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앞으로 돌려,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 백제 부흥군이 진압된 뒤 옛 백제 지역의 대부분은 다시 당의 지배에 귀속되었다. 웅진도독보를 중심으로 이 지역의 지배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당나라는, 이 지역의 대내외적 여건이 여전히 불안한 상황인 것을 보게 된다. 오랜 전란으로 기존 백제의 행정체계는 완전히 무너져내렸고, 인구는 이산하였으며,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신라나 왜와의 관계 등 주변 상황도 매우 유동적이었다. 당 조정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백제 지역을 대고구려전 수행을 위한 거점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구체적 작업을 일임받은 사람은 백제부흥군 격파에서 자신의 안목을 보여준 유인궤였다. 손인사와 유인원이 귀국하고 난뒤, 유인궤는 웅진에 머물며 전후 복구사업을 주관하였다. 그는 민생 안정을 위한 행정적 조처를 취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백제 유민을 웅진도독부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작업과, 웅진도독부의 관할 범위를 확정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후자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멸망한 옛 백제 왕족을 전면에 내세워 백제 유민을 회유하는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백제가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 왕실이 여전히 남아있게 되는것이고, 그렇다면 신라는 이 지역으로는 한발자국도 더 들어올 수 없다. 옛 백제 왕실을 신라와 병립시켜 신라의 백제 침투를 방지하는것이 유인궤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보다 앞서, 663년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이 귀국하였다. 이때 신라의 왕은 2년 전에 죽은 무열왕의 뒤를 이은 문무왕으로, 일전에 문무왕은 부여융에게 침을 뱉은 적이 있었다. 이 당시 부여융의 가치는 백제 부흥군과 왜국이 내세우는 부여풍의 가치를 내리끌어, 부여풍을 중심으로 백제인들이 규합하는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백제 유민을 회유하는 데도 쓸만했다. 부흥군이 진압된 뒤에도 '도구' 로서 부여융의 가치는 여전하였다.
부여융은 반당적인 백제유민의 동향에 대응할 수 있는 도구 일뿐만 아니라, 동맹국인 신라의 동향에 대한 고려에서도 쓸만한 패였다. 부흥군을 진압하는 동안 신라는 백제 여러 지역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침투시켰고, 당나라는 이 점을 우려하였다. 당은 대신 부여융을 웅진도독부를 대표하는 인물처럼 내세워서, 문무왕과 회맹하게 하였다.
신라 측 기록에 따르면, 주류성을 함락시킨 후 당의 대부 두상(杜爽)은 "백제를 평정한 후 서로 회맹하라." 는 당 고종의 칙명을 내세워 부여융과 회맹할 것을 신라에게 종용했다. 신라는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거부했지만, 임존성이 함락된 후 회맹하지 않을 것을 당고종이 책망하자 별 수 없이 맹약을 맺게 되었다. 이에 따라 따라 664년 2월, 각간 김인문과 이찬
천존(天存)이 당의 칙사 유인원과 더불어 백제 부여융과 웅진에서 맹서하였다.
이에 따라 당은 부흥군과의 전쟁 기간 중 확장된 신라의 세력을 통제하고 차단하기 위해 백제왕자인 부여융을 내세워 신라와 대등한 회맹을 하게 하여, 공식적으로 신라와의 경계를 분명히 하였다. 다른 하나는 부여융을 백제를 대표하는 존재로 내세워 백제 유민을 회유하는 작업에도 이용하였다. 하지만 이 회맹 당시 신라에서는 문무왕의 신하인 김인문과 천존이 나섰다. 이렇게 되자 문무왕은 부여융에 대해서는 물론, 회맹을 주재하였던 당나라 칙사보다도 상위인 형태로 남게 되었다.
이에 회맹이 다시 한번 추진되었고, 664년 문무왕이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으로 책봉되자, 부여융 역시 웅진도독으로 664년 10월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665년 8월, 웅진의
취리산(就利山)에서 유인궤과 회맹문을 짓고 유인원이 주재하는 부여융과 문무왕의 회맹이 이루어졌다. 이때 양자는 "땅을 구획하여 양측의 경계를 확정하고, 백성을 살게 하여 각각 산업을 영위하게 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 이후로, 웅진도독부는 자체적으로 곽무종(郭務悰) 등을 왜에 파견하는 등 자체의 위상을 확보하려 애를 썻다. 먼저 자신들의 위상을 세우고 부여융이 문무왕과 대등한 위상을 갖는 회맹을 하게 함으로서, 신라의 정치적 영향력이 서쪽으로 밀고 들어오는것을 막아버렸다. 이 모든 그림을 뒤에서 조종한 유인궤는 복구사업을 진쟁하고 행정 체계를 갖추면서 고구려전을 준비하였다. 단기적으로는 큰 효과를 보기 힘들지만, 장기적으로는 웅진도독부 체제를 굳히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그런데 신라 입장에선 이런 행동이 마음에 찰 리가 없다. 당나라의 압력에 못 이겨 결국 취리산에서의 회맹등에 참여했지만, 부여융과의 회맹은 당의 괴뢰정권인 백제의 재건을 승인하는 의식인데 신라가 마음으로 따랐을 리가 없다. 당과 개전한 이후, 문무왕이 설인귀에게 신라의 불만으로 '가장' 강조한 부분이 이 문제였다. 당나라의 손을 빌린 백제 재흥은 결과적으로 신라의 대백제전 성과를 모조리 앗아가는 일일뿐 아니라, 신라의 안보를 더욱 심각하게 위협하는 일이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재흥 백제국의 본체는 세계 최강의 국가 대당 제국의 군사력 이다. 그런것이 신라 국경에 바로 생기게 되는 것이었다.
660년 8월, 당군이 백제를 멸한 뒤에 신라까지 침공하려 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어 신라 조정이 긴급하게 대책 마련을 위한 논의를 한 적이 있었다. 물론 헛소문에 따른 한바탕의 소동으로 끝났지만, 강대한 무력을 인접하게 되면서 신라는 늘 이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웅진도독부가 왜와의 교섭을 시도한 사실도 신라가 몰랐을리 없다.
이런 가운데 신라 조정은 자국의 위상과 당나라와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인식하게 되었던듯 하다. '웅진도독' 부여융과 '계림주대도독' 문무왕이 동격으로 당나라 장수의 주재 아래 회맹하였으니, 이는 결국 신라도 백제와 같은 성격의 존재로 당나라에게는 규정되고, 또 백제처럼 될 수 있음도 의미하는 일이었다.
다시 정리해서, 나당전쟁의 원인은 크게 3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번째. 648년 당태종과 김춘추간에 맺은 영토분할약정을 당이 위반했기 때문이다. 이 영토분할약정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734년 당이 대동강 이남 지역의 영토권을 신라에게 승인한 점에서 볼떄, 당은 신라의 요구를 그 이전부터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나당전쟁의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여기에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백제 부흥군의 활동 시에 신라는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섰지만 그 대가는 거의 없지 못했다. 신라가 주도적으로 작전을 이끌어 나간것은, 그러한 움직임을 통해 백제고지에 대한 자신들의 주도권을 키우려는 행동이었겠지만, 당군의 요청이나 지휘에 의하여 당을 돕는다는 인상을 면할 수 없었으며, 앞서 본 바와 같이 되려 부흥군이 진압된 뒤 신라는 백제고지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한치도 더 늘릴 수 없었다.
셋째. 부여융과 취리산 회맹 문제다. 취리산 회맹으로 당나라의 괴뢰 정권인 백제와 신라는 동등한 위치에 서버렸고, 신라의 입장에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한 백제가 다시 당의 의해 신라와 대등한 국가로 부상되었다는것은 엄청난
모순이었다. 물론 양자를 구분하여 백제는 당의 내번(內藩)이고 신라는 내번(外藩)이라 할 수 있지만, 신라는 당의 의지에 따라
외번에서 내번으로 강제 전환 될 상황에 놓여진 것이었다.
이러한 신라의 입장을 잘 대변하는 것이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이다. 이는 671년 설인귀가 보낸 서한에 대해 문무왕이 답신을 한 것이다. 이 내용으로 신라가 불만으로 제기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 648년 합의된 영토분할 약정을 당이 위반함
- 백제평정은 신라의 공로가 절대적이었음
- 백제평정 후 신라군도 함께 주둔하며 백제부흥군과 싸움
- 백제주둔 당군에게 지속적으로 군수품을 제공함
- 웅진도독 부여융과 회맹시킨것은 부당한 처사임
- 고구려평정도 신라의 공로가 컸음
- 고구려 펑정 후 비열흘의 안동도호부 귀속은 부당함
여기에서 신라는 당이 영토분할 약정을 위반한 점, 백제·고구려 평정에 신라의 공이 컸다는 점, 부여융과의 취리산 회맹은 부당한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신라는 답설인귀서를 보낸 직후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임명하는데, 이는 문무왕의 답서가 백제의 고지를 완전히 접수하겠다는 것을 당에게 통보하는 성격의 편지임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은 648년 당시에는 기미정책(羈靡政策)의 대상으로 고구려만을 상정하고 있었으나, 650년 대 이후 대외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전략으로 수정하였다. 당이 비록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과정에서 신라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지만, 신라와 외교관계를 맺은 이래로 당은 여전히 신라를 '연합' 이 아니라 '군대를 이용' 했다는 관점을 유지했다.
결국 신라는 당의 지배체제 속에 포함됨으로서, 신라가 멸망시킨 나라들과 형식상으로는 별 차이도 없는 동등한 것이 되고 말았다. 신라는 삼국통일과정에서 대단한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실익도 없는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쌍방의 공동이익이 없는데 나당동맹이 유지될리가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신라는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쫒아버리기 위한 전쟁이라는 적극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