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둥지
문학기행 버스는 경부고속도로를 물이 흐르듯 질주하고 있다. 새벽잠을 못 채운지라 버스 차창에 가끔씩 이마를 찧으며 어설프게 졸다가 흐린 눈으로 스쳐 가는 노변의 산하(山河)를 본다.
아직은 음력 삼월이라 그런지 앙상한 나목으로 그 자리에 유장하게 버티고 서있는 고목들이 보이고, 미루나무 . 참나무 등걸에 의지한 채 거무스레한 빛으로 둥글게 공중에 매달려 있는 까치집들이 눈에 띤다. 사월 초순의 햇살은 상서로운 기운으로 차창을 투과하여 졸린 내 눈두덩이에 따뜻하면서도 포근한 열기를 보내오고 있다.
설익은 꿈결 속으로 허공에 두둥실 떠 있는 듯한 까치집의 검은 둥지가 동공을 꽉 채워 오고 있다. 까치둥지에 얼기설기 엮어진 작은 나무 가지의 기묘한 이음새 매듭이 오색 실타래와 같은 형상으로 보여, 꿈결에서도 '이것은 착시현상이야' 하고 뇌까려 본다.
점차 희미해지고 사라져 가는 백주(白晝)의 의식은 혼곤한 망각 속으로 그 존재마저 가물가물 거리게 하고 있다. 차 중에서 숙면에 빠지는 것은 내게 흔치 않은 일이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광야의 언덕에 두 팔을 벌리고 서있는 나의 모습은 가관이다. 억세게 광야 곳곳의 지표면에 붙어 있는 들풀의 밑둥까지도 날려 버리려는 듯한 거센 바람은 북동쪽 희뿌연 하늘의 짙은 먹장구름 밑으로부터 미친 듯이 불어오고 있다.
어깨에서 흘러 내려 가슴께에 걸려있는 바바리 코우트는 요란스럽게 펄럭이고 있고, 군데군데 호주머니에 넣어져 있던 잡동사니 용품들은 거센 바람에 모두 날아 가 버린 듯하다. 먹장구름의 가운데에서 희미하게 금속성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하여, 날아가려는 코우트를 붙잡고 단추를 채우며 귀를 기울여 본다.
「까악 - 깍.」
그 소리는 점차 분명해지며 구름 가운데로는 둥그레한 형상이 드러나고 있다. 그 것은 틈실한 나목에 견고하게 얹혀 있는 까치둥지가 분명했다. 까치 소리는 광야의 폭풍을 무시하듯이 선명하고 낭낭하게 온 대지를 울리고 있다. 신심(信心) 깊은 항간의 백성들과 수행(修行)이 돈독한 면벽승(面壁僧)의 귓청이라도 흔들어 놓을 참인가….
광야에서는 거센 폭풍과 까치 소리가 경쟁이라도 하듯이 나를 언덕에 웅크리게 하고 있다. 하늘 저 편의 공중에 미동도 않은 채 멈춰져 있는 월계관 같이 보이기도 하는 까치둥지에는, 정작 까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까치 울음소리만 허공에 울려 퍼지고 있다. 내 혼곤한 의식세계에서 까치둥지의 촘촘한 이음새는, 또 다시 오색 실타래의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광야에 서기 전 희미하게 사라졌던 의식 속의 미세한 실타래 끝매듭이 다시 눈앞에 다가오면서, 돌연 여럿의 사람 형상이 나타났다.
그들은 어제 직장의 사무실 쇼파에서 웅크리고 앉아 굳은 얼굴로 모종의 결정을 보류하였던 사람들이다. 질책하던 사람, 용기를 내어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 사람, 진언(進言)하지 못한 사람, 번데기처럼 굳어 버린 사람 등이 어제의 경직된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채 다가왔는데, 표본실의 박제된 미이라와도 같은 모습이다.
아! 광야에서 시련 같은 폭풍을 이겨내면서 상서로운 까치의 교향악 연주회 중에 왠 어제의 갈등이 등장한단 말이냐. 한 번 발생된 단위별 스트레스 인자는 이렇게 혼곤한 의식 속까지도 틈입해 와, 길지 않은 장년기를 주름지게 하는 독소로구나.
커졌던 까치 소리가 유턴 하듯이 왔다가 점차 작아져 가 버리자, 나는 어느새 눈앞에 바짝 다가와 환영같이 우뚝 서 있는 박제된 미이라들에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허공에 둥실 매달려 있는 오색 실타래의 매듭을 붙잡으려 손을 내 밀다가, 갑자기 쟁반처럼 커지면서 날아 온 둥근 실타래에 이마를 들이받고 말았다.
버스의 급제동으로 앞좌석 의자에 머리를 들이받고, 차중 수면에서 깨어 난 나를 보고는 동료가 빙긋이 웃는다.
"한형! 참 맛있게도 주무시네"
멋쩍은 웃음으로 대신해 주고는 차창 밖을 보니, 고속도로 변의 정돈된 풍광 속의 야산에 기립하고 있는 군병(群兵) 같은 수목의 어깨에, 바둑 판 속의 흑돌처럼 점점이 자리 한 까치둥지가 허공에 점을 찍듯 흘러가고 있다.
(1999 . 4.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