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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춘 시집-바다는 언제 잠드는가
방어진으로 가는 길
김성춘 시인의 시를 읽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방어진을 다녀와야겠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솟아 오른 절박한 심경이었다.
방어진이라는 지역적 공간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삶과 초월」이라는 두 갈래와 「내적, 외적인 지향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울산이라는 산업도시와 그 변두리에 있는 방어진은 김성춘 시인의 시적 공간이자 사물로써 끈적한 호흡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가 지닌 투명함과 삶의 일상성을 찾아 방어진으로 향했다. 울산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은 공업도시로서 각종의 공해와 인구문제, 주택문제, 복잡한 노사관계가 뒤얽혀 골치가 아플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비시적 공간에서 울산을 지키며 울산을 사랑하고, 끈질기게 울산이라는 위치적 공간을 대상으로 삼고 오랜 세월 시를 써오고 있는 김성춘 시인은 성자의 모습을 하지 않았는가 생각되기도 했다.
시외버스정류장에 내렸다. 검고 칙칙한 공기가 나를 덮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공기는 맑았다. 가로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푸른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전국 제1의 공해 도시라고 보도되던 것과는 달리 평온하고 아늑한 모습을 하고 있어 울산의 진면목은 다른 곳에 숨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성춘 시인이「섬․비망록」을 쓸 무렵에 거주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공해문제, 주택문제, 인구집중문제, 노사문제 등이 뒤범벅되어 혼란스러운 와중에서 살아가는 도시민들이 꿈꿀 수 있는 이상향을 제시하고, 스스로 섬을 갈망하여 꿈꾸던 시인의 모습이 태화강에 투영되어 왔다.
멀리 바닷가 쪽의 굴뚝에서 뿜어내는 하얀 연기들이 그림처럼 도심 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의 시적공간은 방어진에 있었다.
다시 방어진행 시내직행을 타고 시인의 자취를 발견해 내기위해 차창에 스쳐 지나가는 거리를 놓치지 않았다.
방어진 가는 길은 자동차 공장과 그 관련 공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논이었는데… 넓은 벌판에는 괴물같은 공장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구릉이 깎이어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그는 어느 잡지에 다음과 같이 울산을 말했다. “울산의 특징은 ‘바다와 굴뚝’이다. 가까이 방어진, 장생포, 당사, 주전, 정자의 아름다운 바다를 끼고 있어 시인들은 바다를 많이 노래한다. 특히 나의 경우는 오늘 밤도 방어진 바다의 높은 밤파도 소리를 책상 앞에 끌고 와 방어진 바다에 수작을 걸고 있다. 이곳의 시인들도 이 땅의 모든 시인들처럼 현대인들의 훼손된 마음, 상처 입은 영혼에 맑은 한줄기 바람을 불어 넣기위해 고민을 한다. 결국 감동적인 글이란 우리 삶과 관련있는 글이고, 그런 글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알고 산다.
“굴뚝이 많아 공해 제일의 도시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서, 시로서 더 아름다운 작품을 남기기 위해 전력투구를 하는 이곳의 시인들이 자랑스럽다.”고
공장지대가 끝나고 버스는 울산시 동구로 들어가는 고개길을 넘고 있었다. 양편의 산들이 이제 방어진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숲과 바다가 어우러진 김성춘 시인의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찌든 도시인들의 마음을 씻어 주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한순간도 지나지 않아 부서지고 말았다. 버스가 오른쪽으로 회전하여 모퉁이를 돌자 거대한 크레인이 나를 압도하며 차를 부술 듯이 다가섰다.
저것이 바로 골리앗 크레인이구나.
숨어 있던 울산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었다.
골리앗 클레인에 짓눌려
납짝해진 바다
현대중공업 앞 바다의 입술이 떨고 있다.
<방어진 풍경․3>에서
왼쪽으로 현대중공업을 끼고 방어진을 향해 가는 동안 까닭 모를 불안과 압박감이 엄습해 왔다.
이 시집의 제1부「새벽하늘」에 나타난 작품들의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전하동, 방어진, 울기등대, 현대중공업, 골리앗 클레인은 일산해수욕장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다.
男根처럼 튼튼한 골리앗 클레인이
부시시 눈을 뜬 방어진 바다를 보고 있따.
수평선도 푸른 눈을 뜨고
男根처럼 우뚝 솟은 골리앗 클레인을 보고 있다.
<방어진 풍경․1>부분
골리앗 클레인은 현대산업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인공적인 것, 공업화, 공해, 노동의 현장, 삶의 현장으로 일상성을 대표하는 것이 된다. 반면에 방어진의 바다는 현실과 동떨어진 거리에 놓여 이상향, 초월의 공간으로 상징된다.
이렇게 상반된 두 공간을 마주보게 하고 그것의 의미를 곱씹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김성춘 시인이 추구하는 내면세계를 엿볼 수가 있다.
서로가 마주보고 있다는 것은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응시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골리앗 클레인으로 대표되는 삶의 모습이 추구하고저 하는 것은 자유롭고 평화로운 방어진 바다와 같은 공간일 것이다. 그곳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이기에 희망을 갖는다. 더구나 바다는 삶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현실이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임을 드러낸다.
현실 속에서 추구하는 이상향의 세계와 이상향에서 버리지 못하는 현실세계라는 상반된 공간을 김성춘 시인은 평화롭게 타협시키고자 하는 것일까.
오늘은 실눈을 뜬 채 꿈꾸는
수평선을 끌어 당겨
사람들의 가슴에
말없이 걸어주고 싶다.
마른 풀처럼 구겨져 떠도는 사람들에게
갈매기처럼 정처없이 떠도는 사람들에게
황홀한 눈빛의 수평선 하나
저 일망무제의 그리움을
일망무제의 허무 하나를
말없이 걸어주고 싶다.
<수평선․3>전문
방어진에 버스는 닿았다.
한적한포구로 상상되던 방어진이 현대식 건물로 메워져 정말 낯선 곳이 되었다. 버스는 더 이상 가지 않았따.
이곳은 김성춘 시인이 말하는 방어진이 아니었다. 울산이라는 산업화된 공간의 연장선이었다. 그의 방어진은 동심지와는 아득히 멀리 떨어진 섬 같은 곳, 그가 늘 가고 싶어하던 동경의 섬, 다가오는 파도와 갈매기소리 평화롭게 들리는 그런 곳이었다.
방어진에 오면
내 심장 안까지 바다가 쳐들어 온다
그래서 바다는 어디서든지 보이기도 하고,
또 보이지 않기도 한다.
<방어진에서․3>중에서
다시 20여분 걸어서 숲에 도착하였다. 80~100여년 된 해송이 우거진 숲이었다. 소풍을 나온 국민학생들이 올망졸망 모여 도시락을 먹고 있는 아름다운 숲은 바다를 향해 전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숲속에 김성춘 시인이 바다를 보고, 듣고, 느끼며 생활하는 덕유교육연수원 방어진 분원이 숨어 있었다.
솔숲에 앉아 김성춘을 읽었다. 아니 그의 방어진을 읽었다.
연수원 뒤편 언덕에서 현대중공업의 골리앗 크레인이 마주 보였고 왼쪽옆에는<흰 옷 입은 성자의 옆모습>을 한 울기등대가 소나무 숲 위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오존 섞인 바람속에 파도소리가 묻혀 왔다. 해송 숲이 이를 받아 함께 파도소리로 흔들렸다. 한적한 절해고도, 가까이는 하얀 거품을 빼어 무는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숲에는 새들이 지저겼다. 바다쪽에서 갈매기가 날아와 일산해수욕장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숲속의 건물, 이는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김성춘 시인의 섬이 아닐까?
김성춘 시인이 꿈꾸어 오던 섬-방어진, 그렇다. 이 작은 숲으로 된 공간이 바로 그 섬이며 그가 말하는 방어진이다. 이 숲을 벗어난 곳은 인간의 도시이며 삶의 모습으로 느껴지는 곳이다. 그는 울산과 방어진이라는 상반된 공간을 함께 살고 있다. 그 두 공간은 바다로 형상화 되면서 외향적인 시인의 삶과 내향적인 의식의 세계를 만든다.
울산의 바다는 삶의 모습이 끈적거리며 나타나는 생활 속의 바다이다. 그곳은 공해와 제한된 공간과 불안한 이웃들과 성폭행 당한 여고생이 정신질환을 일으켜 자살하는 바다가 있다. 방어진의 바다는 초월과 명상, 자유와 평화, 행복이 깃들어 있는 열린공간이며 무소유의 깨달음을 느끼는 열락의 바다이다.
울산/방어진, 현실/이상, 외향적/내향적인 상반된 대립은 서로 마주보며 역동적인 인과관계를 지닌다.
울산은 방어진을 향하여 열려 있고, 방어진은 울상을 향하여 열려 있다. 방어진이라는 초월공간이 있음으로하여 울산의 모습은 인간 삶의 현장으로 살아있는 공간일수 있고, 방어진은 울산이 지닌 세속성 때문에 이 땅에 뿌리박고 있는 초월공간으로 존재 가능하다.
김성춘 시인은 두 개의 바다를 동시에 거느리고 있다. 아침과 저녁의 모습처럼 같은 하루일지라도 생활공간이 다른 그에게 두 바다를 거느림은 타협으로 남게 되고 이쪽 바다와 저쪽 바다를 들락거리며 그 가운데에다 자신의 섬을 만든다.
현실에 대한 좌절과 실망과 분노를 느낄 때 그는 방어진으로 간다. 때로는 방어진의 바다를 세속으로 끌어 들이기도 한다. 속박하는 것들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싶을 때, 자유로운 예술공간을 차단하는 여러 상황들로부터 도피하고 싶을 때 그는 방어진으로 간다.
현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며,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내부에는 또 다른 초월의 세계를 만든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그것이다. 김성춘 시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방어진의 바다로 나타난다.
그의 시에서 드러나는 그의 태도는 하나의 바다에만 빠지지 않는다. 그는 늘 떠나고 있다. 하나의 바다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바다를 향하여 떠난다. 방어진에서는 지친 육신과 영혼을 위해 위무 받을 수 있는 바다를 만나고 그는 다시 삶의 바다로 돌아온다.
명상과 초월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기에 그는 인간의 모습을 찾아서 돌아온다. 「전하동」에서 조깅하는 젊은 부부의 <헝크러진 삶을/더운피로 부등켜안고 오늘도 전하동 숲 위를>나르는 것이다. 전하동은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인간의 숲 지대이다.
그는 이곳으로 돌아와 초월하는 바다가 그에게 전부가 아니고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자각을 한다.
내가 숨 쉬고 사랑하는 동안
바다를 결코 건너 갈 수 없다는 늦은 자각 이후
나는 조금씩 느긋해 지기로 했다.
내 마음의 악셀레이터도 천천히 밟으면서
곡예같은 생의 커브길 느긋하게 돌기로 했다
아다지오, 아다지오로 물살져 오는
환희의 바다를 바라보면서
나만의 작은 집 한채 지을 생각이나 하면서
심심해하는 젊은 갈매기와 함께
엉터리 휘파람이나 불면서.
<바다를 건너는 뢔․1>전문
김성춘 시인의 앞선 작품집「방어진 시편」,「흐르는 섬」,「섬․비망록」,「그것은 나의 삶」에서는 바다를 향해 가고 있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그대 집은 늘 푸른 바다로 넉넉하다」에서는 바다에서 돌아오고 있는 그를 만날 수 있다. 돌아 와 바다를 삶의 모습으로 바꾸어 함께하는 여유와 바다를 자신의 삶 속으로 이끌고 오기도 한다.
위 시에서<내가 숨쉬고 사랑하는 동안>은 이 땅에 인간으로 삶을 누리고 있는 동안이다. 그 동안에는 바다-즉 이상향, 초월공간으로 갈 수 없다는 늦은 자각을 하고 그는 현실에 빠져 든다.
늦었지만 결코 서두를 것이 없는 인생이고 보면 그는 바다를 바라보며<나만의 작은 집 한채>를 짓고 자연과 동화되어 무심한 세월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
<심심해하는 젊은 갈매기와 함께/엉터리 휘파람이나 불면서>그는 바다곁에 행복을 느끼며<단순하고 청청한/수평선으로 서고 싶다>는 것이다.
이처럼 바다 곁에서 바다가 되고 싶은 시인도 결코 바다를 포기할수 없을 만큼 삶을 방기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그는 이 땅에 호흡하며 살아 있는 한에는 한사람의 생활인으로 존재하고자 한다.
<전하동 바다 구석에/죽은 쥐 몇 마리 둥둥 떠다님>(골리앗 바다․1)이라든가<오늘도 흉흉한 파도 이는 바다에/지금 필요한 고통의 처방은>(골리앗 바다․2)처럼 적극적으로 삶의 모습을 회복한다.
삶에 대한 진한 애정과 삶의 작은 모습 속에서도 행복을 찾아내는 성실함이 보인다. 한걸음 더 나아가 시인은 황폐한 척박함 속에서도 행복의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다. <삶에도 연장전과 패날티 킥이 있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하고 깨닫기도 하고 해일(海溢)에서는 삶의 모습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질곡된 우리 삶의 모습을 발가벗겨 놓고 이 땅의 진정한 행복을 위하여 과연 우리들은 무엇인가 자문해 보기도 한다.
김성춘 시인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망은 이 시집의 제1부에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그의 바다는 제2부에 숨어 있다.
그녀는 빛나는 열일곱살.
온 몸이 성감대다.
갯바람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해변 구석구석
관능의 흰파도가
부끄럽게 부서지는
그녀의 몸은 빛나는 열일곱살.
<바다․9>전문
방어진으로 향하는 도중 골리앗크레인이 갑자기 다가와 가슴에 압박을 느낀 것처럼 이 시집에 제1부는 압박감으로 채워져 있다. 그뒤20여분을 걸어서 도착한 울기등대숲-방어진으로 나타나는 곳에서 느끼는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이 시집의 제2부에서 느낄 수 있음은 우연한 일치인지 모른다.
김성춘 시인의 포매이션은 제2부에서 보여 주는 투명함과 명증성에 있다고 느낀다. 아름다움을 주고 있는 그의 시는 주저 없는 언어구사에서 대상접근을 쉽게 해준다. 그것은 명증한 이미지로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맑고 투명한 이미지를 결합시킴으로서 형상화된 의미가 객관적이며 구체화 되어 있다.
그의 시는 연약해 보이는 듯 하면서도 감상에 치우치지 않고 사변적이거나 논리에 빠지지 않는 직관을 드러낸다. 바다를 관좌 하면서 삶의 의미를 추출해 내는 작업, 그러나 무게가 잔뜩 실린 골리앗크레인이 아니라,「있음의 삶」을 직관하고 있다. 그것은 시인에 의해 꾸며지는 삶, 새삼스러이 발견되는 경이로운 삶이 아닌 백년 전이나 더 오래 전에 거기에 그렇게 있어 왔던 삶, 방식은 바뀌었다 할지라도 그것의 모습을 주어진대로 포착하고 있다.
김성춘 시인이 초기에 간직하고 있던 빛나는 감성이 활어처럼 툭툭 튀고 있는 제2부에서 나는 울산과 방어진 사이에 만들어 가고 있는 그의 섬을 만날 수 있었다.
숲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낮게 엎드려야 더 별이 빛나 보이듯
가장 낮게 엎드리는 사람만이
바다를 볼 수 있다면
나는 아직 바다를 발견하지 못했다.
날마다
몸을 떨며
바다를 보고 또 보아도
심연속에 얼굴을 감춘 그는
목쉰 뱃고동과
텅빈 갈매기 울음만 보여준 뿐
심연속 그 얼굴은 보여주지 않는다
바다여
아무래도 나는 아직도 그대를
짝사랑만 하나보다
<방어진에서․6>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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