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催瑩, 1316~1388)은 고려 말의 명장이다. 본관은 동주이고 시호는 무민(武愍).
그는 처음 양광도 도순문사의 휘하에 있을 때 왜구를 토벌하여 공을 세웠고 공민왕 원년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여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최영은 그 후 원나라의 요청으로 구원병을 이끌고 장사성의 난을 평정해서 중국대륙에 이름을 떨쳤으며,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쳤고 왜구의 침공을 여러 번 격퇴하여 왜구들이 백수최만호(白首催萬戶)의 이름만 듣고도 달아났다고 한다.
최영은 고구려의 옛 강토를 수복하려는 큰 뜻을 품고 요동정벌을 위해 군사를 출동하기도 했으니 그의 빛나는 업적은 청사(靑史)에 길이 남는다.
그는 정부 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나 청렴결백의 모범을 보였으며, 그가 나중에 이성계일파에 의해 처형당할 때, “내 일생동안 탐욕을 부린 일이 없다. 만약 탐욕을 부렸다면 무덤위에 풀이 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풀도 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는데 과연 그의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아 홍분(紅墳)으로 불리어 온다는 전설이 유명하다.
최영장군은 한평생 전쟁터를 누벼온 무인이지만 시에도 능했고 바둑도 두었다고 한다. 조선조 세조 때 문인 성현(成俔)이 쓴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철성(鐵城) 최영은 그의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늘 “황금을 흙처럼 보라(見金如土).” 가르쳤으므로 항상 이 네 글자를 큰 띠에 써서 종신토록 지니고 다녀 잊지 않았다. 그는 국정을 맡아 이름이 중외에 떨쳤으나 남의 것을 조금도 취하지 아니하고 겨우 먹고 사는데 족할 따름이었다.
당시의 재상들은 위기회(圍棋會)를 조직, 서로 초대하여 바둑으로 날을 보내면서 다투어 진수성찬을 차려 손님을 접대하는 등, 부(富)를 과시했으나 공만은 달랐다.
한번은 최영 댁에서 위기회가 열렸는데, 최고 권력자의 집에서 열린 모임이기 때문에 이날은 특별히 대신들이 많이 참석했고, 모두들 주인댁에서 특별한 음식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안에서 음식상이 나오지 않았다. 점심때가 지나고 석양 무렵이 되어서야 기다리던 밥상이 나왔는데, 진수성찬은커녕 거친 잡곡밥에 나물반찬 몇 가지뿐이었다.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어이가 없었지만 하루 종일 굶은 터라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식후에 대신들이 “철성집 밥맛이 아주 좋다.” 칭찬하니 공이 웃으면서 “이것도 용병(用兵)하는 술책이요.” 하였다.』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시중이 되었을 때 시를 짓기를 “석자 칼로써 사직을 안정시켰네(三尺劍頭安社稷).”라고 읊으니 당시의 문사들은 아무도 대구를 짓지 못했는데, 공(최영)이 재빨리, “한 가닥 채찍으로 하늘과 땅을 안정시켰도다(一條草便末定乾坤).”라고 대구를 읊자 모든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공이 항상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의 소행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의 종족을 모두 죽였는데, 공이 처형되던 날, “내가 평생 동안 나쁜 일 한 적이 없는데, 다만 임견미와 염흥방을 죽인 것이 지나쳤다. 내가 탐욕한 마음이 있었다면 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요, 그렇지 않았다면 풀도 나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그의 무덤은 공양군에 있는데 지금까지 한줌의 잔디도 없는 벌거벗은 무덤이라 홍분(紅墳)이라고 한다.』
고려 말 유명한 시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집에 보면 최영장군과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 1304~1382)의 바둑이 맞수로서 자주 대국을 했다고 적혀있다. 백문보는 고려 공민왕 때 충신. 자는 화부(和父)이고 시호는 충간(忠簡), 본관은 직산이다. 충숙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검열·우상시를 지냈고 공민왕 초기에 ‘전리판서’가 되었다. 우왕이 왕자시절 그가 사부에 임명되었으며 ‘정당문학’을 거쳐 직산군(稷山君)에 봉해진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