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마, 톤즈
-수단의 슈바이처, 고(故) 이태석 신부님이 남긴 유일한 저서,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독후감-
/ 도월화
그는 한 그루 대나무였다.
자신을 온전히 비웠기에 대신 성스러운 기운으로 가득 차게 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자기를 벗어나 자유로이 성령께서 활동하시도록 하며 짧은 한세상을 불태우고 떠나갔다.
고(故) 이태석 신부*는 일찍이 인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뒤늦게 신학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의사라는 현실적으로 장래가 보장된 직업을 가졌으나 어려운 사제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저 눈물만 흘리는 어머니께 그는 효도를 못해서 죄송하지만 하느님께 자꾸 끌리는 걸 어떡하느냐며 함께 울었다고 한다.
우리 작은애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안드레아는 커서 신부님이 되거라."라고 수녀님이 말씀하셨다. 성당에서 복사 서고 옷을 갈아입는 제의실에서 들었던 이야기이다. 하기야 두 아들 모두 어릴 적 신부님께서 미사 집전하실 때 옆에 서서 하얀 옷 입고 도와드리는 복사 섰으니, 그 이전에 큰아이도 들었던 권면이다. 그 때 형의 반응은 신부님 아무나 되는 거 아니니 권하지 말란다. 반면에 동생은 진지하게 나에게 의논해왔다. 나는 기도 중에 예수님께 여쭤보라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기도 중에 물어본 후에 저한테 전해주시면 그대로 할께요."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네가 직접 기도해서 정해.” 라고 말했다. 자신을 비우지 못하고 나로 가득 차서 하느님의 이끌림에 무딘 이 엄마가 한 대답은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었고, 그 논의는 그렇게 잊혀져갔다.
얼마 전 본당신부님께서 주일미사 강론 중에 성직자가 되고 싶은 청소년들 손들어 보라고 하시자 온 성전이 잠잠했다. 신부님께서는 사제가 부족해질 앞날을 염려하셨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울지마, 톤즈'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를 감격시킨 고 이태석 신부님 같은 분이 나타났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 아닌가. 대체 그분의 내면세계에 남다르게 내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무척 궁금했다. 마침 타계하기 바로 전에 남긴 유일한 저서가 있어서 읽어보았다. 이 신부님이 쓰신 수필집의 제목은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2010년 생활성서사 출간)이다.
그는 한 송이 국화였다.
봄이면 철따라 다투어 꽃이 피지만 다 지고 마는 가을에 피어나는 국화꽃처럼 메마른 이 시대를 감동으로 적셨다. 이태석 신부님은 의사 사제로서 뿐만이 아니라, 건축가 교육자 음악가로서 아프리카에 혼신을 다 바쳤다. 섭씨 40도에 육박한다면 가만히 숨만 쉬고 있기도 어려운 기온이다. 그 불볕더위에 톤즈 거주민과 함께 톤즈 강의 모래를 실어다 손수 벽돌을 찍어 병원을 짓고 학교를 지었다. 스스로 설계 도면부터 그렸다. 의료품 보관 할 냉장 설비를 위해 지붕에 태양열 발전시설도 직접 설치했다. '울지마, 톤즈' 제작자(KBS 구수환 PD)는 수단에 가서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도 근래에 이 책만큼 읽으면서 많이 울어본 도서가 없었다. 수없이 세면대에 들락거리며 울다 지쳐 나중에는 그만 읽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깊은 감명의 자기장 속으로 침잠해 한동안 눈물을 흘린 채로 눈을 감고 미동도 않았다.
그는 한 송이 난초꽃이었다.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를 읽어갈수록 서늘한 난향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단전호흡 할 때처럼 상쾌한 바람이 코끝에서 배속까지 통했다. 덧없는 현세에 목매고 사는 내 모습이 보인다고나 할까. 보다 큰 기쁨, 감사, 찬미의 노래가 흐르는 세상의 청사진을 이태석 신부님의 난초 향기 고고한 마음속을 통해 보여주는 듯 했다. 바로 그곳에 천국의 열쇠가 숨겨져 있는 게 아닐까.
수단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님은 2001년 사제서품을 받고 자청해서 수단으로 갔다. 남 수단은 내전 중이고 아주 위험한 곳이라 누구든지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가 정착한 톤즈 마을은 오랜 내란 중에 다치거나 아파도 치료를 못 받고 죽어가고, 오염된 강물을 마시는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 이 신부는 의사로서 낮이고 밤이고 짜증 한번 내지 않고 기꺼이 병자들이 찾아오면 치료해 주었다.(1일 진료 300명 이상) 붕대로 싸매 준 맨발의 나환자들이 계속 다치자 몸소 그들의 변형된 발에 대고 본떠 꼭 맞는 신을 제작의뢰하기도 했다. 나환자들은 고난 속에서도 보통 사람보다 더 민감하게 감사할 줄 안다고 한다. 그는 책에서 나환자들의 신비스러운 능력에 대해 오히려 감사한다고 썼다.
' 나로 하여금 소중한 많은 것들을 뒤로 한 채 이곳 수단까지 오게 한 것도, 열악한 환경이지만 후회 없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것도, 모두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 주위로 모이게 하고 주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만드는 보잘것없는 나환자들의 신비스러운 힘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게 된다.
이러한 나환자들의 특별한 능력을 보면서, 식물인간, 뇌성마비, 뇌졸중, 자폐증 등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환자 가족들과 함께하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가끔 묵상을 하게 된다. 환자들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아픔을 가슴에 품고 평생 그들을 보살펴야 하는 가족들의 고통은 당해보지 않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멍에나 십자가가 이 세상에 또 있으랴.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이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미치는 힘은 때로는 상상을 초월한다. 가족을 하나 되게 하고 가족들에게 참된 신앙을 갖게 하며 가족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깊게 체험하게 하는 그들의 힘은 신비스럽기 이를 데 없다.
물론 시간도 많이 걸리고 엄청나게 큰 고통의 문을 통과해야겠지만, 우리에게 뜻밖의 큰 은총의 선물을 주는 그들에게 우리가 오히려 감사해야 하고 그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하느님께도 감사드려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이태석 저,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중의 「천국의 열쇠」에서-
이처럼 기쁨에 감사하는 그 이상으로, 고통을 특은으로 여겨 더 깊이 감사하는 이태석 신부의 눈으로 볼 때 세상에 감사하지 않을 것이 어디 있겠는가. 감사에는 찬미가 따르지 않는가. 감사와 찬미는 이신부의 사랑의 원천이 아닌가. 이태석 신부님의 사랑 에너지의 비결이 언뜻 글 행간에서 어렴풋이 와 닿는 듯한 순간, 나는 이 책에 나오는 ‘마음의 신분증’이라는 말과 가진 것 없이도 기쁘게 사랑을 나누는 삶이 떠올라 부끄럽고 다시금 눈물 났다. 여태껏 내가 해 왔다고 생각했던 사랑과 희생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일 뿐이 아니었던가. 이태석 신부와 같이 난초 향내 그윽한 열린 사랑, 열린 희생은 아니지 않는가. 나는 그나마 내 가족만 생각하는 닫힌 사랑, 닫힌 희생에 마저 조금만 힘들면 안달하지 않았던가.
그는 한 송이 매화였다.
톤즈 마을 아이들은 가난과 질병과 내란에 상처 받아 마음이 꽁꽁 얼어있었다. 그곳에 성당을 먼저 지을지, 학교를 먼저 지을지 망설였을 때 이 신부는 예수님도 학교를 먼저 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는 학교를 건립하고 브라스밴드를 조직한다. 아프리카 인의 피에는 악곡을 쉽게 익히는 유전인자가 흘렀다. 이 신부가 지휘하는 35인조 브라스밴드는 남 수단 대통령 초청까지 받게 된다. 그 지역에서 하나밖에 없는 유명한 악대가 되었다. 후원받은 원색 유니폼을 입고 ‘아주 특별한 여행’을 하며 음률로 교감했다. 청소년들의 싸늘하게 굳은 정서를 녹이기 위해 그들의 손에 들고 있던 무기 대신 악기를 쥐어 준 것이다. 고(故) 이태석 신부님의 죽음을 믿지 못 하겠다는 브라스밴드는 선배가 후배에게 지도를 하며 연습을 계속 한다. 어린 그들도 무기 대신 악기를 쥐어 준 뜻을 알고 있다. “총과 칼을 녹여 그것으로 클라리넷과 트럼펫을 만들면 좋겠다.”고 표현하는 아이들에게서 이 신부는 주님의 흔적을 진하게 느꼈다고 썼었다. 남겨진 사진에서 온갖 역경에도 음악을 즐기며 언제나 활짝 웃고 있는 그는 차가운 눈 속에 꽃잎을 드러내는 한 송이 매화였다.
오지 배낭 여행자가 며칠을 견디기 힘들다는 열악한 환경에서 마을 살림살이가 달라질 만큼 많은 일을 해내며 어찌 8년 동안이나 그것도 늘 웃으며 지낼 수 있었을까. 그예 2010년 이 신부는 48세에 대장암으로 선종했다. 나는 편집자 후기와 ‘울지마, 톤즈’영화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는 홀로 어렵게 10남매를 키웠다. 그 중에서 사제 두 분, 수녀 한 분이 나왔다.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고향인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었다. 집에서 가까운 성당은 어린 이 신부의 놀이터였다. 그곳에서 본 다미안(*2) 신부에 대한 영화의 영향으로 사제가 되는 꿈을 품었다고 한다. 수단 사람들은 이태석(요한)신부를 `쫄리(John Lee)`신부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그는 인근에서 유일한 의사였다. 또한 가난한 이 뿐만 아니라 모든 어려운 이를 도우는 아버지로 불렸다. 휴가차 한국에 왔다가 발견된 암으로 타계한 소식이 전해지자, 톤즈에 애도의 물결이 넘쳤다. 우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전사의 후예, 딩카 족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톤즈 아이들이 쫄리 신부 없이 어찌 지낼지 걱정스럽다. 그런데 인터넷에 추모 카페가 생겨났다. 그의 뜻을 이어 받아 ‘울지마, 톤즈’하며, 위로와 도움의 손길이 줄을 잇는다.
이 책에는 편집할 때 증보한 내용 외에는 전혀 암 투병기가 나오지 않는다. 이 신부는 어머니가 걱정하실까봐 거의 마지막까지 병명을 숨겨서 공개적으로 적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홀로 되어 덜렁 남겨진 10남매의 교육과 뒷바라지를 위해 눈물은 뒤로한 채 평생을 희생하신 어머님의 고귀한 삶도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한 아름다운 향기였다. ‘향의 종류와 세기에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치는 자기장과 비슷한 그런 향기 말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리고 의식을 하든 하지 않든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의 이런 향기가 서로 얽혀서 알게 모르게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음에 틀림없으리라......(중략)......또한 예수님 사랑의 자기장이 어떻게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강한 힘으로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이태석 저,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중의 「아름다운 향기」에서-
고(故) 이태석 신부님은 그가 사랑하는 신 앞에 고결한 사군자 화폭 같은 향기로운 삶을 꽃피워 올렸다. 오늘도 내일도 더불어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마음속의 지지 않는 한 송이 매화, 난초, 국화이고, 한 그루 대나무이다.
(에세이포레2011겨울호 수록)
註
* 이태석 신부(1962~2010. 1. 14)
추모카페 http://cafe.daum.net/WithLeeTaeSuk
미주 아프리카 희망 후원회 http://shukuranbaba.com
* 다미안 신부(1840~1889)는 벨기에 출신으로 하와이 부근의 몰로카이 섬에 들어가 나환우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을 삶의 터전으로 만들며 한센 병 환자를 돌보다 그 자신도 나병에 걸려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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