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예수님의 흔적을 가진자(갈6:14-17)
흔적이라는 말은(스티그마)“낙인,문신”이라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노예시장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물건을 사고팔듯 노예를 사면 그 노예가 자기의 노예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낙인을 찍는데 불에 달군 인두로 그 노예의 몸에 문신을 새깁니다. 그것을“스티조”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스티그마)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자기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노예)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노예들이 좋은 주인 만나면 팔자가 피는 것이고 나쁜 주인 만나면 지옥이 따로 없겠지요.
같은 한국 사람이라도 이북에서 사는 것보다 남한에서 사는 것이 좋지요?. 사람은 누구나 종교성이 다 있는데 용왕이나 무당이나 그건 미신에 빠지는 것보다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섬기고 사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좋은 주인을 어디서 만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종)노예가 되는 것은 땡잡은 것입니다.
어차피 무언가에 순종하는 것이 인생인데 죄에 순종하지 말고 선한 것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무엇에 순종하던 순종하는 것에 종이라고 했습니다(롬6:16). 어떤 신앙에 빠지던 신앙을 가져야 한다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다.
(1)예수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로 할례를 받습니다.지금도 합니다.그러나 그러한 할례를 통하여 복의 근원이 되고,구별되고 모범적인 민족이 되라는 목적과는 달리 할례를 하나의 종교적 우월감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민족들을 짐승처럼 취급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내가 어떤 직분을 받았다.나는 어떤 교회에 다닌다...등 차별을 하기 시작 할 때 이미 그 사람은 그 직분,그 세례,교회가 우상이 되어 버리는 것이고 십자가 자랑이 아니라 육체의 자랑을 위한 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인간적으로 화려한 이력을 가진 분입니다.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 베냐민 지파에 소속되었고,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으며,바리새인이며,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으며,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최고의 인텔리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세상 모든 경력들을 배설물처럼 취급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님들의 명함에도 이력들이 엄청납니다. 목사님의 까운도 박사 까운이 유행합니다. 한때 가짜 박사학위까지 홍역을 치루기까지 했습니다. 저는“주님의 십자가,주님의 은혜”이외 어떤 이력도 자랑거리가 없습니다.나는 주님 때문에 빰을 맞았고 침 뱉음을 당당했습니다.“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다"라는 이 말씀이 실감납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오늘까지도 주님의 은혜로 살아왔고,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았고, 악한 죄에 빠지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이 흔적들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2)한 알의 밀알 같은 삶
바울사도는 그렇게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세상자랑거리들을 십자가에 못 박힘, 곧(죽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죽으면 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생명의 원리는 죽음에 있습니다. 생명은 죽음으로만 설명되어집니다.“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하여“나는 죽었다~”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입니다.세상정욕,세상 자랑, 세상욕망들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한 알의 밀알 같은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익은 곡식이 고개를 숙인다고 신앙이 깊어지고 수준 높은 신앙인이 될수록 고개가 숙여 집니다. 더 겸손해지고 더 사랑하고 싶어지고 더 용서하고 싶어지고 더 섬기고 싶어집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분개하고, 강해지고 의를 위하여는 겸손히 살아가는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 초대 목사였던 김익두 목사님에 대한 일화는 우리에게 많이 들려진 이야기입니다. 그가 평양 깡패였다가 예수를 믿고 나서 자신이 활보하던 지역에“김익두는 죽었다”는 부고장을 돌린 이야기입니다.“과거의 나는 죽었소. 그리스도 안에서의 변화된 미래만이 내게 있을 뿐이오”
(몽테뉴의 수상록)“인간 생애의 목적은 죽음이다 이것은 필연적이고 목적이다. 죽음은 가장 평범한 사실이므로 죽음을 멀리하거나 잊어버리는 것은 목적에서 이탈하는 어리석음이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의 생활에서 죽음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
(고전15:31)날마다 죽노라.
제목: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자(갈6:11-18절)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갈라디아 서신의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쓰는 것을 보라”(11절)고 했습니다. 아마 바울은 다메섹 사건 이후로 시력을 상실하여 글을 쓰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돕는 자들이 바울의 편지를 항상 대필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육체를 자랑하지 말라(13절)고 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할례를 육체의 자랑거리로 생각했습니다. 할례의 본래적인 의미가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징표로 행한 것입니다. 할례는 죄 된 인간의 본성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은밀한 곳에 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신만이 아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복음인 십자가가 있기 전에 있었던 그림자요 안내판에 불과합니다. 실물이 나타나고 목적에 도달했으면 더 이상 그림자나 안내판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병에서 낫고 나면 더 이상 침상에 누워 있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십자가를 붙든 인생에게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2)자랑할 것은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14절).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모든 부끄러운 수치와 죄를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담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몸을 자르거나 피 흘릴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부끄러운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자유하게 하셨으므로 십자가만이 우리의 영원한 자랑거리입니다.
(3)바울은“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습니다(17절).
목욕탕에서 몸에 문신을 새긴 자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가 속한 조직의 일원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몸에 지울 수 없는 자국을 남기는 것입니다. 본문에“흔적”(스티그마타)이란 말은 본래 고대 사회에서 주인이 노예에게 자신의 소유권을 나타내기 위하여 몸에 지워지지 않는 불도장을 찍어 두는 자국을 말합니다.
(고후11:2-27)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그 몸에 수많은 예수의 불도장이 찍힌 사람입니다(고후1:8∼9,골1:24). 예수의 사도됨에 대한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는 문제 삼지 말라는 말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평안북도 청주에 박영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재산이라고는 논 서마지기 밖에 없었는데 성전건축에 바칠 것이 없어 논을 팔아 교회에 바치고 교회에서 사찰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소문을 듣고 미국 맥힌 선교사가 그 아들을 데려가서 영어를 가르치며, 영창중학교에 입학시켜 공부를 시켜주었습니다. 졸업 후 중국으로 데리고 가서 신성고등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어 유명한 파크 대학과 프린스톤 대학 그리고 예일대학에서 공부를 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귀국하여 연세대학교 교수와 총장이 되었으며, 문교부장관까지 지냈습니다. 그분이 바로 백낙준 박사입니다. 후일에 그의 아버지가 간증하기를 나는 어려운 때 논 서마지기를 받쳤는데 하나님은 나와 나의 후손들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