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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길(포승읍 원정7리 수도사~평택호) 답사기
1.이름 없는 길에 이름을 짓다
길은 국토의 동맥이며 정맥이다. 사람들은 길을 통해 소통했고 물자를 공급받아 살아왔다. 길에는 그에 합당한 이름이 있다. 인간의 이름이 부모의 소망을 나타낸다면 길의 이름은 역사와 문화를 표현한다.
우리 선조들은 평택지역의 길 위에도 수많은 이름을 남겼다. 춘향이길, 흰치고개길, 장고개길, 숯고개길, 서낭고개길, 대진길 같은 친근한 이름이 그것이다. 그러다가 근대 신작로를 가설하고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이름 대신 국도38호선, 273지방도와 같은 번호를 붙이기 시작하였다. 도로에 붙여진 번호는 흡사 죄수번호처럼 편리함을 상징한다. 그 지역에 살지 않는 사람도 금방 이해할 수 있는 편리함은 통치의 논리이고 중앙 중심의 발상이다.
이번에 '평택의 섶길(가칭)' 답사를 하면서 길의 명칭을 놓고 고심하였다. 일정한 구간을 나누고 역사성과 문화적 감성이 묻어나는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시민들에게 우리고장의 아름다운 비경을 소개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우리 팀이 가장 먼저 답사했던 포승읍 원정리 수도사에서 평택호까지 구간에 '원효길'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게 된 것은 이 같은 고심의 결과였다.
2.전통사찰음식체험장으로 거듭나고 있는 수도사
7월 14일 오후 조정묵, 이상권, 장순범 그리고 나, 넷으로 구성된 답사팀은 길을 나섰다. 평택시내에서 수도사까지는 제법 먼 길이다. 통상 38번 국도를 따라 포승방면으로 달리다가 내기사거리에서 남양만 방면으로 길을 잡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우리 일행은 45번 국도를 달리다가 고덕면 동고리에서 38번 국도로 내려선 뒤 다시 오성면 숙성리에서 평택-동탄 간 고속도로로 올라가 평택-제천 간 고속도로를 따라 서평택I.C로 나가는 길을 택했다. 이 길은 눈이 어지러울 만큼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평택시 동삭동에서 서평택으로 나가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다.
수도사는 원정7리 호암마을 뒤 괴태산 아래에 있다. 괴태산은 조선시대 '괴태길곶 봉수'가 있어서 '봉화산'이라고도 부른다. 봉수대는 1990년대 중반부터 해군제2함대 영역에 들어가면서 출입이 금지되었고, 1년에 딱 한 번 신년 해돋이행사를 할 때만 들어갈 수 있다. 호암마을은 자연지명으로 '범바위'다. 본래 해군제2함대가 들어오기 전만해도 괴태산 서쪽 바닷가에 있었던 마을인데 1990년대 중반 현재의 위치로 집단 이주하였다.
마을의 역사처럼 수도사도 몇 번의 변천을 거듭하였다. 수도사는 신라 하대 염거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알려졌다. 창건당시에는 남양만 하구 LNG기지 자리에 위치하였는데 고려 후기쯤 주변에 수적들의 횡포가 심해지면서 폐사되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괴태산 중턱에 암자가 세워져 명맥을 이었지만 이곳마저도 폐사되었고, 현재의 사찰은 1960년 영석스님이 다시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영석 스님은 대처승이라 조계종과는 갈등이 많았고, 결국 20여 년 전 소유권을 놓고 법정다툼을 벌여 조계종 용주사의 말사로 등록되었다.
주지 적문스님은 2003년에 부임하였다. 당시만 해도 수도사는 두어 칸짜리 법당과 살림집을 겸했던 요사 1채뿐이었다. 그것을 현덕면 덕목리 심복사 전 주지 정견스님의 지원과 적문스님의 노력으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현재 수도사는 두 가지 사업으로 이름을 얻고 있다. 하나는 전통사찰음식이고, 다른 하나는 원효의 견성오도 성지라는 이름이다. 적문스님이 수도사의 발전방향을 전통사찰음식과 템플스테이로 정한 것은 승가대학 학보사 기자시절 변질되어가는 전통사찰음식을 취재하면서라고 한다. 그것을 2002년 월드컵 때 정부가 추진한 템플스테이 사업에 결합시켰고, 오늘날 가장 대표적인 전통사찰음식 전문 사찰로 발돋음 하게 되었다.
3.원효의 '견성오도 성지'라는 콘텐츠
원효의 '견성오도 성지' 문제는 오랫동안 학술적으로 논란이 많았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당항성의 위치였고, 삼국시대 신라에서 경기만의 당항성까지 연결된 육상교통로의 노선에 대한 고증도 걸림돌이 되었다. 당시에는 영남대로를 따라 북상하다가 수원 부근에서 화성시 서신면 당성으로 빠진다는 주장이 일반적 견해였지만, 이와 같은 견해는 7세기 후반 한강유역이 삼국의 가장 격렬한 격전지였다는 사실을 간과한 논리였다. 그러던 중 10여 년 전에, 7세기 후반 신라의 한강유역 거점 중의 하나인 진천 엽돈재를 넘어 사산성(직산)과 안성천 하류 수로를 통해 오갔을 것이라는 새로운 학설이 제시되면서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더구나 최근에는 당항성의 위치와 범위가 화성시 서신면 당은포만을 의미하지 않고, 당은포에서 포승읍 대진 사이를 아우르는 광역개념이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제기되면서 논쟁은 더욱 가열되고 있다.
어째든 이 같은 논쟁의 중심에 '원효'가 있다. 원효는 1차 대당유학 시도가 실패한 뒤, 661년 의상과 함께 2차 유학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항성 부근 어느 무덤가에서 잠을 자던 중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는 큰 깨달음을 얻는 견성오도를 경험하였다. 과거 신라의 육상교통로가 영남대로의 구간과 일치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일반적으로 통용될 때는 오도(悟道)의 성지(聖地)가 '당항성 부근의 어느 곳'이라는 주장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7세기 후반 신라 육상교통로에 대한 연구와, 예로부터 수원 용주사와 수도사 인근에 원효의 견성오도 장소가 수도사 부근이었다는 이야기가 새롭게 발굴되면서 기존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9세기 중엽 염거(? ~ 844)화상이 남양만 하구에 절을 창건하게 된 것도 원효의 성지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염거는 가지산문의 개조(開祖) 도의선사의 수제자였고,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에서 수도하던 도의에게 중국 남선(南禪)을 전수받은 인물이다. 도의가 염거에게 전수한 선종은 우리나라 선불교 역사의 시작이었다. 이로부터 신라 하대의 선종9산이 발전하였고, 선교(禪敎) 통합의 사상은 고려후기 조계종 탄생의 기반이 되었다. 도의와 염거에 의해 시작된 선종은 발전과정에서 원효의 원융회통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원융회통사상은 고려시대 불교통합의 기반이 되었을 뿐 아니라 신라하대 선종과 조계종에도 영향을 끼쳤으므로 염거가 원효의 견성오도 성지인 이곳에 절을 창건하였다는 추측은 단순한 추측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째든 현재 수도사는 원효를 끌어안으려는 비교적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몇 년 전에는 단국대 팀에게 지표조사를 의뢰하였고, 절 서남쪽 방향에는 '원효의 견성오도 성지'라는 펼침막도 걸려 있다. 주지 적문 스님에 따르면 조만간에는 대웅전 뒤편에 견성오도를 했던 무덤도 복원한다고 한다. 수도사를 중심으로 원효의 오도성지가 복원되고 이것이 문화콘텐츠로 활용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다만 모양만 갖추지 말고 고증에 따라 제대로 했으면 하는 마음과, 원효라는 이름만 팔아 이익만 얻으려 하지 말고 진정으로 원효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하여 중생을 구도하려는 발심이 담겨 있기를 바랄 뿐이다.
4.수도사에서 평태항 구간을 가다
수도사 뒤편은 해군제2함대사령부의 방어철책으로 둘러쳐있다. 적문스님은 철책 아래에 사람이 지날 수 있는 소로가 있다고 하였지만 한여름이라 수풀이 우거졌을 것을 염려하여 우리팀은 원정6리 여술로 넘어가는 마을길을 택하였다.
여술마을길은 적당히 좁고 아스팔트가 깔려 있는 데다 차량통행도 거의 없어 걷기가 매우 좋았다. 시민들이 섶길을 걸을 때도 풍광만 수려한 밋밋한 길을 걷기 보다는 스토리텔링 된 마을과 문화유산을 아우르며 걸어가는 것이 좋을 듯싶어 장고 끝에 선택한 길이었다. 여술마을 남서쪽으로 돌아서니 철책 아래에서 길이 끊겼다. 지나가는 동네 아주머니께 물었더니 밭 옆으로 넘어가면 사람이 걸을 만한 소로가 있을 거라고 가르쳐주었다. 조정묵 대표와 이상권 선생은 차량으로 이동하고 장순범 국장과 내가 탐사에 나섰다. 철책 아래로 난 소로는 원정5리 왜골까지 약 7, 8백 미터쯤 이어졌는데 사람의 손길이 닿은 듯 잘 정비되어 있었다. 나중에 상동마을에서 만난 최옥수(62세)씨는 우리가 넘어 온 산길이 '걷기 좋은 길'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마을 주민들이 조성한 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왜골마을에서 원정5리 한일마을 사이에는 공장과 주택공사로 옛길이 끊겨 있었다. 할 수 없이 큰 길로 나와 2백여 미터쯤 차량으로 이동하여 한일마을로 들어섰다. 한일과 원정4리 쌍용마을은 1970년대 말 경 대청댐 수몰민들이 집단 이주하여 조성한 마을이다. 조성시기가 이르기 때문인지 마을은 전형적인 농촌새마을처럼 네모반듯하게 구획되었다.
도로는 원정5리 마을을 가로질러 지구촌교회 앞으로 이어졌다. 우측에는 해군기지아파트가 우뚝 솟았고 거리에는 슬라브집들이 즐비하여 시골풍경이라기보다는 소도시 외곽과 같은 모습이었다. 마을 중앙의 큰 길을 따라 서쪽으로 조금 더 이동하였더니 번제마을과 해군기지로 갈라지는 Y자 형 도로가 나왔다. 우리팀은 이곳에서 도곡리 주택가와 말목장토성 공원길을 버리고 번제마을 쪽으로 좀 더 내려가서 포승공단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택했다. 이도로는 번잡하고 딱딱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하수종말처리장과 포승국가공단, 평택항 홍보관을 거쳐, 옛 대진(솔개바위나루)과 마린센터를 지날 수 있다는 장점이 컸다. 또 여행객의 입장에서도 잠시 다리를 쉬며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실 수 있는 위치가 필요하기 때문에 솔개바위나루의 횟집과 식당, 마린센터 전망대와 레스토랑은 여러모로 유용할 것 같았다.
5.희곡리 일자촌에서 마을길로 접어들다
복잡한 포승국가공단과 평택항을 지나면서 피로감을 느끼는 여행객에게 가장 적절한 치료약은 뭐니뭐니 해도 정겨운 마을과 아름다운 자연일 것이다. 포승공단과 평택항을 지난 뒤 호젓한 시골길로 여정을 잡은 것은 그런 이유였다. 솔개바위나루와 마린센터를 지나면서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시간도 촉박하고 기후도 온전치 못한 점을 감안하여 우리팀은 자동차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희곡리 앞까지 평택항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아프리카 레스토랑’ 팻말을 보고 희곡리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희곡리 일자촌과 원희곡을 지나 이조농원이 있는 댓골방향으로 달리다가 우회전하여 신영리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 시야가 무척 제한되었지만 빗줄기 사이로 드러난 시골길이 무척 아름다워서 저절로 탄성을 자아냈다. 신영분교 근처 논길을 따라 달리다가 신영리 가장골을 지나 매상동에 다다랐다. 장순범 국장은 매상동에서 장수리 두메마을까지 이어진 마을길이 환상적이라며 굵은 빗줄기 속에서도 길을 재촉한다. 매상동 마을회관에서 길을 잘못 들어 고생을 하다가 차를 돌려 산등성이를 넘어서니 구릉을 사이에 두고 장수리로 넘어가는 들길이 나왔다. 들길을 지나면서 빗속에서도 언덕빼기에 장수리 마을제당과 김정한 효자비각이 보여 안심하고 있었는데, 장순범 국장이 헛것을 보았는지 갑자기 큰 길 아래로 난 논길로 가자고 우긴다. 한 번 우기기 시작하면 쇠심줄보다도 질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라 일행은 장국장의 고집대로 길을 잡았지만, 논길에 차가 미끄러지는데다 길까지 끊겨 있는 바람에 단체로 황천길 앞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 돌아오는 수모를 당했다.
장수리에서 권관리로 연결된 길도 소롯한 마을길이다. 이곳부터는 조금 멈칫해진 빗줄기 덕분에 기분 좋게 차를 달릴 수 있었다. 들판을 지나 작은 언덕을 넘어서니 권관1리의 큰 마을 상하동이다. 상하동은 전주 이씨가 대성이고 수성 최씨와 함평 이씨도 다수 거주한다. 일제강점 전후에는 정부군에 쫒긴 동학도들이 아산에서 배를 타고 계두진을 통해 들어와 정착하면서 천도교가 발전하여 평택지역 선교의 중요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그와 같은 영향으로 3.1운동 당시에는 마을에 거주했던 함평 이씨의 대종손이며 동학의 접주였던 이민도가 권관리, 기산리 일대의 주민들을 선동하여 옥녀봉에서 평택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의 아들이며 국회의원과 천도교 부교령을 지낸 이병헌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상하동 동쪽 언덕을 올라서면 39번 도로와 만난다. 이곳에서는 39번 도로 지하암거를 통과하여 권관2리 고잔마을을 통과하거나, 큰길을 따라 평택호 선착장으로 가는 길이 가장 좋았다. 평택호 선착장은 원효길의 최종 종착지다. 토요일 오후 비가 퍼부었는데도 평택호에는 요트와 윈드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6.에필로그
원효길은 정확하게 재보지는 않았지만 대략 15km 내외로 판단된다. 이 길은 원효와 의상이 걸었던 옛 길을 추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날로 발전하는 평택의 산업과 호젓한 마을길을 걸으며 도농복합도시로서의 평택의 특징을 만끽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같은 장점을 극대화하려면 평택시청과 협의하여 구간 구간마다 위치를 알려주는 팻말을 세워야 하며, 마을과 유적의 스토리를 알려주는 안내판도 세워두어야 할 것이다. 이밖에도 포승국가공단과 평택항을 가로지르며 만나게 되는 교통상의 안전과 소음, 먼지 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스토리 계발도 중요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좋은 스토리를 머리 속에 그리며 의미를 부여하고 걸어야 재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간 중간의 쉼터 개발, 물과 음료를 구할 수 있는 편의시설, 시골마을의 향토음식이나 생산물을 구입할 수 있는 장치들을 설치하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여행이란 모름지기 적당한 노동과 쉼, 향토색 짖은 맛있는 음식을 곁들이면 즐거움이 배가된다.(2012.7.15)
첫댓글 선생님 ~ 목숨을 담보?로 다녀 온 소중한 답사보고서 잘 읽었습니다.꾸벅. 에필로그는 완전 공감입니다. 평택에도 꼭 그런 길이 만들어지기를 바래봅니다.
추천 열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