건 잘못된 기억이었습니다--;)에 "미구엘 루이스"라는
선수를 상대로 무판정시합을 한 경기 기록하거든요. 이 경기에 대
해서 차베스는 자신의 1회 KO승으로 기록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하
더군요. 이 경기를 무판정시합으로 받아들인다면 차베스의 연승기
록은 10전가량이 줄어들게 되겠죠.
83년과 84년에 각각 7승과 3승을 거두면서 호흡을 조절한 차베스는
1984년 10월 13일에 "마리오 마르티네스"를 8회 KO로 꺾으면서 WBC
S 페더급 정상의 자리에 오릅니다.(참고로 S 페더급과 J 라이트급
은 같은 체급입니다.)
1985년에도 5승을 거두며, 세계 챔피언으로는 드물게 많은 경기를
치릅니다. 그의 제물이 된 선수는 "마구엘 헤르난데스", 명예의 전
당에 헌액된 복서 "루벤 카스틸로", 훗날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
르는 "로저 메이웨더"등이 있습니다. 1986년에도 다섯차례의 경기
를 벌리는데, 이 중에는 "파스티노 바리오스"를 5회 TKO로 누르고
WBA J 라이트급까지 거머쥔 경기와, 역시 세계 정상의 자리까지 오
르는 "로키 로크리지", 강타자 "후안 라포르테"와의 경기가 포함되
어 있습니다.
J 라이트급에서 도전자들을 두세 수 이상의 기량차를 보이며 압도한
차베스는 1987년 11월 21일 한 체급을 올려 "에드윈 로사리오"를
11회 TKO승을 거두며 WBA 라이트급 타이틀을 석권하며 두 체급 석
권에 성공합니다. 1988년까지 타이틀을 보유한 차베스는, 한국의 "
최충일"을 KO로 꺾었던 "라파엘 바주카 리먼"을 7회 TKO로 꺾고,
라이트급 최강으로 군림하던 "호세 라미레스"역시 11회 TKO로 제압
하면서 라이트급에서도 절대강자의 자리에 오릅니다. 한가지 아쉬
움은.... 이때 차베스가 "퍼넬 휘테커"와도 한 번 붙었어야 하는
데...라는 점이올시다.
1989년, 차베스는 J 라이트급 시절에 한 차례 꺾은 바 있으며, 당
시 WBC J 웰터급 챔피언이던 "로저 메이웨더"를 10회 KO로 꺾으면
서 꿈의 "트리플 크라운"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J 웰터급에 올라
와서도 고만고만한 선수들을 연파하면서 자리굳히기에 들어선 차베
스는 처음으로 고비를 맞게 됩니다.
1990년 3월 17일, 차베스는 J 웰터급의 테크니션 "멜드릭 테일러"
와 일전을 벌리는데, 차베스는 전에 없이 부진한 경기를 벌립니다.
특히 스피드에서 밀린 차베스는 12회 까지 점수에서 2-3점차 이상
으로 뒤진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경기종료 불과 몇초전 한 차례
다운을 빼앗고, 그것이 그대로 TKO승으로 선언됩니다. 당시 테일러
는 몇 초 남은 경기를 충분히 버틸 수 있을 만큼 체력도 남아있었
고, 다운을 고려하더라도 판정에서 밑질 것이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심판의 이해할 수 없는 판정으로 대어를 놓치고 맙니다. 차베스로
써는 처음 맞은 시련을 천행으로 넘깁니다.
90년 12월 8일에는 한국의 "안경덕"선수가 차베스에게 도전합니다.
당시 국내 강자였던 "김응식"을 누르고 세계 랭커로 첫발을 딛은
안경덕 선수는 워낙 힘이 좋아서 "불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선
수였지만, 그 힘도 차베스 앞에서는 별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여
3회 TKO로 일축 당합니다. 사실, 안경덕이 약한 것이 아니라 차베
스가 너무 강한 탓이었죠. 차베스는 그 해에 5전 5승 5KO를 기록하
는데, 테일러에게 12회 TKO승을 거둔 것 이외에는, 모두 2,3,4회에
마무리 짓는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거든요.
차베스는 계속해서 J 웰터급에 머물면서 91년에는 5전 5승 5KO, 92
년에는 6전 6승 5KO를 기록하지만, 제가 판단하기로는 J 웰터급이
차베스로써는 한계 체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워낙에 탁월한 선수
이기에 도전자들을 물리칠수는 있었지만, 이미 멜드릭 테일러에게
고전할때부터 "과거의 차베스는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거든요. J
라이트급과 라이트급에서의 차베스가 워낙 강한 인상을 남겼기 때
문일겁니다. 92년 10월 12일, "헥토르 카마쵸"와의 경기에서 그 스
피드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 지지부진한 경기 끝에 판정승을 거두
는 등, 무리한 체중증량과 나이에서 한계에 다다른 듯한 모습을 보
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때부터 "차베스의 연승이 언제 끝날
것인가"를 기다리는 꼴이 되었습니다.
93년, 드디어 차베스의 연승행진에 제동이 걸립니다. 무리하게 한
체급 더 올린 차베스는 라이트급에서부터 일전이 거론되던 "퍼넬
휘테커"의 WBC 웰터급 타이틀을 노리고 도전을 시도합니다. 하지
만, 카마쵸 정도를 잡지 못했던 차베스가 휘테커를 잡는 다는 것은
무리였죠. 경기 결과는 무승부로 기록되지만, 실질적으로 2-3점 이
상 뒤진 경기였습니다.
1993년에도 휘테커와의 무승부를 제외하면 5번 경기를 모두 KO로
장식한 차베스였지만, 1994년 1월 29일 드디어 검은 별을 달게 됩
니다. "프랭키 랜달"과의 경기에서 생애 처음으로 다운을 당하는
등 일방적으로 몰린 끝에 12회 판정패 함으로써 J 웰터급 타이틀을
상실하고 말죠. 물론 리턴매치에서 8회 기권승으로 타이틀을 되찾
기는 하지만, 그를 이전의 차베스로 보는 이들은 적었습니다. 그
후 그에게 처음으로 시련을 안긴 멜드릭 테일러를 8회 TKO로 꺾기
는 했지만, 노쇠한 영웅들의 대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1995년에는 활동도도 뚝 떨어져서 3전 3승 1KO승만을 기록한 차베
스는 1996년. 결국 골든보이 "오스카 델라 호야"에게 4회 KO로 패
함으로써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호야에게 패한 후에 복수를 다짐하
며 칼을 갈았지만, 예전과는 완연하게 다른 경기를 보여줍니다. 호
야와의 재대결이 있기 전까지 5전 4승 1무 2KO만을 기록한 차베스
가 호야를 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지요.
(사실 5전 4승 1무 2KO도 괜찮은 전적이지만, 천하의 차베스의 전
적으로는 부실해 보이네요) 결국, 1998년 9월 18일, WBC 웰터급 챔
피언이 된 호야와의 재대결에서도 8회 TKO패 하고 맙니다. 의욕은
보였지만, 몸이 전혀 따라가주질 못했고, 호야에게 일방적으로 안
면을 내 준 끝에 경기를 포기하는 차베스의 모습이 보는 이들을 안
타깝게 했지요.
결국 4체급 석권에는 실패한 차베스, 하지만 그가 남긴 강렬한 카
리스마와 기량은 라이트급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금세기 최고의 복
서로 손꼽힐 만 합니다. 그의 전적을 연도별로 한번 쭉~ 기록해 볼
까요. 정말 엄청난 복서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존경하지 않
을 수가 없네요.12전째경기는 차베스의 1회 KO승으로 간주하겠습니
다.
1980년 - 10전 10승 6KO
1981년 - 13전 13승 13KO (통산 23전 23승 19KO)
1982년 - 13전 13승 12KO (통산 36전 36승 31KO)
1983년 - 7전 7승 6KO (통산 43전 43승 37KO)
1984년 - 3전 3승 3KO (통산 46전 46승 40KO)
1985년 - 5전 5승 3KO (통산 51전 51승 43KO)
1986년 - 5전 5승 3KO (통산 56전 56승 46KO)
1987년 - 3전 3승 2KO (통산 59전 59승 48KO)
1988년 - 5전 5승 4KO (통산 64전 64승 52KO)
1989년 - 6전 6승 6KO (통산 70전 70승 58KO)
1990년 - 5전 5승 5KO (통산 75전 75승 63KO)
1991년 - 5전 5승 4KO (통산 80전 80승 67KO)
1992년 - 6전 6승 5KO (통산 86전 86승 72KO)
1993년 - 6전 5승 1무 5KO (통산 92전 91승 1무 77KO)
* 90전째 경기에서 "퍼넬 휘테커"와 무승부 기록,
연승기록 89연승에서 종지부
1994년 - 4전 3승 1패 3KO (통산 96전 94승 1무 1패 80KO)
* 93전째 경기에서 "프랭키 렌달"에 판정패
무패기록 92경기에서 종지부
1995년 - 3전 3승 1KO (통산 99전 97승 1무 1패 81KO)
1996년 - 3전 2승 1패 2KO (통산 102전 99승 1무 2패 83KO)
* 101전째 경기에서 "오스카 델라 호야" 에 4회KO패
1997년 - 2전 2승 (통산 104전 101승 1무 2패 83KO)
1998년 - 3전 1승 1무 1패 1KO (통산 105전 100승 2무 3패 84KO)
* 105번째 경기에서 "미구엘 곤잘레스"와 무승부
107번째 경기에서 "오스카 델라 호야"에 8회 KO패
1999년 - 1전 1승 1KO
-----------------------------------------------------------
통산전적 106전 101승 2무 3패 85KO
제 목:[복싱] 위대한 복서 카오사이 갤럭시! 관련자료:없음 [3236]
보낸이:허지이 (미래98 ) 1999-05-06 16:30 조회:380
내가 축구외에 좋아하는 스포츠가 복싱과 마라톤이다.
프로복싱의 경우 과거 전성기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여전히
관심을 갖고 있다.
회고하건데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챔피언이 나왔지만
솔직히 말해서 아주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선수는 몇되지 않는다.
전세계를 통틀어서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몇되지 않는
선수중에서 난 단연 태국의 카오사이 캘럭시를 꼽는다.
카오사이는 쌍둥이 형제이다. 형제 모두 세계 챔피언에
올랐지만 내가 말하려는 카오사이는 동생이다. 물론
동생이 기량이 좀 더 우수하고 더 빛나는 자취를 남겼다.
형의 경우는 한국에서 문성길이 어거지로 판정승했다고
태국원정경기에서 흠뻑 두들겨 맞고 케오패당한 그선수다.
그 경기에 진후 문성길은 엄청난 변명으로 일관했고
재대결은 꿈도 꾸지 못했다.
카오사이는 문성길을 두들겨 팬 형보다 기량이 훨씬
뛰어난 선수다. 카오사이에게 나가 떨어진 국내 선수는
무수히 많으며 그중 세계챔피언도 지낸 김용강도 포함돼있다.
이선수는 일단 그 자체만 봐도 상대를 압도하는 무엇인가가
느껴진다. 그 매서운 눈과 단단한 상체, 엄청난 파괴력의 주먹...
이선수는 결국 세계챔피언으로 있다가 더이상 싸울 상대가 없자
자진 타이틀 반납하고 은퇴를 했다.
그당시에도 이선수를 이길 선수가 과연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에서 나올 수 있을까 의문을 가졌었는데 결국 물러날 때를
안 영웅이 물러나는 바람에 카오사이는 영원한 영웅으로 남게되었다.
카오사이 갤럭시. 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이만한 선수가
역대 흔치 않았다고 본다.
hkrhee
제 목:[복싱] 작은 알리 "소트 치탈라다" 관련자료:없음 [3241]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5-07 09:33 조회:444
작은 알리 "소트 치탈라다"
1961년 10월 24일생인 소트 치탈라다는 30전이 갓 넘는
일천한 캐리어를 가지고 있지만, 그가 벌였던 경기들이
워낙에 훌륭했고 화려했기 때문에 마치 5-60전을 싸운 선
수처럼 느껴집니다. 역시 태국 출신의 선수 "베니세 보코
솔"과 함께 플라이급 역대 최강의 선수로 인정받고 있습
니다.
1982년 12월 5일에 프로데뷔한 치탈라다는 첫 경기를 2회
KO로 장식하며 순항을 시작합니다. 유연한 몸놀림과 탁월
한 스피드, 아웃복싱을 밑바탕으로 하되 찬스가 나면 본
전을 뽑고마는 실리적인 복싱. 그 외에도 신인 답지않게
링 플레이등의 잡기에도 능하여 단번에 복싱팬들의 관심
을 끕니다.
프로 데뷔 후 4전 전승 3KO승을 기록하고 있던 치탈라다
는 1984년 최초의 사건을 터뜨립니다.
그해 3월 31일 단 4전의 일천한 전적을 안고 당시 WBC L
플라이급 챔피언인 "장정구"의 4차 방어전 상대로 나섭니
다. 모든 전문가들은 전 챔피언 "일라리오 사파타"와 지
명도전자인 "헤르만 토레스"를 연파한 장정구를 프로전적
4전의 치탈라다가 잡는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을 했지
만, 경기는 치열한 접전이었으며 12회 마지막 종이 울렸
을때는 장정구는 서 있을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고전한 경기였습니다. 결과는 근소한 차이로 장정구의 손
이 올라갑니다만, 경기 후 치탈라다가 경기 운영능력에서
약간 밀렸을 뿐 그 외 기량면에서 장정구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는 세평이 나옵니다. 프로 4전의 선수에게는 굉장
한 힘을 불어넣어준 패배였습니다.
그 후 두 차례 경기를 모두 KO로 장식한 치탈라다는 장정
구에게 패한지 6개월만에 WBC 플라이급 챔피언이었던 "가
브리엘 베르날"을 12회 판정으로 누르고 프로데뷔후 8전
만에 세계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합니다. 챔피언이 된
치탈라다는 논타이틀전 9차 방어에 성공하며 롱런합니다.
치탈라다의 재물이 된 선수로는 전 챔피언 베르날과 한국
의 "최문진""안래기""정병관"등이 있습니다. 최문진 선수
는 어릴적부터 고아원에서 자란 고아 복서로 이 경기 전
에도 WBA J플라이급 챔피언인 "조이 올리보"에게 도전하
였으나 판정패 하고 치탈라다에게도 9회 KO패 함으로써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죠. 저랑 이름이 비슷해서 기억하
고 있어요...^^
1988년 7월 24일. 한국으로 원정한 치탈라다는 한국의 샛
별 "김용강"과의 경기에서 빠른 발을 이용하여 아웃복싱
을 구사한 "김용강"을 잡지 못하고 판정패 하면서 10차
방어에 성공하지 못하고 왕좌에서 내려옵니다. 김용강은
치탈라다의 받아치기를 의식하여 적극적인 공세를 자제하
고 포인트 위주의 신중한 경기를 벌리면서 타이틀 획득에
성공하게 되지요. 적극적인 공세를 펴다가 좌절당한 "안
래기"선수의 교훈을 잘 받아들였던 탓이겠지요.
그러나 아직 치탈라다는 건재했습니다. 김용강에게 패한
후 3연속 KO승을 거두며 복귀를 노리던 치탈라다는 이듬
해 6월 3일, 김용강을 자국으로 불러들여 12회 판정승을
거둠으로써 패배를 깨끗하게 설욕합니다. 그 후 다시 다
섯차례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는데 그 중에는 자신에게 첫
패배를 안긴 장정구와의 타이틀 방어전도 포함되어 있습
니다. 1990년 11월 24일에 한국에서 벌어진 이 경기에서
두 선수는 승패를 가름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접전을
벌입니다. 누구의 손이 올라가도 할 말이 없었을 경기였
지만, 근소한 차이의 판정승으로 치탈라다의 손이 올라감
으로써 6년전의 패배를 설욕합니다.
숙적 장정구를 누르고 의기양양해 있던 치탈라다에게 의
외의 적이 내부에서 나타납니다. 91년 2월에 벌어진 타이
틀 방어전에서 치탈라다는 "무앙차이 키티카셈"에게 생애
첫 KO패(6회KO패)를 당하며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그 후
에도 2연속 KO승을 거두며 복수를 노리지만, 92년 초에
벌어진 키티카셈과의 리턴매치에서도 9회 KO패 함으로써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은퇴를 선언합니다. 통산전적 26승
1무 4패 (17KO)
"샌디 새들러"는 그가 거둔 144회의 승리 중 103번을 KO로 장식하였습니다. 체급을
무시한 최다 KO승 기록에서도 여섯 번째에 해당하지요. "깃털"이라는 뜻의 체급인
페더급에서 이만 하면 경이적인 파괴력입니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단지 주먹만 강한 하드펀처였다고는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1926년생인 새들러는 17세의 어린 나이로 프로에 전향하여 1945년에만 24전을 싸워
열 일곱차레의 KO승을 거두는 등, 1948년 전설적인 복서 "윌리 펩"을 4회 KO로
일축하고 페더급 세계 정상의 자리에 서기 전 까지 93전을 싸우는 정력적인 활동을
벌립니다. 또 펩을 물리치고 18일 뒤에 1차 방어전을 벌리는 가공할만한 체력을
과시하기도 했지요. 여하간 새들러는 데뷔 후부터 타이틀을 차지할때까지인 6년여
동안 거의 100전을 싸웠습니다. 차베스가 울고 가겠네요. 차베스는 거의 20년
가까이 걸렸거든요.
역사에 남을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자신의
진가를 빛내줄 라이벌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알리에게 포먼이나 프레이져가
없었고, 레너드에게 헌즈나 두란이 없었으면 두 선수가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을 수가 있었을까요?
새들러에게 그런 역할을 해 준 선수가 있었다면, 그는 바로 "윌리 펩"일 것입니다.
역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펩과 가진 4차례의 경기는 새들러의 가치를 몇단계
올려놓은 중요한 경기입니다. 펩은 새들러와 싸우기 전까지, 거의 완벽한 선수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새미 앙고트"에게 10회 판정패 하기 전까지 73연승을
달리기도 하였으며, 새들러와 싸우기 전 까지는 그것이 유일한 패배였습니다.
하지만, 새들러는 이 완벽한 복서를 4회 KO로 일축하고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 경기 후 석달 하고도 13일 뒤인 1949년 2월 11일, 뉴욕에서 두 번째 대결은
벌리는데 이번에는 펩이 특유의 빠른 발로 새들러를 희롱한 끝에 15회 판정승으로
설욕을 합니다. 1949년 12월 새들러는 한 체급 아래의 J 페더급 타이틀을 석권한 후
펩과의 3차전을 준비합니다. 1950년 9월 8일 벌어진 펩과 새들러의 경기에서는
새들러가 다시 8회 KO승을 거두고 상대전적 2승 1패로 우위를 점합니다. 두 앙숙은
1951년 9월 26일 마지막으로 만나는데, 이 때에도 새들러가 9회 KO승을 거둠으로써
새들러는 영원한 강자로 남습니다.
1956년 30세의 새들러는 훗날 세계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플레시 엘로르데"를 13회
KO로 꺾었지만, 자동차 사고로 인한 눈 부상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1990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오릅니다. 샌디 새들러....한창 활동을 할 나이에 은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선수였죠. 통산전적 162전 144상 2무 16패 103KO
제 개인적인 생각만으로, 역대 복서 랭킹을 매긴다면 두란을 다섯 손가락 안에 넣을
것입니다. 두란에 관련된 글은 벌써부터 올리고 싶었지만, 프로복싱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두란이기에 아무리 간략하게 적는다고 해도 엄청난 분량이 될
것이기에 겁부터 나서요. 섣불리 시작하지는 못했는데... 뭐....함 해 볼랍니다.
두란은 1951년 6월 16일 생입니다. 우리 나이로 마흔 아홉이지요. 파나마 출생인
두란은 아직까지도 왕성....하지는 않지만,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놀라운
선수입니다.
두란은 1967년..제가 태어나기 1년 전이구만요...3월 8일 열 여섯살의 나이로
"까를로스 멘도자"를 판정으로 물리치고 프로에 데뷔했습니다. 여느 선수와
마찬가지로 4회전 선수로 시작한 두란은 2차전부터 파죽의 3연속 1회 KO승 포함
5연속 KO승을 거두며 강호로 부상합니다. 대부분의 경기를 초반 KO승으로 마무리
지으며 승승장구하던 두란은 26전 26승 23KO승의 무시무시한 전적을 쌓으며 1972년
영국출신의 테크니션 "캔 부캐넌"을 13회 KO로 격파하고 라이트급 세계 정상의
자리에 등극합니다.
그는 세계 챔피언이 된 후 "에스테반 데 헤수스"와의 논타이틀전에서 10회 판정패
당하면서 29연승에서 제동이 걸리지만, 이듬해인 73년 세계 챔피언으로써는 상당히
많은 경기인 여덟차례의 경기를 소화하면서 왕성한 활동력을 과시합니다. 두란은
73년부터 79년 초 타이틀을 반납할 때 까지 라이트급에서 35연승(27KO)승을 거두며
무적을 과시합니다. 그 중에는 그에게 첫번째 패배를 안긴 헤수스를 두 차례 KO로
제압한 전적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복서생활 10여년간 단 한차례의 패배만을 기록한
두란은 결국 79년 초 타이틀을 반납하고 두 체급 석권을 노립니다. 전 세계 챔피언
"카를로스 팔로니모"를 판정으로 제압하고 라이트급 이상의 체급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두란은, 1980년, 그의 캐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1980년 6월 20일 미국 네바다에서 만난 세기의 천재복서 "슈거 레이 레너드"와의
일전이 그것입니다. 당시 레너드는 "윌프레도 베니테즈"를 꺾고 최고조의 기량을
보일때 였으며, 두란은 두 체급을 뛰어넘어 도전해 온 선수로써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레너드의 빠른 발을 두란의 불어난 체중으로는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두란의 15회 판정승. 마치 토끼몰이 사냥꾼과 같이
레너드의 길목을 지키던 두란은 2회에서 레너드를 크게 휘청이게 하는 등, 경기를
리드한 끝에 판정승 함으로써 두 체급의 석권에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두란이
레너드를 꺾자 파나마는 온통 축제의 분위기에 쌓였으며, 대통령은 자신의 전용기를
보내어 두란을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6월 20일은 "두란의 날"이라고 해서 공휴일로
지정되었습니다. 아직까지 공휴일인지는 잘 모르지만요.
30년 넘게 선수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두란에게 있어서 가장 황금기는 바로 부케넌을
꺾고 챔피언이 된 72년 부터, 80년 레너드를 꺾을 때 까지의 약 8년간일 것입니다.
이 동안은 정말 무적을 자랑했었죠.
하지만, 세기의 천재복서는 패배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해 11월 25일,
루지애나에서 두번째로 마주친 두 복서는 접전을 벌렸지만, 1차전과는 달리
두란에게 경기 양상은 불리하게 돌아갑니다. 경기가 초반을 넘어 한창 불꽃은
튀기던 중반 8라운드. 두란은 경기중 갑자기 손을 절레절레 흔들면서 "NO MAS"라고
말하고는 경기를 포기합니다. 한창 땀빠지게 주먹을 섞던 레너드는 잠시 멍~~ 한
표정을 지었으나, 재빨리 두란에게 대쉬하였고, 두란의 행위를 경기 포기 의사로
받아들인 주심은 재빨리 레너드의 기권승을 선언합니다. 경기 후 두란은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은 하였지만,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 경기는 저도 보았지만, 정말 이상했거든요.
약 8년만에 두번째 패배를 기록한 두란은 이듬해 6월에 재기합니다. 갑자기 체중을
불린 두란은 예전처럼 많은 KO승을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정평있는 수비를 바탕으로
여전히 강세를 보입니다. "돌주먹"이라는 별명만 본다면, 두란을 무대뽀식
인파이터로 생각하실 분들이 많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두란의 경기는 가드를
굳히고 신중하게 상대의 모션을 읽는 수비형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스타일의
선수이기 때문에 30년 넘게 선수생활을 할 수 있을른지도 모르지요.
1982년 1월 30일. 레너드가 맹위를 떨치던 웰터급을 건너뛰고 WBC J미들급에
도전합니다. 당시 챔피언은 레너드 못지않은 천재복서 "윌프레도 베니테즈"였는데,
두란은 선전하지만 15회 판정으로 무릎을 꿇습니다. 하지만, 83년 일명 "턱
분쇄기"인 "호세 피피노 쿠에바스"를 4회 KO로 격파하고, J미들급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두란은 1983년, 미국의 "데이비 무어"를 8회 KO로
꺾고 대망의 WBA J 미들급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83년이면 제가 한창
복싱에 취미를 붙을 때 인데요. AFKN에서 그의 경기를 본 기억이 납니다. 데이비
무어는 일본의 "미하라 다다시"를 3회 KO로 누르고 챔피언이 된 선수인데, 한국의
백인철과 싸웠던 "줄리언 잭슨"과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였습니다. 설마 두란이
무어를 꺾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었는데, 두란이 이겼다는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두란은, 라이트급 챔피언을 반납한 이후 두 체급을 건너 뛰고 다시 J
미들급 챔피언이 된 셈이지요. 용기백배한 두란은 한 체급 위인 미들급을 노립니다.
당시 미들급 챔피언은 설명이 필요없는 파이터 "마빈 헤글러"였죠.
83년 11월 10일 벌어진 이 경기... 음...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대단히 재미없는
경기였습니다만, 뭐랄까요. 다이너마이트를 품에 품고 폭팔의 기회를 노리던 두
선수의 경기를 손에 땀을 쥐고 본 기억이 납니다. 결국 헤글러의 근소한 판정승으로
미들급 석권에는 실패합니다.
1984년. 두란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비참한 패배를 당합니다. 6월 15일
네바다에서 벌어진 저격수 "토머스 헌즈"와의 경기에서 두란은 1회전부터 헌즈의
강공에 일방적으로 몰리고 1회 종이 울리고 나서는 자기 코너를 못 찾아갈 정도로
넋이 빠집니다. 2회에 한 차레 다운을 당한 두란은 버텨보지만, 헌즈의
내리찍는듯한 강력한 라이트스트레이트를 안면에 허용하고 실신해 버리면서 2회
KO패로 무릎을 꿇습니다. 수비의 귀재 두란의 생애 첫 KO패 였습니다.
헌즈에게 당한 1패의 충격이 워낙 심해서인지 두란은 그간의 왕성한 활동을 접고
공백기를 가집니다. 85년 조심스럽게 재기를 한 두란은 88년 까지 8차례의 경기를
가져 7승 1패 3KO를 기록하여 "이제 두란은 끝났다"라는 평을 받습니다만, 두란은
결국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는 경기를 가집니다. 이 경기의 결과를 보고 저 역시
두란에게 두번째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89년 2월 24일, 면도날이라는 별명으로, 후에 헌즈를 두 차례나 제압하는 "이란
바클리"를 꺾고 대망의 WBC 미들급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아마 두란이 챔피언으로 마지막 기량을 보여줬던 해가 바로 89년이
아니었나 싶네요. 그해 12월 7일. 1승 1패를 기록하고 있던 "슈거 레이 레너드"와
다시 일전을 벌리지만, 12회 판정패 하면서 9년만에 다시 레너드에게 패를
기록합니다. "UNO MAS"... 레너드와 두란과의 경기에 붙은 표어이지요. 9년전
갑자기 "NO MAS"를 외치면서 경기를 포기했던 두란. 아마 NO MAS는 영어"NO MORE"에
해당하는 말인 모양이지요.
90년 1년간 활동을 하지 않고 보냈던 두란은 91년에 다시 재기하게 되는데
재기전에서 6회 KO패 하는 등 과거의 화려했던 전적에 먹칠을 하는 경기를 하지만,
두란은 패배를 두려워 하지 않고 복싱 자체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그 모습이 더 아름다와 보이는 게 사실이네요. 91년 부터 지금까지의
경기에서는 눈여겨 볼 만한 사항은 없고요. 91년부터 23차례 경기를 가져 16승(9KO)
7패를 기록하였습니다. 특이한 사항이래야 86년 6월 22일에 "헥토르 카마쵸"에게
12회 판정패 한 것과 98년 8월 28일 WBA 미들급 챔피언 "윌리엄 조피"에게 3회 TO패
한 것 정도겠네요. 통산전적 117전 102승 15패 69KO
스트로급 (WBA에서는 미니멈급이라고 함)프로복싱 전 체급 중 가장 짧
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체급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챔피언은 배출한
체급은 아니지만, 리카르도 로페스의 경기를 보고 있으면 "앞으로 이
체급에서 이만한 강자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하는 의문에 쌓이게 됩
니다. 강철로 만든 갈대(스트로). 제가 붙여본 별명이지만, 가장 잘 어
울리는 별명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164의 신장과 신장에 비해 긴 리치(65인치)를 가지고 있는 로페스는 미
니멈급으로는 완벽한 신체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뻣뻣해 보이는
스타일이지만, 실제로는 상대의 펀치를 흘려보낼 수 있는 유연성을 갖
추고 있고 뛰어난 연타와 파괴력, 그리고 상대의 파워를 견뎌내는 터프
함 까지 갖추고 있어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페더급의 천재복서
"살바도르 산체스"의 재래를 보고 있는 듯 합니다.
1967년 7월25일 생인 리카르도 로페스는 18세인 1985년 프로에 데뷔합
니다. 첫 경기에서 "로자시오 헤르난데스"를 3회 KO로 누르고 가능성을
보인 로페스는 85년에만 6경기를 가져서 모두 KO승을 거두어 최경량급
선수로써는 가공할 펀치력을 과시하게 됩니다. 86년 국내 라이벌인 "헤
르미노 라미레스"에게 판정승을 거둘 때 까지 8연속 KO승을 거둔 로페
스는 다른 선수들의 기피대상 1호로 떠올랐지만, 자기 자신은 J 플라이
급으로는 항상 체중이 부족하여 허덕일 정도로 애로를 겪고 있었습니
다. 예전에 한국에 "이성우"라는 스트로급 선수가 있었는데, 그 선수도
스트로급이 생기기 이전에 J 플라이급 선수로 뛰면서 체중이 부족해서
고생을 했었다고 하지요. 스트로급이 생기면서 제 물을 만났지만 "이삼
중"과의 라이벌전에서 판정패 하면서 그만 야심을 꺾이고 말았죠.
음...말이 샛다.
87년 6월 14일, 한국의 "이경연"이 일본의 "가와카미 마사하루"를 2회
KO로 제압하고 IBF 미니멈급 챔피언이 되면서 최경량급인 스트로급의
역사가 시작되자, 로페스도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체급을 만난 셈이
된 거죠. 하지만, 그의 기량이 워낙 탁월해서 아무도 그의 도전을 받으
려 하지 않았습니다. 로페스가 일본으로 원정하여 국내 팬들에게도 낯
이 익은 일본의 "오하시 히데유키"를 5회 KO로 일축하고 WBC 스트로급
정상의 자리에 오른 것은 1990년 10월 25일로 그가 프로에 전향한지 6
년째 되는 해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전적은 27전 27승 20KO승 으
로, 최경량급으로는 엄청난 전적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현재까지 22차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헤비급 챔피언 "조 루
이스"가 가지고 있는 세계 최다 타이틀 방어기록(25차)를 약 50여년만
에 경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그의 타이틀 방어에 재물이
된 선수는 전 세계 챔피언 이경연(판정승), 화려한 아마 전적을 가지고
있던 오광수(9회KO)등이 있으며, 1998년 3월 7일에 "로잔도 알바레스"
와의 WBC, WBA 통합 타이틀전에서 7회 부상으로 무승부를 기록 함으로
써 46연승의 기록이 깨지기는 했지만, 11월 13일의 재대결에서 근소한
차의 판정승을 거둠으로써 WBC와 WBA를 공히 석권하여 명실상부한 최경
량급의 최고수임을 입증하였습니다. 지금으로써는 그에 필적할 만한 도
전자가 보이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로페스가 "조 루이스"의 기록을 깰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통산전적, 48전 47승 1무(35KO)
제 목:[복싱] 최고의 선수와 "이만수"선수 관련자료:없음 [3266]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5-10 14:17 조회:717
요즘, 야구의 이만수 선수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역대 최고의 선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네요. 복싱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표적인 복싱
전문지 '링'지를 포함해서 거의 매년마다 체급을 무시한 역대 최고의 선수를 뽑고는
하지요. 선수의 선정은 전문가들의 손을 빌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복싱 팬 들의
투표로 이루어지는 듯 합디다.
약간씩의 변동은 있지만, 대체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선수는 한정되 있는
편입니다. "무하마드 알리""슈거레이 로빈슨""슈거레이 레너드" "아치 무어" 그리고
어느 복싱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현역으로는 이례적으로 "에반더 홀리필드"가 한
자리 차지하고 있더군요.
알리의 팬이나, 지난번 홀리필드의 경기를 보고 실망하신 분들은 다른 의견을
가지실 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알리가 홀리필드보다 기량면에서 그렇게 뛰어난
선수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알리가 빠르다고는 하지만 홀리필드도 결코 만만치
않으며, 푸트웍에서는 알리가 뛰어나 보이지만, 연타능력에 있어서는 홀리필드가 한
수 위라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노쇠한 나이에도 홀리필드를 쩔쩔메게 만들었고, 무어를 눕혔던 "조지 포먼"이 한창
팔팔한 시절에 알리에게 패 하기도 했지만, 알리 역시 전성기에 프레이져에게
다운을 빼앗기면서 판정패 했고 "캔 노턴"에게 턱이 박살나면서 졌으며, 애송이
"레온 스핑크스" 에게 판정패 했었죠.
또한 고려해야 할 점은, 헤비급 선수들이 알리의 시대보다 훨씬 대형선수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리딕 보위"나 "레녹스 루이스"와 같은 거구의 선수들이 알리
시절에는 드물었을 뿐만 아니라, 거구의 선수들의 기량도 사실 변변치 않았죠.
"록키 마르시아노"나 "조 프레이져"같은 선수들도 키가 180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하니, 요즘으로써는 명함 내밀기도 힘든 체구입니다. 포먼도 장신의 선수이기는
했지만, 알리와의 경기를 보시면 레녹스 루이스 처럼 떡 벌어진 선수는 아닙니다.
요즘은 살이 붙어서 엄청나지만.... 각설하고 알리가 90년대를 뛰었으면, 과연 그가
뛰었던 70년대 만큼의 경기를 할 수 있었는가는 한 번쯤 의심해 볼 만 하다는 말씀
올시다.
근데, 문제는요. 그런 의심이 가는데도 불구하고 저 역시 알리를 역대 복서중 단연
첫 손가락에 꼽는 이유는 말이죠. 알리가 세계 복싱팬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복서였다는 점입니다. 뛰어난 기량과 더불어 팬들을 즐겁게 하는 경기를 할 줄
알았죠. 노턴에게 턱이 부서지고 나서도, 특유의 떠벌이 기질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고, 링을 떠난지 20년 가까이 지난 이 순간까지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왕년 최고의 스포츠맨으로써, 파킨슨씨 병에 시달리며 떨리는 손으로도 아틀란타
올림픽 성화점화자로 나왔을 때, 모든 이들의 갈채를 보면서 "역시, 최고의 선수는
알리"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훌륭한 프로선수는 가장 사랑받는 선수입니다. 최고의 선수를 가리는데 있어서
전적도 중요하고 그 선수에 대한 각종 데이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선수가 과연 사람들을 얼마나 즐겁게 해 주었는가를 판단하여야 합니다. 그 선수가
떠난 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 하고, 그를 사랑하는가가 역대
최고의 선수를 선정하는 데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될 것입니다.
야구의 이만수선수.. 제가 알고 있기로도 그의 투수 리드는 약간 문제가 있었고,
타격도 그에 못지 않은 포수가 있을른지도 모르지만요. 그런건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온 힘을 실은 스윙이 헛돌아서 삼진을 당하여도 박수가 터져
나왔던 이만수 선수.....역대 최고의 포수로써 손색이 없는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제 목:[복싱] 첫 일본원정 챔피언 "유제두" 관련자료:없음 [3277]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5-12 09:42 조회:481
아시아에서, 아마나 프로를 통 틀어, 중량급에서 한국만큼 많은 인
재를 배출한 나라도 없어 보입니다. 물론 라이트급 이
하의 경량급에서야 태국, 필리핀, 일본등도 강국의 대
열에 들어서고 명선수를 많이 배출했지만, 한국은 아
시아 출신 최중량급 세계 챔피언인 박종팔 백인철(S
미들급)을 포함한 중량급에서 챔피언과 많은 세AT
랭커
를 배출하였습니다. 타 스포츠도 그렇지만, 한국이 운
동선수의 체질면에서는 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나라
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야구나 축구 선수들의 체
격도 다른 아시아 출신 선수들보다는 우수해 보이더군
요.
제 선입견 탓인지는 모르지만, 한국 내에서도 호남지
역에서 우수한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는 것 같습니다.
프로야구의 해태도 그렇고... 참고로 전 대구 출신입
니다. ^^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유제두
선수가 바로 전남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유제두 선수는 한국 선수로써 일본에 원정하여 승리를
거두고 세계 챔피언이 된 최초의 선수입니다. 그 후에
는 무구루마를 누르고 챔피언이 된 박찬영, 그리고 오
니츠카를 꺾고 챔피언이 된 이형철이 있었죠. 또 있나?
음.... 또 있네요. 가스가이 켄을 누르고 IBF챔피언이
된 전주도..... 음..... 더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1948년 4월 25일생인 유제두 선수는 1968년에 프로로
전향합니다. 10월3일 "최호동"선수를 3회 KO승을 거둔
유제두는 약 3주 후에 "김병기"와 2차전을 가져서 판
정승을 거두는 등 6연승 1 KO승을 거두면서 유망주로
떠오릅니다.
사실, 저 자신도 유제두 선수의 경기가 잘 기억이 나
지 않기 때문에, 그 선수의 스타일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중량급 선수 치고는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선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
다. 들은 바 대로 말씀드리자면 착실한 기본기를 바탕
으로 테크닉 위주의 경기를 벌인 선수라고 하데요.
여하간, 6연승을 거두던 유제두는 69년 "임병모"에게
7회 KO패를 당하며 첫번째 검은별을 달지만 이 패배가
약이 된 탓인지, 이전보다 한결 성숙된 경기를 선보입
니다. 첫번째 가진 국제전에서 "알만도 보니퀴트"를
10회 판정으로 제압하는 등 다시 연승행진을 이어가던
유제두는 프로데뷔 3년만인 71년 한국 미들급 타이틀
을 획득합니다. 여세를 몰아서 그해 7월 24일 "카시우
스 나이토"를 6회 KO로 제압한 유제두는 타이틀을 무
려 열 여섯차례나 방어하면서 75년까지 롱런을 합니
다. 임병모에게 패한 이후의 전적은 32전31승 1무승부
에 20KO승 이었습니다.
4년동안 동양무적을 과시한 유제두는 1975년에 한 체
급 아래인 J미들급 세계 챔피언인 일본의 "와지마 고
이찌"를 노리고 일본으로 원정을 떠납니다. 6월 5일에
벌어진 이 경기에서 유제두는 와지마를 농락한 끝에 7
회 KO승을 거두며 WBA J 미들급 세계타이틀을 쟁취합
니다. 건국이후 한국에서 세번째 세계 챔피언이 탄생
하는 순간이었으며, 74년 육영수 여사 시해사건 이후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던 일본에서 일군 승리여서 국
민들의 기쁨은 더욱 컷습니다.
요즘과 비교하면 조금 이상한 점이 있는데요. 보통 동
양챔피언이 세계 도전을 할 때에는 타이틀을 반납하는
것이 보통이지요. 하지만, 유제두는 동양 타이틀을 그
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올랐습니
다. 세계 챔피언이 된 유제두는 그 해 10월 4일에는
일본의 "오자키 노부요시"를 6회 KO로 꺾고 동양타이
틀 17차 방어에 성공하며 12월 10일에는 다시 일본 시
즈오카로 원정하여 "미사코 마사히로"를 6회 KO로 제
압하며 세계 타이틀 1차 방어에 성공합니다.
이듬해인 1976년, 1월 17일에 일본의 "사카이 사부로"
와 가진 논타이틀 전에서 8회 KO승을 거둔 유제두는 2
월 17일 전 챔피언 와지마와 타이틀 2차 방어전을 벌
립니다만, 주먹 한 번 써보지 못하고 15회 KO패를 당
하며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당시에 유제두 선수의 경
기가 예전과는 달리 워낙 부진해서, 혹시 약물에 중독
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까지 사기도 했습니다. 하
지만, 지금 보니 선수 관리에도 문제가 있지 않았나
싶네요. 1차 방어전을 11월 10일에 갖고 이듬해 1월
17일에 논타이틀전을 벌린 후 2월에 타이틀 방어전을
갖는다는 것이 사실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패배의 충격이 컷던 탓인지, "알베르토 크루즈"와 가
진 동양타이틀 18차 방어전도 무승부를 기록하며 간신
히 방어해 내지만, 그 후 다시 연승행진을 이어가며
정상을 넘봅니다. 하지만, 서른을 넘기면서 기량도 점
점 하향곡선을 그리면서 78면 6월6일, 논타이틀 전에
서 신성 "주 호"에게 충격적인 10회 KO패를 당하고 맙
니다. 그 후 "강형원"을 상대로 한 차례 동양 타이틀
방어전을 더 갖기는 하지만, 한계를 느끼고 타이틀을
자진 반납하고 은퇴를 선언합니다. 통산전적 55전 50
승 2무 3패 (29KO)
순전히 제 기억에만 의존해서 박종팔 선수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
었는데요. 잘못된 구석도 많이 있었고, 자료로써 별 가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삭제되었네요.
박종팔은 백인철과 함께 한국...아니 아시아를 대표하는 중량급 선수
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챔피언 이었습니다. 물론, 한국 프로복싱에
남긴 족적이 장정구나 유명우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앞으로 제2 제3의 장정구 유명우는 나올
수 있지만, 제2, 제3의 박종팔은 나오기가 어렵지 않은가 라는 생각
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인철이 80년 KBS 신인왕전 출신인 반면, 박종팔은 그보다 3년 빠른
77년 MBC 신인왕 출신입니다. 77년도 신인왕전은 한국 프로복싱에 일
획을 그엇다고 할 만큼 많은 유망주들을 배출하였습니다. J 플라이급
의 장정구, 플라이급의 김태식, J 밴텀급의 김철호, J 웰터급의 이상
호 그리고 미들급의 박종팔... 대단하죠? 박종팔은 중량급 선수로써
상당히 몸이 가벼웠고, 눈이 좋았으며 주먹에 스넵이 들어가 있어서
툭~ 던지는 듯한 주먹에도 많은 선수들이 주저앉아 버렸었죠.
이런 박종팔이었지만, 26연속 KO승을 기록했던 백인철과는 달리 데뷔
초에 일찌감치 시련을 겪게 되지요. 1977년 3전3승 2KO승을 거두며
신인왕을 거머쥐지만, 이듬해 "강성환"과의 경기에서 8회 무승부를
기록하더니, 6월 14일에 벌어진 "강현원"과의 경기에서는 1회에 KO로
무릎을 꿇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본 원정 경기에서 "고지마 가쓰오"
를 1회 KO로 제압하고 컨디션을 회복합니다. 사실 이 일본원정이 박
종팔에게는 대단한 자신감을 심어 줬던 경기였던 것 같습니다. 다음
경기에서 강호 "최창백"을 3회KO로 제압하면서 한국미들급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사실, 당시에는 미들급의 선수층이 그렇게 두껍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에서 박종팔에 필적할 만한 선수가 없었습니다.
이듬해인 1979년에는 여섯차례 국제전을 모조리 초반 KO로 장식하며
"캐시우스 나이토"를 2회 KO로 제압하고 동양 미들급 챔피언의 자리
에 오르며 세계 정상으로 가는 두번째 고비를 넘습니다.
바야흐로 박종팔의 최전성기가 열린 것입니다. 박종팔은 강현원에게
1회 KO패를 당한 이후 19연속 KO승을 거두는 쾌조를 보입니다. 그 가
운데는, 11차례의 동양 타이틀 방어도 포함되어 있고, 한국의 라이
벌 '이상호'를 9회 KO로 제압한 경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 제
기억에도 박종팔의 11차 방어전이었던 태국의 터프가이 "마나 프렌차
이"전이 남아 있는데요. 우직스러울 만큼 인파이팅을 구사하던 프렌
차이를 거의 가지고 놀면서 11회 KO로 제압한 경기는 정말 압권이었
습니다. 경량급 같은 스피드와 몸놀림을 보여줬지요.
그해 11월. 박종팔은 대망의 꿈을 안고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베네주
엘라의 카라카스로 날아갑니다. 박종팔은 당시 세계랭킹 1위에 올라
있었지만, 미국 내에서는 지명도가 전무 하였기 때문에, 세계 타이틀
도전권을 놓고 당시 랭킹 2위였던 "풀헨시오 오벨메이아스"와 도전자
결정전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당시 박종팔의 기량이 완숙하였기 때
문에 승리를 예상한 전문가들이 많이 있었으나, 세계의 수준은 동양
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박종팔은 워낙 눈이 빠른 선수였기 때문에, 동양 선수를 상대로 거의
안면은 노출 시킨 가운데 경기를 하여도 거의 펀치를 허용하지 않았
지만, 오벨메이아스에게 똑같이 상대했던 것이 패인이었습니다. 박종
팔은 초반부터 강도와 스피드에서 동양권과는 차원이 다른 오벨메이
아스의 주먹을 대책없이 허용한 끝에 2회 한차례 다운을 포함하여 8
회 KO로 무릎을 꿇으며 세계 타이틀 도전 일보직전에서 기회를 날려
버리게 됩니다.
국내로 돌아온 박종팔은 다시 몸을 추스리고 세계도전의 기회를 엿봅
니다. 역시 동양권에는 적수가 없어서 1982년 가진 다섯차례의 경기
를 모두 KO로 장식하면서 컨디션을 회복하는 듯 보였는데....시련은
다시 한번 찾아오게 되지요.
당시 국내에서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박종팔의 목을 죄어오던 "나경민
"이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60년 생인 박종팔보다 나이는 훨씬 많았
던 것으로 기억되는데요. 스피드야 박종팔에 한참 못미쳤지만, 힘과
주먹에서는 박종팔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였습니다. 83년 5월 29일 팬
들이 장충체육관을 가득 채운 가운데 양 선수는 경기를 가졌는데, 4
회 이후 힘으로 밀어붙인 나경민에게 박종팔은 어이없이 7 KO패를 당
하고 맙니다. 경기 후 박종팔은 초반에 나경민의 글러브 엄지 손가락
부분에 눈이 찔려서 경기를 진행 할 수가 없었다고 말하며 강력하게
재 대결을 요구하였고 그해 10월에 벌어진 재대결에서는 4회 KO승을
거둬 치욕적인 패배를 설욕합니다. 박종팔 - 나경민의 2차전은 너무
재미있게 봐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경기는 박종팔이 압도하였
지만, 2회 한때 나경민의 주먹에 흔들리기도 하는 등, 손에 땀을 쥐
게 만드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이었습니다. 이런 경기들만 벌어진다면,
프로복싱이 왜 인기가 없겠습니까.. 쩝~
국내 라이벌 나경민을 제압한 박종팔은 다시 한번 정상의 자리를 노
리고 , 기회는 의외로 쉽게 찾아옵니다. 당시 IBF라는 신설 기구가
창설되었고, 미들급과 L헤비급 사이에 S 미들급이라는 새로운 체급이
신설되게 됩니다. 신설 체급이었기에 비교적 선수층이 얇았고 박종팔
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습니다. 당시 초대 챔피언은 "머레이 서
덜랜드"선수로, 박종팔과 정말 같은 체급의 선수인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거구였습니다. 거의 박종팔의 2배는 되어 보이더군요. 서덜랜
드는 미국내에서의 지명도도 대단하여 "토머스 헌즈""마이클 스핑크
스"같은 선수들과도 대결하였습니다. 헌즈나 스핑크스 같은 선수는
아무하고나 경기를 하지 않습니다. 비록 헌즈에게는 판정패 당하고
스핑크스에게는 1차례 판정패와 1차례 KO패를 기록하였지만, 이런 선
수들과 주먹을 섞어 봤다는 것 만으로도 서덜랜드의 기량은 인정해
줄 만 했습니다. 1984년 7월 22일에 서울에서 벌어진 서덜랜드와의
경기는 시작부터 치열한 접전이었습니다. 2회에 서덜랜드에게 안면연
타를 허용한 박종팔은 한 차례 다운을 당하지만, 곧바로 반격에 나서
서 8회 한차례 다운을 빼앗고 11회에 코너로 밀어붙여 무차별 연타를
퍼부은 끝에 KO승을 거두고 꿈에 그리던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올랐습
니다.
체급신설 초기라 선수층이 얇았던 까닭에, 박종팔은 비교적 손쉬운
방어전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한가지 빼 놓을 수 없는 경기가 있는
데요. 바로 "노창환"이라는 선수와 가진 두 차례 논타이틀 전입니다.
승리한 경기보다는 패배한 경기가 더 많았던 노창환이었지만 맷집하
나는 정말 가공할 만 했습니다. 때려도 때려도 데미지를 받지 않는
선수. 경기 초반부터 박종팔은 일방적인 공격을 퍼부었지만, 노창환
은 무수한 강타를 허용하고도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경기 후반에
는 박종팔 앞에 안면을 그대로 보여주며 "계속 쳐보라"는 의사를 보
여 박종팔을 질리게 할 정도였지요. 결국 경기는 박종팔의 판정승으
로 끝났지만, 박종팔은 체력도 고갈된 데다 손 부상까지 입고 링을
내려갔고, 노창환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셰도우 복싱을 하면서 박종
팔을 희롱하였습니다. 박종팔의 주먹에 노창환이 깨진것이 아니라 노
창환의 안면에 박종팔의 주먹이 깨진 샘이었지요. ^^ 이듬해 벌어진
노창환과의 재 대결에서는 9회 KO승을 거두며 간신히 챔피언으로써
체면치레를 하지만, 박종팔로써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선수였을
겁니다.
참고로, 노창환은 그 후 J 미들급 동양챔피언 백인철에게 도전했다가
5회 KO로 일축 당하면서 "복싱은 실력으로 하는 것"임을 증명하게 됩
니다. 저는 백인철에게 안면연타를 허용하고 처음으로 노창환이 "아
프다"는 표정을 짓는 걸 봤습니다. 으~~~
박종팔은 간간히 논타이틀전을 가지면서 타이틀 방어전을 갖는데, 그
상대로는 미국내에서 50전 이상의 경기를 가졌던 "비니 커토"와의 2
연전, "마빈 맥""덕 셈"과의 경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미국으
로 원정한 커토와의 3차 방어전에서 15회 KO승을 거두면서 한국 선수
로는 유일하게 미국에서 세계 타이틀전을 가져서 승리한 선수로 기록
됩니다.
뭐니뭐니해도 박종팔이 가장 고전한 경기는 "린델 홈즈"와의 두 차례
방어전이었습니다. 홈즈는 당시 WBC, WBA, IBF 모든 기구에서 상위랭
커로 랭크되어 있었으며, 주먹과 스피드 기량면에서 최정상급 선수였
습니다. 86년 7월 6일 벌어진 첫번째 대결에서 박종팔은 2회에 버팅
을 당하면서 무승부로 간신히 타이틀을 방어합니다만, 이듬해인 87년
5월 3일에 가진 2차전에서는 최악의 악전고투를 벌립니다. 5회 한 차
례 다운을 빼앗기며 10회까지 일방적으로 밀리던 박종팔은 11회 부터
반격을 시도하여 14회 홈즈를 한 차례 그로기 까지 몰고 간 끝에 간
신히 판정승을 거두고 타이틀 방어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사실....
박종팔이 이겼다고 보기는 어려운 경기였습니다. 홈 어드벤티지가 좀
심하게 적용된 경기였지요. 일방적으로 밀리던 10라운드까지의 채점
에서 동점이 나왔다고 하니....
어찌 되었든.... 난적 홈즈를 제압한 박종팔은 "엠마누엘 오티"를 4
회 KO로 꺾고 타이틀 8차 방어에 성공한 후, 타이틀을 반납하고 WBA
S 미들급 타이틀을 노립니다. 당시 IBF는 국내에서 WBC나 WBA만큼 대
접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한국 프로복싱을 망치는 암적
인 기구로까지 매도당하고 있던 터 였습니다. 타이틀을 반납한 박종
팔은 87년 12월 6일 "헤수스 가야르도"와 가진 WBA S 미들급 타이틀
결정전에서 1회 한차례 다운을 당하지만, 2회에 역전 KO승을 거두고
WBA 정상의 자리에 섭니다.
1988년, 한 차례 방어전을 가져 5회 KO승을 거둔 박종팔은 7년전 세
계 정상의 문턱에서 그를 좌절시킨 숙적 "풀헨시오 오벨메이아스"와
2차 방어전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오벨메이아스는 여전히 강했고,
박종팔은 3차례나 다운을 당한 끝에 12회 판정패 당함으로써 다시 한
번 피눈물을 흘리며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옵니다. 그해 10월 22일에
는 국내 라이벌 백인철과 라이벌전을 벌리지만, 역력한 체력의 한계
를 보이며 9회 KO패 당하면서 링을 떠나게 됩니다. 통산전적 53전 46
승 2무 5패 40KO
제 목:[복싱] 외유내강형 챔피언 "사무엘 세라노" 관련자료:없음 [3299]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5-19 12:12 조회:333
금방 무너질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부실해 보이기만 하는 것이, 의외
로 오래 견뎌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경우가 있죠.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안은 "저렇게 부실해서 금방 넘어질 것"이라며 비웃음을 사지만,
무너진 후에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오래 버티고 있었는가를 깨닫고 놀
라는 것이죠.
프로복싱이 세계 프로스포츠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던 70년대에 "사무
엘 세라노"만큼 챔피언 대접을 못 받았던 챔피언이 있었을까 싶습니다.
항상 2류로 취급 받았지만, 그는 한차례 타이틀 재 탈환 한 것을 포함하
여 통산 열 네번이나 세계 타이틀을 지켜냈죠.
세라노는 1952년 11월 7일 코스타리카에서 태어났습니다. 약관 열 일곱
살이 나이로 프로에 데뷔한 세라노는 첫 경기에서 4회 ko승을 거두며 좋
은 출발을 보이며, 72년에 자국의 라이벌 "프란시스코 빌라카스"에게 12
회 판정패 할 때까지, 15연승을 기록합니다.
그는 프로 데뷔 7년만에야 처음으로 세계 타이틀 도전의 기회를 잡게 되
는데요. 그때까지의 전적을 보시면 여러분들도 그가 왜 그렇게 대접을
못 받았는지를 이해하실 겁니다. 29승 1패. 물론 전적은 흠잡을 곳이 없
었지만, 29승 중 KO승은 단 7차례 뿐이었습니다. j 라이트급 선수로써는
사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KO율 이었죠. 지나칠 정도로 신중한 경기운영
으로 그의 경기는 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1976년 4월 13일, 하와이 호놀루루로 원정한 세라노는 필리핀의 "벤 빌
라폴로"와 격돌합니다. 빌라폴로는 "김현치"와의 대결로 한국팬 들에게
도 낯이 익은 선수이죠. 세라노는 접전을 벌립니다만, 두 선수중 어느
한 선수도 우세를 잡지 못하고 무승부를 기록하며, 세라노는 세계 정상
등극에 실패합니다. 하지만, 그 해 10월빌라폴로를 자국으로 불러들인
세라노는 15회 판정승을 거두면서 대망의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던 세평과는 달리 세라노는 9차 방어까지 성공합
니다. 원래, 약체로 평가받는 챔피언이 새로 등극하면, 각지에서 도전자
들이 속출하게 되지요. 한국에서도 두 명의 도전자가 세라노를 노리고
날아갑니다. 테크니션 "김태호"와 일발필도에서 역대 최강이라는 "오영
호"가 그 주인공입니다만, 각각 10회와 9회 ko로 패하면서 좌절됩니다.
오영호 선수는 4회와 8회에 세라노를 그로기까지 밀어붙였지만, 기량에
서 세라노에게 미치지 못하여 안타깝게 KO패 당했습니다.
약 4년간 타이틀을 지키던 세라노는 80년 8월 2일 일본의 "우에하라 야
츠네"에게 6회 KO패 하면서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그러나 특유의 잡초
근성으로 이듬해 일본까지 원정하여 가진 우에하라와의 재 대결에서 15
회 판정승을 거두며 설욕하고 타이틀에 재등극 하지요. 그 후 83년에 팔
팔한 젊은이 "로저 메이웨더"에게 8회 KO패 당하면서 타이틀을 상실합니
다. 이듬해 자국내에서 한 차례 경기를 가져 1회 KO승을 거두기는 합니
다만 실질적인 은퇴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처음에도 언급했지만, 어느 누구도 세라노를 1급 챔피언으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세계 타이틀을 도합 열 네차례나 방어해 냈다는 사실
은 한번 되씹어 볼 만 하네요.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
든요. 철저한 자기 위주의 복싱. 그리고 신중하게, 상대에게 현혹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량을 100% 발휘 한다는 것. 사실 '자신의
기량을 100%발휘 한다는 것'도 하나의 능력입니다. 세라노는 그런 선수
가 아니었나 싶네요.
이 끈질긴 복서는 1996년..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재기전을
가져서 10회 판정승을 거두고 97년에도 한 경기를 더 소화해 냅니다. 참
놀라운 일이죠. 생각해 보세요. 홍수환씨 보다 두살 어린 선수가 2년전
까지 선수생활을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복싱선수라는 관점을 벗어나서도 배울 것이 많은 선수라는 생각이 듭니
다. 통산전적 57전 51승 1무 4패 17KO 1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