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 지식 총서 500호' 를 출간한 출판사 대표를 만난다. 지은이 500명, 500가지 지식이 주는 이미지는 무거웠다. 크고 강인한 지식인을 마음에 그리며 집을 나섰다. 작은 몸집에 모히칸 헤어스타일, 통 좁은 바지, 세련된 카디건, 디자인이 독특한 오렌지 빛 안경과 보기 좋은 턱수염. 눈이 먼저 웃는 세련된 신사가 손을 내민다. 살림 지식 총서 500호에 대한 자랑은 하지 않았다. 어른이 된 아이들이 "나를 키운 첫 순간" 으로 꼽을 수 있는 '감동' 을 주는 책을 만들고 싶어 한다 장래의 꿈도 '책 만드는 사람' 이라는 살림출판사 심만수 대표를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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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story |
초등학교 소월을 처음 알았다. 소에게 풀을 먹이며 큰 소리로 소월의 시를 수없이 읽었다. 결국 시집 한 권을 모두 외웠다. 중2 월탄 박종화의 <삼국지>를 읽었다. 재미있어 멈출 수가 없었다. 학교에 가지 않고 책을 읽었다. 중3 <이방인>을 읽었다. 소설에 푹 빠졌다. 청년기 1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고 김현 평론가에게 칭찬도 들었다. 청년기 2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로 소설가의 꿈을 접고, 출판인의 길로 들어섰다. 글을 쓰겠다는 열망은 접었지만 '문학 정신' 은 단단히 챙겼다. 청년기 3 1989년 살림출판사를 차렸고 지금까지 1천913 종을 냈으며, 살림 지식 총서 500호를 출간했다. 청년기 4 현재이자 미래. '세상의 모든 지식' 을 '세상의 모든 방법'으로 전하려 한다. 특별히 이 땅의 미래인 어린이와 청소년의 마음과 교양을 키우는 일에 깊은 관심을 쏟을 예정이다. 누가 알아주지도, 큰돈을 버는 일도 아닌 출판의 길을 걸어온 심만수(62) 대표의 삶이 궁금했다. 그는 '피투성(被投性, 내던져져 있음)이란 말로 걸어온 길을 정의했다. 피투성은 개인의 삶은 개인의 결정과 상관없이 이미 세계 속으로 던져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철학 용어. 그의 삶을 들여다보니 그는 책을 만드는 운명 속으로 피투된(던져진) 것이 틀림없었다.
피투성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음에도 우리가 이미 세계 속으로 던져져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의 세계 속에 들어선 채로 머물고, 이러한 사실은 불안과 같은 일정한 기분 속에서 뒤늦게 알려진다. 이 점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세계 속으로 피투된 세계-안의-존재인 것이다. 출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변화의 시대, 지식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 |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겠다는 의지로 시작한 '살림 지식 총서'. 문고본을 500호까지 출간한 것은 국내에서 최초의 일이고, 2003년 6월 첫 책 <미국의 좌파와 우파>를 시작으로 이달 발행한 <결혼>까지 11년 동안 달려온 길이다. 또 번역서의 유혹을 뿌리치고 국내 필자들로 이뤄낸 성과다. "많은 언론에서 찬사를 보내주어 고맙긴 하지만,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 이라는 심 대표의 말에서 자부심을 넘어선 사명감이 느껴졌다. "군인이나 노인 같은 독서 소외 계층에 관심이 많아요. 세상의 모든 지식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세상의 모든 방법을 찾아보고 실제로 적용하지요."
스마트폰 사용자를 위한 앱 북, e북, 오디오 북, 어르신을 위한 큰 글자본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책을 만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종이 책이 점점 사라진다는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우리는 종이 책을 보던 세대고 글 중심의 세계에 익숙하지요.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이미지 중심으로 넘어 왔다고 생각해요. 학교에서도 디지털 교과서로 수업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종이 책은 점점 사라지겠지요." 하지만 그는 전달 방식이 변해도 지식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면면히 이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변화의 과정에서 지식을 전하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자 일이라고. |
아이들의 독서가 국가의 미래다 |
마당에 놓인 기찻길에는 진짜 기차가 '칙칙폭폭' 달린다. 널찍한 토끼장에는 토끼들이 놀고, 옛날 대장간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실내 암벽 등반, 목공예 교실, 책 읽어주는 공간까지 작은 테마파크 같다. 어린이를 위한 배려가 느껴지는 이 공간은 심 대표가 운영하는 살림출판사. 어린이를 위한 공간도 심 대표의 아이디어다.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아이들의 미래에 관심과 책임이 크다" 말하는 심 대표는 '교육의 본질은 올바른 책 읽기' 라 단언한다. 하지만 지금 독서 교육의 현실은 안타깝다. 필독 도서 목록을 마련하고 아이들에게 읽히지만, 올바른 독후 활동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
"책은 읽는 데서 끝나면 안 돼요. 토론과 다양한 독후 활동을 통해 그 책을 나만의 양식으로 만드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죠. 그 과정에 생각을 연결하는 힘도 키울 수 있고, 문제 해결 능력도 생기거든요." 그는 많은 말이 오가고 새로운 지향점을 만들어가는 것이 '진보' 라며, 미래의 주역인 아이들이 독서와 토론으로 진정한 진보주의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아이들을 무조선 이끌려고 하는 부모들에게도 따끔한 한마디를 남긴다. "아이들이 읽는 책이 금서만 아니라면 만화책이어도, 학교 공부와 상관이 없어도 아이의 독서를 존중해줘야 해요. 책을 읽는 행위는 무조건 격려하고 칭찬해줘야 합니다."
<삼국지>를 읽느라 학교에 가지 않은 중2 때, 부모는 아들의 행동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단다. 그는 "그때는 먹고사는 것이 힘든 세상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부모님이 학교가라고 내 손에서 책을 뺐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 이라 단언한다. "아이들은 그들만의 감동 코드가 있어요. 그 감동의 순간에 아이들의 마음이 자라고 그 속에 뭔가가 만들어지지요. 부모는 이런 때 슬쩍 거들어주는 존재여야 합니다." |
어린이 교양서의 가이드라인 만들고 싶어 |
아이들을 위해 만든 기찻길. 그는 아이들의 미래를 여는 감동적인 책을 만들고 싶다.
"초등에서 중등, 고등 각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갖춰야 할 교양이 있어요. 많은 책이 있지만 정리해줄 필요를 느꼈어요. 초등 단계부터 시작했고, 초등 교양을 갖추는 가이드라인이 될 책을 만들고 있어요." 국가의 미래인 아이들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또 다른 사명이라고 여겨 시작한 일이다. 1955년 시작한 1차 교육과정부터 6차 교육과정까지 도덕과 국어 교과서에 실린 좋은 글을 모았다. 교과서는 시대마다 아이들에게 좋은 글을 엄선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초등 단계 교양의 완성을 위한 책이지만, 가족 구성원이 세대를 초월하는 감동을 공유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획했어요. 할아버지의 교과서에 실린 글을 아들과 손자가 함께 읽는 그림을 그려본 거지요." 가족 사이에 생긴 공통분모는 대화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할 것이다. 할아버지의 지혜와 아버지의 현실, 손자의 미래가 만나 토론하고 새로운 지향점을 찾아보는 '작은 광장' 이 집집마다 생겨나길 기대한다. 단절의 시대에 책으로 가정 안에 토론의 장을 열고 싶다는 그의 생각은 이루기 힘든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벌인 모든 일은 그의 꿈에서 시작되었고, 사명감으로 완성됐다. 살림 지식 총서를 낼 때도, 기독 신학 서적을 낼 때도 '해야 할 일을 한다' 는 사명감으로 시작했다고 말하는 심 대표는 "돈을 많이 벌 생각이 우선이었다면 할 수 없었을 것" 이라면서도 "그래도 문고본 한 권이 수십만 부가 팔리는 '대박' 의 순간은 늘 기대한다" 며 크게 웃는다. 책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살리고, 미래의 꿈나무를 키우고, 책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끌어안겠다는 꿈을 꾸며 걸어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림' 의 의미는 무엇일까. 살림은 '한집안을 이루어 살아가는 일' 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일 터. 그가 출판사 이름을 '살림' 이라 지은 이유, 자신을 '꿈을 꾸는 개혁가' '환상주의자' 라 부르는 이유도 알 것 같다. "지식은 진리의 오촌쯤 되려나? 지식이 없어도 사는 데 큰 지장은 없어요. 하지만 지식이 머리와 마음에 들어오면 삶이 자유로워지지요." 그는 많은 사람이 책을 통해 자유로워지기를 다시 꿈꾼다. 지금까지 삶을 돌이켜보면 마음먹은 대로 길이 펼쳐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런저런 원하지 않은 돌부리들이 발에 걸렸고, 그 때문에 방향을 바꾸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다시 공부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며 지금까지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심 대표가 청년들에게 인생 선배로서 따듯한 조언 한 마디를 전한다. "돌부리 때문에 넘어져도 절망하지 마라. 돌부리 때문에 방향을 바꿔야 하는 그 지점이 새로운 꿈이 시작되는 이정표다." 그는 자기만의 꿈을 꾸고, 자신만의 DNA를 가진 어린이가, 청소년이, 청년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물리적 나이와 상관없이 청년의 꿈을 꾸고, 그 길을 걷는 심만수 대표가 '작은 거인' 이라 불리는 이유를 온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미즈내일 | |
첫댓글 아!. 작지만 깊이가 있는 살림 총서... 두세 권 가지고 있는데... 멋지군요. 감사합니다. ^^
가치있는 자신의 길을 우직하니 가는 사람의 모습은 참 아름다워요. 그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