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기분 좋은 날
분식집 주인 부부가 축수해 준 덕인지 쉬이 대홍리 '봉선홍경사
사적갈비'(奉先弘慶寺事蹟碣碑) 앞에 당도했다.
이 곳은 한양과 호남을 잇는 교통 요지인데도 무성한 갈대 못이
있는데다 인가가 멀고 강도의 출몰이 잦아 내왕이 어려웠단다.
이에 고려 8대 현종(顯宗)은 여기에 사찰과 원을 지으라 명했다.
불법(佛法)을 펴고 행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백성을 사랑하는 어진 왕의 모습 아닌가.
절은 부왕(安宗)의 뜻을 받들어 지었다 하여 奉先弘慶寺(그때의
지명은 홍경리)라 했고 당시의 원명은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
이었으나 훗날에 홍경원으로 바뀌었나 보다. (그러나 홍경리는
이웃 대하리, 대정리와 병합되면서 대홍리로 변경되었다고)
현종 17년(1026년)에 어명을 받은 한림학사 최충(崔沖)이 이를
기리는 글을 짓고 당대의 서가(書家)백현례(白玄禮)가 썼다는데,
홍경사의 사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이 갈비는 국보 제7호로
지정되었다.
봉선홍경사 사적갈비
불행하게도 이 대형 사찰은 망이와 망소이(亡伊亡所伊) 형제가
주동한 공주 명학소(鳴鶴所:現大田市儒城區鳳鳴洞?) 천민의 난
(亂)때(1177년) 소실되었고 지금은 '사적갈비'만 남아 있다.
그런데, 고소 불금의 전설에 비 갓이 파손되었단다.
비(碑)의 갓(笠子)위에 돌 세 개를 올려 놓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에 현혹된 무자(無子)여인들이 비 갓위에 돌을 올려 놓으려
하도 많이 던졌기 때문이라니까.
잠시 휴식을 취했다.
평택시계가 지근인데 해는 아직도 중천이라 여유로웠던 것.
고맙게도 몸 상태가 놀랍도록 양호해진 것이다.
안궁리(安宮)에서 구 안성교를 넘는 옛1번 국도를 버리고 신1번
국도따라 신설 안성대교를 밟고 평택시에 들어섰다.
드디어 경기도땅에 진입한 것이다.
대동지지에 의하면 홍경원에서 7리어간의 기호교계(畿湖交界)인
안성천의 아교(新牙橋)를 넘은 셈이다.
안성시계(安城市界)도 되는 유천동(柳川:안성유천)의 우측 따라
승두천 원소교를 지나면 소사점(素沙店)터인 소사동에 당도한다.
아교에서 3리 밖에 되지 않는 지척이다.
대간에서 정맥들이 분기하는 것처럼 충청수영대로(忠淸水營)가
분기하는 이 곳에는 대동법시행기념비(大同法施行記念碑 : 유형
문화재40호)가 서있다.
대동법시행 기념비
대동법은 각 지방의 공물(貢物)을 미곡으로 환산하여 바치게 한
이조 중후기의 납세제도다.
이 법의 시행 후 공부(貢賦)의 불균형과 부역(賦役)의 불공평이
없어지고, 민간의 상거래까지 원활해졌단다.
이조 17대 효종 때 충청감사 김육(金堉)이 호서지방에서 최초로
실시했는데 성과가 좋으므로 이 법의 시행을 만인에게 알렸다.
그리고 백성을 생각하는 그 덕을 기리기 위해 효종10년(1659)에
이곳에서 남동 50m 지점 언덕에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 (지금의
비는 1970년대에 옮겨온 것이라고)
대동법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논의되던 수미법(收米法)의 후신이다.
광해군 원년에 이원익 등의 주장으로 경기도에, 인조 원년에는 관동
지방으로 확대 시행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김육은 인조 16년(1638) 충청감사에 임명된 후 대동법을 시행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효종 원년(1649) 우의정이 되어 다시 시행하려다
역시 좌절된다.
영의정이 된(1654) 후에야 호서지방 시행에 성공하고 이후 숙종때
비로소 전국화 된다.
비문 작성에 착오가 있었던 듯.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다.
홍경원이 늙은 길손을 그러하게 했고 대동법 또한 그랬다.
백성의 애로를 덜어주려는 위정자의 진지한 자세들을 보았는데
기분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군주시대에도 그러했거늘 주권재민의 민주국가에서 국민을 하늘
처럼 받들겠다고 떠들어 대지만 돌아서면 딴죽을 치는 이 시대의
혐오스런 정치인들에 비해 기릴만 하지 않은가.
소리라도 마구 지르고 싶었다
비전2동(碑前) 아파트단지를 뚫고 북상하면 배다리지(池)다.
본래, 이 지역에 작은 내(川)가 있었단다.
이웃인 아산만의 영향으로 밀물 때 마다 강폭이 넓어져서 배를
다리삼아 강을 건너야 했다나.
그래서 배다리(浮橋가 되었으며 이 곳에 축조한 농수용 저수지
또한 그 이름을 땄다는 것.
나는 1950년 9. 28 수복때 UN군이 파괴된 한강교 대신 가설한
부교를 통해 도강(渡江)하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는데 우리의
선조들은 이보다 수세기 전에 이미 부교공법을 시행했던 것.
그런데 삼남대로 옛길 걷는 이들의 고생이 많이 줄어지겠다.
배다리저수지에서 이곡천, 통복천 뚝이나 논밭 둑을 타고 칠원
(七院)으로 가는 길이 이미 상당히 포장되었다.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되기 위해 이 일대에 있던 기존의 집들도
다 소개되었고 훤칠한 신작로들이 바둑판처럼 날 것이니까.
하지만 선인들의 애환을 헤아려 보겠노라고 길 아닌 길을 고집
한다면 누가 말리랴만 그들의 애환은 이런 곳에 서려있지 않음
만은 환기시켜 주고 싶다.
칠원(대동지지의 葛院) 직전의 가천역(加川驛) 자리도 애매하다.
안성으로 통하는 45번 국도상인 비전1동 죽백(竹柏)마을에 삼남
대로의 가내역(加川)이 있었다(평택시자료)는 하나 배다리지(池)
에서 가천역을 거쳐 칠원으로 갈 방법은 묘연하다.
317번 지방도로를 따라 칠원동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 도착하여
하루의 일과를 마쳤다.
고장난 늙은 몸의 하루치로는 경이로운 거리이며 이로서 자신감
또한 시시각각으로 상승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어찌나 다행한 일인지 소리라도 마구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해남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이 주저앉아야 했던가.
한양땅에 도착한다는 것은 정녕 터무니 없는 과욕이려니 생각될
때가 어디 한두번이었던가.
그랬는데도, 4일 예상했던 남은 길을 하루쯤 단축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도 산에도 다시 오를 수 있겠다고 생각되어지는데 어찌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 않겠는가.
복받치는 환희를 억누를 길이 없는데....
내 <새울>은 서울을 떠나지 않기로 했다
퇴근중인 쌍용자동차의 한 직원으로부터 버스 정보를 얻어 평택
시내로 철수했다.
비전동 통과때 알아둔 찜질방으로 가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내가 탄 버스의 운전기사는 늙은 이가 그리도 싫었던가.
몰라서 묻는건데 친절하진 못해도 제대로 가르쳐주면 안될까.
이것도 적선이겠거늘 좋은 일 하기가 그렇게도 싫었단 말인가.
물어볼 엄두마저 낼 수 없도록 싸늘한 기사가 내뱉듯 한 대꾸에
잔뜩 상기됐던 늙은 길손의 기분은 쭈구렁이가 되고 말았다.
결국, 찜질방 인터넷을 통해 간신히 확인했다.
사람보다 기계에게 물어보는 것이 더 마음 편하다면 분명히 잘못
되어 가는 세상이다.
젊은 날 나는 시골을 무척 동경했었다.
은퇴하면 시골 어딘가에 은거하리라 마음먹었다.
그 때 살 움막 이름을 <새울>이라고 미리 지어 놓기도 했다.
'새'는 신(新)이고 '울'은 '둥지', '보금자리'를 의미한다.
"새로운 둥지를 튼다"는 뜻이며 고향을 그리는 마음(鄕愁)도 담겨
있는 이름이다.(내 태생지의 옛 이름이 '새울'이니까)
그리고는 호시탐탐하듯 그럴 만한 곳을 살펴왔다.
여기다 싶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니다 싶어지기를 반복했다.
한데, 백두대간과 9정맥을 비롯해 전국의 산을 누비고 길을 걷는
등 전국구가 된 이후에 이런 바람이 종적을 감춰버렸다.
나는 비로소 시골이 여전히 순박하고 정 넘치는 농경사회 그대로
머물러 있기 바랐던 나의 과오를 인정하게 되었다.
또, 여전히 서울에 살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도 되었다.
결국 40년 살아 온 낡은 집을 리-모델링(re-modeling)한 후 미리
지어 놓았던 이름 <새울>이라고 스스로 부르고 있다.
이후로는 여러 날씩 집을 떠나 곳곳을 누비다가도 나의 <새울>로
돌아오는 걸음이 마냥 가볍기만 한다.
실제로 버스를 비롯한 대중교통 수단 하나만 보아도 내 <새울>이
있는 곳이 가장 친절하고 청결하며 단정한데다 편리하다.
비단, 교통뿐 아니라 의식주 등 일상의 매너가 다 그러하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며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식이 비교 우위에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 <새울>은 서울에서 아무 데로도 옮기지 않기로 했다.
지체 높은 우물 옥관자정
평택 찜질방의 밤은 이런 상념으로 인해 설치고 새벽같이 칠원에
도착하여 잰걸음을 시작했다.
(七院은 본래 칡이 많다 하여 葛院이었다.
'갈'이 '칠'로 바뀌게 된 전설이 있긴 하나 억지라는 느낌이다.
오히려 葛의 訓인 '칡'의 변음과 취음이라 하겠다.)
아무리 그런다 해도 원칠원(옛 葛院)의 옥수정을 모른체 할 수야
없지 않은가.
이조 인조(仁祖:16대)가 옥관자(玉貫子)를 붙였다는 우물인데.
삼남대로를 따라서 남행하던 왕이 물맛에 반해 정삼품인 당상관
(堂上官)의 품계를 내렸다는 것 아닌가(당시에는 당상관 이상만
옥관자를 패용할 수 있었다)
세종(世宗:4대)이 용문산(경기도 양평군)의 은행나무에 당상관
벼슬을 내린 것과 세조(世祖:7대)에 의해 충북도 보은군 법주사
입구의 소나무가 정2품이 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물 맛이 얼마나 좋았길래 우물이 정삼품(당상관) 벼슬에
올랐을까?
정3품(당상관) 옥수정(상/하)
자고로 산고수장(山高水長) 혹은 산고수청(水淸)이라 했다.
은유적인 여러 뜻은 차치하고 축자적으로 풀이하면 산이 높아야
물 줄기가 길고 또 맑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산이 낮고 평야지인 평택지방은 당연히 물이 귀했다.
이런 이유로 이 지방민에게 신수는 불이(身水不二)였고 타지방에
비해 정제(井祭 : 우물에 지내는 제사)가 발달했다.
그리고 마을 단위의 공동우물이 성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석정리의 돌우물(石井), 서정리의 서두물(西井), 신장동 제골
박우물과 갈원(葛院) 옥수정(玉水井)은 송탄의 4대우물이란다.
옥관자정이라고도 불렸던 이 지체높은 우물도 하수상한(?) 세월에
밀려 현역에서 은퇴한지 이미 오래다.
상수원과 수도꼭지에 의해 일체의 두레박 우물이 폐업됐고 그래도
옥수정처럼 유명세를 탔던 일부 우물은 역사의 유물로 라도 남는
특혜를 누리게 되었다 할까.
새벽같이 텃밭에 다녀오는 듯한 노파에게 옥수정에 대해 물었다.
골방 차지가 아마 옥수정의 은퇴와 때를 비슷하게 했을 법한 이
노파의 우물 자랑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 연배의 아녀자 치고는 제법 식견이 있어 보였다.
하긴, 당시 현감(縣監)의 품계가 고작 종6품이었다.
종2품인 관찰사(觀察使: 監司: 지금의 도지사) 바로 아래 직급이며
목사(牧使)와 동일급으로 영감(令監)의 호칭이 붙는데 이 시골에서
정3품 당상관이 배출되었다면 지방의 자랑일 수도 있었겠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