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병탄 100년을 맞이한 요즈음 우리는 외국에 나가있는 한국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환수에 관해서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음을 느낀다. 이런 시점에 작년 가을 국립박물관 100주년 기념 전시에 출품되어 짧은 시간이나마 국내에 전시되었던 미국 보스턴 소장의 은제 주전자는 그 가치를 되새겨볼 만한 의미 깊은 문화재이다. 우리는 흔히 고려 공예를 조선시대와 비교하면서 결코 중국에 뒤지지 않는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귀족적인 면모를 특징으로 꼽는다. 이러한 표현에 가장 부합되는 공예품이 바로 이 은제주전자로서 정교하고도 세련된 고려 금속공예의 정수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전시실 중앙에 자리 잡아 그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던 이 명품은 언제인지 몰라도 고국을 떠나 오랜 세월 미국에 머물다가 국내에 처음 공개된 작품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 새롭다.
보스턴 미술관은 미국 내의 여러 박물관 가운데서도 다양하고 방대한 한국 문화재를 소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한국실 못지않은 수준 높은 한국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어 일찍부터 주목 받아왔다. 그러나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된 한국 문화재의 성격과 소장품의 반입 내용 등을 기록한 내부 보고서에도 이 은제주전자의 소장경위는 나와 있지 않다. 전시에 즈음하여 필자는 이 주전자의 소장 경위를 파악해보고자 국립중앙박물관 측을 통해 정식으로 그 소장경위를 요청해 보았지만 미술관 측에서 결국 구체적인 답변을 해주지 않았다. 다만 미술관 사이트를 통해 이 유물이 1935년 George Nixon이라는 개인 Fund를 통해 들어왔다는 간략한 내용만을 파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주전자는 1935년 이전 어느 시기쯤 미국으로 건너갔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소장 당시의 기록에도 이 주전자가 한국 작품이란 사실은 전혀 몰랐던 것 같다. 물론 당시에는 한국 미술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이 전무하던 시절인 점에서 우리의 미술품이 중국이나 일본으로 기록된 예가 어디 이 주전자뿐이랴.
이 주전자는 은을 주재료로 만들고 부분 부분에 금도금을 하여 장식함으로써 은제 도금 주전자로 불린다. 긴 주구가 달린 반구형의 몸체와 여러 겹으로 중첩된 앙, 복련(仰伏蓮)의 연화 뚜껑, 그리고 기다란 못을 달아 꼽도록 만든 연화 받침과 봉황으로 장식한 뉴(紐)로 구성되어 있다. 몸체 아래에는 주전자를 받치는 화형의 승반(承盤)까지 완벽하게 남아있어 그 가치를 더해준다. 이 주전자가 다른 작품에 비해 돋보이는 점은 바로 몸체의 외면을 24줄로 이루어진 대나무 줄기 형태로 만든 참신한 조형감에 있다. 또한 외면 줄기마다 연화 당초문을 정교하게 음각하였고 그 위쪽과 아래쪽에도 당초문을 시문하여 바로 이 부분에만 도금을 첨가함으로써 은색의 배경 속에 금색이 돋보이는 부분 도금의 장식성을 가미하였다. 이러한 부분 도금은 고려의 금속공예품에서 자주 등장되는 기법으로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국립박물관 소장의 은제도금화형 탁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몸체의 중앙으로 높게 솟은 구연 위쪽을 몇 단으로 중첩된 앙복련의 뚜껑이 덮이도록 만들었고 이 뚜껑 위로 규모가 축소된 또 하나의 앙련 뚜껑이 올려지도록 구성되었는데, 아래쪽으로 길게 두 갈래 못이 부착되어 내부로 끼워지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 위 뚜껑의 상부에는 날개를 접고 꼬리가 높이 솟은 생동감 넘치는 봉황이 솟아있어 주목된다. 이러한 봉황은 이미 백제금동향로에서도 등장되고 있지만 그와 또 다른 고려적인 감각과 섬세함이 돋보인다. 아울러 몸체의 앞쪽에는 대나무 죽순을 형상화한 주구(注口)가 길게 솟아있으며 반대쪽으로 목부터 몸체 상부에 연결되도록 네 줄로 구성된 손잡이가 유려하게 부착되었다. 주전자를 감싼 승반은 그 외형이 주전자의 몸체와 유사한 대나무 줄기 모양이지만 보다 굴곡지게 처리함으로써 마치 연꽃이 핀 듯 더욱 화려하며 모든 줄기와 하단 받침에까지 빠짐없이 연화당초문이 시문되었다.
다양한 종류의 금속공예품이 고려청자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며 이 주전자 역시 이후 많은 도자기의 형태로 재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전자는 도자기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금속공예만의 독특한 기법이 있다. 바로 금속공예품의 외면을 장식하는 타출문(打出文)으로서 고려시대에 와서 그 역량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금속기의 내면에서 바깥으로 눌러 도드라지게 문양 부분을 돌출시키고 다시 바깥에서 조금씩 다듬는 지극히 까다롭고 섬세한 타출기법은 고려시대 표형병(飄形甁), 장도집, 팔찌를 비롯하여 거울걸이(鏡架)에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이러한 고려 타출문 공예의 장식성이 한껏 발휘된 화려한 연꽃과 봉황, 음각과 양각을 적절히 이용한 아로새김(彫金), 세부의 강조가 돋보이는 도금 등 어느 한곳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기형과 고도의 장식성은 모든 금속공예 기술이 집약된 고려 금 속공예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주전자가 중국 쓰촨 성 팽주(四川省 彭州)에서 출토된 남송(南宋)의 은제 주자와 유사한 점을 들어 이러한 중국 주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 주전자에 비해 탁월한 조형성과 자신감 넘친 문양표현 등 모든 면에서 훨씬 탁월하다. 다른 중국 금속공예품은 몰라도 이 주전자만큼은 중국 주자와 차원이 다른 최상급이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전자라고 하여도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이 은제주전자는 국내에 반입될 당시 국가를 대표하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보험을 들어야 했다. 문화재 보험은 외국과의 교류 전시에서 파손이나 손상에 대비하여 반드시 가입되어야 하며 결국 이 가격은 문화재의 가격이기도 한 셈이다. 그 때 이 주전자의 보험가액이 자그마치 400만불(58억)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은제주전자가 처음 미국으로 건너갈 당시에 과연 얼마의 가격으로 팔려갔을까 한번 곱씹어 볼 만한 하다. 이렇게 반세기 이상을 외국에서 타향살이를 하다 잠깐이나마 고국에 돌아온 우리의 문화재는 다시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났다.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 은제 주전자는 한번 우리 손을 떠난 문화재가 얼마나 돌아오기 어려운지, 또한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교훈으로 가르치고 있다.
글 사진 = 최응천 /현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동국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구주대학에서 ’한국 범음구(梵音具)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입사하여 학예연구사, 학예연구관을 거쳐 2002년 초대 국립춘천박물관장과 전시팀장, 아시아부장, 미술부장을 역임한 뒤 현재는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와 동 대학 박물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2005년부터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과 2009년부터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면서 『불교미술대전』,『갑사와 동학사』,『금속공예』 등의 저서와 「일본에 있는 한국 범종의 종합적 고찰」, 「미륵사지 출토 금동 수각향로의 조형과 편년」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