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의 태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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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초, 공화당 정권이 비밀리에 김대중에 대한 신상조사를 했다. 이 조사를 한 사람은 육군헌병장교 출신의 河永祚 씨였다.
하영조는 공화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이 때는 공화당 중앙위원이었다.
하영조는 2명을 보좌역으로 채용하였다. 그들은 자유당 시절 치안국 특정과에 근무한 적이 있으며 김대중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김의 뒷바라지를 많이 해주었다는 李白來, 해병대 상사 출신이며 김대중의 사촌이 된다는 尹一萬이었다.
이들은 목포와 신안군 일원을 샅샅이 누볐다. 배를 타고 섬에서 섬으로 펜과 진술조 서, 녹음기와 카메라를 메고 40여 일간 힘들게 자료를 모았다. 육지에 돌아와서는 김대중이 사업을 한 부산을 거쳐 강원도 인제까지 원정하여 사진을 찍고 증언을 녹음하고 진술조서를 꾸미고 증거서류를 복사하고 수집했다. 이들이 수집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뻐리섬에서 성장한 張鹵島는 17세의 어린 처녀의 몸으로 같은 섬에 사는 총각 諸葛成祚라는 청년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나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청상과부가 됐다. 남편을 잃은 신부를 그를 시숙인 諸葛成福이 돌봐주고 있었으나 과부가 된 장 여인은 얼마 후 여아를 분만했다. 이 여아 즉 김대중의 누이는 장성하여 목포에서 이발관을 하는 김 모에게 시집을 가서 잘 살았는데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린 젖먹이까지 가진 과부 장 여인은 먹고살기가 어려웠다. 생계를 위해 뻐리섬에서 같은 신안군 하의면 너리섬으로 이사를 갔다. 너리섬에서 시골 주막집을 차렸다. 주막집을 하고 보니 뭇 사람을 상대하게 되었고, 젊은 과부는 홀로 살기가 어려웠다.
그곳에서 농악을 하는 尹昌彦이라는 사람을 알게되었고 끝내는 동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윤창언이라는 사람과 동거하면서 김대중을 낳았다. 김대중을 낳을 때 김대중의 이모가되는 張都産이 조산을 했다. 김대중은 김대중이 아니라 윤창언의 아들로 尹大萬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 그의 사촌에 尹一萬이란 동생이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하영조가 채용한 사람이었다.
김대중의 일생도 기구한 운명이었으나 그의 어머니 장 여사도 팔자가 기구했다. 또 남편 윤창언을 잃었다. 남편 윤창언을 여윈 장 여인은 金云式이란 사람에게 또 시집을 갔다. 김운식에게는 김순례라는 부인이 있었고 梅月, 大本, 安禮, 用禮라는 자식도 있었다. 장 여인이 김운식의 집으로 尹大萬을 데리고 들어가니 尹大萬의 나이가 큰아들 大本보다는 적었다.
그래서 이름을 고쳐 김대중(金大仲)이라 했다.(편집자주:仲자는 漢字에서 형제 중 둘째를 뜻함)그후 정치인이 되자 관상가 金鶴에게 이름풀이를 해보았더니 사람들 가운데서 헤어나 지 못한다고 평해서 人변을 없애고 中자로만 쓰게 되었다. 이후 김대중은 목포 북교국민학교를 거쳐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했고 해방 후에는 남로당 산하 민주애국청년동맹 등에 몸을 담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산에서 통선업을 하다가 자유당 때인 1954년 5월 20일 제 3대 국회의원 선거에 목포에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되었고 1959년 6월 5일 강원도 인제 선거구 재선거에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여, 또 다시 낙선하였으며, 4·19이후 7·29 총선거에 민의원에 입후보하여 또 낙선했으나, 다음해인 1961년 5월 13일 인제지구 재선거에 또 다시 입후보하여 당선의 영광을 얻었다.
그러나 3일 후의 5·16 군사혁명으로 국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국회해산을 당하고 말았다. 그 동안 義父 김운식의 호적에는 입적을 못하고 있다가 인제 지구가 6·25휴전으로 이남에 편입되는 바람에 여기에 착안하여 월남동포 행세를 하고 월남가족으로 假호적을 만들었는데 1962년 新民法 시행으로 그제야 김운식의 호적에 입적이 되어 김해 김씨가 되고 처음으로 호적을 갖게 되었다.
(李澣斗 저, 유신 공화국, 매산 출판사, 1986 P42~44)
『유신 공화국』은 공화당 중앙위원이었으며 김종필과 가까웠던 이한두 씨가 쓴 책으로 내용은 유신체제에 매우 비판적이면서도 김대중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이 책에는 위의 내용이외에도 김대중에게 불리한 서술이 많다. 김대중의 출생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말이 많았는데, 이 책에서는 여러 설을 소개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직설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한두의『유신 공화국』에 따르면 공화당 정권은 하영조의 조사보고서를 가지고 이를 공개하느냐 마느냐로 찬반논쟁을 벌인 끝에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공개를 찬성하는 측은 한국민이 가문을 중히 여기는 비교적 혈통을 존중하는 보수적인 민족이고 보니 지저분한 가계에 대해서 멸시하는 경향이 있고 더군다나 성씨를 바꾸었다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성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모신다는 것은 언어도단의 일로서, 이것은 김대중의 선거에 결정적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공개를 반대하는 측은 자칫 잘못하면 국민에게 대통령 후보자를 중상모략 한다는 인상을 주어 도리어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또 이 나라에서 과거 시행한 선거의 예를 보아 적자 출신과 서자 출신이 맞서면 서자 출신이 이겼고 또 서자 출신 국민이 은연중 단결되어 같은 처지에 있는 입후보자를 동정하여 뭉치는 경향이 많으니 득보다 실이 더 많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김운식이 1974년 2월 25일 사망했을 때(호적에는 4월 25일 사망으로 되어 있음), 김 대중이 연금해제 중인데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1973년8월 납치 사건 이후 가택연금된 김대중은 1973년 12월 12일 박정희씨에게 연금해제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 자유롭게 되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1974년 5월 23일부터 12월17일까지 외신기자를 제외한 국내인사의 출입을 금지당하고 외출 시에는 미행을 당하는 등 반연금 상태에 놓였다.
이미 2년 전 호적상 장남으로 돼 있는 이복형 김대본이 숨진 이상 2남인 김대중이 빈소에서 상주로서 문상객을 맞아야 하는 것은 전통적인 가문의 기본 예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이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이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 관계 인물들의 호적은 다음과 같다. 이 호적들이 단기 연호를 쓰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해방 후에 작성된 것이다.
호주 : 金大仲/ 부 金云式 모 張鹵島/ 출생 단기 4258년(편집자 주:1925년) 12월 3 일/ 본적 전라남도 무안군 하의면 대리 232 번지
무안군 하의면 오림리 132 번지 호주 張文淑(편집자주 :장지숙의 오기) 장녀 장노도 무안군 하의면 후광리 97번지에서 庶子 출생. 父신고 단기 4257년(1924년) 7월 7일 접수 입적 출생 년월일의 기재에 착오 있어도 호적 정정의 신청을 하지 아니 함으로 단기 4276년(1943년) 7월 10일 그의 출생 연월일 '단기 4257년(1924년) 1월 16일'을'단기 4258년(1925년) 12월 3일로 정정함…
단기 4287년(1954) 4월 20일 광주지방밥원 목포 지원의 허가 재판에 인하여 단기 4276년 7월 10일 그의 출생 연월일 '단기 4257년 1월 16일'을 '단기 4258년 12월 3일'로 정정함…
단기 4287년 4월 20일 광주 지방법원 목포 지원의 허가 재판에 인하여 호적정정 신청 동월 21일 접수명 '大中'을 '大仲'으로 정정함…(김대중 호적 초본)다시 말하면 1924년 1월 16일 출생한 김대중은 김운식의 서자로 1924년 7월 7일 호적에 올려졌으나 1943년에 출생 연월일을 1925년 12월 3일로 고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1954년 '大中'을 '大仲'으로 개명했다. 훗날 다시 '大中'으로 이름을 고친다.
車蓉秀와 혼인 신고 단기 4278년 4월 9일 접수… 단기 4293년 5월 27일 처 차용수 사망으로 인하여 혼인 해소. 단기 4293년(1960) 6월 5일 부 김운식, 모 장노도의 혼인으로 인하여 嫡出子로 됨(김대중 호적 초본)
김운식의 본처 김순례는 1894년생으로 66세 때인 1960년 6월 1일 김운식과 '협의 이혼'한 것으로 자신의 호적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김순례는 이혼 후에도 주소만 후광리 257번지로 옮겨 놓았을 뿐 김운식과 함께 살았으며 사망한 후에는 김운식 무덤 옆에 묻혔었다(1972년 5월 사망한 장노도는 경기도 파주군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
호적대로 한다면 김운식은 67세에 이혼하고, 이혼한지 4일 후에 67세의 장노도와 재혼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김운식과 김순례의 '협의 이혼' 및 김운식과 장노도의 '혼인 신고'는 김대중을 적출자로 만들기 위한 요식행위이며 서류상에서만 발생한 일이라 하겠다(김대중의 강요에 의한 이혼이라 한다). 김대중은 장기간 김운식의 첩으로 있던 모친 장노도가 67살의 나이로 1960년 김운식과 혼인 신고를 함으로써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맹렬히 활동하던 때 비로소 庶子 신분에서 벗어나 嫡子로 인정되었다.
신안군 하의면 오림리 132 번지에서 출생. 서기 1911년 3월 10일 제갈 성조와 혼인 신고 除籍. 서기 1925년 12월 8일 호주 張之淑 입적 신고, 서기 1924년 10월 10일 전 호주 사망으로 호주 상속. 서기 1960년 6월 5일 金云式과 혼인 신고 除籍.(장노도 호적 초본)
장노도는 18세 때인 1911년 결혼한 첫 남편 제갈성조와는 사별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후 1923년까지 12년 동안의 행적은 명확하지 않으며 호적 이외의 공식 기록은 없다. 앞의 김대중 호적에 나와 있는 대로라면 1924년 1월 16일 김대중을 낳아 이 해 7월 7일 김운식의 서자로 입적시켰으며, 자신은 이듬해인 1925년 12월 8일 아버지 장지숙에게 입적함으로써 호적상 신분을 정리한 것이 된다.나중에 나온 것이지만 이런 자료가 있다.
출생과 성장 金大中의 생모 長鹵島여인(71년5월9일사망)은 1911년 諸葛成祚와 결혼했다가 사별, 1920년에 尹昌彦의 셋째첩으로 입적했으나 역시 사별했다.그후 본남편 諸葛成祚의 친형인 시숙 諸葛成福의 도움으로 주점을 경영하다가 김대중을 임신, 全南新安군 하의면 후광리에 사는 金云式의 첩으로 들어갔다. 1924년 11월16일 全南新安군 荷衣島에서 이같은 복잡한 계보속에서 태어난 金大中은 金云式의 서자로 자라면서 국민학교와 木浦상업을 졸업한후 어업을 시작했고 그후 해운업에 종사했다. 복잡한 가정환경속에서 자란 아이들의 심성이 그렇듯이 金도 극히 반항적이고 교활한 성품이 길러졌고 심지어 의부 金云式을 부친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훨씬 후의 일이지만 1960년에는 서자로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이 불리함을 알고 4남매를 거느리고 있는 의부 金云式과 金云式의 본처 金順禮에게 호적상 이혼을 강요한 다음 그의 생모 長여인을 본처로 입적시켜 자신을 金云式의 차남으로 조작해 江原도麟蹄군 北면 元通리로 분가, 전적했었다. (경향신문 1980년 9월 11일자에서)이 기사는 당시 계엄 사령부가 신문사측에 제공한 자료에 기반한 것 같다.
김대중은 자신의 가족 관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는데, 카톨릭 잡지인 월간지 '司牧' 1990년 11월 호에서 누이동생 얘기를 했다.
당신 생애에서 양심에 가장 거리낀 일을 한 것은? 언제, 무엇을?
"내 누이동생이 1959년에 죽었는데, 누이동생은 이화여대 다니다가 중도 퇴학하고 오랫동안 심장판막증으로 고생하다가 죽었다. 그 당시 나는 야당을 하면서 선거에 몇번 실패해서 가산이 탕진되어 누이동생의 치료를 충분히 해 주지 못했다. 그보다도 좀더 누이동생을 따뜻하게 격려하고 보살펴 주었어야 했는데 그것도 제대로 못 했다.
어떨 때는 귀찮다고 생각한 일도 있었는데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이 누이동생이 누구를 말하는지는 불확실하다.
정치적 격변과 극적인 사건이 자주 일어나는 한국은 외국언론에는 좋은 뉴스 원이다.
1979년 박정권과 김영삼의 결전이 전개될 때부터 미국과 일본언론은 한국상황을 자세히 보도했다. 10·26 이후 한국에 대한 취재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한국정황은 매일 일본신문을 장식했다. 일본의 시바다 미노루(紫田穗) 기자는 1980년 한국에 체류하면서 현장을 누볐는데, 그는 김대중의 생애를 샅샅이 취재해 김대중 전기를 펴냈다. 시바다 미노루는 야마사끼 하지메(山崎一)기자, 통역을 맡은 김영희(金英熙) 씨와 더불어 2일 동안 하의도에 머물며 김대중의 출생과 성장 등에 대해 취재, 마을 촌노들로 부터 이야기를 듣는다. 역시 김대중의 출생지는 전남 신안군 하의면후광리97번지로 되어 있으며 원적은 하의면 대리 232로 다르다. 생모는 1911년 3월
제갈성조라는 사람과 결혼, 남편이 1920년12월에 병사. 남편의 친형(동생이라는 설도 있음)제갈성복과 동거했다 한다.
그리고 1920년인가 21년에는 윤창언이란 사람의 세번째 첩으로 입적, 그런데 1927년 윤창언과도 사별했다. 김대중의 어머니는 남편복이 없는 여자였다. 그후 처음 남편 친형 제갈성복의 도움으로 다방을 경영하던 중에 김대중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대중은 윤창언의 자식인지 아니면 제갈성복의 자식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생연월일이 1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것도 복잡한 사정을 증명한다는 것. 그러나 김대중의 어머니는 다시 김운식이라는 사람과 다시 동거를 시작한다. 김운식에게는 본처인 김순례가 있고 이 김운식의 서자로 입적이 된다. 김대중의 성씨가 김씨성을 갖게 된 것도 이때 부터.
김대중은 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랐으며 형제가 누구누구인지도 몰랐다. 하의도에서 두번째 첩이된 남편 윤창언에겐 두명의 아들이 있는데
대의, 대현이고 정현이라는 딸이 있었다.
그리고 김운식에게도 4명의 아이가 있었다.
매월, 대본, 안례, 용례 등 김대중과 나이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1982년 산께이 신문 시바다 미루노 저. 김대중의 좌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