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일본군 성노예 문제해결 청년의 힘으로!(cafe.daum.net/cafe200004address)
아버지는 평양시 남구역 교구동에서 소작살이를 하다가 내가 15살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가정생활이 가난하여 14살때부터 3년간 지주집 아이보기, 역시 3년간 고무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그 후 평양시 외성구역 유경식당에 들어가 일하면서 손님 접대를 위해 옷을 해입느라 주인집에 빚을 진것을 갚지 못해 500원에 팔려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19살 나던해 팔려가는 여러명의 처녀들과 함께 기차로 중국의 목단강을 지나서 호림에 도착하였다.
30~40명의 처녀들이 있었다.
각기 한방씩 차지하였는데 일체 서로 말할 수가 없었으며 밥먹을 때도 따로 먹었기 때문에 누가 무엇을 하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위안소'의 크기는 길이가 9~10미터 정도였으며 복도 양쪽으로 방들이 있었다.
방안의 크기는 두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정도였다.
일본군인들이 찾아와서는 주인에게 돈을 내고 표를 끊은 다음 차례로 매방에 들어와 처녀들에게 표를 주고 놀다가가곤 하였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고르거나 일본어를 할줄아는 처녀의 경우에는 돈을 더 지불하였다.
저녁이면 모두 모아놓고 하루동안 받은 전표를 종합하였으며 그에 따라 먹을것과 입을것을 주었다.
돈을 받은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10~15명 정도의 일본군을 상대하고 나면 눈앞이 노랗고 뼈마디가 아파서 꼼짝하지 못하였다.
반항하거나 불복하는 경우에는 가차없이 때리거나 죽였다.
한주일에 한번씩 일본군의가 검진하였다.
일본군은 패망후 우리를 내버리고 도망쳤다.
26살 때의 일이었다. 자신의 과거로 인하여 그 후 평안북도 운전군으로 옮겨가 생활하였다.
2년 후 결혼하였으나 '종군위안부' 생활의 결과로 아이를 낳지 못하였으며 3년 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혼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게 되었다.
아직도 그 때의 후유증 때문에 심한 두통과 소화장애로 고통을 받고 있다.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친다.
일본인이라는 말만들어도 머리칼이 곤두선다.
일본은 지금까지 자기의 더러운 과거를 교묘하게 숨겨왔고 현재도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이 참을 수가 없다. 가슴속에 맺힌 원한을 풀기전에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나의 과거를 공개하기로 하였다.
일본정부가 범죄자들을 찾아내어 재판을 하며 피해자인 모든 조선여성들에게 성실한 자세로 반성을 하고 보상할 것을 요구한다.
첫댓글 안타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