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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불교 전래
삼국시대에 전개된 불교는 우리민족의 고대 신앙이나 고유 풍속 등 종래의 기존 문화와 잘 융화하면서 휼륭한 민족문화로 기반을 마련하였는데,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중에서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는 고구려였다.
372년(소수림왕 2) 여름인 6월,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은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에 전하였다. 이에 소수림왕은 사신을 보내 부견왕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순도스님으로 하여금 왕자를 가르치게 하였다.
2년 뒤인 374년에는 진나라의 승려 아도(阿道) 화상이 고구려로 왔으며, 소수림왕은 그 이듬해(375), 초문사(肖門寺, 省門寺라고도 함)를 지어 순도스님을 머물도록 하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아도화상을 머물게 하였다. 이 두 사찰이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절이다.
소수림왕은 즉위와 동시에 율령을 공포하고 문물제도의 확립에 진력하였으며, 대학을 세워 왕이 직접 학사에서 도를 강론하였고, 구복호국의 사상으로서 불교를 깊이 신앙하였다. 순도가 주석하였던 성문사가 흥국사로, 아도가 머물렀던 사찰이 흥복사라 개명된 것으로 보아 소수림왕의 구복호국 정신의 확립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국사종묘(國社宗廟)가 각 지방에 세워지고 불교의 오묘한 진리도 널리 전파되어 불교가 인간에게 복을 주고 국가에 번영을 주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고구려 18대 고국양왕은 '불교를 믿고 복을 구하도록 위민정치의 일환으로 또는 강력한 통치를 위한 사상적 통일의 기반을 다지기도 하였다. 19대 광개토왕은 즉위 2년(392)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세워 불교교화 활동의 범위를 넓혀 갔고, 또한 고승들은 구법과 전교 활동을 위하여 나라 밖에까지 나아가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웃 중국에 유학하여 구법 활동을 하기도 하고, 중국 불교인을 가르친 훌륭한 고승도 많았다. 특히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을 이루게 한 승랑(僧郞)은 고구려의 요동 땅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가서 삼론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용수(龍樹)의 중관불교를 체계화시켜 중국에 삼론종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승랑은 섭산 서하사(捿霞寺)를 중심으로 많은 학인을 일깨우고 교학을 떨쳤기 때문에 그를 섭산 대사. 섭령 대사라고 하였으며 랑법사. 랑대사라고도 하였다. 삼론학(三論學; 中論 . 百論 . 十二問論)은 그에 의하여 학문적으로 체계화 되었으며,그 뒤 수나라의 고승 길장(吉藏,549~623)에 의하여 삼론종으로 완성되었다. 또한 혜관(惠灌)은 길장에게 삼론의 깊은 뜻을 배우고 돌아와서 일본으로 건너가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
가장 먼저 일본에 불교를 전해 준 나라는 백제였지만 고구려 역시 많은 불교문화를 일본에 전해 주었다. 혜편(惠便)은 선신(善信)·선장(禪藏)·혜선(惠善) 등 일본 최초의 세 비구니를 배출하였고, 혜자(惠慈)는 유명한 성덕태자의 스승으로 태자를 가르치면서 불교를 전교하였다. 또한 영양왕(纓陽王) 때 일본에 간 담징(曇徵)은 오경에 통달하였으며, 또 채색과종이, 붓 만드는 법, 맷돌 쓰는 법 등을 가르쳐서 일본인들의 생활향상과 문화발진에 크게 이바지함은 물론,나라(柰良)의 법륭사 금당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한편, 혜량(惠亮)은 551년 신라에 귀화하여 승통이 되어 신라불교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27대 영류왕(滎留王,618~642) 때에 들어온 도교의 일파인 오두미교(五斗米敎)에 의해 고구려의 불교문화는 차츰 위축되었다. 이에, 보덕(普德) 은 국가사상이며 문화의 주축이 되는 불교를 갑자기 핍박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을 수차례 건의하였으나 보장왕은 듣지 않았다. 보덕이 고구려를 떠난 뒤 보장왕 27년(668)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불교를 바르게 신봉하고 불교문화를 일으켜 강성했던 고구려가 불교를 버린 보장왕 때에 망한 것으로 보아 불교문화는 바로 고구려를 유지시킨 생명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 불교
(1) 초기 불교
신라는 삼국등 지리적인 조건이 가장 불리하여 새로운 문물의 유입이 어려웠으며 불교 수용 또한 고구려나 백제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라의 불교 전래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이설(異說)이 있는데 이를 시대순으로 간략히 살펴보자.
첫째,《해동고승전》에서 인용한 <박인량수이전 朴寅亮殊異傳>과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아도본비 我道本碑>에 있는 설로서, 제13태 미추왕 2년(263)에 고구려 승려 아도(我道)가 전래했다는 것이다.
고구려 여인 고도령(高道寧)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온 위나라 사람 아굴마(我堀摩)와 알게 되어 아도를 낳았다. 어린 시절을 어머니 밑에서 보낸 아도는 16세에 위나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난 뒤, 현창화상(玄彰和尙) 밑에서 공부하고 16세에 귀국하였다.
그 뒤 어머니의 말씀을 쫓아 '석가모니 이전의 과거칠불(過去七佛)이 머물렀던 일곱 곳의 절터'가 있다는 신라 서라벌로 오게 되는데, 그때가 미추왕 2년인 263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도스님이 신라인들에게 불교를 알리려 하자 계림(鷄林) 사람들은 스님을 죽이려 하였고, 하는 수 없이 아도스님은 일선현(一善縣) 모례(毛禮)의 집에 숨어 지내다가 공주(公主)의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고쳐준 것을 계기로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짓고 불교를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위협을 느껴 모례의 집에 숨어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는 것이다.
두번째 설은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 鷄木雜典>에 기록된 것을 《삼국사기》·《해동고숭전》· 《삼국유사》 등에서는 인용한 것으로 제19대 눌지왕(417~458) 때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에 이르러 모례의 집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즉, 묵호자가 모례의 집에 숨어 지내며 불교를 전파할 때를 기다리던 어느 날, 양(梁)나라에서 신라 왕실로 향을 보내왔으나, 그 이름과 쓰는 법을 알 수가 없었다. 왕은 신하에게 그것을 알아오도록 명하였고, 전국을 다니며 수소문하던 신하는 묵호자를 만나 명쾌한 해답을 엿들을 수 있었다.
"이는 향이라는 것인데 불을 사르면 향기가 몹시 품기며, 신성(神聖)에게 정성이 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성으로는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만일 이것을 사르고 발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이오."
그때 왕녀(王女)의 병이 대단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였으므로,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우며 기도하게 하였더니 왕녀의 병이 곧 나았다.
그러나 아직은 신라 땅에 불법을 전할 때가 무르익지 않았던 것이다. 왕실에 은혜를 베푼 묵호자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세번째 설은 <삼국유사> · <삼국사기) 등에서 묵호자 이야기에 이어 기록되어 있다.제21대 소지왕(479-500) 때 아도(阿道)화상이 시자(侍者) 3인을 데리고 와서 모례의 집에 머물렀다는데 아도는 묵호자와 모습이 매우 비슷하였으며, 아도가 모례의 집에 와서 여러 해 동안 머물다가 병 없이 돌아간 뒤, 그의 시자들이 남아서 불경과 계율을 강독하자 다수의 신봉자가 생겼다고 한다.
네번째 설은 법흥왕 14년(527) 아도가 와서 불교를 퍼뜨렸다는 내용이다. 이는 <해동고승전)에서 인용한 옛 기록을 따른 것으로 당시 아도가 일선군 모례의 집으로 오자, 모례는 크게 놀라며 "일전에 고구려 승려 정방(正方)과 멸구비(滅坵琵)가 왔다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라고 말했다. 아도를 눈에 띄지 않게 집안의 밀실(密室)로 모셨다. 때마침 신라에 온 외국 사신은 향을 가져왔고, 아도가 그 용도를 알아맞힌 것을 계기로 대궐로 들어가자 외국의 사신은 아도스님께 예배(禮拜)를 올렸다. 이를 지켜보던 법흥왕은 부처님과 승려를 공경해야 함을 깨닫고 백성들이 불교를 믿는 것을 허락하였다는 것이다.
이상의 네 가지 기록을 통하여 신라불교 전래에 따른 어려움을 쉽게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신라땅에 불교를 전하고자 포교승들이 끊임없이 숨어들어 암암리에 포교하였고, 그 지역이 지금의 경상북도 선산지역인 일선군(一善郡) 방면이었으며, 특히 모례의 집이 포교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의 네 가지 설 중에서 네번째의 법흥왕 불교 공인설은 학계에서 채택이 되지 않고 있다. 신라불교의 수용은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공식화되었기 때문이다.
포교승들의 끊임없는 방문과 신라 왕실의 불교공인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씨족 중심 귀족들의 끊임없는 반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법흥왕 대에 이르러 씨족적인 기반을 억누르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확립하고자 했던 왕실파(王室派)들은 불교를 새 지배체제의 구축을 위한 정신적 지주로 삼아, 왕법(王法)과 불법(佛法)을 동일시하고 부처의 위력을 왕의 위력으로 대치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법흥왕 7년인 520년, 왕은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국가조직에 관한 정비를 일단락 짓고, 527년의 이차돈 순교(殉敎)를 계기로 배불파(排佛派)를 제압하고 불교 공인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공인
이차돈의 순교는 우리 나라 불교사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아야 할 종교적 사건으로서, 신라 불교는 이 사건으로 인해 이미 그 시초부터 찬란한 빛을 발현시키기 시작했다. 이차돈의 순교 사건에 대한 설화는 다음과 같다.
이차돈은 지증왕 7년(506)에 태어났으며,성은 박씨요, 이름은 염촉(厭 )이며, 거차돈(居次頓)으로도 불리었다. 그의 아버지는 길승(吉升), 할아버지는 공한(功漢), 증조할아버지는 흘해왕(訖解王)으로 되어 있다.
이차돈은 어려서부터 베풀기를 좋아하여 주위 사람들의 신망을 받았으며.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하였으나 신라에서 국법으로 불교가 허용되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때마침 법흥왕도 불교를 백성들에게 알리고, 불력(佛力)에 의해 국운을 번영시키고자 하는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로 말미암아 뜻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법흥왕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말하였다.
"짐은 즉위할 때부터 만백성을 위하여 복을 닦고 죄를 없앨 수 있는 불찰(佛刹. 불교사 찰)을 짓고자 하였노라. 이제 절을 창건하려 하노니,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고?"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는 예상외로 강하였다.
"근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은 불안하고, 더욱이 인접한 나라의 병사들이 국경을 자주 침범하여 군사들은 쉴 사이도 없사옵니다. 이러한 어려운 때에 백성들을 동원하여 쓸모 없는 사찰을 짓는다는 것은 당치 않사옵니다."
왕은 신심(信心)이 없는 좌우의 중신(重臣)들을 둘러보며 측은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다 가, 자기의 부덕(不德)을 탓하면서 홀로 탄식하였다.
"아! 만백성들에게 편안한 삶을 안겨줄 불교를 펴고자 함이나, 나의 부덕한 소치로 찬 성하는 이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이 일을 같이 할꼬?
그 때 법흥왕의 뜻을 헤아린 이차돈이 찾아와서 아뢰었다.
"대왕이시여, 완고하고 교만한 중신들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대왕께서는 왕명을 어겼다는 이유를 들어 저를 처단하십시요. 틀림없이 부처님의 뜻에 따라 하늘과 땅에서 기이한 변고가 일어날 것이옵니다. 그렇게만 되면 누가 또다시 반대를 하겠습니까?"
"너의 할 일이 아니다."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법흥왕을 향해 이차돈은 거듭 간절히 아뢰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버리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요.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바른 뜻입니다. 신에게 왕명을 거짓되게 전한 죄를 내려 신의 머리를 베이시면. 만백성이 다 굴복하여 이 후로는 어느 누구도 왕명을 거역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염촉아. 부처님은 과거 전생에 새 한마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살을 베어 주었고, 피를 뿌리고 생명을 끊으면서까지 뭇 생명들을 구하여 주었느니라. 내가 불법을 펴고자함도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고자 함이거늘, 어찌 죄없는 너를 죽일 수 있겠느냐? 네가 죽어 큰 공덕을 지을 수 있다 할지라도 죄는 피하는 것이 좋겠다."
"아니옵니다. 대왕이시여.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 목숨(身命)이지만, 이 몸이 저녁에 죽어 아침에 대교(大敎. 불교)가 행하여진다면, 하물며 부처님의 해가 영원히 밝혀지고 이 나라가 길이 평안하다면, 저의 죽는 날이야말로 다시 태어나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네 비록 포의(布衣)를 입었지만 마음 속은 비단과 같구나. 네가 그렇게만 해내면 가히 보살의 행위라 할 것이다."
크게 감격한 법흥왕은 이차돈과 함께 크게 불법을 펼 것을 굳게 맹세 하였다. 마침내 사인(舍人) 벼슬에 있던 이차돈은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짓기 시작하였고, '이차 돈이 왕명을 받들어 절을 짓는다,' 는 소문은 삽시간에 서라벌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신하들은 크게 흥분하여 왕에게 다투어서 물었다. 법흥왕은 자신이 영을 내린 것이 아니라 하고. 이차돈을 불러들여 문초하였다.
"절을 지은 것은 부처님의 뜻에 따라 소인이 한 일이옵니다. 불법(佛法)을 행하면 나라가 크게 편안해지고 경제에도 유익할 것이오니. 국령(國令)을 어긴다 한들 무슨 죄가 되겠 습니까?"
주위의 신하들은 발끈하였다.
"지금 승도(僧徒)들은 보건대 어린 아이들과 같은 머리에 다 떨어진 옷을 입고 허황되기 짝이 없는 말만을 하니. 이 어찌 정상적인 도라고 하겠습니까? 만약 이차돈의 말을 그 대로 좇는다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신들에게 죽음의 죄가 내려진다 한들 이 것 만은 따를 수 없나이다. 하물며 이차돈은 왕명을 그릇 전하였으니 엄한 벌로 다스려 야 하옵니다. "
그 때 이차돈은 분기 띤 음성으로 외쳤다.
"대왕이시여. 군신들의 말은 옳지 않사옵니다. 무릇 비상(非常)한 사람의 뒤에는 비상한 일이 따르기 마련이옵니다. 불교는 매우 심오하여 따르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어찌 제비가 기러기의 큰 뜻을 알 수 있겠나이까?"
신하들의 반대는 더욱 커졌고, 법흥왕은 이차돈과 미리 상의한 대로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반대하고 있는데 오직 너만이 옳다고 하는구나. 두 의견을 다 따를 수는 없다. 이차돈을 참(斬)하여라."
왕명을 받은 하리(下吏)가 목을 베기 직전. 이차돈은 법흥왕께 간곡히 아뢰었다.
"저는 이제 진리를 위해 기꺼이 형을 받나이다. 바라옵건대 대왕이시여. 의리(義理)를 일으키소서. 부처님이 신령하시면 제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적(異蹟)이 일어날 것이옵니다 "
이차돈은 하늘을 우러리 보며 마지막 기도를 하였고, 하리는 그의 목을 베었다.
순간, 머리는 날아 금강산(金剛山) 꼭대기에 떨어졌고, 잘린 목에서는 흰 젖이 수십 장(丈)이나 솟아올랐으며, 갑자기 캄캄해진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꽃이 비오듯 쏟아졌고 땅은 크게 진동하였다. 군신들은 서로 부등켜 안고 자기들의 어리석음과 우둔함에 통곡하였으며,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國敎)로 공포하였다. 이 때가 이차돈의 나이 22세 (또는 26세)인 527년(법흥왕 14)이었다.
이차돈의 순교는 신라의 만백성들이 마음껏 불교를 믿을 수 있는 자유를 안겨다 주었고, 그의 순수한 순교의 정신을 가슴으로 받아들인 신라인들은 위대한 신라불교의 불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죽음을 통한 새로운 탄생. 이것이 신라불교를 영원히 빛나게 만든 것이다.
법흥왕은 불교를 통해서 백성들이 선량한 민본주의 관념을 가질 수 있고, 신라의 문화가 향상 발전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으며 뒷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법흥왕에 의해서 시작된 신라불교가 신라 풍토에 알맞은 불교로 정착하게 된 것은 진흥왕부터 이며, 이것은 왕 자신의 신앙심과 불교 정책에 의해서였다.
진흥왕은 재임 37년 동안 한마음으로 불법을 신봉하였고, 그때까지 삼국 중에서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를 삼국통일의 주체국으로 만든 것이다. 진흥왕 5년에는 선왕(先王) 때부터 짓기 시작한 흥륜사(興輪寺)가 낙성되고, 그해 3월에는 뜻 있는 자에게 승려의 길을 열어줘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게 하였다. 말년에는 왕 자신도 출가하여 법운(法雲)이라 이름하고 수도하였으며 왕비도 영흥사(永興寺)에 들어가 여승이 되었다. 왕은 또 불교이념에 의한 수양단체인 화랑도를 창설하여 신라 청소년의 윤리를 종교의 깊은 곳으로부터 배우게 하는 등 백성들의 정서 함양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화랑도는 불교 사상을 근간으로 설치된 청소년 수양단체로 진흥왕이 나라를 흥하게 할 목적으로 불교의 미륵신앙과 이상국가 사상인 전륜성왕 사상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룩한 것이다. 따라서, 이 단체에서는 신라의 미륵을 상징하는 국선(國仙)이 모든 무리를 통솔하고, 그 아래에 각각 소 단체의 우두머리인 화랑이 있어서 자기 무리의 낭도(郎徒)를 거느렸으며, 또 낭도에는 일반 소년 낭도와 달리 한 사람의 스님이 낭도로 있으면서 국선을 보좌하였다. 이와 같이 화랑단체는 불교적인 사상이 뒷받침된 것이다.
불교가 신라문화에 적응한 예를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나라에 충성하고, 둘째 부모에 효도하며, 셋째 벗을 믿음으로 사귀고, 넷째 싸움터에서 물러서지 말며, 다섯째 산목숨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절대 살생을 금하고 있는데, 원광은 살생을 하되 가려서 하라고 했으나 불교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신라인이 불교의 참뜻을 새롭게 수용한 과정으로 그 시대의 삶과 앎이 깊은 관계를 맺은 포괄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신라는 제30대 문무왕 때에 삼국통일을 이룩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하였는데, 이에 따라 불교도 크게 융성하여 신라의 승려가 당나라에 가 그곳의 불교 교학을 배워 왔다. 따라서 신라는 우리 나라 불교사상 유례없는 황금시대를 가져왔고 수많은 학승이 배출되었다. 신라불교는 대승의 종파와 교학이 크게 일어나게 된 이때를 전기로 처음에는 학해불교(學解佛敎), 다음에는 실천활동으로서의 선불교가 유행하였다. 특히 중국의 달마선(達摩禪)이 전래 성행하던 때를 후기로 나누고 있다. 35대 경덕왕 때까지 활발했던 신라불교는 그 후 침체되어 갔다. 이 무렵에 식지인심 불립문자(直指人心, 不立文字)를 표명한 선불교가 중국에서 들어왔다. 이 새로운 선풍은 중국에서 보리달마(菩提達摩) 이래의 종풍이 확립되어 독특한 선종으로 성립 ·발전된 것이다. 중국의 선종이 6조 혜능(慧能)에 이르러 남. 북으로 나뉘면서 그 기세를 떨칠 무렵 신라 학승들이 선법을 배워 왔다.
북선은 흔적만 남을 정도로 미미했지만 6조 혜능의 남선은 크게 일어나 신라의 선종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 전해진 선법은 6조의 후손들에 의해 발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첫 전법가도의(道義)는 선덕왕 5년에 당으로 가서 마조 도일(馬祖 道一)의 제자 서당 지장(西堂 智藏)에게서 법을 얻고 헌덕왕 13년에 귀국하여 선법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신라에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마의 말이라고 거부하였다. 따라서 도의는 설악산에 은거하여 그 법을 제자 염거(廉居)에게 전하고 염거는 다시 체징(體澄)에게 그 법을 전하였다. 이렇게 하여 구산신문(九山禪門)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신라불교의 대중성
왕실에 의하여 불교가 강력하게 지지, 발전하게 된 것은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인 지주로서 불교가 적합하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귀족 세력과의 타협 없이는 불교가 수용 될 수 없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윤회전생의 사상은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해 주는 이론으로서 환영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즉, 불교는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귀족 국가의 사상체계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불교에 호국적인 성격이 강한 것은 당연한 이치로서 호국경으로 유명한 인왕경(仁王經)은 지극히 존중되어졌다. 그 예로, 인왕경의 설에 의해 백좌강회(百座講會)라는 국가의 평안을 비는 의식이 그렇고, 팔관회, 백제 왕흥사의 건립, 신라 황룡사의 9층탑 건립 등도 호국적인 의미를 가진 것들이다. 미륵불이 하생하여 화랑이 되었다는 신념도 이런 호국신앙의 표시였으며, 호국만이 아니라 아울러 불교를 수호하는 호법정신 역시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삼국시대의 가장 중요한 종파는 계율종이었다. 백제의 겸익이나 신라의 자장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인데 특히 자장은 대국통으로서 신라의 불교를 총괄하였다. 승려들이 지켜야 할 생활 기준으로서의 계율을 강조하는 것은 종교를 통한 인심의 귀일이라는 정치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신라가 국통, 주통, 군통 등의 승관(僧官)을 두어 계율을 통해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통제한 것은 이와 같은 효과를 노린 것이다. 또 밀교가 크게 성하여 치병, 양병, 강용등의 기적을 행한 것도 그 당시 불교에 대한 관념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렇게 불교가 국가적 지위를 얻음으로써 승려들은 때로 정치적 자문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고,문화적으로 중국문화 수입의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에 중국에 유학하는 대부분은 승려였다. 그리고 이들은 국민의 정신적인 교사이기도 하였다. 즉 원광이 세속오계를 말하고, 화랑도에 승려가 참가하여 도의면의 교육을 담당한 깃은 그런 데에 착안한 깃이다.
이렇게 삼국시대의 불교는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존경과 믿음을 받는 종교로서 중대한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라의 여성불교
(삼국유사) 권3 아도기라에 의하면 불교의 최초 여성신도는 모례<毛禮)의 누이동생 사(史) 씨였다고 한다. 아도가 신라에 불교를 전하기 위하여 일선현(지금 선산) 모례가에 왔다. 당시 아도는 지하 종교활동만 하였을 뿐 공개 전도는 할 수 없었는데 이때 사씨가 귀의하여 신불의 증험을 나타냄으로써 마침내 비구니가 되어, 삼천기에 영흥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사씨가 창건한 영흥사는 공인전에 세워진 사사로운 당우였지만 이로써 신라 비구니 국찰인 영흥사로 이어질 법연을 맺은 것이다.
법흥왕은 불교의 전파와 새로운 국가형태를 갖추는데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왕의 뜻에 계합한 왕비의 정성도 큰 공헌을 했다. 불교를 국교로 내세우려고 이차돈의 순교까지 초래한, 외형적인 법흥왕의 신앙의 뒷면에는 내면적으로 자기 신앙을 참되고 티없이 드러낸 법흥왕비 묘법의 열렬한 신앙심이 있었다. 이렇듯, 삭발의 결의를 내리고 영흥사를 창건하여 불교전교에 일생을 바친 것으로 보아, 법흥왕과 요법은 신라에 불교를 전하기 위한 보살의 화현인 듯한 인상을 갖게 한다. 신라의 최고 권좌에 위치한 왕과 왕비의 신앙이 귀족사회나 서민사회 즉 신라 전역에 불교를 파급시켜 국교로 신장할 여지를 넓혀 준 것이다.
법흥왕 뒤에 즉위한 진흥왕(540~576)도 불심이 돈독한 왕이었다. 진흥왕 5년에는 선왕 때부터 역사하던 흥륜사가 낙성되고 동년에는 남녀에게 출가하는 것을 국법으로 허락하였다. 법흥왕의 조교(肇敎) 에 의하여 진흥왕은 국법으로 비구니의 출가를 허락한 것이다.
이처럼 신라는 전래 초기부터 불교를 공적인 종교로 수용하는 데 부단히 마음을 기울였다. 진홍왕의 왕비도 마침내 영흥사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진평왕(575~632) 때 안홍사의 비구니 지혜(智慧)는 선도산 성모의 몽유에 의해 불전을 수리하고 매년 봄(3월). 가을(9월)에 선남 선녀를 모아 일체 중생을 위하여 점찰법희를 배푸는 것을 항규로 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 권5 감통7 <선도성모수희불사조>에 있는데, 이것은 성모신앙과 점찰법회의 영합을 뜻하는 것으로 원광도 가슬 갑사에 점찰보를 두어 상규로 삼았다. 이때에 시주하던 여승이 점찰보에 밭을 바쳤는데,1백 결이었다(삼국유사 권4, 의해5 원광서학). 비구니 지혜가 <점찰경>으로 점찰법회를 관장하였다는 사실은 그 당시 이름 높은 승려였던 원광이 가실사에서 점찰법회를 베푼 것과 견줄 수 있으며 비구니로서 점찰법회를 연 것으로 보아 여승의 위치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왕비의 출가에서 알 수 있듯 신라 비구니의 위계는 비구에 못지 않았다. 신라 상위계의 여성이 출가하였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신라 사회가 여승을 낮추어 보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비구니 지혜가 매년 봄, 가을에 선남선녀를 모아 일체 중생을 위하여 점찰법회를 베푸는 것을 항규로 삼으려면 종교적인 조직력과 함께 국가적인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출가하지 않은 재가자의 신앙도 출가자 못지않게 열렬하였다. 재가자의 봉불은 재산의 헌납과 노력의 신력 헌공으로 양분할 수 있다. 신력 헌공도 사예(寺隸)로 헌신하는 것과 사원건축이나 조상 등의 불사에 나아가 도와주는 것이 있다. 사예는 법흥왕이 궁척을 내놓아 사예로 삼은 것이 처음이다.
스스로 사예의 길을 달게 받아들인 신라 여성의 종교열은 현실고를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매진하게 하였고 사예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저주나 곤욕스러움 없이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신라 여성들이 참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일면이라 할 수 있다.
양지(良志)스님이 영묘사(靈廟寺)에 장록불상을 조성할 때 '성중의 남녀가 다투어 진흙을 날랐다'고 한 것도 신라의 남녀가 조상 불사에 노력봉사를 아끼지 않았음을 뜻한다. 여성 단원들의 노력 봉사 . 재산 헌납으로 지은 불교사원이 지금껏 유지되고 있다.
통일기에 이르러 신라가 부강해지자 사원에 대한 토지의 시납이 보편화되어 개인적으로 대찰을 건축히는 등 재산을 마구 사원에 헌납하므로 문무왕 4년(664)에 시납엄금의 영이 내렸다. 원광이 점찰보를 시행할 때 어느 재가 여신도는 100결의 전답을 내놓는 등 여성의 재
산 헌납이 상당하였다. 사원건축만이 아니라 불상이나 범종의 조성도 대부분 여성 불자의 헌납으로 이룩되었다. 특히 상원사 범종의 시납자는 체도리라는 상류계급의 여성이었으며 현존하는 성덕대왕신종보다 4배나 무거운 황룡사종의 시주자는 효정이왕 삼모부인이였다
효정이왕 삼모부인은 경덕왕의 왕비였으나 아기를 낳지 못한 이유르 폐비가 되어 사량부인(삼모부인의 이칭)으로 봉함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왕비의 신분으로 아기를 낳지 못한 불운과 고업을 벗어나려고 일심봉불한 나머지 황룡사 대종불사에 온 마음을 기울인 것이다.
또한 소성왕비 계화부인은 불상을 조성한 신녀였는데, <삼국유사> 권 3 탑상4, <무장사미타전조>에 의하면 소성왕(799-800)이 돌아가신 후 계화왕후는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후의 성복을 희사하고 구부에 저축하였던 모든 재물을 바쳤으며 그 재물로써 아미타불상 일구와
신중상을 만들어 무장사 미타전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경문왕 (景文王)의 누이인 의장옹주는 경문왕 7년(869) 원찰(願刹)인 현계산 안락사(安樂寺)에 토지와 노비문서를 기증하여 당시 안락사 주지였던 지증을 감격시킨 일도 있다.
이와 같이 신라시대의 불교신앙은 왕족과 귀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서민에게서도 깊고 깊은 믿음을 찾아볼 수 있다. 가난한 빈녀의 신앙으로는 <삼국유사) 권5 <진정사효 쌍미조>와 김대성의 어머니에게서 엿볼 수 있다. 빈한하기 이를 데 없는 진정모자는 재산 중에 가장 귀한 것으로는 노구솥밖에 없었는데 이 노구솥을 어떤 스님의 철물 시주 때 헌납하였고, 김대성의 어머니인 경조부인은 끼니가 어려워 부잣집의 부엌일을 하면서 그 품삯로 얻은 땅을 절에 기증하였다. 또한 경덕왕대 아간 귀진가의 비 욱면은 주인을 쫓아 절에 가서 법당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에서 염불을 드렸다. 이를 본 주인은 종이 어찌 부처를 염하느냐고 꾸짖으며 곡식 두 섬을 하루 저녁에 찧도록 하였다. 그러나 욱면은 부지런히 일하여 초저녁에 다 찧어 놓고 염불에 전념하기 여러 날 마침내 천상의 소리를 듣고 법당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지붕을 뚫고 솟아나며 불신으로 화현하여 연화대에 앉더니 방광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신라불국토사상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으나 창의성을 발휘하여 적극적이고 독특한 신앙사상을 활발히 전개시켰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불국이라는 즉, 신라불국토사상(新羅佛國土思想)이다. 이는 전불유연(前佛有綠), 신라진불국(新羅眞佛國), 현실불국정토관(現實佛國淨土觀) 등이 아우러진 것이다. 이러한 신라불국토사상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는 [삼국유사]에 잘 나타나 있다.
먼저 신라가 과거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전불유연의 국토임을 알 수 있음은, 신라땅에 석가모니불 이전 가섭불 때의 절터가 있고 또 그 부처님이 직접 앉아 설법하신 돌자리(迦葉佛宴坐石)가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 아도화상이 어머니 고도령으로부터 신라로 전법할 것을 권해받은 말 속에 전겁 전불시의 가람터가 신라 경도(경주)내에 일곱 군데나 있었다는 철처가람이 보인다. 즉, ① 천경림 금교(흥륜사) ② 삼천기(영홍사) ③ 월성동 용궁남(황복사) ④ 용궁북(분황사) ⑤ 사천미(영묘사) ⑥ 신유림(사천왕사) ⑦ 서청전(담엄사 터) 등이다. 신라불교인들의 신앙과 사상을 설화형식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칠처가람터 가운데 황룡사에 가섭불이 앉아서 설법하셨던 자릿돌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불전 뒷쪽에 있던 연좌석을 직접 보았는데 나중에 몽고명란으로 황룡사가 타 버렸을 때에 그 연좌석도 땅에 묻히고 말았다 한다. 또 자장(慈藏)법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진신(文殊眞身)을 만났을 때에 신라의 황룡사는 석가불과 가섭불이 강연하던 곳이라 연좌석이 아직 남아있다고 함을 들었다 한다. 그밖에 또 왕성 경주 외에 신승(神僧) 낭지(朗智)가 오래 살고 있었던 영측산의 혁림암 자리도 가섭불 때의 절터임이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신라가 비록 법흥왕대에 와서 불교를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석가여래 출세 이전에 이미 이 땅에는 불법과 인연이 깊었다는 것으로 믿으려 하였던 것이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장소와 물증을 통하여 사실화시켜서 진지하게 신앙하였던 것임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신라가 전불유연국토라고 보았던 신라인들은 나아가 신라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부처님의 나라인 진불국토(眞佛國土)임을 자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신라 본위적 불국관의 근거가 되는 것이 황룡사 장육불상의 조성에 얽힌 연기설화이다. 즉, 진흥왕이 황룡사를 창건한 뒤 오래지 앉아 남해에 한 거선이 닿았다. 그 배 안에는 금, 철과 1불 2보살상의 모형과, 서축 아육왕이 석가삼존상을 주성하려다 이루지 못한지라 인연있는 국토에 가서 장육불의 존용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축원이 함께 있었다. 왕은 동축사를 세워 모형 삼존상을 안치하게 하고 그 금철은 경도로 옮겨서 진흥왕 35년에 장육존상을 이루어 황룡사에 모셨다는 것이다. 인도 아육왕이 불멸 후에 나서 부처님의 진신에 공양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세 번이나 불상을 주성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여, 그 금철을 큰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는데 해변을 따라 가지 아니한 곳이 없었으나 아무 곳에서도 불상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드디어 신라국에 이르게 되어 진흥왕이 주성함으로써 상이 완성되었는데 상호가 원만히 갖추어졌다는 것이다.
이 설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신라만이 참으로 부처님과 인연이 깊으며, 석가모니 부처님 탄생지인 천측보다 신라가 더 훌륭한 부처님의 나라인 진불국임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그 배가 도착하있던 곳에 동축사(東竺寺)를 세움도, 부처님의 생연국(生綠國)인 인도는 서천축이며 진불유연의 신라는 동천축이라는 뜻을 함축한 것이다. 또한 전륜성왕으로 추앙받는 정법왕인 아쇼카 왕조차 이루지 못한 뜻을 신라의 진흥왕이 신라에다 훌륭하게 이루어 놓았다는 사실도 진흥왕과 아쇼카 왕의 인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신라의 불교가 탈생국 인도의 불교보다도 더욱 훌륭하다는 것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장육존상의 조성설화 역시 하나의 설화에만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사실화시켜서 신라의 신앙이 되어, 신라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게 불법을 펼치고 불국토를 이룩한 진불국임을 확신케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신라는 전불(前佛)시부터의 유연국(有綠國)이며, 가장 수승한 불연국(佛緣國)으로서 진불국이라고 자부하였던 신라인들은 더 나아가서 신라 이대로가 바로 불국정토라는 현실정토사상을 이룩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신라에는 불보살의 진신이 상주하는 곳이 있으며 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이 땅에 항상 머무시면서 그 몸을 나누고 계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강원도 양양 낙산은 관세음보살의 진신이 머무시는 진신상주치로서 의상대사 (625一702)가 그 바닷가의 암굴 안으로 들어가 관음의 진용을 직접 만났으며, 그 가르침에 따라 낙산사를 세우게 되었다. 그 뒤 원효성사(617-686)도 낙산의 남교에서 여인으로 화현한 관음을 만났고, 그 낙산에는 정취보살의 진신도 상주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상주도량인데 자장법사가 그 곳에 문수진신을 친견하고자 갔으며, 나중 신라통일 이후에 정신대왕의 태자 보천과 효명 형제가 그곳으로 들어가서 수행할 때에 동.서.남.북 중의 오대(五臺)에 각각 일만의 관음, 세지, 지장, 나한, 문수 등 모두 오만진신이 몸을 나누었다는 것이다. 또 효소왕이 망덕사의 낙성회를 설할 때 석가불진신에 공양하였다 하며, 또 지통(智通)은 어려서 영취산으로 출가하여 보현 대사에게 직접 오계를 받았다. 그리고 원성왕대의 고승 연회는 이 영축산의 서쪽 고개에서 문수 노인과 변재 천녀를 만났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신라는 불보살이 상주하면서 그 진신을 나투는 진신 상주의 국토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천축의 석가불이 이 땅에 그 진신을 나툴 뿐만 아니라 상주처까지도 이 땅에 있으며, 그 진신이 항상 설법도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신라를 불보살의 상주설법도량이라고 믿었던 신라인들은 드디어 신라 그대로가 바로 정토라는 사상을 보여주기에까지 이르렀다. [삼국유사]의 사복불언조에 나타난 것처럼, 신라인들은 연화 등장 불국정토가 현실과는 거리가 먼 타국의 것이 아니라 바로 눈 앞에 이루어질 수 있는 현실적인 것으로서 신라 땅이 바로 불국정토라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마침내는 신라불의 현신성도(現身成道) 신앙을 결과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전세의 과거불이 연좌하였고 현세의 석가불과 제불 제보살이 상주현현하는 부처님 나라 신라에, 이 땅의 부처님이 새로이 출현 성불한다는 것은 당연한 신앙의 귀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백월이성 (노힐부득.달달박박)의 미륵불과 미타불 현신성불이라든지, 광덕·엄장의 왕생서방극락, 욱면비의 염불서승, 포산이성의 현신귀진, 포천산 오비구의 염불서왕 등 신라인들은 불국토에 사는 상근기로서 많은 사람이 성도하고 현신서왕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과 같이 신라의 불국토사상은 전불시의 유연관으로부터 현재의 유연수승의 불국토관으로, 그리고 다시 현실불국정토사상으로 정연하게 전개되어 왔다. 신라가 바로 불국정토라는 현실적인 불국관은 끝내 신라의 현신불을 출현시키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법화경] [화엄경] [미륵하생경] [관음경] 등 경전의 사상적 뒷받침 위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라가 부처님 나라이므로, 신라인이 부처님 나라인 신라를 지켜야 한다는 호국사상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호국불교의 양상은 신라뿐 아니라 신라이래 한국불교의 특색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 불교
백제에는 고구려보다 12년 뒤인 384년(침류왕 1)에 불교가 전래되었는데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서 백제의 서울인 광주(廣州) 남한산(南漢山)으로 들어왔다. 침류왕은 교외에까지 나가 친히 스님을 맞이하였고, 궁중으로 모셔 극진히 받들고 공양하였다.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던 순도는 대국(大國)의 왕으로 군림했던 부견의 사절과 함께 온 스님으로, 외교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엇으나 마라난타는 개인적으로 바다를 건너서 온 일개 외국 승려에 불과하였다. 그런데도 백제의 침류왕은 몸소 교외에까지 나가 스님을 맞이하였고, 궁중으로 모셔와 공경히 받들고 공양하였다.
이는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불교에 대한 이해와 침류왕 스스로의 불교에 대한 갈망을 엿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백제는 바다를 통해 인접해 있던 중국의 문물에 적지 앉은 영향을 받아 왔으며, 새로운 문화인 불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한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마라난타가 오자 서슴없이 받아들여 환영하였고, 공식적으로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다.
이듬해 2월, 침류왕은 한산에 절을 창건하고 10명의 승려를 배출시킴으로서, 백제의 불교 수용은 그 어느 나라보다 적극적이었다.
이것은 백제가 이미 불교문화를 받아들일 충분한 정신적 자세를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391년 (아신왕 1년) 왕은 백성들에게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라는 영을 내림으로써 불교는 생활화되어 갔고, 이것은 백제의 정신문화를 신앙과 사상으로 발전시키는 확고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백제불교의 기록은 약 140년쯤 중단되어 오다가 26대 성왕(聖王)에 이르러 크게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백제불교의 특징은 계율의 중시에 있었는데, 성왕 4년(526)에는 고승 겸익(兼益)이 인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져온 불교 경전 율부(律部)을 번역하였다. 겸익은 일찍이 바다를 건너 중부인도의 상가나사(常伽那寺)에서 5 년 동안 범문(梵文)을 익히고, 계율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인도의 고승 배달다(倍達多) 삼장과 더불어 범문 <아비담장(阿毘曇藏)>과 <오부율문(五部律文)>의 원전을 번역하여 율부(律部)72권을 완성하였다. 이에 왕은 새로 번역된 비담(毘曇)과 신율(新律)의 서문을 지어 태요전(台耀殿)에 봉안함으로써 겸익은 백제 율종의 시조가 되었다.
또한 성왕 23년에는 장육(丈六) 불상을 조성하여 여러 중생들이 다같이 해탈하기를 기원하였고, 성왕 30년에는 불교를 일본에 전파했는데 이것이 한국 불교가 일본에 전해진 최초의 일이다. 불교 뿐 아니라 승려 예술가, 건축가, 기능공들이 29대 법왕 원년(599)에는 살생을 금지하는 영을 내려 민가에서 기르는 매 종류를 놓아주게 하고, 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를 모두 불태우게 하는 등 계율의 엄격성을 철저하게 강조하였다. 이듬해에는 30명의 승려를 배출시켰고 도성인 부여에 왕흥사(王興寺)를 세워두기도 하였다.
30대 무왕(600~641) 때에는 익산에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고, 거대한 탑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형식 위주의'사원 건립과 계율 중심의 엄격함이 백제불교를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백제에서는 율종 외에 열반종(涅槃宗) · 삼론종(三論宗) · 성실종(成實宗) 등에 관한 연구도 성하여 성왕 때에는 양(梁)에 사신을 파견하여 <열반경>의 주석서를 구하였다. 말기에는 고구려의 보덕이 망명해 옴으로써 연구는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으며 통일신라까지 계승되었다.
백제불교의 특징은 계율(戒律)의 중시에 있었다. 성왕(聖王) 때 인도에시 돌아온 겸익(謙益)은 율부(律部)를 번역했고,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은 이에 대한 연구를 했다. 일본의 선신니(善信尼) 등이 백제의 계율학을 배워 갔고, 성왕은 계율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불교를 장려하였다. 많은 백제의 고승, 기술자, 건축가, 예술가 등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소위 아스카(飛鳥)문화의 형성에 기여했고, 일본 고대국가의 정비에 정신적 이념을 제공했다.
통일신라불교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고려왕조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거의 250년 동안 계속된다. 그런데 이 시기의 불교는 대체로 전 100년과 후 150년으로 구분되는 두 기간 동안에 각각 다른 특징을 보인다. 전기는 불교사상이 건전하게 발전한 시기이고, 후기는 그 전기 불교가 차츰 퇴락, 쇠퇴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불교가 일기 시작한 시기이다.
전기 불교는 그 시작부터가 매우 좋았다. 민족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 통일하고 그들의 좋은 점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따라서 신라의 불교는 안정된 환경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문화까지를 더 보태어 내면적인 심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특히 통일신라 전기의 미술은 온통 불교적인 색채로 충만 되었을 뿐 아니라, 경덕왕(742-765) 때를 정점으로 불교문화는 우리 민족문화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찬란한 꽃을 피웠다.
김대성(金大城)이 토함산에 세운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롯하여, 김지성(金志誠)이 부모와 전처를 위해 만든 감산사(甘山寺)의 미륵존상과 미타존상, 세계 제일의 종이라 할 수 있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에밀레종)과 오대산 상원사동종, 어머니의 믿음과 아들의 교화력이 만들어낸 화엄사의 4사자삼층석탑, 독특한 창의성을 가미한 법주사의 쌍사자 석등 등, 이 시대에 만들어진 세계적인 문화재는 너무나 많다.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통일신라 전기의 불교가 이토록 찬연한 빛을 발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그 뒤에는 원효·의상 등과 같은 훌륭한 고승들의 교화활동과 그들의 끊임없는 교학 연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의 융성기에 귀족사회에서 가장 두터운 존경을 받은 것은 화엄종이었다 신라의 화엄종을 개종한 의상(義湘)은 중국 화엄종의 수도자인 지엄(智嚴)의 수제자였다. 당에서 귀국한 의상은 부석사를 창건하고 이를 중심 도량으로 하여 화엄학을 연구하였으며 그의 밑에서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화엄의 사상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원융사상이며 일심에 의하여 만물을 통섭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와 일치하는 것으로 지배적인 귀족 사회에서 환영된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원효는 여러 종파의 대립의식을 배격하였다. 원효는 당시의 고승들 중에서 예외적으로 입당 유학을 하지 않았으나 학승으로서의 위대함은 당에서조차 존경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법상종 계통의 사상을 주로 연구하였지만 불교 연구의 범위가 지극히 넓어서 많은 경전에 조예가 깊었다. <화엄경) <반야경> <열반경) <아미타경) (금강삼매경) <대승기신론> 동의 여러 경론에 주(註). 소(蔬)를 달았다. 그는 일경일론(一經一論)으로 소의경전(所依經典)을 삼지 않았고, 여러 종파의 모순상쟁이 보다 높은 입장에서 융화·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독특한 사상체계를 수립하였다. 특히 그의 저술 <십문화생론(十門和諍論)>은 이러한 그의 사상을 담은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해서 그는 후일에 화쟁국사라고 추서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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