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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음악에 대한 연구 -개화기부터 해방 이전까지를 중심으로-
2000-14782 이동희
1. 머리말
병자호란 이후, 이수광(伊晬光)과 허균(許筠)을 필두로 한 실학자들에 의해 조선에는 천주교가 도입되기 시작하였다.1) 이후, 개화기를 맞이하면서 본격적으로 서양인들의 한국선교가 행해졌는데, 이 때 들어온 종교가 바로 기독교이다. 많은 서양의 선교사들과 목사들이 한국 땅에 기독교의 복음을 전했는데, 이렇게 복음을 전파할 때는 항상 찬송가(讚頌歌)가 따르게 마련이다.
찬송가의 도입은 한국 땅에 처음으로 서양음악이 들어오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 땅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서양식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들을 설립하였는데, 대표적인 학교로는 1886년에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과 스크랜톤 부인이 설립한 이화학당 등이 있다.2) 이러한 서구식 교육 기관은 커리큘럼 중에 ‘창가’라는 과목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이 창가는 대부분이 찬송가이다.3) 개화기의 서구식 학교에서는 이렇듯 양악교육을 목적으로 찬송가를 가르쳤다고 볼 수 있다.
찬송가에서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한국의 교회 음악은, 100년이 조금 넘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약 1세기동안 기독교는 기독교인이 남한 인구의 약 25%에 육박할 정도로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고, 그로 인해 기독교의 음악 또한 자연스럽게 발전하게 된 것이다.
본문에서는 개화기부터 해방 이전까지의 교회 음악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초창기의 교회 음악에 대한 연구를 통해 오늘날의 교회 음악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2. 본문
2-1. 찬송가
2-1-1. 찬송가와 신문화(新文化) 운동
이유선은 자신의 저서에, “한국에 있어서 개신교의 찬송가는 한국의 서양 음악을 가능케 했을 분 아니라 ‘애국가운동’과 ‘창가운동’의 전개로 이 나라 내셔널리즘의 기치가 되었고 신문학 운동, 나아가서는 예술 가곡과 대중음악(유행가)에 이르기까 지 실로 한국 근대 문화의 모체가 되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4)고 서술하였다.
이처럼 찬송가는 성경과 함께 우리나라의 개화운동에 큰 힘을 주었다.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일반인들에게 널리 보급하였고, 찬송가의 전파로 서양음악을 이 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한국은 기독교에 의해서 개화가 앞당겨졌다고 볼 수 있다.
초창기의 우리나라 찬송가는 서양의 경우처럼 창작에 의한 보급은 아니지만, 단 기간에 한국인의 정서에 스며들게 되었고, 이를 통해 신문화운동을 이끌었다는 점 에서 역사적 의의를 가지게 된다. 또한 찬송가는 한국 최초의 서양음악으로, 한국 땅에 서양음악을 뿌리내리게 하였으며, 애국운동과 예술가곡과 대중음악 등 전반 적인 신문화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2-1-2. 찬송가와 민족운동
찬송가는 점점 한국인의 정서에 깊이 스며들게 되었다. 찬송을 통해 개개인과 민족의 마음을 표현하게 되었고, 결국 교회에서 예배용으로만 쓰이던 찬송가가 사 회적인 차원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존의 찬송가 곡조 에 애국적인 가사를 붙여서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본래 교회음악이 지니는 의 미와는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민족의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기독교의 복음 전파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래의 한 가지를 예로 들 면 다음과 같다.
<애국가>5)
1절 : 높으신 상주님 자비로운 상주님 긍휼히 보소서
이 나라 이 땅을 지켜 주옵시고 오 주여 이 나라 보우하소서
2절 : 우리의 대조류 폐하만세 만만세 만세로다
복되신 오늘날 은혜를 내리사 만수무강케 하여주소서
3절 : 상주의 권능으로 우리의 대군주 폐하 등국하셨네
이 나라 이 땅을 영세 불멸하겠네 대군주 폐하여 만만세로다
4절 : 상주님 은혜로 오 주여 이 나라 독립하였네
우리들 백성은 상하 반상 구별 없이 오 주여 상주님 기도하겠네
5절 : 홀로 한 분이신 만왕의 왕이여 찬미 받으소서
상주님 경배하는 나라와 백성들 국태민안 부귀영화 틀림없이 받겠네
가사를 분석해보면, 하나님께 의존하면서 왕위를 옹위하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 하며 독립을 다짐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가사를 찬송가 곡조에 붙인 것이다. 위 의 노래는 고종황제의 탄신일을 맞아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축하예배를 드릴 때, 언더우드 박사가 찬양가로 프린트해서 모두 함께 불렀다고 전해지는 노래이다.
민비가 시해되었을 때에는 백성들이 모여 합동추모예배를 드리면서 원통함을 통 곡하며 울부짖었다고 한다.6)
이러한 사실을 통해, 국가의 희비가 찬송가로 승화됨을 알 수가 있다.
1895년 대한제국이 독립국을 선포하던 때에 국왕과 외국사신들을 초청한 자리에 서 독립가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7) 또한 일년 뒤인 1896년, 독립문 정초식을 거 행할 때에도 애국가를 불렀다.8) 이것은 당시에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노래로 나타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당시의 애국가류 창가만 해도 애국가, 독립가, 진보가 등 여러 종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애국가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를 시사해 주고 있다. 이것은 애국운동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한 독립운동 의 다양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2-1-3. 찬송가와 음악교육
한국의 음악교육은 찬송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서양음악은 선교사가 가 르치기 시작한 찬송가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머리말에서도 밝혔듯이, 개화 당시에 선교사들이 세운 서양식 학교는 커리큘럼에 ‘창가’를 포함하고 있었는 데, 주로 찬미가를 번역하여 가르쳤다.9)
평양의 숭실학교의 경우, 1867년 창설 당시부터 서북지방의 음악활동의 중심이 되고 있는데, 이 학교에서 나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인식, 김영환, 현제명, 박태준, 김세형 등으로 모두 한국 양악의 선구자들이다.10)
이러한 사실을 통해 당시의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서구식 음악교육을 일찍부터 시작했고, 따라서 기독교가 한국의 음악 발전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현재 생존해 있는 70세 전후의 음악가들은 대부분이 찬송가나 오르간을 좋 아하여 교회에서 그것을 배우고 정식 음악교육까지 받게 되어, 이름 있는 음악가 들로 배출된 것이다.
2-1-4. 찬송가의 발행
한국에서 찬송가가 처음으로 발행된 것은 1892년이었다.11) 그 이전에는 중국어 찬송가를 번역하여 사용하였다.12) 찬송가의 발행을 살펴보면, 복음가가 조선에서 처음으로 생기기는 1894년경에 언더우드 목사가 발행한 ‘찬양가’와 1895년에 미국 감리파의 ‘찬미가’와 1895년에 북장로파에서 발행한 ‘찬셩시’가 있는데, 찬송가가 발 행되었다고는 해도 그것은 악보가 없는 찬송가였다. 그리고 번역도 가사가 일정치 않았고, 구전으로 배우는 것이어서 곡조도 틀리고 부르는 것이 가지가지였다.
그런데, 한국 최초의 찬송가는 언더우드가 만든 ‘찬양가’ 이전에 나왔다. 그것은 앞에도 언급했듯이 1892년에 존스와 로드와일러 두 사람이 만든 악보 없는 ‘찬미 가’였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찬송가집이다. 이것은 27곡이 번역된 찬송가였는데, 이 책은 당지(唐紙)로 된 소형본으로서 감리교회의 전용이었다.
1893년 언더우드는 사성부 악보를 집성하여 117곡(126면)의 ‘찬양가’를 출판하였 다. 이것이 남쪽 장로교회의 전용이 되었는데, 악보로 된 찬송가로서는 이것이 한 국 최초이다. 그 다음에 나온 것이 ‘찬셩시’인데, 1895년에 리(G. Lee)와 기포드 부 인(Mrs. M. H. Gifford)의 공편으로 54곡이 수록되어 있다. 이 찬송은 주로 북부 장로 교회에서 사용하였다.
그 후에 1908년에 이르러 장로교․감리교 양교파의 찬송가 위원회가 발행한 ‘찬 송가’가 나올 때까지 위 세 종류의 찬송가집이 곡수를 점점 늘리며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교인수가 증가했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그 증판상황은 다음과 같다.
찬미가(讚美歌) : 1892년 27곡(초판) 찬양가(讚楊歌) : 1893년 117곡(초판)
1895년 81곡(재판) 1895년 154곡(재판)
1899년 176곡(삼판) 1900년 182곡(삼판)
1902년 205곡(오판)
찬셩시(讚聖詩) 1895년 54곡(초판)
1898년 83곡(재판)
1900년 87곡(삼판)
이상 세 가지의 찬송가의 증간 내용13)을 살펴보면, ‘찬미가’의 경우, 초․재판의 3년 간에 초판의 3배나 되는 곡이 증가되었고, 그 다음 4년 동안의 3판의 곡 수는 재판의 곡 수보다 배나 늘었으며, 5판의 곡 수는 초판의 7배가 넘게 증가되었다. 다른 두 찬송가도 해를 더할수록 곡 수가 늘기는 했지만, ‘찬미가’에 미치지 못하 는 수였다. 찬송가의 증판이 수년만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찬송가를 사용하는 신 자의 증가율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후, 1900년에 침례교회에서는 ‘복음찬미가’를 발간하여 사용하였고, 성공회에 서는 ‘성회성가’를, 1904년에는 ‘천도찬사’를 발행하여 사용하였다. 1908년에 장로교 와 감리교회에서는 ‘연합찬송가’를 발간하여 20년간 사용하였는데, 이 연합찬송가 의 곡 수는 무려 262곡에 달했다.
1911년에 성결교회는 ‘복음가’를, 안식교는 ‘찬미가’를 발행하였고, 1912년에 구세 군은 ‘구세군가’를 발행하였다. 성결교회에서는 1911년에 발간된 복음가를 증보하 여, 1919년에 ‘신정복음가’를 출판하였으며, 1924년엔 천주교에서 ‘조션어 성가’를, 1928년에는 장․감 연합 공의회가 찬송가 개편의 필요성을 느끼고 ‘신정찬송가’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장로교회에서는 이 찬송가의 사용을 거부하고 400장으로 된 ‘신편찬송가’를 단독 발간함으로써 합동은 깨지고 감리교에서만 ‘신정찬송가’를 사 용하게 되었다. 1930년에 성결교회에서는 ‘신정복음가’에 40여 곡을 증보하여 ‘부흥 성가’로 개제하여 출판 사용하였다. 이로써 교단마다 독자적인 찬송가를 가지고 예 배를 드리다가 8․15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14)
2-1-5. 찬송가의 경향
이 시대의 찬송가의 특징은 말세 지향적이다. 우리 예술은 핍박을 당하는 서러 움을 토대로 하여 여러 가지로 감정을 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반 가곡에서도 그렇지만, 찬송가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잘 나타나 있다. 말세 지향적이라는 것은 흔히 말하는 휴거론 같은 것을 말한다.
당시 우리 민족은 현세에서는 속박과 억울함을 당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속 히 천국의 기쁨을 얻기를 동경하였던 것이었다. 아름답고 찬란한 천국을 마음에 그리면서 찬송을 부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찬송가와 일반 음악은 이렇듯 민족적인 면에서 공통성을 보인다.
2-2. 교회음악의 발전
2-2-1. 합창
합창대가 조직된 후의 성장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였고, 활동 또한 활발 하였다.
모우리 박사의 경우, 합창대와 취주악대가 조직된 후 전국을 순회하며 전도와 연주를 하였고, 이화합창단과 연희합창단의 경우는 헨델의 ‘메시아’ 중 ‘할렐루야’를 불렀으니, 당시로서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32년 연전에서 중고생 대상으로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의 영향을 받아 1934년부터는 이화전문 주최의 음악 경연대회가, 1935년부터는 조선 일보사 주최 음악인을 위한 경연대회가 뒤이어 생기게 되었다.15)
이렇게 격려와 자극을 뒷받침하여 후진들을 육성하였다.
2-2-2. 성악
성악의 대표자는 루츠 부인(Mrs. Lutz)이었다. 루츠 부인은 기독교 농촌문제를 연구하는 남편을 따라 한국의 선교를 위하여 1920년경에 평양에 왔다. 그녀는 훌 륭한 성악가로, 현제명․이유선․김노현 등이 가르침을 받았다.16)
2-2-3. 기악
모우리 박사는 오르간을 미국에서 수입하여 장대현교회에 설치하였다.17)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은 정동감리교회에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피아노를 가지고 있던 사람은 에케르트의 손녀인 아 말리 여사인데, 그는 피아노를 잘 쳤고 개인교습도 하였다. 평양의 선교사 중에서 도 한 사람이 피아노를 가지고 있었고 이화학당에도 피아노가 있어서 교육을 할 수 있었다.18)
1918년 일본 동경의 상야음악학교(上野音樂學校)를 졸업한 김영환씨가 일본에서 공부할 때에 피아노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사실은 그가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 초로 피아노를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해준다.
1928년 한국에 온 D. 말스베리(D. Malsbary) 선교사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고, 박태준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19)
2-2-4. 관현악단
2-2-4-1. 독일인 에케르트(Franz Eckert)
1900년 한국정부는 에케르트를 초빙하여 군악대를 창설하였는데, 그 목적은 한국군대의 사기증진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한국의 전통음악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한국의 가사나 민요를 연구하고 그 테마에 의해 많은 작곡을 하였으며, 일제에 시달리는 한민족을 보았고, 1907년 군대 해산과 함께 군악대도 해산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생애를 한국을 위해 바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는 일제의 탄압을 목격하고 체험하다가 1916년에 위암으로 회현동 객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2-2-4-2. 미국선교사 모우리 박사(Eli M. Mowry)
1909년에 내한한 그는 숭실전문학교에 합창부와 취주악대(吹奏樂隊)를 조직하 여 지도하였고 전국 전도를 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그는 숭실의 밴드를 출동 시켜 시가를 누비며 군중을 열광하게 하여 이 운동에 가담하였는데, 그것 때문 에 그는 투옥되었다.20)
2-2-4-3. 말스베리(Dwight Malsbary)
그는 1928년에 선교사로 내한한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다. 숭실전문 학교에서 관현악단과 합창을 지도하였고 박태준씨는 그에게서 화성학과 작곡을 배웠다.21)
2-2-5. 성가대의 발족
성가대의 기원은 구약시대부터이다.
다윗이 이 아래의 무리를 세워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매 솔로몬이 예루 살렘에서 여호와의 전을 세울 때까지 저희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반열 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22)
헤만을 중심으로 우편은 아삽족이, 좌편은 에단족이 맡았으니 3부분의 찬양대가 되는 셈이다.
다윗이 레위 사람의 어른들에게 명하여 그 형제 노래하는 자를 세우고 비파와 수금과 제 금 등의 악기를 울려서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 하매23)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악기에 맞추어 합창을 하였다. 그 중에서 에단은 놋제금 을 치고 스가랴, 아시엘, 스미라못, 여히엘운니, 엘리압, 마아세야, 브니야는 비파를 타서 여창(女唱)에 맞추고 맛디디야, 엘리블레후, 믹네야, 오벧에돔, 여이엘, 아사시 야는 수금을 타서 여덟째 음에 맞추어 인도하는 자라고 하였다.24)
성가대는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존재했다. 계속하여 성가대가 거 룩한 노래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많은 사람들이 성가를 통해 하나님께로 인 도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성가대의 공적이 크다. 선교사들은 교회가 시작이 될 때부터 성 가대를 조직하고 육성하기에 힘을 썼는데, 최초의 성가대는 1909년경에 조직되었 다. 1909년경 평양의 장대현교회가, 그리고 1910년부터 새문안교회, 종교교회, 정동 교회가 성가대를 조직하여 운영하였다.25)
모우리 박사는 장대현교회에 찬양대를 조직하고 지도했으며 먼 밤길을 초롱불을 들고 다니며 일주일에 두세 번씩 왕래하면서 합창단을 지도하였다. 5음음계 또는 3음음계의 한국식 음악에 젖어 있는 한국사람들에게 서양식 찬송가를 가르치는 일 도 어려운 일인데, 사성부(四聲部)합창을 훈련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 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그는 한국 최초의 합창단을 육성하였다. 뒤를 이어서 각 교회가 혼성성가대를 조직하여 예배를 도왔으며 교회음악의 발전에 기여하였 다.
1920년경, 각지에서 성가대를 처음으로 조직하여 합창을 할 때에, 단음으로만 노 래를 부르던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2부, 4부 혼성 합창을 처음 듣고서 잘못 부르고 틀리게 부른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같은 소리를 내지 않고 다른 소리를 낸다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한편에서는 쉬고 있는데 다른 한 편에서는 노래를 하니 그것 은 틀린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26) 그리고 남녀가 같이 노래 를 부른다고 풍기문란이라는 비난도 받았으며 음악적인 무지로 인해 많은 일들이 있었으나, 합창운동은 교회 내외에서 점점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2-3. 합창음악의 조직과 지도
1909년에 한국에 온 모우리 박사는 숭실전문학교에서 한국 최초로 남성 합창대와 취주악부를 조직하여 지도하였으며 전국순회를 하였는데, 이로 보아 합창대와 취주 악대가 순회 전도까지 한 것으로 보인다.
하몬드 선생이 한국으로 건너온 후, 1909년에 서울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합창단인 이화합창단이 조직되었는데 나중에는 헨델의 ‘메시아’ 중 ‘할렐루야’를 연 주할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또 배재합창단이 조직되었고, 1910년경 김인식은 YMCA 안에 합창단을 조직하였 는데 이 합창단은 남성중창단으로 출발하여 혼성합창단으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경성찬양대였다.27)
1923년에는 음악부 학생들을 인솔하고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 연주여행을 하였는 데, 그때의 레퍼토리 중 헨델의 ‘할렐루야’ 합창이 끼어 있는 것을 보면 연희전문합 창단의 수준을 짐작하게 해준다.28)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연희전문학교에서는 일본의 동양음악학교와 상야음악학교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고 1918년에 연희전문학교의 강사로 온 김영환이 정규 강의 외에 합창부와 기악지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1930년경에 경기보육학교합창대가 있었고, 1937년에는 일반합창단이 김 성태에 의해 조직되어 많은 활약을 보였다.29)
2-4. 유년주일학교와 음악
2-4-1. 유년주일학교의 시작
한국에 첫 유년주일학교가 시작된 것은 1890년이다. 1897년에는 평양에 주일학 교가 다섯 군데가 설립되었고, 교재도 인쇄된 것이었다고 한다. 1919년에 세계주일 학교협의회 총무인 하인쯔(H. J. Heinze)씨가 내한함을 계기로 경무대30)에서 주일 학교대회를 하였을 때, 무려 14200명이나 모여 놀라게 했다.
주일학교 프로그램은 노래와 성경이야기를 중심으로 이룩되었다. 아무도 잘 돌 봐주지 않는 어린이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 아이들을 교회로 이끌게 하였다. 1915년부터는 유년주일학교가 교회가 없는 지역의 전도에 앞장서기도 했고, 교회 청년들이 주일 오전에는 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인근 부락의 교회가 없는 곳을 찾아가서 주일학교를 시작하고 교회를 창설하였다.
이렇게 주일학교는 교회에 나오는 어린이들을 교육하면서 동시에 교세확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2-4-2. 주일학교용 찬송가 발간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 찬송가는 반드시 필요했다.
1892년에 찬송가가 출판되기 이전에도 우리나라 각 교회에서는 찬송가를 널리 부르고 있었다. 그 하나의 예로, 1888년 7월에는 이미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위한 주일학교 조직을 보게 되었다.”는 기록31)을 보고 알 수 있듯이, 조직된 주일학교에 서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찬송가를 부른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어린이 찬송가는 1936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종교교육부가 발행한 ‘아동 찬송가’이다. 101곡으로 되어 있고 편집인은 현제명이며, 가격은 1원이었는데 월부로도 보급하였다고 한다. 우리 찬송가는 9곡이 수록되어 있다.32)
해방 이후, 어린이 찬송가는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는 여러 종류의 어린이 찬송 가가 시중에 나와 있다.
2-5. 창가의 분화
이 시기의 찬송가의 특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창가(唱歌)의 경향을 살펴보는 것도 유익하리라고 본다.
창가는 1890년대로부터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애국가이든 권학가(勸學歌) 나 진보가(進步歌)이든 혹은 운동가, 독립가이든 아니면 망국가 중 어떤 것이든 간에 시대감정을 민감하게 나타내면서 서민의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린 것이었다. 이렇게 창가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급격히 파급되어 나간 점으로 보아 일종의 유행 가일 수도 있으나, 반드시 유행가로 단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창가의 특성은 신시(新詩)와 유행가, 애국가, 국민가요 등을 포괄한 상태였다. 이것 이 시대가 지나면서 시대감각에 따른 양식으로 파생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예술 가곡과 유행가, 동요를 들 수 있다.
2-5-1. 예술가곡
창가는 직설적이지만 예술가곡은 예술적으로 높이 순화된 것으로서 풍부한 내용 을 가진 음악이다.
홍난파의 ‘봉선화’를 예를 들어 살펴보면, 이 노래는 우리 민족이 3․1운동과 일 본의 관동대지진에서 여지없이 짓밟힌 동포들의 처절한 모습을 그린 것이며, 일제 의 총칼에 짓밟히는 나약한 민족의 운명이 그늘진 울밑에서도 일어서는 재기의 굳 은 신념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희생키를 바라노라.
이 노래는 그 시대에 활동하던 김형준의 작사에 홍난파가 작곡한 노래이다.
2-5-2. 유행가
유행가도 예술가곡과 같이 창가에서 분화되었고, 그 시대적인 감정과 좌절감에 있어서도 공통점이 있다. 창가가 예술가곡으로 승화하자 음악적으로 수준이 그리 높지 못한 서민층의 노래도 새롭게 변모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의 예술은 어떤 분야에서든지 3․1운동에서 얻은 상처를 함축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33)
그 때의 예술가곡으로는 홍난파가 지은 ‘성불사의 밤’, ‘고향생각’, ‘어제 온 고깃 배가’, ‘옛 동산에 올라’, ‘사공의 노래’ 등이 있었고, 일반 서민층에는 실의와 체념 을 노래하는 유행가들이 나타났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희망가’, ‘황성옛터’, ‘방랑 가’, ‘항구의 일야’, ‘목포의 눈물’ 등이 있다.
‘황성 옛터’를 예로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은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일본인들의 고리채에 얽혀 매인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기고 북간도, 만주, 중국, 시베리아 등으로 떠나는 한국인의 신세를 한탄한 이 노래는 민요 ‘아리랑’과 함께 민족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번져 나갔다.34) 이 노래는 가사와 가락 모두 진한 서러 움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서러움과 분통은 머지 않아 폭발하는 분화구처럼 무섭 고 소름끼치는 민족적 울분이었다. 일제는 이 노래의 저의를 알아차렸는지 2년 후 에 총독부가 노래에 대한 금지령을 내리고 말았다.35)
1928년경,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의 이 노래는 전기 홍난파의 가곡들이나 기존 의 창가와 확실히 구별된다. 이는 가사의 전달 방식이나 멜로디의 양식, 표현법 등 에 있어서 유행가의 성격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이로부터 유행가는 예술가곡과 함께 병행하면서 당시의 한민족의 시대 감각을 노래하고 한민족의 운명을 대변해 주었다.36)
2-5-3. 동요
창가와 유행가가 분화되던 때에, 예술가곡은 동요를 파생시켰다. 1921년 방정환 은 ‘사랑의 선물’이라는 동요집을 내면서, “학대받고 짓밟히고, 차고 어두움 속에서 우리처럼 또 자라는 불쌍한 어린 양들을 위하여 이 책을 썼습니다.”37) 라고 머리 말을 썼다.
어른들이 당한 정치적인 탄압은 어린이의 가슴에도 멍이 들게 하였다. 부모님들 이 당했던 서러움은 아이들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
1924년 윤극영이 ‘반달’, ‘제비 남매’, ‘고기잡이’, ‘새떼’ 등의 동요를 작곡했고, 홍 난파는 ‘어린이 동요 100곡집’ 1,2권을 출판했으며, 박태준은 동요집을 두 번 내놓 았다. 정순철은 동요집 ‘갈잎피리’를, 이광렬은 ‘꽃동산’을 각각 출판했고 강신명 목 사는 ‘강신명 동요 99곡’을 출간하였다.
이렇듯 많은 작품이 나왔는데 이것이 거의 다 민족의 비애와 울분을 노래한 것 이었다. 이 중에서 윤극영의 ‘반달’을 예로 들어 보겠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이것은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우리 민족의 심정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 노래는 한반도의 전역으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퍼져 나갔다.
동요는 당시에 이 민족의 울분을 터뜨리고 승화시키는 예술이기도 하였다. 이러 한 경향은 당시의 교회음악의 방향과 일치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맺음말
개화기부터 해방 이전까지의 교회음악은 짧은 기간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이는 당시의 사람들이 종교에 대한 많은 관심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찬송을 통해 사람들은 울분을 나타내기도 하였고, 또한 찬송은 민족의 마음을 대변해 주기도 하였다. 찬송가의 가사를 변형하여 사회 참여적인 내용의 노래를 만들기도 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의 복음 전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교회음악의 교육은 학교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선교사들이 세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그 외 다수의 학교에서는 ‘창가’라는 과목을 통해 음악을 가르쳤다. 이것이 서구식 음악교육의 시초가 된다. 또한 유년주일학교를 만들어 어린이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고 음악을 가르쳤으며, 각 교회에서는 성가대를 조직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찬송가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창가도 20세기 초에 들어서 분화를 하기 시작했다. 창가를 통해 예술가곡․유행가․동요 등의 다양한 예술 분야가 파생되었는데, 이 모두가 공통적으로 민족의 애환을 담고 있는 특징을 가진다. 이것은 교회음악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교회음악과 창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모든 예술에서 나타난다.
교회음악은 이처럼 우리의 조상들에게 큰 영향을 준 소중한 존재이다. 교회음악을 통해 서양음악이 이 땅에 전해지게 되었고, 1세기가 조금 지난 오늘날 한국 땅에서의 서양음악의 비중은 한국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에 훨씬 앞서있다. 또한 교회음악도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에는 558장에 달하는 찬송가가 사용되고 있고,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대중음악 분야에서도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참고 문헌◁
『비전성경』(서울: 두란노, 1998.)
『찬송가』(서울; 성서원, 2000.)
대한민국 예술원,『한국예술사총서3 한국음악사』(서울: 대한민국 예술원, 1985.)
렛셀 N.스콰이어 作, 이귀자 譯,『교회음악사』(서울: 호산나음악사, 1994.)
원진희,『교회음악사』(서울: CLSK, 1976.)
이유선,『기독교음악사』(서울: 기독교문사, 1988.)
―――,『한국양악백년사』(서울: 음악춘추사, 1985.)
이중태,『한국 교회음악사』(서울: 예찬사, 1992.)
전희준, “한국 교회음악에 관한 연구,” 서울: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5.
▶ 출처<The source > : http://myhome.naver.com/saebyuk7/menu5.html
▶ 원문<The original> : http://myhome.naver.com/saebyuk7/download/church.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