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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그늘이 푸르던 시절
오 세영(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우리 모두를 위해 훌륭한 스승이셨지만 내게 있어서 선생님은 어쩐지 나만의 스승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만큼 내 중고 시절의 선생님은 그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회상해보면 내가 대학을 다닐 수 있었던 것도, 문학을 전공해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대학교수의 한 생을 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선생님의 보살핌으로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중고등학교학창시절을 통틀어 선생님은 한 번도 우리 반의 담임을 맡으신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어떤 담임선생님 이상으로 선생님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었던 것은 내 생애의 큰 행운이었다. 그것이 만일 특별한 인연이었다면 아마 중 1학년 때 맺어졌을 것이다. 그 시절, 전기 시험에 낙방을 하고 후기 신흥중학교에 입학한 나는 그야말로 철부지 골빈 학생이었다. 성적도 좋지 않아 그 해 봄 학기 석차는 반 20등 내외였다. 그러던 내가 2학년에 진학하면서 갑자기 학년 전체 4, 5등으로 뛰어 오른 것은 오로지 선생님에 의해서 길들여진 독서습관과 선생님의 격려로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학년 2학기 때부터였던가 나는 정말 천만 다행으로 독서에 취미를 붙인 아이가 되어 있었다. 사춘기적 감정으로 반에서 이상한 만큼 나를 좋아했던 한 독서광 아이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 보다 양영옥 선생님의 이끄심 덕택이었다. 이 무렵 선생님은 학교나 교사의 사정으로 빈 수업시간이 생기게 되면 그 어떤 반이건 항상 자원해 들어오셔서 시간 내내 문학작품을 읽어주시곤 했다. 오늘날 내가 시인이 된 계기도 따지고 보면 그 무렵 선생님을 통해서 알게 된 김소월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감화된 내가 학교 도서관을 찾게 되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학교도서관- 도서관이라고 해야 교실 한 칸 정도의 공간에 2000여권 남짓한 장서가 고작이었지만- 의 책임자는 양영옥 선생님 한분 뿐이셨다.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진 나는 항상 종례가 끝나자마자 헐레벌떡 2층의 도서관으로 뛰어올라가곤 했다. 시간을 아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 앞줄에 서야만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빌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서가 적으니 한 종의 책은 한권 밖에 없었고 도서관도 온 종일 개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종례시간에 맞추어 열린 문이 저녁 9시 전후면 닫혔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매일 도서관 개관 전부터 문밖에 맨 선두로 달려가 열을 서 기다리고 가장 늦게 책을 반납하는 열성 독자가 되었다. 어떤 때는 폐관시간을 넘기면서 까지도 책읽기에 몰두하니 선생님은 차마 도서반환을 재촉하지 못하고 내가 독서를 마칠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주시곤 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 내가 어찌 선생님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 쪼그마한 아이- 그 무렵 나는 반에서 여섯 번째 내외에 키 작은 아이였다- 의 독서열에 감동하셨던지 선생님은 가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기도 하고, 내가 읽은 책을 살펴보시기도 하고, 때로는 읽어야 할 책을 권해주시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홀로 부르시더니 “너는 이제부터 읽고 싶은 책은 집에 가져가서 마음대로 읽어라. 네게만은 특별히 대여를 해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책은 오직 도서관 열람실에서만 읽도록 되어 있는 규칙을 내게만은 예외로 해주셨던 것이다.
2학년에 진급하면서 나는 앞서 언급한대로 전체 석차 4,5등의 성적을 올렸다. 그리고 중학교 졸업할 때는 2등, 동일계 신흥고등학교에서 3년을 수학하는 동안은 항상 전체 3등 이내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내게 일어난 이와 같은 신상의 변화는 모두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감화 덕택이었다. 독서취미에서 발전한 면학 태도, 미래에 대한 개안, 무엇보다 꿈을 지닌 아이로 성숙한 것 등이 한데 어우러져 만든 이 같은 결과가 절대적으로 선생님의 격려와 인정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내가 성장했던 외가는 전라도의 이름 있는 반가로 원래 빈곤하지는 않았으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몰락하다 시피한 집안이었다. 그래서 고향을 등지고 의지가지없는 전주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제 때 수업료를 마련하기가 힘들었다. 수업료를 내지 못하면 중간고사나 기말시험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서무과 직원들이 수험장에 나타나서 수업료 미납 학생들을 하나씩 불러내 시험을 치루지 못하도록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그 시절의 관례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 진학이라는 것은 내게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사범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하였다. 사범학교는 그 때 고등학교 과정이었지만 졸업하자마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이 나게 되니 봉급을 받아 경제적 안정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범학교 입시는 특차였다. 전기 시험날짜보다도 한 열흘이 더 빨랐다. 그 결과 제도적으로 사범학교 입시 합격자는 다시 전기 시험을 볼 기회가 있었고 전기 시험에 합격하면 사범학교를 포기하고 전기 시험의 학교(주로 전주고등학교)로 가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사범학교 입장으로서는 적지 않은 결원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꾀를 낸 것이 임학 시험을 필기고사와 실기고사로 나누어 두 번 보게 하는 방법이었다. 즉 필기시험은 일차 특차로 치르게 하여 우수한 합격생들을 미리 뽑아 놓고 이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이차의 미술, 음악, 체육 실기시험은 전기 시험 날자와 겹치게 해서 필기고사 합격생이 전기에 소속된 학교에 가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막아버리는 방법이었다. 그러니 실기시험이란 필기시험 합격생을 붙잡아 두는 구실 이외 별 의미가 없는 형식적 시험이었다. 그 시험 과목이라는 것도 음악은 교사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두세 번 음정을 발성해보는 것, 미술은 자신의 손가락을 간단히 2,3분 동안 스케치 해보는 것, 체육은 철봉대에 턱걸이를 시켜보는 것 정도였다. 실기시험에서 떨어뜨리는 학생들도 고작 10여명 남짓이었다.
그런데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 실기시험에서 불합격한 10여명의 학생에 포함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당연히 미리 원서를 제출해 둔 전기고등학교 입학시험도 치를 수 없게 되었다. 내게는 후기의 유일한 인문계 고등학교인 동일계 신흥고등학교로 돌아오는 것 밖에 별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신흥고등학교로 되돌아오게 되었고 이 후기 입시에서 전체 수석을 하였다. 그러나 그 후부터 나는 학업에 별로 집착하지 않았다. 대학진학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것도 이유의 하나였지만 이 때 입은 정신적 상처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고등학교 시절의 내 학업성적은 항상 2. 3.4 등의 수준에서 맴도는 것으로 끝났다.
신흥고등학교로 되돌아오자 제일 반기시는 분이 양영옥 선생님이었다. 중학교 졸업 때 내가 사범학교로 입시 원서를 내려고 하자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법인데 미리부터 대학을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며 만류하시던 선생님이셨으니 그리할 만도 했다. 입학해서 처음 마주치는 날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불러 세우시더니 ‘거 봐라, 내가 신흥고등학교에 진학하라고 누누이 이야기하지 않았니?’ 하고 다소 타박을 주시더니 ‘다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너를 필요한 일에 쓰시려고 그런 것이니 낙망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여라.’고 격려해 주셨다. 이후부터 나는 일상에서 나 자신 불운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맞닥뜨릴 때마다 항상 양영옥 선생님이 그때 들려주신 그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성적이 기껏 3등 안에서 맴도니 -전체 수석은 수업료가 면제되었지만- 여전히 수업료는 내게 큰 부담이었다. 그리고 수업료를 제 때 납부하지 못하면 시험기간 집으로 돌려보내지는 일을 겪게 됨으로 설사가상 성적은 더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악순환이 되풀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던 1학년 가을 어느 날이었던가 선생님이 나를 도서관으로 부르셨다. 그간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 틀림없었다. 찾아뵈니 선생님께서는 나를 한동안 살펴보시다가‘네가 수업료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나를 좀 도와주렴. 그러면 내가 수업료를 대신 내 주도록 하겠다.’고 제의하셨다. 도서관에서 도서를 정리하고 학생들에게 책을 대여하는 일 즉 도서관 사서로서의 아르바이트를 한번 해보라고 권유하신 것이다.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므로 방과 후 남는 시간을 굳이 학습에 투자해야 될 부담도 없었고 무엇보다 도서관의 그 많은 책들을 내 마음대로 주무르고 읽을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때부터 나는 6교시가 끝나면 선생님을 모시고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수업료 걱정 없이 순탄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나는 고등학교 시절 대학진학을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당연히 이에 대비한 입시공부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하는 방과 후 보충수업도, 학원 수강도, 개인지도도 단 한번 받아보지 않았다(못했다). 그러나 어떻든 세월은 지나서 졸업시즌이 되었고 학우들은 대부분 대학 입시 문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분위기가 그러하니 충동적으로 혹시 내게도 대입학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그래서 각 대학의 입시 광고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나름대로 방법이 없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이 장학생모집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두 곳 -원광대학교와 국학대학-(나중에 우석대학으로 교명이 바뀌었고 훨씬 뒤 고려대학교에 합병되어 지금은 사라진 대학이다)의 장학생 선발시험에 응모하였다. 그 결과는 두 학교에서 모두 B급 장학생, 즉 2학년 말까지는 등록금을 면제해 주되 나머지 3, 4학년은 2학년의 성적에 따라 지원 여부를 결정한다는 조건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중 서울에 있는 국학대학을 가기로 결정하고 3월에 상경하였다.(그 시절 봄 학기는 4월 1일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우연히 친구 따라 구경가본 연세대학 캠퍼스의 아름다움에 홀려 그만 국학대학의 등록을 포기했다는 것과 그 다음해 정식으로 서울대학교 입시에 도전하여 합격했다는 이야기는 다른 지면에 이미 쓴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1년 쉬었다가 대학에 진학하긴 했지만 시험에 낙방해서 재수한 것은 아니다.
어떻든 서울대학에 합격하여 선생님을 찾아뵙자 선생님은 당신의 일 이상으로 기뻐하시면서 축하해 주셨다. 그리고 곧 바로 이어지는 걱정, ‘그래 입학금은 어찌할 것이냐 ’내가 당신의 질문에 묵묵부답이었더니 선생님은 ‘그래 알겠다. 입학금의 절반은 내가 마련해 볼 터이니 나머지 절반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네 자신이 한번 만들어보아라’하신다. 내 기억으로 그 때(1961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입학금은 5000원이 조금 넘었다. 이 중에서 나는 선생님이 주신 2500원과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일한 혼수(婚需), 어머니의 화개장롱을 팔아서 마련한 돈으로 겨우 등록을 마칠 수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내가 대학에서 정부의 대여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선생님의 재정 보증으로 가능했으니 내 대학 4년의 생활과 오늘 날의 이러한 성장은 오로지 선생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었다.
내가 선생님을 존경하고 또 선생님을 세상의 그 어떤 분보다 훌륭한 교육자로 생각하는 것은 물론 선생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 때문이 아니다. 사적인 관계와 공적인 인간상은 다를 수도 있는 법이니까. 내가 진실로 선생님을 존경하는 것은 그런 사적인 관계를 떠나 선생님이 나를 포함한 모든 학생들에게 충분히 귀감이 될 만한 교육자이셨기 때문이다. 이는 학 내외에서 이미 공인이 된 사실이니 이를 새삼 일일이 열거할 일도, 열거할 필요도 없다.
당신은 무엇보다도 지적인 호기심이 강하셨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전염시켰다. 그리해서 모든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셨다. 당신은 무엇이든 솔선수범하셨다. 그리해서 당신 곁에 있는 학생들은 당신을 따라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 근면하시고 성실하셨다. 학교에 가장 먼저 출근하시고 가장 늦게 퇴근하셨다. 다른 선생님들이 기피하시는 일들은 즐겨 도맡아 하셨다. 빈 수업시간을 담당하는 일은 모두 당신 차지였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 검약하셨다. 나는 선생님 밑에서 공부한 6년 동안 당신이 단 한번 넥타이를 맨 것을, 단 한번 신사복을 입으신 것을, 단 한번 구두를 신으신 것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대학생 교복 차림에 검정고무신이었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 학생들을 사랑하셨다. 학생 개개인의 생활과 생각과 처지에 관심을 갖고 음으로 양으로 보살펴주셨다. 당신은 항상 뒤에 숨어계셨다. 당신이 하신 일을 결코 밖으로 표출하지 않으셨다. 당신은 비록 사회과학을 전공하셨지만 그 누구보다도 인문학의 중요성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틈만 나면 문학이나 철학에 대한 말씀을 자주해 주셨다. 독서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셨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옳고 그름에 엄정하셨다. 그래서 때로는 무서우리만큼 엄하게 우리를 꾸짖곤 하셨다.
인간이 한 생을 사는 동안 그 사는 길을 가르쳐주는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행운일 것이다. 나는 선생님을 만남으로서 그런 행운을 누렸다. 공부하지 않고 뛰놀던 철부지 시절, 선생님이 들려주신 것 가운데 지금도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말씀을 끝으로 나는 이 글을 마치려 한다. “부(富)는 절약으로, 명예는 노력으로, 건강은 절제로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한번 가버린 시간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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