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어째서 진경시대인가? Ⅱ. 진경시대 1. 인구 증가와 그 밖의 발전의 토대들 2. 진경시대 문화의 개화 Ⅲ. 우리 역사와 문화의 무한한 발전을 옹호하며
Ⅰ. 어째서 진경시대인가?
역사학자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크나큰 신세를 지고 있는 E. H. Carr에 다시 한번 기댐으로써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는 후에 그 내용이 《역사란 무엇인가》로 정리될 강연을 통해서, 이른바 '과학적 가설로서의 진보'의 개념을 확연하게 현시해 주었다. 이렇게 역사의 무한한 진보, 발전의 가능성을 수인했던 카의 발전사관을 우리 역사 연구에서 찾아본다면, 대표적으로 1960년대와 70년대의 "내재적 발전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세영에 따르면, 우리 사학사에 있어서 "내재적 발전론"은 "현대민족주의사학"이라는 큰 테두리 속에서 두 가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고 하겠다. 그 첫째가 근대화론의 시각에 선 연구 경항이며, 둘째가 사회경제사학이다. 이중에서 남한 사학계를 중심으로 전개된 첫 번째 입론은, 크게는 식민지사관의 정체성론(봉건제결여설)과 타율성론(만선사관, 반도적 성격론, 그리고 신공왕후의 신라정벌과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운 일선동조론)을 불식시키려 하였고, 구체적으로 경제사 분야에서는 자본주의맹아론(서민지주, 경영형 부농), 사회사 분야에서는 신분제해체론, 사상사에서는 실학론, 정치사 쪽에서는 붕당정치론이라는 역사 개념들을 산출해냈다. 이 분야 연구자들은 조선후기가 중세 사회의 해체기이자 근대 사회로의 이행기라는 전제 하에서 우리 역사 속에서의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에 와서 여러 가지 비판(注3 참조)에 직면하고 있는 위 입론들 자체가 반드시 한국사 연구에 있어 타도되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금방이라도 이 세상이 "정상 재난"에 의해서 절멸이라도 할 듯 호들갑을 떨며, 역사 연구에 있어서 "국가와 민족을 해체시키고 계급을 부정하며 개체성과 다원화를 강조하는 가운데 기존의 이해체계를 전면 재고할 것을 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돌아서야 할 것인지 혹은 아무런 발전적 인식도 없이 그저 역사를 실증적으로 읽어내기에만 바쁜 미시사적 접근으로 일관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발전사관의 비판적 계승과 전체사의 실현을 위해 이른바 문화사적 어프로치를 상정해 볼 수 있겠다. '발전'은 역사의 체계화를 위해서, 그리고 역사가의 현실적 임무를 위해서 버릴 수 없는 매력적인 개념이다. 그렇다고 해도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옷은 훌쩍 커버린 우리들에게 이제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데다가 IMF라는 된서리를 맞아 버렸다.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결여된 실증사학이나 그것의 변주곡인 포스트모더니즘에 안주하기보다는 발전전 측면을 계속적으로 부각시켜 실천적 전투에 임하되 서구 편향적인 근대화론은 버려야 한다면, "주체적 계기에 의한 주체적 발전상"을 찾아내면 되는 것은 아닐까? 진경시대론에서 우리는 그것에 대한 일정한 힌트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조선후기 더 구체적으로 17세기 말부터 18세기에 걸쳐 한국사가 누렸던 문화 번영의 모습들 또 그 내적 원인들을 개관해 보면 좀더 "주체적 계기에 의한 주체적 발전상"이라는 개념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서 조선이 가졌던 나름의 발전 과정과, 장기지속적인 관점에서의 변화상의 실체, 우리 역사와 문화의 역량에 대한 이해를 키울 수 있으리라 믿는다.
Ⅱ. 진경시대
1. 인구 증가와 그와 연계된 발전의 토대들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중세사 교수로서, L. 페브르와 함께 저 위대한 《역사종합평론지》(Annales d'histoire conomique et sociale)를 창간한 M. 블로크는 "토지 점유를 향한 거대한 도약의 기저에, 인구의 자연 증가 이외의 다른 원인을 놓을 수 없다....유럽 문명사에 있어서, 이것보다 더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 것은 없다....이러한 번영(물질적, 지적 교류, 르네상스, 도시 성장, 군주 국가의 등장 등)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인구의 증가"라고 하면서, 역사 운동체의 원동력으로 인구 증가를 꼽고 있다. 물론 인구 증가가 제요소의 관계 속에서 결과로 나타나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농경의 발달을 설명하는 고고학의 인구압 이론(the theory of population pressure)을 잠시 원용해 본다면, 인구 증가가 기술과 문화의 발달에 결정적인 요인임에 틀림없다. 유럽 문명사에서 인구 증가가 르네상스 번영을 가져왔다면, 우리 역사에서의 진경시대를 추동한 기본 밑바탕에 역시 인구 증가의 요인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임진왜란과 양차에 걸친 호란으로 전국적 인구는 급감하게 된다. 그러다 17세기 중반에 들어와서 인구는 다시 증가하기 시작해 그 세기 말엽에 이르면 왜란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여 1,400만여 명에 이르게 된다. 숙종 대에 들어와 유난히 잦던 자연 재난과 그로 인한 기근, 전염병의 유행으로 일시적 감소가 뒤따랐지만, 전체 인구는 꾸준한 증가세를 보여준다. 호적과 양안의 분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인구 증가 현상은 생산 수단으로서의 토지의 가치를 급격하게 증가시키게 된다. 호당 경지면적이 전란 이전에 비해 1/10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 이와 관련된다. 이러한 인구의 자연적 증가는 당시 상공업 도시로 성장하고 있던 한양과 지방의 행정도시로의 사회적 이동을 수반하였다. 대구부 도시 지역 곧 동상면東上面 서상면西上面의 호적을 분석한 이준구의 연구에 따르면, 18세기 무렵 해당 지역에서는 호구의 집중 분포, 호구수의 현격한 증가, 신호新戶의 꾸준한 증가, 인구 밀도의 조밀함 등 농촌과 다른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농촌에서 도시로의 사회적 인구 이동은 토지 가치의 급격한 상승으로 인해 농업 분야에서 배제된 무전농민無田農民의 이주로 설명될 수 있고, 그 이전에 당대 사람들로 하여금 상공업으로의 업종 변경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 한양의 인구 집적에 따른 도시화는 괄목할 만하다. 15세기 이래 행정적, 군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던 한양은 18세기에 이르러 상공업 도시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토지 면적이 적고 토질이 척박한 강원도와 궁방宮房 소유의 농장이 발달했던 황해도 연해 지역의 유이민이 중심이 된 인구 유입이 있었다. 이들 유이민들은 주로 도성 밖에 터전을 잡았는데, 북촌北村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있던 관가·반촌班村과 대비되어 도시의 분화 현상도 있게 된다. 전반적으로 인구는 세종대의 6천 명 정도의 수준에서 8만 명 수준으로 급증하게 된다. 18세기 한양의 상업 도시 성장의 모습을 경강상인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달은 전국적 수준에서의 해로 유통권을 성립시켰다. 그 결과 경강京江 지역이 발달된 운항술을 기반으로 물동의 중심지로 부각된다. 그러다 한강 지역 내에서도 상인간의 경쟁 등으로 인해 상권의 분화와 변천이 일어나는 가운데 점차로 상업 지역의 확대가 일어난다. 나아가 하역운수업과 장빙업藏氷業, 창고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그것들을 통한 자본의 안정적인 축적과 확장을 위해서 정부 권력과의 밀착을 강화한다. 이를 통해 경강상인은 육의전 중심의 특권적 시전상업체제를 붕괴시키게 되며, 보부상 등의 하부 상업 조직을 운용하여 전국적 상권 확장을 이루어나간다. 18세기 한양의 성장은 국방 전략의 수정을 야기하였다. 조선 초, 지역 무차별적인 방어 전략 아래에서 중앙 정부는 전국적 규모의 관방關防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도성 및 지방 도시로의 인구 집중과 번영의 현실 속에서 국토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이 싹트게 되었고, 그 결과가 유형원 등에게서 확인될 수 있는 유성전수론留城全守論=도성고수론都城固守論이다. 기존의 조선의 방어 전략은 변방과 해안에 울타리처럼 성을 쌓고 내륙에서는 요해지要害地를 중심으로 산성을 쌓는 것이 주안이었다. 그리고 유사시에는 군지휘관을 겸했던 수령의 지휘 하에 읍민들이 청야淸野를 단행하고 입보入堡하도록 되어 있었다(산성입보론山城入堡論=도성포기론都城抛棄論). 그러나 도시의 성장 속에서 생활 터전에 대한 포기는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기 때문에 규모가 큰 도시를 중심으로 읍성을 쌓고 그것을 사수하자는 전략상의 수정이 조선후기에 있게 된 것이다. 상공업에 대한 당대 서인=노론 지배층의 시각을 점검하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백승철의 이 분야 연구는 당시 지배층이 상공업 발달에 있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통념을 명쾌하게 불식시켜 준다. 그에 따르면, 서인=노론이 상공업 진흥에 대한 직접적 정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실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 재부를 축적해나갔다. 이러한 경향은 그들 개인의 단순한 물욕의 차원이 아니라, 이권재상론利權在上論=국부론國富論에 대한 반대 기치로 재부민산론財富民散論의 경제관으로 연결되었다. 또한 근본적으로는 왕과 왕실도 하나의 사私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왕이 중심이 된 부국강병책은 패도로 인식하였다. 인구 증가는 경작지의 증가와 토지 이용의 양상에 발전을 가져왔다. 상공업이 이전 시기에 비해서 발달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산업의 중심은 농업이었기 때문에, 농업 경영 형태의 발전 없이는 인구압을 견디지 못 할 것이다. <표1>에서 보듯, 조선의 전체 토지 면적은 세종대에 160여만 결이었고, 임란 직전에 150여만 결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70%-80% 정도가 시기결時起結(실결實結)로 파악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100만-120여만 결이 생산에 투하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16세기부터는 연해안을 비롯해 내륙 지방에서 왕실 종척과 재지사족의 주도로 개간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따라서 그 이전 시기에 비해 전답이 크게 증가하였다. 그러다가 임란 직후에는 전쟁의 여파로 진황지陳荒地가 광범하게 발생하게 된다. 광해군 대에는 원결에서 진황지 가 70%에 육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재조國家再造의 노력으로 전답의 면적은 진전陳田이 다시 기경起耕되고, 나아가 내륙과 연해안 지방의 개간사업이 꾸준히 계속 진행됨으로써 17세기 말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부세제도賦稅制度도 토지 면적의 증가와 발맞추어 대동법과 같은 전세 중심적 성격을 강화하게 되며, 국가는 도별 양전에서 읍별 양전(영조 이후)으로의 전환을 이루면서 양전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농업 경영 형태에도 혁신이 일어나 집약 농업이 완성되었다. 이앙법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하삼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또 이에 대한 선결 조건으로 제언堤堰의 복구 및 신축, 보洑의 수축이 다수 이루어지게 된다. 밭농사에서는 밭작물의 혼작이 보편화되어 갔다. 그와 함께 농종법壟種法(이랑심기)에서 견종법 種法(고랑심기)으로의 파종 기술 향상도 보았다.이앙법으로 발생한 잉여 노동분을 밭농사에 투입하여 다각적인 영농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보리와 콩, 목면, 담배, 고구마 등을 혼작 방식으로 재배하여 상업적 영농 형태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밖에 시비법의 발달로 소출은 더욱 증가한다. 인구 증가와 농업 생산력 발전은 토지에 대한 열망을 가중시킨다. 이렇게 될 때 토지를 더 많이 얻는 측이 있고, 농민이면서 토지를 박탈당하는 부류(무전농민無田農民)가 발생하게 되는 것은 필연지세이다. 이른바 계급의 분화 다른 말로는 농민층의 분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한 무전농민들의 추이에 대해서는, 국가의 불시 노동 징발 곧 요역제 役制와의 관련 속에서 점검해 볼 수 있다. 조선시대 국역國役 체계 내에서 요역은 공납과 관련된 것과, 일시적 노동력 징발로 크게 나눌 수가 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들어와 공납이 대동법 시행으로 인해서 전결세에 포함되어 책정되었기 때문에 공납에 속한 노동력 징발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국가의 토목·건축 공사에서의 노동력에 대한 국가 수요와 생산 수단으로서의 민간 수요는 남아 있었다. 이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고용雇用 노동 시장이 형성되었다. 조선후기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상품 화폐 경제의 전개에 따라서 "무토불농지농無土不農之民"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임용위업지류賃傭爲業之類"로 전변되어 갔던 것이다. 이상으로 조선후기 인구 증가와 그것에 의해서 야기된 물적 토대의 형성을 개관해 보았다. 이 밖에 수공업(관영 수공업의 쇠퇴와 초기적 민간 공장제)과 광공업(설점수세제設店收稅制), 장시의 발달, 상인 조직의 발달(금난전권 폐지와 난전의 형성)도 거례될 수 있을 것이다.
2. 진경시대 문화의 개화
조선후기 사회는 전란의 여파를 수습하고 사회, 경제적으로 나름의 발전 과정을 모색했고, 또 실천하고 있었다. 이런 바탕 위에서 진경시대라는 고유색 짙은 문화 흐름의 한 국면을 만들어냈다. 대외적으로는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대청설치론對淸雪恥論을 표방하면서, 대내적으로는 현실 이해와 깊게 관련된 조선성리학의 활발한 학문 활동을 전개하였다. 여말에 충선왕의 만권당萬卷堂을 중심으로 이제현과 이색, 안향 등 신진 사류에 의해 성리학이 수용된 후, 조선은 유교적 국가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의 성리학 이해는 완전한 수준에 도달한 것도 아니며, 유학자들이 그것에만 전심한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조선 초기에 도성을 건립하는 등 국가 체제의 일변을 도모했던 정도전은 유교 경전 가운데서도 패도적 성격이 강한 《주례周禮》에 바탕을 둔 개혁을 추진하였다. 주돈이周敦 의 우주론, 장재張載의 기氣철학을 근간으로 《불씨잡변佛氏雜辨》이라는 반反불교적 이론서를 저술하는 등 신유학 사상에 충실했던 그가 조선 유학의 도통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은 조선초기 유학의 성격을 방증하는 것이다. 주자성리학에 대한 본격적인 이해와 연구는 중종 38년에 《주자대전朱子大全》이 수입·간행된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사림파를 중심으로 《소학》의 내용을 현실적으로 실천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퇴계와 율곡에 의해서 완벽한 이해가 이루어지게 된다. 퇴계는 이기론과 사단칠정 논쟁을 통해서 성리학의 심학화心學化 경향을 주도하였고,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확고한 자기 학설을 수립한다. 율곡은 사단四端에 대한 퇴계의 [理發氣隨之]설을 부정하고 일관되게 [氣發理乘之]설을 주장하면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적인 조선성리학의 독창적인 이해의 수준을 심화시킨다. 특히 율곡은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저술하였는데, 제왕학帝王學의 교과서인 《정관정요貞觀政要》, 《대학연의大學衍義》의 대안으로 부상하기까지 한다. 율곡의 학통을 계승하고, 정치적으로는 서인=노론으로 결집한 조선성리학자들은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북벌론과 종법宗法의 현실적 적용 문제를 둘러싼 예송禮訟 논쟁을 전개해나갔다. 특히 그들이 가졌던 화이론적인 세계관 곧 소중화의식은 진경시대 문화의 발현에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병자호란의 굴욕을 맛본 당시 사류들에 있어서, 숭명반청의 기운은 당파를 초월한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여기에 학문적 지도자였던 산림山林들, 대표적으로 김집·송시열·송준길 등은 효종의 북벌론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나섰다. 송시열은 처음에 청에 대한 설치와 복수를 별개의 것으로 파악하였다. 즉 "우리나라가 저 오랑캐들에 있어서, 다만 설치의 의리가 있을 뿐 복수의 의리는 없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설치의 일이 주가 된다고 해도, 복수가 역시 그 가운데에 있다. 대개 중국의 땅을 빼앗아서 중국의 백성들을 좌임左 하게 된다면, 복수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군다나 홍광황제弘光皇帝가 오랑캐에게 피륙되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면, 복수의 의리가 주가 되고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복수를 설치와 동일시하였다. 여기에다 그는 정명론을 첨가시켜서 "이적은 중국에 들어올 수는 없으며, 금수는 사람 축에 낄 수 없다."고 하면서 청을 이적과 금수로 파악하였다. 결국 송시열은 설치→복수→춘추대의로 북벌론을 강화시키면서 공론을 주도해나갔다. 중국은 이제 금수가 통치하는 나라로, 문화적으로 더 이상 중화의 위치를 가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중국=이적, 조선=중화라는 소(조선)중화의식이 싹트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조선 학계 내부적으로는 《심경질의心經質疑》와 이를 송시열이 다시 교감한 《심경석의心經釋疑》, 《절작통편節酌通編》,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등의 연구 성과를 이루어내 중국의 정수를 조선이 계승했다는 의식이 팽배해져갔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조선은 이제 더 이상 중국 문화를 동경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성리학에 입각한 지치至治를 조선에 실현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는데, 그 선결 과제로서 조선(조선의 강역·말·지방색·풍경 등)에 대한 자체 이해와 찬양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했다. 진경시대의 문화는 국문 소설로 구체화되었다. 숙종비 광산 김씨의 숙부이면서 송시열의 제자로 대사헌을 역임한 김만중金萬重은 조선성리학에 기반한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었다. 그 외에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심청전沈淸傳》·《흥부전興夫傳》·《옥루몽玉樓夢》·《춘향전春香傳》·《숙향전淑香傳》·《임진록壬辰錄》·《임경업전林慶業傳》·《유충렬전劉忠烈傳》 등의 국문 소설이 제작되었다. 이밖에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계축일기癸丑日記》·《한중록恨中錄》 등의 궁중 문학도 거례될 수 있겠다. 여러 가지 가운데서 진경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흐름에 역시 진경 시풍과 진경 화풍을 빼놓을 수 없다. 척화파의 영수였던 안동 김씨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자이며, 송시열의 제자로서 김창흡金昌翕은 한국 한문학 분야에서 진경 시문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시문으로 표현해내되, 우리 어감에 맞도록 어순을 자유롭게 변화시키는 시도를 하였다. 그의 제자 사천 川 이병연李秉淵은 더욱 세련된 진경시를 구사하였다. 그는 겸재謙齋 정선鄭敾과 동문 수학한 사이로 전국을 누비면서 그 지방의 기후와 풍물, 지형, 인심, 경승을 기행시로 사경寫景해냈다. 이러한 시작 행태는 자국 산천에 대한 강한 애착이 밑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사천시초 川詩抄》를 발跋한 홍낙순洪樂純은 "公我東之放翁也"라 썼다고 하는데, 여기서 방옹은 북송의 애국 시인으로 추앙되던 육유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병연의 애국심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당시 시작의 행태가 당시나 송시의 시풍을 모방하거나 그들의 시에 차운次韻하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던 상황에서 새로운 시재詩材와 시체詩體의 개발은 혁신적인 것이었으며, 조선의 지명을 시제로 붙이거나 토속어로 시를 짓기도 하였다. 진경산수화의 연원은 인조반정에 29세로 참여한 창강滄江 조속趙涑(1595-1668)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반정 성공 후에 벼슬로 현달할 길을 버리고,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시화로 그것을 사생해내는데 몰두하였다. 이렇게 조선 고유의 색채를 담아내는 진경산수화는 겸재에 이르러 완성된다. 겸재는 화법의 수용·개발을 통해서 더욱 진경산수화를 정제시킨다. 선묘線描를 특징으로 하는 중국의 북방 화법과 묵법墨法을 특징으로 하는 남방 화법을 한 화폭에 모두 등장시킴으로써, 바위산과 토산이 한데 어우러진 우리의 풍경을 효과적으로 담아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골산骨山을 그릴 때는 상악준법霜鍔 法을 주로 쓰고 부벽준법釜劈 法을 혼용하며, 토산을 그릴 때는 미가운산법米家雲山法을 주로 사용하여 비구름과 안개가 숲이 우거진 봉우리를 휘감는 모습을 나타내고, 미점米點을 여러 번 덧 찍어 푸르름이 짙어지도록 하였다고 한다. 조선후기 학문과 사상·문화를 주도한 계층은 역시 경화京華 사족이다. 그들은 한양의 발달된 도시적·국제적 성향 속에서 성장하면서 조선성리학과 실학을 모두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경향 분리를 추동하였던 것이며, 그와 반대로 이제 영남학파는 스스로를 '궁향원신窮鄕遠臣'이라고 하면서 '受分田 阻跡京城'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술환국 후의 남인은 정치 활동에서 완전히 배제되면서, 재지사족화하였던 것이다. 진경시대를 선도하던 경화 사족은 조선성리학의 명분론을 계승하면서 조선 중심적인 학술·예술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이들에게 있어 주목되는 점은, 조선성리학의 2대 철학 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호락논쟁湖洛論爭)의 전개에 있다. 17·8세기에 성리학의 핵심적 논쟁으로 부상한 인물성동이론은 말 그대로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가하는 문제를 탐구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간李柬은 인물성구동人物性具同을 주장하면서, 인물성이 상이하다고 주장한 한원진韓元震과 맞섰다. 동론同論은 사람과 사물의 본성은 같지만 다만 기질이 다를 뿐〔性同而氣異〕이라고 하면서, 사람과 사물의 근본적 차별성을 부정하고 마음의 본체는 모두 선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이론異論은 이치가 같을 뿐이지 본성이 같은 것은 아니다〔理同而性異〕고 하면서, 사람과 사물의 차별성을 주장하였다. 동론을 낙론洛論이라고 하는 것은 그 주창자인 이간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낙하洛下(지금의 서울)에 거주했던 것을 지칭한 것이고, 이론을 호론湖論이라고 한 것은 한원진의 지지자들이 호서湖西(지금의 충청도)에 살고 있었던 것을 지칭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학설의 차이는 당시의 경향 분리의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경화 사족들은 사상적으로 낙론으로 결집하면서 우위를 점해 갔다. 그들은 신분적 질서를 부정하는 이론을 주장하는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당시 상공업적 분위기에 적응하면서 성장했던 위항인委巷人들과 교류를 가지기도 하였다. 세계관에 있어서는 청이 조선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해소된 상황에서 인물성동론을 바탕으로 유연한 교류의 자세를 보여 주었고 그들의 진경 문화를 더욱 세련된 것으로 정제하였다. 조선후기 청을 통한 서구 천문학의 전래 배경을 연구한 정성희는 낙하의 동론, 서양 천문학의 중국기원설을 꼽고 있다. 인물성동론과 관련해서는 홍대용洪大容의 경우, "인물성동론을 기초로 하여 人物均의 논리를 끌어내고 여기서 다시 이용대상물로서의 物이라는 새로운 物論에까지 나아"갔다고 하였고, 황윤석黃胤錫의 경우 성즉리性卽理의 대원칙에서 진물지성盡物之性의 태도를 강조하였으며, 이러한 물론은 자연스럽게 "자연과학"의 탐구로 이어졌다고 하였다. 물론 홍대용과 황윤석의 자연 탐구가 자연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다시 검토되어야 할 것이지만, 하여간 그들을 중심으로 낙론계 경화 사족은 조선적 색채를 견지한 위에서 외래 문물을 이용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다가 다음 세대 박지원에 의해서 북학이 사상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하자, 진경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Ⅲ. 우리 역사와 문화의 무한한 발전을 옹호하며
오늘날 내재적 발전론은 그것이 가진 근대화론적 편향성 때문에 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다. 서구의 근대 시기라는 역사적 경험을 세계 보편 논리로 수인하면서, 우리 역사 속에서 그것과의 접점을 찾아내려는 시도가 과연 타당하냐는 것이다. 그러한 연구들은 우리 역사의 더 많은 부면들, 혹은 그것의 가능성은 무시해버리고는 그들의 목적에 부합되도록 부조적 수법을 구사했으며, 궁극적으로는 식민사관을 극복하기는커녕 오히려 인정하는 모순에 빠져 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판들은 매우 타당한 견해가 아닐 수 없다. 역사가의 문제의식의 틀, 곧 사관이 역사성을 면치 못하는 것이라면 1960·70년대 내재적 발전론은 흘러간 과거이며,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에까지 반드시 그것을 묵수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과연 발전의 개념까지도 버려야 하는가라는 점이다. 흔히 진보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역사에 있어서 발전이라 것은 혁명가들의 선동구호에 불과한 것이며, 허구적 개념이라고 일축한다. 또한 한국사 연구에서 발전이라는 큰 틀을 가지고 체계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실증성이 희박하다거나, 내재적 발전론의 재판이라고 하면서 연구의 동기는 물론 결과물까지 부정하려든다. 그들이 진보나 발전을 부정할 때에는 마치 조건반사 작용과 같이 하나같이 핵폭탄, 원전사고, 화학무기에 의한 게노사이드, 참혹했던 1·2차 세계대전, 아파르트헤이트, 나치의 유태인에 대한 홀로코스트, 환경오염 등 역사에 있어서의 암울한 측면들을 줄줄이 거례한다. 이에 덧붙여 민족이나 계급, 국가, 인종, 문화, 문명 등의 개념들이 역사적 용어에 불과한 것들이며, 실재하지 않는 허구적인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럼 우리는 이렇게 단언한다. "그렇게 얘기하는 그들도 역사의 장구한 발전의 실현물일 뿐이다."라고.... 정도전은 불가의 유식학적 사고에 대해서 고래로 장구한 천지 자체를 어떻게 한 조각 물거품으로 치부할 수 있느냐며 항변하였다. 그와 같은 심정으로 우리는 역사의 발전을 하나의 실체로 당당하게 인정할 수 있다. 다만 카의 말대로 그 발전·진보의 동기와 계기는 각 시대와 역사적 여건에 있어서, 단일하지 않은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드러나는 결과도 다를 수 있다는 유연성을 확보하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장구한 천지는 인정하되, 그 내에서 어떤 시기 어떤 곳은 사막으로 될 수가 있으며, 또 꽃이 피는 들판·산·바다·강으로 달리 존재할 수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진경 시대에 접근하였다. 만약 제국주의 국가라는 것과 식민지 국가라는 것을 잣대로 발전을 가늠한다면, 우리는 분명 후진국이었으며 정체된 역사와 문화를 가졌던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발전이라는 개념 속에는 그러한 징표 단 한가지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치열한 고민을 통해서 조선성리학을 완숙의 경지로 소화하였으며, 그러한 사상에 입각한 이상 사회를 건설해나가고 있었다. 진경시대의 문화의 개화도 이런 바탕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 우리가 지배당했다고 해서, 우리 역사와 문화가 발전하지 못 했다고 본다면 너무나 큰 오산이며 비과학적인 단견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영위하는 사회는 오랜 세월을 겪으면 변하게 마련이며, 그 변화의 방향은 아무렇게나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치열한 고민과 시도, 그리고 시행착오, 성찰을 통해서 때로는 급진적이지만 대체로 점진적인 발전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진리로 간주된다. 이런 의미에서 위와 같이 인류의 전체 생명을 대단히 걱정해 주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도 장구한 발전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 우리 역사와 시대 과제의 해결 역량으로서 문화의 발전을 얘기할 때, 그것은 전체사적인 시각에서 구성되어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화폐가 고려 중기 때 주조되어 사용되었다가 조선에 들어와 사용되지 않고 다시 조선후기에 사용되었다고 한다면 과연 고려 중기는 조선 초기에 비해서 퇴보한 사회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너무나 도식적인 설명이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으려면, 화폐의 사용 이외에도 다른 측면이 종합적으로 고려된 바탕 위에서 결론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사적 어프로치가 중요한 것이다. 현재의 진경시대도 겉으로는 문화사적 접근법을 취하고는 있으나, 너무나 노론 중심적인 설명, 그리고 경화 사족을 부각시키는 측면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진경시대의 대표성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최완수의 글을 보면, 율곡과 그의 학통을 계승한 기호학파는 훌륭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반해서, 영남학파=남인은 고루하고 너무나 퇴행적인 자세로 퇴계학설을 묵수하는 것만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분명 영남학파=남인 내부에서도 새로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상의 변화상이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학문과 사상 등에서 경향 분리가 이루어졌다고 하면, 향과 향의 문화에 대한 설명이 총체적으로 밑받침이 되어야지 17·8세기 조선 전체가 진경 문화를 향유했다고 하는 설명이 타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가 역사학을 연구하는 과학적 가설로서 진보와 발전을 이야기하였다. 과연 진보와 발전이 없었다고 보면서 그냥 '술이부작'의 태도로 일관할 것인가, 아니면 발전과 진보라는 개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과거와 대화하면서 그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할 것인가? 역사학(자)이 현실 사회에 아무런 메시지도 주지 못하고 아카데미즘에 침잠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 사회의 첨단에 서서 이념적 지표를 제공해주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전자에 대한 강한 부정과 후자에 대한 강한 긍정만이 역사학의 종말론에 대항해서 건설적인 연구의 지평을 열어줄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