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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쉽게 배우는 글짓기 교실
“귤을 좋아하는 모양이오.”
검정 양복의 사내가 물었다. 키가 190 센티미터는 되어 보였다. 더군다나 검정 썬글라스까지 끼고 있어 사내는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CIA나 KGB의 요원처럼 보였다. 탁상구는 사내를 보고 조금 주눅이 들었다. 사내는 귤을 만지작거리며 탁상구를 바라봤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탁상구는 사내가 왜 자신에게 귤을 좋아하냐고 물어오는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내의 말투는 꽤 도전적이어서 “날씨 참 좋군요” 같은 인사말처럼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쩐지 탁상구는 별로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내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껍질을 까는 것이 좀 귀찮긴 하지만. 귤은 맛있는 과일이죠.” 탁상구가 말했다.
사내는 탁상구의 말을 듣고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은 비웃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탁상구는 약간 모욕감이 들었다.
“나와는 반대군. 나는 귤은 별로인데 귤 껍질 까는 것은 좋아하거든.”
사내는 손전등 같은 막대기를 탁상구의 목에 슬쩍 갖다 대었다. 사내의 검정 썬글라스에 파란 불빛이 번쩍했다. 탁상구는 순간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탁상구는 이상한 방에 끌려와 있었다. 방 안에는 치과 수술용 의자와 몇 가지의 복잡한 의료 기구가 있었고 방 가운데에는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슈퍼 앞에서 본 검정 양복의 사내는 다른 사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검정 양복의 사내가 아주 정중하고 공손하게 서 있는 것으로 보아 다른 사내의 직급이 더 높은 것 같았다. 탁상구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처럼 바닥에 계속 엎드린 채 자신이 여기에 왜 끌려와 있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사내들의 분위기로 봐서 일반적인 경찰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말로만 들었던 기관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러자 탁상구는 만약 기관 사람들이라면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오히려 한심스럽기까지 한 나 같은 소시민을 왜 잡아 왔을까 생각해보았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주차 위반이라든지 차선 위반 같은 것으로 몇 번 딱지를 끊기도 했고, 술에 취해 경찰서 앞에 노상 방뇨를 하다가 벌금을 문 적도 있지만 고작 그딴 것을 탓하기 위해 국가에서 요원 씩이나 보낼 리는 없을 것이다. 탁상구는 혹시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국의 안보에 심대한 해악을 끼친 일이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를 리가 있겠는가? 조국의 안보에 무슨 해악을 끼치고 싶어도 사원이 50명도 안 되는 중소 기업의 총무과 말단에 있는 자신이 무슨 수로 해악을 끼친단 말인가? 결국 탁상구는 사내들이 사람을 잘못 체포해온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결론을 내리자 사람 한 명 제대로 찾지 못하는 어벙한 것이 요원이라면 요원이라고 해서 주눅 들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탁상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냐하면 자신이 잘못 체포되어 온 것이라면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 것이 아니라 빨리 신원 확인을 해주고 집에 가서 주말 드라마나 보는 것이 보다 현명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것 보세요.” 탁상구가 사내들을 불렀다. 검정 양복이 탁상구를 돌아봤다. 탁상구는 검정 양복을 보자 본능적으로 약간 움찔했다. 그렇지만 탁상구가 많이 겁을 먹은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내들은 행정상의 실수를 저지르고 있고 자신은 그 행정상 실수의 희생자다. 그러니 사내들이 서류를 뒤져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나면 곧 “어이쿠, 이거 죄송합니다” 하고 굽실거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나랏일 하는 사람들 같은데 무슨 행정상의 오해가 있었던 것 같소. 그러니 내 말은 사람을 잘못 봤단 얘기요. 뭐 나랏일 같은 큰일을 하다보면 이런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그 점은 내가 이해하오. 무슨 심적 피해로 인한 소송이니 그런 것은 안 할 생각이니 그냥 집에나 가게 해 주시오. 아참, 뭐 확인할 것이라도 있소?”
그때 검정 양복이 걸어와서 아주 익숙하고 유연한 폼으로 탁상구의 복부를 강타했다. 연이어 사내는 복부를 잡고 있는 탁상구의 머리를 발로 가격했다. 의자에 앉은 사내가 “김 과장. 물건 상처 입히지 마. 때리려면 장비를 사용해” 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검은 사내는 공손하게 “알겠습니다. 부장님” 하고 말했다. 탁상구는 어이가 없었다. 탁상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검정 양복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당신들 정말 실수하는 거야. 당신들이 뭐 하는 사람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들이 찾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나는 그냥 귤을 사러 나온 것뿐이라고. 계속 신원 확인도 안 하고 이런 식으로 하면 나중에 국가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낼 거야”
그러자 검정 양복은 옆차기로 다시 탁상구의 목을 가격했다. 탁상구는 3미터 정도 날아가서 떨어졌다. 이번에는 정말 심한 부상이었는지 탁상구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자 의자에 앉은 사내가 검정 양복에게 “이 씹쌔끼야. 내가 상처 입히지 말랬지. 때리려면 장비를 사용하라고 했잖아. 이 새대가리 새끼야.” 하며 들고 있던 파일로 검정 양복의 얼굴을 탁탁 때렸다.“죄송합니다. 부장님. 버릇이 돼놔서 그만.”하고 검정 양복이 쩔쩔매며 말했다. 의자에 앉은 사내는 다시 평정을 되찾은 듯 “명심해. 이 제품은 망가지면 안돼. 흥분해서 흠집이라도 나면 넌 씹쌔끼야 뒤질 줄 알어.” 검정 양복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명심하겠다고 말했다. “저 새끼 끌고 와!” 의자에 앉은 사내가 말했다. 검정 양복이 탁상구를 질질 끌고 와서 의자에 앉혔다.
탁상구는 이제 훨씬 공손해진 태도로 말했다.
“정말입니다. 나랏일을 하는 높으신 분들 같은데 저는 아마도 선생님들이 찾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저는 나라에서 일부러 부를 만큼 잘난 것도 없고, 뭐 잘난 게 없으니 큰 잘못을 저지를 일도 없기 때문이지요. 제 이름은”
탁상구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 하는데 검정 양복이 파일을 읽기 시작했다.
“이름 탁상구, 나이 32세, 주민등록번호, 690301-1045632, 주소 망원동 437-2, 직장 세명주식회사 총무과 대리, 1997년 4월 3일 홍대 앞 닐니리아 다방에서 차명순과 중매 후 79일만에 결혼. 자녀 없음. 불임 사유 없음. 복숭아 알레르기, 대학 시절과 군대 시절 각각 임질 한 차례씩 앓음. 배꼽 옆에 탈장 수술 자국. 더 읽어줄까?” 검정 양복이 말했다.
“예, 저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탁상구는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탁상구 너는 워커힐호텔 4903호 복도 앞에서 소음기 장착 38구경 리볼버 권총으로 노나라당 대변인 김석산을 암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헛!” 탁상구는 검정 양복의 말을 듣고 경악하기는커녕 웃음이 나왔다. 싱크대 밑에 죽어 있는 생쥐도 집 밖으로 못 들어내는 탁상구로서는 그 말이 농담처럼 들렸던 것이다.
“하하. 어르신들이 뭘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으신 것 같은데요. 저는 예비군 훈련 가서 사격도 안 하는 놈입니다. 거 무서우신 분들은 빼준다고 조교들이 그러거든요. 그러면 저는 빠져요. 그걸 왜 쏩니까. 쏴 봐야 남는 게 뭐 있다구. 그늘에서 담배나 피우는 게 낫지. 그런데 뭐요? 소음기 장착 38구경? 이거 거의 명작 동화네. 하하……”
검정 양복이 부장을 한 번 쳐다보았다. 부장이 웃으며 말했다.
“기본적으로 CATS의 공작원들은 45구경 매그넘을 사용하는데 왜 이번에는 38구경이었지? 소음기 장착 문제 때문인가? 개인적으로 나는 그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더군.”
탁상구는 고분고분 말하니까 요원들이 사람을 우습게 본다고 생각하고 반말을 섞어서 강한 톤으로 말했다.
“아! 나 참 머리 안 돌아가는 양반들일세. 당신들. 안기부나 뭐 그런 요원이지? 그러고도 국민들 세금을 받아 처먹어? 어딜 봐서 내가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할 사람처럼 보여? 그리고 나는 총이라고는 군대에서 식스틴 두 번 쏴 본 게 전부야. 그것도 영점 사격으로. 영점 사격하는데 연발로 쏴서 뺑뺑이를 좀 돌긴 했지만.”
검정 양복이 의자에 앉은 사내에게 안 되겠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의자에 앉은 사내는 당연한 일 아니냐는 듯이 웃었다.
“어이 김 과장 장비 준비해.”
검정 양복은 탁상구를 들다시피 해서 치과 수술용 의자에 눕혔다. 탁상구는 문득 겁이 났다. 지금까지는 신원만 확인되면 곧 풀려날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조금 느긋한 감이 있었지만 지금 분위기로 보아서는 당장 무슨 고문이 시작될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실컷 고문을 당한 뒤에 “어이쿠. 이거 죄송합니다. 행정상의 실수군요” 하고 말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탁상구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사람 잘못 본 것이라고 소리쳤다. 검정 양복은 여기에 끌려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든 걸 잡아뗀다고 말했다. 탁상구는 자신은 독립 운동가처럼 신념을 위해 비밀을 지키는 그런 사람들과는 달리 진짜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설득하고 싶었지만 별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검정 양복은 이런 경험이 많았는지 숙련된 솜씨로 탁상구의 팔과 다리를 치과 수술용 의자에 고정시켰다. 탁상구는 “당신들은 지금 정말 실수를 하고 있는 거요” 하고 덜덜 떨면서 말했다. “아가리 닥쳐 이 개애새끼야.” 검정 양복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검정 양복은 탁상구의 손가락과 가슴에 로션 같은 것을 발랐다. 로션은 매우 차갑고 미끌거렸기 때문에 탁상구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검정 양복은 탁상구의 열 손가락에 전선으로 연결된 골무 같은 것을 끼우고 젖꼭지에는 집게 같은 것을 꽂았다. 검정 양복이 부장에게 준비가 다 끝났다고 말했다. 부장은 담배를 끄고 천천히 다가왔다.
“음악은 사용 안 하나?” 부장이 말했다. “좀 돌리고 난 후에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품이 너무 지치면 명료함이 떨어지니까요.” 검정 양복이 말했다. “그래 조금 있다가 사용해도 될 것 같군.” 부장이 말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CATS가 어째서 야당 대변인을 죽였는가 하는 사실이 아니네. 우리는 너희들이 이번 사건을 어떻게 공작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이번 암살 사건이 정말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하는 사실적인 내용이네. 복도에 어떤 표식을 했고, 엘리베이터는 몇 층에서 내렸으며, 너는 무슨 옷을 입고 있었고, 아침 식사는 어디서 무슨 메뉴로 했는가 하는 자네만 알고 있는 그런 사실적인 내용이란 말이지.”
검정 양복은 장비의 스위치를 켜고 센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있었다. 탁상구는 지금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공포에 떨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공포에 떨지 않았다 하더라도 뭘 알아야 무슨 말이라도 할 것이 아닌가.
“아하! 아무 말이 없다? 나는 이 일을 이십 년째 하고 있는데 말이야. 결국에는 다 털어놓을 것인데도 왜 사람들은 사서 고생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고생을 좀 하고 털어놔야 그나마 양심에 가책을 덜 받는 모양이지? 그런 면에서 인간이란 참 이해할 수 없는 동물이야. 안 그렇나 김 과장?” 검정 양복은 별 뜻 없이 “예 그렇습니다. 부장님”이라고 말했다.
검정 양복이 부장에게 리모컨을 주었다. 부장은 전화기를 들어 “미스 김. 나 오렌지 주스 한 잔만” 하고 말했다. 그리고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탁상구는 손가락에서 무엇인가가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전기에 감전된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근 것 같기도 했다, 곧 오른쪽 손가락과 왼쪽 손가락에서 나온 충격파는 심장에서 만나 반응을 시작했다. 수천 개의 면도날들이 미친 듯이 날뛰며 장기들을 잘라내는 것 같았다. 탁상구는 극심한 고통에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정말로 소리도 지를 수가 없었다. 인간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는 기계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탁상구는 문득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고문 장면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짜 극한의 고통이 오면 인간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탁상구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지를 비틀고 있을 때 백화점 앞의 도우미처럼 날씬한 여자가 오렌지 주스를 들고 와서 부장에게 주었다. 여자는 “더 시키실 일은 없습니까? 부장님” 하고 아주 일상적인 톤으로 물었다. 부장은 “아니. 됐어. 오늘 미스 김 패션 상큼한데?” 하고 말했다. 여자는 자신의 패션이 정말 상큼한지 슬쩍 보고 웃으며 나갔다.
10분쯤 지나자 부장이 다시 리모컨을 눌렀다. 탁상구의 심장 속에서 미친 듯이 날뛰던 면도날들이 서서히 탁상구의 몸에서 빠져나갔다. 탁상구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의식은 또렷했다.
“3단계였나?” 부장이 물었다.
“1단계였습니다.” 검정 양복이 말했다.
“그래? 이 친군 엄살이 좀 심하구먼. 다음은 2단계로 하지.” 부장이 말했다.
탁상구는 다시 시작하자는 말에 너무도 당황하여 “저는 정말 아니에요. 이건 행정상의 실수니 한 번만 확인을 해주세요”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 몸 어느 한 군데도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부장은 오렌지 주스를 조금 마시고 다시 리모컨을 눌렀다. 이번에는 면도날과 드릴 같은 것이 내장을 갈기갈기 찢고 지나갔다. 2단계가 채 끝나기도 전에 탁상구는 의식을 잃었다. 검정 양복이 와서 탁상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 친구 정말 의식을 잃었는데요.” 부장은 그럴 리가 있냐는 표정으로 오렌지 주스 컵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탁상구의 눈을 살펴보았다. “정말 그렇군. 깨워.”
사내가 탁상구의 뺨을 몇 차례 때렸다. 탁상구는 다시 일어났다. 다시 일어났을 때 자신의 몸이 여전히 치과 치료용 의자에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닫자 탁상구는 공포에 질려 온몸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그러나 검정 양복과 부장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3단계 하면 물건 잡겠는데. 2단계로 한 번 더 하고 그냥 음악이나 좀 틀지.” 부장이 말했다.
검정 양복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정 양복은 탁상구의 귀에 헤드폰을 끼웠다. 준비가 다 되자 부장은 오렌지 주스를 조금 마신 뒤 장난치듯 리모컨 버튼을 살짝 눌렀다. 탁상구의 손가락 사이로 무엇인가가 지나가고 심장에서 다시 면도날과 드릴이 내장 속의 장기들을 낱낱이 끊어놓았다. 귀에서는 유리창을 못으로 긁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이 2단계의 상태는 거의 두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탁상구는 고통과 발작 때문에 기절했다가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기절했다가 다시 일어나도 탁상구의 몸에는 여전히 수천 개의 면도날과 드릴이 내장 속을 질주해대고 있었고, 귓속에서는 유리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탁상구는 어서 빨리 죽어서 이 치과 수술용 의자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탁상구가 사지를 비틀며 경련을 하는 동안 검정 양복과 부장은 설렁탕을 시켜서 점심을 먹었고,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미스 김을 불러서 패션에 대해 농담을 하기도 했다. 두 시간이 지나자 부장은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하며 리모컨 버튼을 눌러 장비를 중지시켰다.
10분 정도 지나서 고문의 충격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난 탁상구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부장이 다가왔다.
“어때 조금 더 할까? 뭐 이 장비는 10단계까지 준비되어 있고 음악도 아주 다양해.” 부장이 말했다.
“뭐든 시키는 대로 할께요. 정말이에요.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시면 다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장비만은 사용하지 말아주세요. 네 정말이에요.” 탁상구는 애원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가 어떻게 김석산을 죽였는지 소상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구먼.”
“예예 그럼요. 소상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말고요. 정말이에요. 저는 정말 소상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이 친구 풀어줘.” 부장이 말했다. 검정 양복이 와서 탁상구를 풀어주었다. 탁상구는 야당 대변인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치과 수술용 의자와 헤드폰으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 종이와 펜이 있네.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경위를 최대한 사실적으로 쓰라는 말일세. 최대한 사실적으로. 알겠나? 열두 시간 후에 오겠네. 그때까진 다 쓸 수 있겠지? 김 과장. 자료집을 주게. 살인 사건에 대한 경찰 측의 여러 가지 견해와 신문 기자들의 의혹이 담겨 있는 신문 기사일세. 그러니까 자네는 여기에 나와 있는 기사와 자료들을 보고 모든 의혹들을 풀어줄 수 있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진술서를 써야 한단 말이야. 알겠나? 만약 진술서가 맘에 들지 않으면 열두 시간 후에는 장비 위에서 살게 될거야.”
탁상구는 덜덜 떨면서 명심하겠다고 말했다. 부장과 검정 양복은 돌아갔다. 검정 사내는 펜과 종이 그리고 파일 뭉치 하나와 탁상시계를 주고 갔다. 탁상구는 한숨을 쉬었다. 탁상구는 고문으로 상처 입은 곳이 없는지 몸의 구석구석을 만져 보았다. 피가 나거나 아픈 곳은 없었다. 저 장비는 고통만 줄 뿐 상처는 남기지 않는 것 같았다.
탁상구는 자료집을 펼쳤다. 거기에는 한 사내가 가슴과 목에 각각 총알을 맞은 흉한 사진이 한 장 들어 있었다. 사진 밑에는 사건 발생 추정 시간 오후 다섯시 사십분이라고 적혀 있었다. 탁상구는 신문 기사도 펼쳐 보았다. 거기에는 대변인 암살 사건을 다룬 중앙 일간지의 기사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기사들은 경찰 측은 이번 사건을 개방과 남북 화해를 두려워하는 북한의 보수 군부에서 내려보낸 대남 침투 공작조의 소행이거나 남한에 오래전부터 상주하고 있던 간첩의 소행으로 보고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신문은 똑같은 기사를 다루고 있었지만 한 신문은 아무리 체제 붕괴를 두려워하고 있는 북한의 보수적인 군부라도 기아와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는 현 실정을 고려해 볼 때 대북 식량 지원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적십자 사무국장이자 야당 대변인이었던 김석산을 간첩을 보내 암살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었다. 탁상구는 이 신문 저 신문을 보면서 도대체 진술서를 어떻게 써내려 가야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부장 말에 따르면 신문 기자들이 묻고 있는 모든 의혹들을 말끔히 해결할 수 있는 진술서를 써야 한다는 말이다. 탁상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것을 어떻게 쓴단 말인가? 탁상구는 이 암살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파리보다 더 큰 생물체는 죽여 본 적도 없는 내가 어떻게 암살범에 대해 진술한단 말인가. 암살범이 그 대변인이라는 작자를 왜 죽여야 했는지 이유도 알지 못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 내막도 알지 못한다. 탁상구는 총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는 태어나서 총이라고는 딱 두 번 쏘아 봤는데 그 중에 한 번은 실탄이 발사되지 않아서 사격 조교가 응급 처치를 해준 다음에 쏜 것이다. 더구나 탁상구는 권총 같은 것은 한 번도 만져보지 못했다. 탁상구는 자신이 문득 진술서를 쓸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탁상구는 이 암살 사건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으며 직접 경험이건 간접 경험이건 경험한 것도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못 쓴다. 쓸 수가 없다. 탁상구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나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므로 못 쓰겠다고 말하면 부장은 자신을 치과 수술용 의자 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검정 양복은 탁상구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3단계로 하루 종일 고문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토록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설렁탕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깔깔거리며 여비서랑 잡담을 나누는 것을 보아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다. 그 생각이 들자 탁상구는 극심한 공포감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써야 한다. 무조건 써야 한다. 다시는 그 장비 위에 올라가고 싶지 않다. 탁상구는 문득 탁상시계를 봤다. 벌써 한 시간이나 흘렀다.
탁상구는 방 가운데에 있는 탁자와 의자를 끌어다가 모서리 쪽으로 가져다 놓았다. 탁자가 방 가운데에 있으면 불안해서 집중이 잘되지 않을 것 같았다. 탁상구는 종이와 펜을 탁자의 중간에 올려놓고 탁상시계를 탁자의 끝에 놓았다. 그리고 서류 파일은 종이의 위쪽에 두었다.
이제 쓸 준비는 다 되었다. 뭘 쓰나. 막상 쓰려고 하니 마땅히 쓸 말이 없었다. 탁상구는 ‘죄송합니다. 제가 대변인 김석산을 암살했습니다’라고 썼다. 그리고 종이를 찢어버렸다. 탁상구는 ‘저는 탁상구인데요, 나이는 서른두 살이고요 세명주식회사 총무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총으로 대변인 김석산을 워커힐호텔 복도에서 죽였어요. 정말이에요. 유가족 분들에게는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썼다. 탁상구가 읽어 봐도 말이 되지 않았다. 탁상구는 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시간은 열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탁상구는 한참 동안 머리를 쥐어뜯고 몇 장의 종이를 더 찢어버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탁상구는 방 안을 어슬렁거렸다. 그리고 서류 파일을 다시 읽었다. 사진을 꺼내 이렇게도 살펴보고 저렇게도 살펴보았다. 탁상구는 세 시간도 넘게 방 안을 어슬렁거리기만 했다.
탁상구는 천장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북한 공작원이다. 나는 암살범 탁상구다. 나는 암살 전문 공작원이다. 나는 남파 주둔 간첩 탁기수의 아들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오는 남파 간첩들에게 어릴 적부터 암살 전문 공작원으로 키워졌다. 나는 주위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평범한 삶을 사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은 시간이 될 때마다 폭파와 암살과 무기 다루는 법에 대해 배워왔다. 나는 암살 전문 공작원 탁상구다. 나는 암살범 탁상구다.
탁상구는 그렇게 한참을 중얼거리다가 다시 책상에 앉았다. 시간은 이제 여섯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탁상구는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탁상구는 자신이 머리 속에 떠올렸던 암시들을 생각하며 종이에 사건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암살 전문 공작원 탁상구다. 나는 남파 주둔 간첩 탁기수의 아들이다. 나는 암살범이다……
탁상구는 네 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진술서를 써내려 갔다. 탁상구가 보기에도 그 진술서는 참으로 그럴듯해 보였다. 이 정도면 부장도 만족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장이 말한 시간은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약간 긴장이 풀린 탓으로 탁상구는 탁자 위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탁상구가 다시 일어났을 때, 검정 양복과 부장은 이미 방에 들어와 있었다. 검정 양복은 꼿꼿하게 서 있었고 부장은 진술서를 읽고 있었다. 부장은 진술서가 아주 못마땅한 모양으로 문장을 읽을 때마다 눈살을 찌푸렸다.
“이 개새끼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인지조차 알 수가 없잖아. 열두 시간이나 줬는데 그 많은 시간 동안 이걸 진술서라고 쓰고 잠을 퍼자고 있어? 이 썅 개새끼가. 쓸데없는 수식어는 왜 이리 많아. 뭐 참으로 광택이 나고 보기에도 무시무시해 보이는 검은색 소음기 장착 38구경 리볼버 권총?” 부장은 무척 화가 난 것 같았다. 탁상구는 자신이 보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문장 같았는데 부장이 너무 심하게 말하자 약간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저는 그냥 사실적이고 상세하게 쓰라고 하셔서.” 탁상구가 부장의 눈치를 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김과장. 이 새끼는 말로는 안 되는 놈이야. 장비에 집어넣고 3단계로 네 시간쯤 돌려.”
검정 양복은 탁상구를 끌고 장비에 앉혔다. 곧 면도날 같은 것이 내장을 갈가리 도려내며 지나갈 것이다. 탁상구는 너무나 공포에 질려서 바지에 오줌을 질질 쌌다.
“잘 쓸게요. 잘 쓸게요. 정말이에요. 이번에는 정말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제발 장비에만 넣지 말아주세요. 정말이에요. 정말 잘 쓸 수 있어요. 엉엉엉, 제발요.” 탁상구는 눈물 콧물까지 흘려가며 사정을 했다.
부장과 검정 양복은 서로를 보고 슬쩍 웃었다.
“그래? 좋아. 그럼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사내는 탁상구를 장비에서 풀어주었다. 탁상구는 한 번 더 기회를 준다는 말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 구두에 대고 머리를 연신 조아리며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하고 말했다. 부장은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한 대 물면서 탁상구가 쓴 진술서를 다시 읽었다.
“문장은 짧게 써. 그래야 명료해 보이고 읽는 사람이 이해도 잘되지, 쓸데없는 수식어는 붙이지 말고, 그냥 소음기 장착 38구경 리볼버 권총이라고 쓰란 말이야. 알겠어?” 마지막 마디는 조금 거칠었지만 대체로 부장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탁상구는 한마디도 빠트리지 않겠다는 듯이 부장의 말이 나올 때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묘사하지 말란 말이야. 워커힐호텔 주차장에 무슨 차가 있었니, 쓰레기통은 무슨 색깔이었니, 웨이터들 복장은 어떠했니 하는 것들은 필요없잖아. 너는 암살범이니까 너에게 필요한 요원의 표식 같은 것이라든지, 대변인이 어떤 자세로 죽어갔는지 뭐 이런 것만 쓰면 돼. 왜 모든 걸 다 쓸려고 하나. 그러니 별말도 아닌데 분량만 이렇게 많지. 알겠어?” 탁상구는 명심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예” 하고 말했다.
“김부장. 이 새끼 밥 넣어줘. 그리고 진술서 쓰는 데 뭐 필요한 거 있나?” 부장이 탁상구를 보고 물었다. 탁상구는 무슨 말을 하다가 멈칫거렸다. 부장이 괜찮으니까 눈치 보지 말고 말하라고 했다. 탁상구는 부장의 눈치를 보며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볼펜이 한 종류밖에 없는데 빨간 볼펜과 파란 볼펜이 필요해요. 내용을 다시 정리할 때 같은 색깔이면 헷갈리거든요. 파일을 걸어둘 수 있는 책 받침대도 필요해요. 그리고 저 탁상시계는 째각거리는 초침 소리가 너무 크게 나요. 초침 소리 때문에 불안해서요. 전자 시계 같은 것으로 바꿔주시면 좋겠어요. 담배도 피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도무지 집중을 할 수 없거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 장비는 치워주셨으면 좋겠어요. 무서워서 글을 쓸 수가 없어요.” 탁상구는 그 밖에도 샤워를 하고 싶다든지, 아내에게 전화를 하고 싶다든지, 커피를 마시고 싶다든지 하는 것들을 말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이것을 다 말하면 다시 장비 위에 올라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부장은 탁상구의 요구 사항에 약간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곧 그것은 수긍할 만한 요구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알았어. 곧 조치해주지. 그러나 장비를 치우는 것은 안돼. 우리의 경험상으론 장비가 옆에 있어야지만 제대로 된 진술서가 나오거든.” 하고 말했다.
부장이 나가고 난 뒤에 검정 양복은 설렁탕과 담배 한 보루, 책 받침대 그리고 빨간 펜과 파란 펜을 가져다 주었다. 탁상구는 설렁탕을 정신없이 먹었다. 오랜 시간 굶었으므로 설렁탕은 너무나 맛있었다. 탁상구는 설렁탕을 국물까지 남김없이 먹고 난 다음에 담배를 한 대 피웠다. 탁상구는 갑자기 행복해진 느낌이었다. 탁상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한 대 다 피우고 곧 탁자 위를 정리했다. 탁상시계 자리에는 전자시계를 놓았다. 자료집은 책 받침대에 끼웠다. 탁자 위에 종이를 올리고 그 위에 삼색으로 된 볼펜을 올렸다. 왼쪽에는 담배와 재떨이 대용으로 종이컵을 놓았다. 탁상구는 탁자 위의 배치를 보고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글을 쓰기 위해 탁상구는 다시 방 안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암살범 탁상구다. 나는 암살 전문 공작원 탁상구다. 나는 남파 주둔 간첩 탁기수의 아들이다. 나는 암살범이다……
“훨씬 좋아졌어. 그래 이렇게 계속 해 나가면 돼.”
다음날 탁상구의 진술서를 읽은 부장은 감탄하듯이 말했다.
“문장도 간결하고 명쾌해. 특히 이 부분이 좋아. 나는 암살 전문 공작원일 뿐이다. 그러므로 암살에 관련된 정치적 배경과 당의 의도 같은 것은 모른다. 암살 전문 공작원은 당의 지령대로 암살을 하면 그뿐, 다른 정보는 필요하지도 궁금하지도 않다. 음 이건 아주 좋아.” 탁상구는 부장의 말을 듣고 오늘은 장비에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약간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눈에 거슬리는군. 그래도 시체를 보자 유가족 생각에 약간 눈물이 났다? 도대체 암살범이 이런 표현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이런 싸구려 정서는 넣지 말란 말이야. 암살범처럼 냉정하게 써. 그리고 군데군데 있는 이 의연한 말투는 또 뭔가? 너는 안중근 의사가 아니란 말이야. 자네는 단지 암살범일 뿐이라구. 명심해 암살범처럼 거칠게 써 거칠게.” 탁상구는 “예” 하고 잘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부장이 돌아가고 탁상구는 다시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글을 쓰기 위해 다시 방 안을 어슬렁거렸다. 나는 암살범이다.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거친 암살범이다. 나는 거칠다. 나는 당의 의도는 모른다.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암살 전문 공작원 탁상구다……
그 후로 며칠인지 모르는 동안 부장은 열두 시간에 한 번씩 들어왔다. 그때마다 탁상구는 열두 시간 동안 쓴 진술서를 보여주었다. 두 번이나 더 장비에 올라가기도 했지만 대체로 부장은 탁상구의 진술서를 보고 나날이 나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탁상구의 책상 위에도 많은 것이 새로 들어왔다. 이제는 종이 대신에 컴퓨터로 글을 쓰게 되었고 그래서 속도도 더 빨라졌다. 프린터기도 생겼다. 믿기 어려울 테지만 꽃병도 있고, 양주도 한 병 있고 커피도 마실 수 있다. 잠 안 오는 약도 있다. 부장이 새로운 자료를 가져올 때마다 탁상구는 매일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진술서를 새로 쓰거나 고쳤다. 탁상구는 이제 자료만 준다면 어떤 진술서도 열두 시간 안에 완벽하게 써낼 수 있을 만큼 자신이 붙었다.
탁상구가 다시 깨어난 곳은 귤을 팔던 슈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골목이었다. 탁상구는 쓰레기통 옆에 누워 있었고 개 한 마리가 탁상구의 얼굴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고 있었다. 탁상구는 손으로 개를 몰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으므로 탁상구는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조차 하기 귀찮았다. 탁상구의 왼손에는 비닐 봉지에 든 귤이 있었다. 탁상구는 귤 봉지를 들고 자신의 집으로 걸어갔다.
집 앞에서 탁상구는 가죽 잠바를 입은 두 명의 사내를 만났다. 가죽 잠바는 “탁상구 씨입니까?” 하고 물었다. 탁상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한 사내가 다짜고짜 팔을 잡고 수갑을 채웠다. 다른 사내가 “당신을 노나라당 대변인 김석산 암살 혐의로 체포한다”고 말했다. 그 밖에도 무슨 말을 더 했지만 탁상구는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으므로 더 이상 사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가죽 잠바들은 지프차에 탁상구를 태워서 큰 건물로 데려갔다. 탁상구가 지프차에서 내리자 기자들이 한꺼번에 다가와서 사진을 찍어대면서 뭐라고 계속 질문을 던졌다. 가죽 잠바들은 묵묵히 기자들을 밀치고 탁상구를 탁자가 있는 방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 방에는 치과 수술용 의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금테 안경을 낀 사내가 노트북을 들고 와서 탁상구의 앞에 앉았다. 금테 안경은 노트북을 펼치더니 “이름?” 하고 물었다. 탁상구는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기 때문에 금테 안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금테 안경은 피식 웃으면서 ‘탁상구’라고 썼다. “주민등록번호?” 탁상구는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솔직히 탁상구는 지금 자신이 여기에 왜 와 있는지조차 감을 못 잡고 있는 듯했다. 금테 안경은 “‘주민등록번호,690301 - 1045632 맞지?” 하고 말했다. 탁상구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테 안경은 인생이 지겹다는 듯이 머리를 긁더니 노트북을 약간 밀치면서 “야! 탁상구, 김석산 야당 대변인을 왜 죽였어? 나도 일 좀 쉽게 하자. 나도 마누라랑 애새끼 얼굴 좀 보고 살자구. 이거 오늘 밤 안에 진술서 다 써야하는데. 미치겠구먼” 하고 말했다.
그때 갑자기 탁상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 진술서를 쓰려고 하는 건가요? 그건 제가 써야 해요. 아무렇게나 쓰면 안 되거든요. 수식어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문장이 길어진다거나 불필요한 묘사가 있으면 안 되니까요. 그리고 어투도 중요해요. 암살범은 거칠게 그러니까 안중근 의사가 아니잖아요? 노트북만 주세요. 두 시간 안에 적어드릴 수 있어요.”
탁상구는 노트북을 자신에게로 끌고 와서 진술서를 쓰기 시작했다. 수사관은 좀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탁상구가 사건에 대해 조목조목 쓰는 것을 보고 뭐 달리 필요한 것은 없냐고 말했다. 탁상구는 주요 일간 신문과 담배와 위스키, 그리고 저녁 식사로는 설렁탕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탁상구는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아서 진술서를 다 썼다. 탁상구는 진술서를 다시 읽어보고 이것은 내가 쓴 진술서 중에서 최고군! 이라고 생각했다. 탁상구는 위스키를 한 잔 마시고 배달되어온 설렁탕을 먹었다. 취조실에 들어온 여러 명의 수사관들은 탁상구의 진술서를 보고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다. 가장 늙어 보이는 수사관이 “사건 정황에 비추어 보아 범인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어쩐지 좀 꺼림칙하군” 하고 말했다. 탁상구는 설렁탕을 먹다가 문득 수사관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입 속에 있는 밥알을 튀어내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뭐가 부족한가요? 그냥 뭐가 부족한지 말씀만 해주시면 돼요. 제발 장비에만 올리지 말아요. 더 사실적이고 더 구체적으로 적어드릴 수도 있어요. 정말이에요. 자료집만 주세요. 아무도 의문 품을 수 없는 최고의 진술서를 보여 드릴게요. 자료집만 주세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