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얀 성애가 서린 창문이 유난히 아름다워 보이는 겨울밤이었다.
거저 줘도 가지고 갈 것 같지 않은 한 뼘 크기의 낡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는
오늘이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며 귀가 따갑게 떠들어대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베니어 합판으로 된 얇은 나무문에서는 바늘같이
따가운 바람이 매섭게 스며들고 있었다. 형민은 무릎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 크기의
작은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아, 누렇게 색이 바랜 홑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을 비벼 대고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너저분하게,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누런 갱지에는 검은 글씨가
빼곡이 적힌 채 마구 구겨져 있었다.
형민은 입김을 장난스럽게 '호, 호' 불어 보다가 두 평도 안 되는 방안을 채우지
못하는 희미한 백열전구의 불빛을 바라보더니 문득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규칙적으로 덜컹대는 창문을 통해 하얀 솜 같은 함박눈이 첫날 밤 새색시의
몸짓처럼 너무도 가녀리게 흩날리고 있었다. 비비던 손을 턱에 괴고 물끄러미
바라보던 형민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번졌다.
'오늘밤만 지나면....'
형민은 입가에 흐르는 미소를 애써 감추며 앉은뱅이 책상 서럽을 열었다.
색이 바랜 거무튀튀한 서랍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뻑뻑한 파열음을
토해내며 반쯤 고개를 내밀었다.
서랍 속에는 쓰다만 원고 뭉치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고 그것들 사이에 금색 종이로
포장된 네모난 작은 상자가 다소곳이 자리잡고 있었다.
형민은 천천히 손을 뻗어 작은 상자를 한번 쓰다듬고는 더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하정이가 이걸 받으면 얼마나 즐거워할까?'
너무도 소중한 손길로 서랍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고는 책상에 바싹 다가앉아
갱지 위에 놓여 있는 육각형 모양의 싸구려 볼펜을 집어 들었다.
분명, 처음 살 때는 창밖에 내리는 눈만큼이나 새 하얀 색이었을 볼펜 껍데기는
손가락이 자주 닿는 부분들이 회색 빛으로 바래 있었고, 몇 번이고 새로 갈아
끼워졌을 검은 색 볼펜심의 황금색 끝 부분만이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형민은 기지개를 한 번 피더니 책상 위에 놓인 누런 색 갱지 위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볼펜의 움직임 소리와 맞물려 손을 뻗으면 하늘에
닿을 것 같은 도심 변두리 달동네의 후미진 골목에는 아주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들만이 창문 넘어 은은하게 들려왔다.
열심히 무언가를 적던 형민은 문득 볼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또렷이 들리는 낯익은 발자국 소리가 한 칸 짜리, 초라한 자신의 집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형민은 이불을 꼭 뒤집어 쓴 채 자리에서 일어나 뽀얗게 성애가 낀 창문에 다가가
손등으로 천천히 문질러 닦아 보았다. 방안을 밝히는 전구 불빛만큼이나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까만 생 머리를 휘날리며 천천히 걸어오는
하정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어깨와 머리에 흠뻑 눈을 뒤집어 쓴 채 주황색 롱코트를 턱 밑 깊숙이
여미고 있었다. 새하얀 얼굴에 발그레한 양 볼은 송이송이 흩날리는 눈과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형민은 미닫이 창문을 열고는 까치발로 서서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하정아!"
"어? 오빠."
하정은 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들어 형민을 쳐다보았다. 추운 날씨에 장갑도
끼지 않아 꽁꽁 얼어 새파랗게 질린 양손이 더욱 가냘프게 보였다.
"길도 미끄러운데 왜 여기까지..."
반가움에 걱정이 섞인 형민의 말투는 몹시도 떨리고 있었다.
하정은 윗입술을 살그머니 깨물더니 조용히 손바닥을 펴서 눈을 감싸는
시늉을 했다.
"첫 눈이 오잖아... 그래서, 문득... 오빠 얼굴... 보고 싶어서... 그냥..."
"하지만... 이런 날씨에 이 높은 데까지..."
"이젠 익숙해져서 괜찮아. 그나저나, 오빠... 춥겠다. 어서 창문 닫아. 내, 금방 들어 갈 테니."
하정은 왼쪽 눈을 찡긋하며 종종 걸음으로 집에 들어왔다.
방안에 들어 선 하정은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는
형민을 보고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작은 소리로 물었다.
"화... 많이 났어?"
"화난게 아니라... 네가 걱정돼서 그렇지. 이 동네... 무허가 건물 철거한답시고 군데군데
파놓은 곳도 많고... 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건물도 많은데...
눈도 많이 오는 이 어둠 속에서 행여나..."
형민은 하정의 따스한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겹쳐져서 더 이상 말을 짓지 못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달콤한, 사랑하는 여자의 진실된 입맞춤에 형민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꼭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뭐 하고 있었어? 소설? 시?"
잠시후 이마에 키스를 하고 한 발짝 물러난 하정은 방금 전까지 형민이 앉아있던
책상 근처에 마구 구겨져 있는 종이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형민은 방안의 싸늘한 공기에 몸을 가끔 떠는 하정을 보고는 자신이 뒤집어스고
있던 이불을 그녀의 이마에서부터 장난스럽게 뒤집어씌우며 대답했다.
"가사..."
"가사? 노랫말 말이야?"
하정은 형민의 허리에 손을 감고는 이불을 함께 쓰며 물었다.
듬직한 형민의 온기가 손끝에 아련하게 전해왔다.
"응."
"오빠가 가사도 써?"
하정은 책상 위의 종이를 몇 장 들추더니 의외라는 듯 되묻자 형민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도 몇 번 만났지? 현기라고... 내 후배 말이야."
"아, 알지. '이브'의 멤버잖아? 그런데?"
"걔가 이번에 솔로 음반을 내게 됐는데... 노랫말, 좋은 게 있으면 몇개 써달라고 하더라고,"
"그래? 그거 참 잘됐네? 드디어 오빠의 글 솜씨를 알아보는 사람이 생겼구나."
아이처럼 좋아라 박수까지 치며 즐거워하는 하정의 얼굴을 보자 형민은 기쁨보다는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밀려왔다. 컴퓨터는 커녕 원고지조차 살 돈이 없어 남이
쓰다 버린 갱지에 글을 써야 하는 자신의 가난 때문이 아니라, 조그마한 기쁨에
너무나도 행복해하는 하정의 마음이 가슴속으로 진하게 저려왔기 때문이었다.
"작사는 현기가 더 잘할텐데... 용돈 벌이라도 하라고... 일부러 날 생각해서 일을 맡긴 것 같아.
아무튼 고맙지 뭐. 모처럼 일다운 일을 한다는 생각에 기운도 나고..."
"그래, 어쨌든 잘 됐다. 오빠가 쓴 가사... 엄청 유명해 졌으면 좋겠어. 나도 뽐내고 다니게 말이야. 헤.헤.헤..."
맑은 눈동자에 듬뿍 피어오른 '희망'이라는 단어가 언뜻 생각났다. 형민은 과장되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그동안 써놓은 소설 원고도...
몇 군데 출판사에 보내 놨으니 조만간 연락이 올 거야. 그리고 신춘문예도..."
하정은 가녀린 손가락을 들어 형미의 입에 대더니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오빠가 하는 일 다 잘 될 거야. 난 믿어. 그리고... 만에 하나...
가난이란 놈이 오빠 곁에 꼭 붙어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 해도 난 오히려
가난과 친구가 될 망정 오빠 곁을 떠나진 않을거야."
형민은 하정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봇물처럼 터져 나오려는 수많은 말들을
애써 참았다. 아무 보잘것없는 자기 때문에 부유했던 집안과 부모님을 등지게 해
타지에서 고생을 시켜 미안하다는, 혹은 내일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혼인신고만
먼저 하게 되어 면목이 없다는, 그리고 어떤 일을 해서라도 반드시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그런, 마음 속에 늘 간직한 말들을 그저 입 속으로 조용히 삭일 뿐이었다.
********************
처음에는 소리없이 흩날리던 눈이 밤이 깊어 갈수록 세찬 바람과 함께, 창문까지
흔들거릴 정도로 매섭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정은 형민이 글을 쓰고 있는
뒷모습을 애정 어린 눈길로 지켜보다가 어느 사이엔가 몸을 웅크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형민은 그런 하정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얼굴을
쓰다듬없다. 여전히 부드럽고 따스했지만 그동안 고생의 흔적 같은 부르튼 입술이
형민의 가슴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이란 형식적인 위안도 법적으로 부부가 되는 내일의
혼인 신고 앞에서는 별 효력이 없는 듯 생각되었다. 경제적 안정이라는 현실적
증압감이 창문 밖에 쌓이는 눈처럼 형민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때 둔중한 남자들의 발자국 소리가 흔들대는 창문 밖, 골목 쪽에서 나지막하지만
다급하게 들려왔따. 형민은 하정이 춥지 않게 이불을 잘 덮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가로등 불빛에 어른거리며 보이는 건 건장한 체구의
남자 두 명이었다. 얼굴은 뚜렷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조심스러운
행동을 봐서는 그저 길을 지나는 사람들 같지는 않았다.
'뭐지?'
창문 가까이에 얼굴을 대고 그들을 주시하기 시작했따. 덜컹대는 유리창의 한기가
코끝에 '짜르르' 전해왔다. 두 남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형민의 집 근처로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형민의 머리 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솟구쳤다.
"이 집이 맞아?"
남자들 중 짧은 스포츠 머리가 무스로 범벅을 한 다른 남자에게 물었다.
무스는 험악한 인상을 찡그리며 담뱃불을 붙이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확실해. 이 근처에서 이사를 안 간 집은 여기 뿐이라고..."
"어떻게 해? '콱' 불을 싸질러 버려?"
형민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불을 지르다니...
도대체 저 사람들은 누구기에...
"이런 산동네에 불이 나면 끄기도 힘들 거야. 소방차도 여기까지는 못 올라 올 테니..."
"휘발유는 가져왓어?"
더 이상 가만히 쳐다 볼 수만은 없었다. 저들이 누군지, 또 그런 짓을 왜 저지르려
하는 지는 몰라도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형민은 다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 나갔따. 두 남자는 느닷없이 뛰어 나오는 형민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아직도 눈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뭐... 하는 겁니까?"
"몰라도 돼..."
잠시후 냉정을 되찾은 듯 스포츠 머리가 이죽거렸다.
형민은 주먹을 불끈 쥐고 스포츠 머리 앞에 다가가 턱을 들고 꼿꼿이 섰다.
"뭐 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왜 남의 집에 불을 지르려고 하는 겁니까?"
그때 무스가 바닥에 담배불을 아무렇게나 버리더니 스포츠 머리에게 말했다.
"사람이 잇따고는 안 했잖아?"
"상관없어.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
"저 새끼는?"
"밟아 버리고 시작하지 머..."
남자 둘은 형민의 존재를 아예 무시한 채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 받았다.
비록 야위고 약한 맨 몸뚱어리뿐인 형민이라 해도 그들이 하는 짓을
간과할 수 없었다. 마침내 너무도 작고 볼품 없는 형민의 조그마한 주먹이 허공을
갈랐지만 이미 스포츠 머리의 오른 쪽 무릎이 그의 가슴팍에 정확히
명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무스의 왼쪽 팔꿈치가 형민의 관자놀이를
짓누르자 그는 소복히 쌓인 눈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아련히 들리는 남자 둘의 발자국 소리와 진한 휘발유 냄새가 형민의 머리를
금방이라도 깨뜨려 버릴 것처럼 아프게 하더니 잠시 후 그의 눈앞에는 춤을 추는 듯
너울대는 새빨간 불기둥이 희미하게 펼쳐졌다.
"하... 하정아..."
안간힘을 쓰던 형민은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무스의 구둣발이 자신의 턱밑으로 날아오는 가 싶더니 한 움큼의 피를
입에서 흩뿌리며 그나마 남아있던 의식마저 잃고 말았다. 귓가에 어지럽게
불어대는 새벽바람과 차다 못해 아린 눈보라가 형민의 몸을 마구 휘감고 있었다.
************************
"형, 뭘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어?"
현기는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카페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보는 형민의
맞은 편에 앉으며 근심스러운 듯 물었다. 그제야 현기를 알아 본 듯,
촉촉한 눈망울을 돌리며 형민이 우물거렸다.
"응? 아... 너 왔구나..."
"또 하정이 누나...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냥... 저.... 모처럼 내리는 함박눈이 너무 예뻐서..."
현기는 무심코 창 밖을 쳐다보았다. 형민의 말처럼 눈이 내리고 있기는 했지만
함박눈은 커녕 질퍽한 싸리눈이었다. 현기는 얕은 한숨을 쉬며 다시 형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휴우... 이제 그만 잊어... 일년이나 지났잖아? 그동안 하정이 누나도 많이 괴로웠을 거야.
부모님 때문에 억지로 형과 헤어지게 됐으니..."
"얼마 전까지는 돈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아는 하정이 부모님을 많이도 원망했지.
하지만 이젠... 다 이해해. 나같이 삼류 인생에게 딸을 줄 부모는 그 어디고 없을 테니 말이야."
형민의 얼굴은 억지 웃음을 짓는 듯했다.
"형이 왜 삼류 인생이야? 그건..."
현기는 목청을 높여 몇마디 더 하려다말고 입을 다물었다. 카페에 들어 올 때부터
자신을 쳐다보며 수군대던 여 종업 둘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현기는 어색한 시선을 애써 피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때 고요하게 흐르던
음악이 멈추더니 귀에 너무도 낯익은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울했떤 형민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졌고 도리어 현기의 얼굴이
경직되는 듯 보였다.
쑥스럽게 내미는 여 종업의 앳된 손에는 CD 음반이 들려 있었다.
현기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형민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잠시 내 생각에 잠겨 네가 유명인이란 사실을 깜빡 잊을 뻔했다. 후웃~
이거, 나까지 괜히 우쭐해지는 걸?"
모처럼 환하게 웃는 형민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였는지, 현기 또한 미소를 지으며
CD를 받아 사인을 해주었다. 여 종업원 둘은 CD를 보물처럼 품에 안고는 좋아라
떠들며 자기들 자리로 되돌아갔다. 현기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써준 가사들 중에 지금 흘러나오는 이 노래 한 곡만 멜로디를
만났구나? 하긴 이노래 가사도 거의 다 네가 손을 다시 봤지만..."
"형이 써 준 다른 노랫말들... 나, 소중히 간직하고 있어. 내가 아직 실력이 없어서...
그 노랫말들에 어울릴만한 훌륭한 곡을 만들지 못해 그런 것 뿐이지.
하지만 다음 앨범엔 꼭..."
"자식...둘러대긴... 내가 제대로 못 써서 그런거, 나도 다 알아."
현기는 장난스럽게 헛기침을 몇 번하고는 말을 돌리려는 듯 주머니에서 CD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뭐니?"
"내 앨범이지 뭐야?"
"이미 샀어."
"거짓말 마. 형이 무슨 돈이 있다고..."
농담처럼 내 뱉은 말에 형민의 얼굴에는 잠시 그늘이 깔렸다. 현기는 서둘러 말을
얼버무렸다.
"사는 것하고 내가 주는 것하고 똑 같아? 받아 둬."
물끄러미 CD를 내려다보던 형민은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기는 형민의 반응에 어쩔 줄을 몰라,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몇 번
퉁기더니 말을 이었다.
"미... 미안해. 내가 괜한 소리를 해서."
"며칠 전에... 하정이 소식을 들었어. 내일... 결혼... 한다더구나.
오래 전부터 집안끼리 약속했던 그 남자하고..."
"그... 래?"
"하정이... 일년동안 외국에 있는 친척집에 감금되다 시피하며 살았었나봐.
결혼 때문에 귀국했다던데..."
"만나... 볼 거야?"
"아... 니. 잊을 거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현기의 노래 소리는 형민의 목소리와 한데 어울려 더욱
애처롭게 카페 안에 울려 퍼졌다.
[나를 알아요, 난 약하지만 그대만 곁에 있어 준다면
모진 바람과 험한 세상도 이제 나에겐 아무 것도 아님을...]
"오늘이 하정이와 만난지 삼년째 되는 날이야. 공교롭게도... 헤어진지 일 년째
되는 날이이곧 하고... 한번 다시 가보고 싶어."
"어딜?"
"그녀와 나만의 장소... 가슴이 시리도록 아프지만 즐거웠던 추억의 장소 말야..."
그 후로 이어지는 침묵과 한숨과 흐르는 눈물, 그리고... 형민의 머리 속은 마구
엉킨 실타래처럼 여러가지 상념으로 복잡한 듯 보였다. 마침내 현기가 CD를
형민 앞에 바짝 밀어 놓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따.
"이 CD를 보고... 용기를 가졌으면 해. 내가 형을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곤
이거 뿐일 듯 싶어서.."
물끄러미 CD만을 응시하는 형미을 뒤로하고 현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 밖에 내리던 싸리눈은 어느새 탐스런 함박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형민은 카페를 나서는 현기를 굳이 붙잡지 않았다.
애당초 이곳에 나온 것도 현기가 잠시 보자고 졸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거리에는 찬바람이 몹시 부는지 현기가 방금 나간,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치장된
문이 흔들릴 때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한동안 CD를 바라보던
형민의 머리 속에 한가지 이상한 생각이 스쳐갔다.
'CD를 보고 용기를 가지라고? 듣는 게 아니라?'
형민은 현기가 놓고 간 CD를 조심스럽게 뜯어보았다. 케이스 안 쪽에 파나색
메모지와 함께 곱게 접혀 있는 수표 한 장이 보였다. 형민은 수표를 펼쳐보고는
그 곳에 적힌 액수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적혀있는 현기의 메모 편지...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야, 하지만 몇몇 사람들에게는 그게 인생에서 무척
중요한 부분이 될 수도 있지. 나역시 넉넉한건 아니지만..
지금 형에게 꼭 필요할 것 같아서... 내가 할수 있는 한 돈을 마련해서 넣어놨어.
주제 넘는 짓이라 생각되지만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줘... 한가지 아쉬운건...
일년 전에 내게 이정도의 능력이라도 있었으면...
형이 하정이 누나와 헤어지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야..
어쨌거나... 진실과 정의를 사랑하는 형이 다시 예전처럼 용기를 되찾아 넓은
꿈을 펼쳤으면 해. 이게 내 바람이과 또...]
형민은 아롱거리는 눈물 때문에 현기가 쓴 메모 편지를 끝까지 읽지 못했다.
감동의 눈물이 번져 앞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 자신을 이토록 생각해주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는 것, 참으로 오랜만에 살아가는 기쁨을 맛본 소중한 경험이기도 했다.
*************************
형민이 예전에 살던 달동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일년만에 와보는 추억의 장소는 아파트 재개발이 한창이라 그런지 여기저기
흉물스럽게 아파트 구조물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렇게 높아 보이기만 했던
지저분한 언덕도, 썩은 시궁창의 쾌쾌한 냄새도 이제는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완공을 기다리는 철근의 을씨년스러운 군상과 시멘트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사방에 가득 퍼져있을 뿐이었다. 눤이 하얗다는 것이 어쩌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부터 함박눈으로 바뀐 눈은 그립지만 낯 설은 형민의 동네를
포근히 감싸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데군데 말 없이 서있는 가로등은 변함 없이 밤을 밝히고 있었다. 형민은 기억을
애써 더듬으며 자신이 살던 집터를 간신히 찾았다. 그곳 역시 아파트가 들어서려는지
언뜻 보면 거북스럽기까지 한 구조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형민은 주머니에서 일년 전 하정에게 미처 전해주지 못한 조그만한 네모난 상자를
꺼내 들었다. 그후로도 볓 번이고 쓰다듬었을 뜨지 않은 포장지는 시간의 흐름을
말해 ㅈ듯 무척이나 낡아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쳐다보는 형민의 얼굴은
일년전과 마찬가지로 온화하고 행복한 모습이었다. 비록 오랫동안 살았던 정든
집은 없어지고 동네도 몰라보게 바뀌어씨만 선물을 손에 쥐고 있는 형민은
일년 전 바로 그 날밤과 똑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가지, 그리워 목이 메는 단 한사람, 하정이가 곁에 없다는 사실만이 다를뿐...
형민은 자기 집 창문 밖 골목을 밤이 되면 묵묵하게 밝혀주던 바로 그 가로등에
기대고는 담배가 한대를 피워 물었다. 몽금몽글 피어오르는 알싸한 담배 연기가
바람 따라 흩날리는 눈발과 어우러져 형민의 눈가를 어지럽혔다.
"형민... 오빠?"
바람 소리에 섞여 어디선가 들려오는 하정의 목소리... 잘못 들은 것일까...
그러나 형민의 귀에는 분명 그렇게 들려왔다. 들고 있던 담배를 힘없이 떨어뜨린
형민은 어두운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아무도 없을, 분명 자신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던 바로 그 자리에 그녀가 와 있었다. 일년전과 똑같은 얼굴과 옷차림새를
하고 여전히 발그레한 표정으로 자신의 뒤에 다소곳이 서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듯한 벅찬 감정이 형민의 등골을 타고 짜르르 전해왔다.
입을 열려고 해도 바짝 마른 입술에서는 타는 목마름만이 길게 소용돌이 쳐
목안으로 들어 갈 뿐이었다.
"오늘은 꼭.... 오빠가 여기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오늘만은... 왠지 오빠가 이곳에
올 거라는 예감에..."
"하... 하정아..."
간신히 말문을 열은 형민은 비틀거리는 다리를 애써 붙잡으며 하정에가 다가갔다.
다섯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가 왜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는지..
일년이란 세월이 그리도 멀게 만든 것인지... 형민의 입 속에서는 수많은 궁금증과
해 주고 싶은 말들로 넘쳐났지만 그저 그녀를 꼭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하정은 가녀린 몸을 파르르 떨며 아무 말도 하려 하지 않았다. 흐느끼는 어깨에
살포시 얼굴을 들이대고 그녀의 향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예전과 같은 포근한
체취가 형민의 코끝에 아련하게 전해졌다. 둘은 상처 입은 사슴처럼 그렇게
아픔을 댈래주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때 어디선가 낯 설은 남자의 흥분된 목소리가 둘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형민은 의아하게, 하정은 놀란 표정으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갈색 무스탕에 금테 선글라스를 낀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검은 장갑을 매만지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서있었다.
"사... 상규씨..."
하정은 토해내듯 중얼거리며 무의식적으로 형민의 등쥐로 숨었고 상규는 기르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을 씰룩이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더러운 것,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형민의 머리 속에 문득 드는 생각하나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수긍하게 했다.
"혹시... 당신은....?"
"그래, 내일이면 네 놈 뒤에 있는 저 여자의 남편이 될 사람이지."
하정은 눈물로 퉁퉁 불은 얼굴을 몹시도 떨며 상규와 형민을 번갈아 보았다.
도대체 왜... 형민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 상황들이 믿어지지 않았다.
헤아릴 수 없는 생각들이 머리 속에 교차될 때 상규의 주먹이 형민에게 날아들었다.
피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상규의 손놀림이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그가 하는 대로 자신의 몸을 맡기고 싶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정을 위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탓도 있었다.
보기보다 강한 상규의 주먹에 형민은 균형을 잃고 뒤로 물러나며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건물 주위에 쌓여있던 철근과 나무 판자들이 형민의 모에 의해 요라한
굉음을 내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하정은 처음에 너무 놀라 몸만 바르르 떨다가
이내 형민에게 달려가 일으켜 세우고는 상규를 쳐다 보았다.
"사... 상규씨... 사실..."
"시끄러워! 한국에 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자시 한 눈을 판 사이에 저 놈을 만나?"
상규는 우악스럽게 하정의 옷깃을 잡고 힘차게 뒤로 밀어버렸다.
여기저기 널려있던 건축자재들 속으로 나뒹군 하정은 못비도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상규는 그런 것에는 전혀 아랑곳없이 형민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너 같이 하찮은 놈이 감히 어딜!"
"당신은 하정을 사랑하지 않아. 하정의 부유한 집안을 동경하는 것뿐이지...
하지만 난..."
"이 자식이! 죽고 싶지 않으면 다신 하정이 앞에 나타나지 말아! 알았어?"
"......."
형민은 입술을 질끈 깨무고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힘이 없어서 혹은 상규의
주먹이 무서워 그런 것은 아니었다. 힐끔 바라본 하정의 너무나도 슬픈 눈망울이
형민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조선시대에나 있어야 할 신분의 차이를
피부로 느끼면서...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눈을 부라리던 상규는 소리가 날 정도로 이빨을
'부드득'갈더니 형민의 멱살을 힘껏 놓아버렸따. 반동으로 뒤로 넘어진 형민은
비틀거리며 아주 천천히 바닥에서 일어났다. 아주 짧은 순간, 상규를 때려눕히고
하정과 함께 멀리 도망가 현기가 준 돈으로 아무도 모르게 평생 숨어살고 싶은
생각도 들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가 하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이 자리를 떠나는 것뿐이었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형민의 차가운 양 볼을 적실 때쯤 짓다만 건물 안쪽에
서있던 하정의 슬픈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형민은 하정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뒤로 돌아, 애써 외면한 채 앞으로만 거으며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냈다. 상규가 뭐라고 고참치는 소리도
이미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울고 있을 하정의
애처로운 눈망을이 그의 가슴을 깊이 적시고 잇엇다.
"왜 저런 놈을 사랑하는거야? 나는 왜 안 되는 거냐구! 우린 이미 집안끼리 약속한
사이란 말이야!"
언덕을 내려올 때쯤 형민의 귀에 들려온 상규의 거친 목소리와 연이어 들려오는
높은 파열음... 아마도 사정은 상규의 우악스러운 주먹에 노예가 된 듯 싶었다.
다시 달려 올라가 상규를 흠씬 두들겨 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지만 지금의
그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고즈넉한 재개발지역의 구조물이 모두 무너지는 듯한 시끄러운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이 찢어지는 듯한 낮은 소리였다가 이내 온
천지가 진동할 정도의 거세게 귓가를 때려왔다.
"혹시?"
형민은 내려오던 발걸음을 멈추고 하정과 상규가 다투고 있을 건물로
뛰어올라갔다. 멀리 보이는 매캐한 먼지와 급하게 반대쪽 언덕으로 뛰어 내려가는
상규의 뒷모습이 보였다. 형민은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를 손으로 가리며 상규가
뛰어간 쪽으로 따라 가려했다. 그러나 나지막이 들리는 하정의 신음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형민은 뛰던 발걸음을 급히 멈추고 어두운 건물 안을 들여다 보았다.
조금 전까지 높게 쌓여있던 철근과 나무판자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그 사이에서 하정의 여린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뽀얀 먼지 사이를 헤치고
다가가 억지로 눈을 비비며 바라보니 건물 한쪽 천장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하정아!"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상규란 파렴치 놈은 하정을 사정없이 때리고 몰아
부쳤을 테고 그 바람에 건축 자재들이 쓰러지며 짓다만 건물 한쪽이 함께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상규란 놈은 지은 죄가 무서워 하정을 두고 엉겁결에 도망을
친 것을 테고... 형민은 분노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것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자기 애인을 내팽개치고 도망간 상규의 치졸한 행동보다도 눈앞에 사랑을 두고
지ㅕ주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도 저주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형민은 간혈적으로 들리는 신음소리를 찾아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 한쪽 구석, 어두운 곳에 하정의 한얀 손이 보였다. 그토록 가녀린 손이 두꺼운
나무 판자 두개와 날카로운 철근과 흙더미 속에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형민은 정신 없이 그쪽으로 뛰어가 살펴보았다. 다행히 하정이가 깔린 곳은
사람 한 명 정도 들어갈 틈이 있는 곳이라 그리 많이 다치지는 않은 듯 싶엇다.
"하... 하정아.. 괘.. 괜찮아?"
"오... 오빠?"
"응, 하정아, 어째서 이런..."
"다시 와 줬구나. 고... 고마워..."
"바보, 지금 그런 얘기 할 때야?"
하정을 짓누르고 있는 나무판자는 잘하면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형민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지렛대 역할을 할 도구가 있나 살펴보았다.
그때 천장에서 먼지가 풀썩이는가 싶더니 시멘트 조각들이 자신과 하정의 옆에
조금씩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조그 전 천장이 무너진 충격으로 건물 자체가 차츰
붕괴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하정을 덮친 나무판자와 그 위에 있는 흙더미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하정의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허... 헉.."
너무도 짧은 순간이었는데 하정의 호흡은 거칠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러 갔다가는 모든 게 끝장 날 것 같았다. 바로 이 순간
자신이 하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다려, 내가..."
형민은 하정의 옆, 작은 공간에 자신의 몸을 억지로 집어넣었다. 어깨와 등으로
무너지는 나무판자를 지탱하기 우해서였다. 하정은 형민의 행동을 말리려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형민이 하정의 옆으로 기어 들어와 힘을 주자 그동안
하정을 누리고 있던 나무판자가 조금 들리며 약간의 공간이 생겼다.
"이러다가는 오빠까지 위험해... 어서 나가서..."
"아무... 말도... 하지마... 또 다시 너를 혼자 놔두고 싶지 않아."
형민은 하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깊숙히 몸을 집어넣고는 두 팔을 지렛대
삼아 나무 판자를 들어올렸다. 형민의 팔이 꺽이는 소리인지 나무판자가 부셔지는
소리인지 가늠하기 힘든 기분 나쁜 파열음이 건물 안에 울려 퍼졌다.
"어... 어서 빠져나가."
"오... 오빠..."
하정은 서둘러 몸을 빼내 먼저 나가서 형민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몸을 조금 움직이자 형민이 지탱하고 있던 쪽으로 무게가 더욱 실려 자신이 몸을
빼냈다가는 그대로 무너져 파묻혀 버릴 것 같았다.
"아... 안 돼. 내가 나가면 오빠가..."
"괜찮아. 버틸 수 잇어. 어서 넌 먼저 빠져나가."
"싫어! 안 돼!"
하정은 헐떨이는 숨을 몰아쉬며 세게 도리질을 했다. 그 바람에 고여 있던 눈물이
형민의 얼굴에 튀었다. 이런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겠찌만 왠지 형민은 너무도
따스하고 푸근한 감촉이라 느껴졌다.
"난 죽지 않아. 어서 나가라구."
"흑. 흑. 흑... 안 돼... 나 때문에 오빠가..."
형민은 온 몸을 떨며 울고 있는 하정의 슬픈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싶엇다. 그러나
형민의 두 손은 무게를 버티고 있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 하얀 뺨을
한번만이라도 만질 수만 있다면...
"어... 어서 나가... 이러다간... 둘 다... 죽는다고..."
"안 돼. 어떻게 오빠만 두고..."
잠시 둘 사이에는 침묵만이 짙게 깔렸다. 잠시 후 형민의 자조 섞인 음성이
어두운 건물 안에 메아리쳤다.
"현기... 자식이 오늘 나를 감동시켰어. 너를 데리고 도망이라도 가 숨어살라는
뜻인지... 선물한 CD 속에 돈을 넣어놨더군. 그걸 보고 많은 생각을 했어.
일년 동안 너를 혼자 놔 둔 내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고 바보 같다는...
너의 약혼자가 사람들을 시켜 불을 지른것도 네가 그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된 것도
어찌 보면 네가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이라 여기며 애써 참고 견뎌왔던 건데..."
힘이 다해 가는 지 형민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정은 그런 형민을
바라보며 자신도 몸을 일으켜 나무 판자를 함께 받히기 시작했다.
"내가 일년동안 오빠에게 연락하지 않은 건... 부모님의 반대도 약혼자의 집요한
성격 때문도 아니었어. 그토록 사랑한다면서 연락조차하지 않은 오빠의
무책임함에 실망을 했기 때문이야. 돌이켜보면 그런 나의 생각이 너무도 어리고
바보 같았어."
하정은 입술을 굳게 깨물며 눈물을 흘렸다. 형민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그러자 셔츠 위쪽 주머니 속에 있던 네모난 상자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형민은 머리를 숙여 입으로 그 상자를 집어 포장지를 물어뜯었다.
"오빠... 뭐... 해?"
형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포장지를 뜯기만 했다. 마지막 힘을 모두
거기에 쏟으려하는 듯... 몇번이고 실수 후에 뜯어진 포장지 속에는 조그마한
반지 케이스가 있었다. 형민은 입으로 뚜껑을 열어 반지를 보여 주며 말했다.
"작년 오늘... 네게 주려던 결혼 기념 반지야... 혼인 신고를 하고나서...
깜짝 놀라게 할 선물이었는데... 비록 도금이 된 구리반지지만...
내 마음의 보석을 담았다고 말해주려고 했는데..."
"오... 빠..."
하정은 눈앞에 있는 반지를 보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끼니조차 잇기 힘들었을
그 당시 형민의 처지를 생각하면 분명 몇 달 동안이나 돈을 아끼고 모았을 것이다.
반지를 바라보는 형민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잇었다.
"사실... 내일 네가 결혼을 하고 나면... 난,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어... 이런 얘기를
지금 한다는 것조차 우스운 얘기일지 몰라도..."
"그... 그만..."
하정은 감았던 눈을 크게 뜨고 형민을 쳐다 보았다. 동시에 둘의 위에 있던 나무
판자가 더 한층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어서 나가... 어서... 제발 부탁이야."
형민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애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정은 더욱
세게 고개를 젖더니 땀에 젖은 형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크게 얘기했다.
"형민 오빠! 지금도 나를 사랑하는 거지! 정말이지? 틀림없지?"
형민은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순간 하정의 입가에 너무도 아름다운 미소가 번졌다.
"어차피 잘 된 일인지도 몰라. 그동안 괴로움을 생각하면 이것이 축복일지도...
여기서 나 혼자 살아 나가고 싶지 않아. 둘이 함께 할 수 없다면...
난... 차라리 환생을 믿고 싶어."
"무... 무슨 소리야? 하... 하정아..."
하정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녀는 땅을 짚고 버티고 있던 한쪽 손으 뻗어 형민의
목을 감싸 안고는 자신의 입술을 형민의 입숙에 갖다 댔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땅릉 짚고 있던 평민의 손을 천천히 잡아 당겨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게 했다.
둘을 짓누르던 나무판자와 흙더미가 금방이라도 덮칠 듯 위태로웟다.
건물 곳곳에서는 시멘트 조각들이 흩날리는 눈처럼 '후두둑'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당황하던 형민도 하정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형민은 마지막 순간,
단 한번 만이라도 하정의 몸을 꼭 껴안고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반지를
끼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형미의 두 손이 땅에서 떨어져 하정의 어깨와 얼굴을 감쌌다.
잠시 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는 건물의 잔해 속에 둘의 아름다운 사랑은
묻혀지기 시작했다. 진한 입맞춤과 달콤한 기억 그리고 어둠 속에 빛나는
억만금 보다도 소중한 실 반지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를 알아요. 난 약하지만 그대만 곁에 있어준다면
모짐 바람과 험한 세상도 이제 나에겐 아무것도 아님을....
나를 믿어요. 날 믿어줘요 이렇게 곁에 있어준다면
나의 하루는 그대 있음에 슬픈 외로움은 사라진다고....
널 위해서.......... 니 앞에서.......
죽어도 나는 세상 앞에 쓰러지지 않을 테야.......
세월가도....... 지쳐 가도......
그댄 내 품에 잠드는 나만의 그대로 forever in my arms
그대..... 다른 사람처럼 수 많은 날 지나가면 늙어 가겠지만
알아..... 나의 눈엔 언제나 지금 같을 거라고......]
꼭 감싸 안은 두 연인의 귓가에는 결혼식의 축가처럼, 너무도 아프지만 소중한
그 노래가 메아리 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