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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도시가스 온압보정기 원문보기 글쓴이: 짱구박사
25년 전의 저질연탄 사건, 그 전말을 파헤친다!
안대희 서울고검장이 새 대법관에 제청되면서 그가 평검사 시절 주도했던 사건 하나가 근래 우리 사회에서 거세게 일기 시작한 ‘도시가스 부당요금 되찾기 운동’(약칭 도․부․되 운동)과 맞물려 갑작스레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른바 ‘저질연탄 사건’이라 통칭되는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젊은 세대들에겐 비록 생소할지 모르나 40대 이상의 중장년층들의 기억에 그 사건은 결코 유쾌하지 않은 어두운 옛 기억의 그림자로 남아있다.
더욱 경악할 사실은 그때 그 ‘저질연탄 사건’을 일으킨 주범들, 즉 삼천리, 대성과 같은 연탄회사들이 그 후 도시가스회사로 탈바꿈해서 현재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도시가스 부당요금 징수 사건을 일으켰다는 데 있다. 재료만 연탄에서 도시가스로 바뀌었을 뿐, 두 사건은 모든 면에서 너무나 똑같다. 가해자도 똑같고, 피해자도 변함없이 대다수 서민들이라는 점에서 똑같고, 폭리를 취하는 방식도, 심지어 사건이 불거지자 적당히 시일을 끌어 사건을 유야무야 덮어버리려는 해결방식까지 똑같다.
실제로 과거 ‘저질연탄 사건’의 경우 그렇게 며칠 동안 떠들썩하게 변죽만 울리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유야무야 끝나버렸다. 더구나 그 사건으로 된서리를 맞은 쪽은 부당폭리를 취한 연탄회사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건을 조사한 검찰이었다. 사건수사를 주도한 안대희 당시 평검사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그때 그 사건의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간판만 연탄회사에서 가스회사로 바꿔 단 그 사건의 주범들은 4반세기가 지난 지금 ‘도․부․되 운동’의 고발과 소송에 맞서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까?
지금 우리가 이 시점에서 25년 전의 옛 사건을 다시 파헤쳐보고자 함은 단순한 호기심의 충족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 다시는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25년 전 커다란 사회적 물의를 빚은 ‘저질연탄 사건’이란 무엇이며, 검찰의 사건 수사가 흐지부지된 배경과 그 결과에 대해 당시 신문 보도기사들을 중심으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온 국민이 경악한 추악한 사건>
때는 1981년 10월 8일 오후. 동아, 중앙, 경향 등(당시 석간) 신문을 받아든 시민들은 격앙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술렁거렸다. 검찰 수사 결과, 서울시내 9개 연탄업체들이 그동안 연탄의 열량을 속여 팔아 부당폭리를 취한 사실과 그중 삼표․삼천리․대성 등 3대 메이커 대표 3명이 구속된 사실이 1면을 비롯한 사회면의 머리기사로 떠들썩하게 보도되었기 때문이었다. 연탄 1개당 20원의 폭리로 그들이 취한 부당이득은 무력 4백억 원에 달했다.
저녁시간에 TV뉴스로 그 소식을 접한 가정주부들은 더더욱 속 끓는 심정을 가누기 어려웠다. 그동안 연탄이 너무 잘 깨진 것도, 연소시간이 자꾸 짧아져 자주 갈아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모두 이 저질연탄 때문이었다니 주부들은 심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언제나 만성 “적자”라고 아우성을 치는 연탄업체들의 엄살에 못 이겨 연탄값을 올려준 것이 바로 두 달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저질연탄을 만들어 한 장에 무려 20원씩이나 폭리를 취해왔다는 사실에 단돈 5원이라도 아껴가며 적자가계부를 적어가던 주부들은 모두 어이없어 말문이 막히는 표정들이었다.
연탄이 지금의 도시가스처럼 생필품이었던 시절이라 시민들의 충격과 분노는 컸고 그만큼 파장도 만만치 않았다. 다음날 조선, 한국 등 조간신문들도 앞 다투어 이 사실을 보도하였고, 관련 공무원들의 수뢰혐의까지 드러나는 등 구체적인 사건 전말이 발표될수록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오죽하면 첫 보도가 나간 다음날인 10월 9일에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김석휘 당시 서울지검장에게 격려전화를 걸고, 민심 수습차 사건현장인 삼천리 연탄공장을 직접 둘러보는 장면까지 연출했을까.
<한 해에 4백억을… >
당시 신문에 보도된 검찰 수사 결과를 토대로 사건 전모를 대략 간추리면 이렇다.
삼천리, 대성을 비롯한 국내 연탄업체들이 석탄에 속칭 ‘버력’이라고 부르는 저질 무급탄(無級炭)을 섞어 연탄 1g당 최소기준열량 4,370칼로리에 훨씬 미달하는 4,200칼로리 전후의 저질연탄을 생산 판매함으로써, 연탄 1개당 20원씩(소매가격 1백53원), 한해 4백억 원씩 부당 이득을 취했다. 당시 동력자원부(지금의 산업자원부 전신)가 인정한 연탄 1개당 이윤은 1원50전이었던 만큼, 무려 10배에 달하는 부당이득을 취한 것이다.
검찰 수사 결과 업체별로는 같은 해 1~7월까지 한정해서 추산할 때 대성연탄과 삼천리연탄이 가장 많은 저질연탄(각각 6천5백만 개와 3천1백만 개)을 만들어 판 것으로 드러났고, 삼표연탄(약 1천4백50만 개)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면 이들 업체들이 어떻게 이처럼 엄청난 연탄 폭리를 취할 수 있었는지 그 실상을 당시 동아일보의 기사(10월 8일자 11면)를 발췌해 살펴보자.
연탄 1g이 갖추어야 할 표준열량은 4천6백칼로리.
현재 고시가격 1백53원도 이 열량에 맞추어 책정된 것
이다. 「저질연탄」으로 단속대상이 되는 것은 4천3백
70칼로리 이하. 표준열량보다 5%오차를 인정해 2백30
칼로리나 단속선을 낮추었는데도 여기에 미달하는 연탄
이 대부분이라는 얘기다.
서울시내 11개 연탄생산업체 가운데 시장점유율 26.5%
인 삼천리연탄, 24.8%인 삼표연탄, 17.5%인 대성연탄
등 대규모업체를 비롯, 9개 업체가 4천3백70칼로리 미
만의 연탄을 생산 공급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회사
들은 실제로 4천2백~4천3백칼로리밖에 안되는 것을 1
백~2백칼로리씩 늘려 서울시청에 품질보고를 허위로
해왔다.
이들이 만드는 연탄이 저질인 것은 값싼 버력(無級炭)
을 혼합하기 때문. 석탄은 특1급(6천5백칼로리), 특2
급, 특3급과 1~9급(3천칼로리)까지 12등급으로 돼 있는
데 버력은 등급이 없는 3천칼로리 미만의 석탄을 말한
다. 버력은 시멘트 제조원료나 화력발전에 사용하든지
또는 버려야 하는 거의 쓸모가 없는 석탄이다.
아울러 각 신문들은 이들 업체가 한해 4백억 원의 폭리를 취했다는 근거로 그 전해인 1980년 한 해 동안 서울시내에서 소비된 연탄이 모두 “20억 개”에 달했다는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했다. 20억 개의 연탄에 개당 20원의 부당이득을 곱하면 4백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가 나오는 것이다. 당시 도시근로자 월평균 가계소득(1981년 3/4분기)이 33만 원이었음을 감안해서 현 시가로 환산한다면 족히 수천억 원은 거뜬히 상회하고도 남을 액수이다.
여기서 우리가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이들 9개 연탄업체 중 가장 많은 저질연탄을 생산한 것으로 드러난 삼천리와 대성 두 업체가 그 뒤 업종을 연탄에서 도시가스로 전환해서, 과거 연탄 열량을 1백~2백칼로리씩 허위로 늘려 보고함으로써 부당이득을 취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도시가스의 부피를 늘리는 수법을 이용, 다른 도시가스회사들과 함께 지금까지 5,700억 원 이상의 부당이득을 취해왔고, 그것도 모자라 중간에서 소비자들의 특별소비세까지 가로채왔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들 업체는 당시 동력자원부가 인정한 연탄 1개당 이윤 1원50전보다 10배 이상에 달하는 개당 20원의 부당이득을, 그것도 후안무치하게 평균 120칼로리 이상의 열량이 부족한 저질연탄을 만들어 파는 대국민 사기행각을 통해 엄청난 폭리를 취한 전력이 있고, 그 후엔 또다시 도시가스 과다 부당요금과 특소세 가로채기 등의 수법을 통해서 국민을 상대로 똑같은 부당폭리, 사기행각의 전과를 대담하게 재범한 것이다. 천인공노할 노릇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드러난 유착비리, 탄력 받은 검찰수사>
당시만 해도 연탄은 지금과 달리 서민들의 생필품이었기 때문에 검찰 수사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더구나 4일 뒤인 10월 12~13일자 석간 및 조간신문들을 통해 관련 공무원들의 유착비리가 드러나고, 동력자원부 석탄국장 윤석구 씨를 비롯해 서울시 연료과장과 석탄공사 영업1과장 등이 업자들로부터 거액을 수뢰하고 열량조작을 묵인한 혐의로 구속된 사실이 보도되면서 시민들의 공분은 걷잡을 수 없이 더욱 커져갔다.
당시 보도된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동력자원부 석탄국장이 수뢰한 액수는 1천9백40만원에 달했고, 나머지 두 사람도 각각 1백95만원과 1백60만원의 뇌물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억대 뇌물이 예사인 요즘의 눈으로 보면 얼마 안 되는 액수 같지만, 그해 9월에 노동부가 조사한 주요노동경제지표에 나타난 5인 이상 사업체의 근로자 평균월급이 15만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의 수뢰액수는 노동자들이 많게는 12년 이상 적게는 1년 이상을 월급 한 푼 쓰지 않고 꼬박 모아야 가능한 액수였다.
덕분에 검찰수사는 시민의 열띤 격려와 여론의 폭넓은 지지 속에 더욱 탄력을 받아 활기를 띨 수 있었다. 사실 검찰수사는 연탄업체들의 이 같은 추악한 비리를 적발해낸 당일부터 언론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저질연탄의 문제가 어쩌다 한번 생긴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고질적인 병폐인데다가, 이를 통해 업체들은 서민들의 불편은 아랑곳없이 자기이익만 꾀하려는, 해도 해도 너무한 “얌체짓”을 계속 일삼아왔기 때문이었다.
조선일보 10월 9일자 7면 기사를 보면, “한해 4百億 삼킨 「低質商魂」이란 ”큰제목 아래 검찰의 수사배경을 짐작케 하는, “檢察서도 「얌체짓」 보다 못해 强權 발동”이란 작은 제목 하나가 눈에 띈다. 그 기사는 검찰이 수사를 착수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검찰은… 저질연탄으로 인한 국민의 불편이 극심해지
고 있는데도 연탄업자와 채탄업자들은 제조원가와 원탄
의 질을 들먹거리며 서로 책임을 전가하기만 할뿐이고,
행정기관은 실효없는 행정제재만을 되풀이하는 등 질개
선이 이루어지지 않자 검찰권을 발동하기에 이른 것이
다.
검찰의 의도는 다분히 전략적이다. 조사를 해보니 연탄
업자들이 먹는 마진이 예상보다 크다는 것을 알게 됐
다. 따라서 검찰은 업자들이 먹는 마진을 줄이고 그 돈
을 연탄질의 개선에 돌린다면 다소의 향상은 가능하리
라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업자들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돈의 일부를 연
탄속에 집어넣자는 속셈이었다. 그렇게 볼 때 검찰이 업
자들을 구속한 것은 하나의 본보기고 엄포라고 느껴진
다.
관련 공무원들의 유착비리로 사건이 수그러들기는커녕 일파만파로 계속 커져나가자 정치권에서도 발 벗고 나서기 시작했다. 10월 14~15일자 신문들을 보면, “저질탄 이득 환수 검토”라는 정부의 대책이 제시된 데 이어, 당시 집권당인 민정당은 저질탄 책임자 엄단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야당들은 국정조사특위를, 당시 제3당인 국민당은 따로 박봉환 동력자원부 장관의 해임안을 제안키로 하는 등 분주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검찰이 연탄업체의 저질연탄을 둘러싼 비리를 발본색원하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무부처인 동력자원부는 행정 감시 소홀과 묵인이라는 비난과 함께 담당부서가 제시한 연탄열량 조사자료마저 ‘신빙성 없다“는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서울시 관련 공무원들 중에는 수사를 피해 아예 잠적해버린 이도 있었다. 당연히 아직 못 캔 비위를 조사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고, 대다수 국민들도 그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저질탄, 장관 책임 아니다!>
그런데 10월 15일부터 이상한 기류가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표면적인 움직임은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이었던 권정달 씨의 발언에서 나왔다. 그는 저질연탄 사건과 관련, 책임자를 엄단하라는 성명을 민정당에서 발표한지 하루만에 “연탄제조의 감독책임은 동자부장관이 아닌 지방장관의 책임”이라며, 자신들이 “14일에 발표한 성명 중 「행정책임자 및 감독자」라는 표현은 동자부장관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라고 발뺌했다. “동자부는 원탄채광 및 공급에 책임이 있는 반면 연탄제조 감독책임은 지방장관에게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서울시장이 그 문책대상이 되어야 할 텐데 그는 서울시장도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어이없게도 그가 문책대상으로 지목한 당사자는 “행정기관의 계장, 과장, 국장”들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다분히 수사를 축소해서 조속히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흘러 10월 19~20일자 신문 보도에는 그간의 검찰수사 발표에 대한 박봉환 동자부장관의 노골적인 반박이 이어졌다. 10월 19일에 열린 국회상공위에서 석탄산업의 현황과 저질탄 개선대책을 보고하는 자리에서였다. 이날 박 장관은 연탄업자들이 저질탄을 생산 유통시켜 부당이득을 취한 액수는 개당 20원이 아니라 1원25전이며, 따라서 “전체 부당이득을 4백억이라고 한 검찰의 발표는 잘못이고 실제 부당이득은 16억”이라고 밝혔다. 그때까지의 검찰수사가 마치 부풀리기 수사라도 되는 것처럼 공공연하게 검찰을 통박하는 언행이었다.
또한 같은 자리에서 박 장관은 검찰의 저질탄 사건 이후 “3천~3천5백칼로리의 저급탄 생산거래가 위축, 전체적으로 올 월동기 석탄생산이 약 4% 감소될 것으로 예상되는데다 연탄공장이 재고의 약 15%를 점하는 저급탄 사용을 중지, 연탄공급이 2% 줄 것으로 보이는 등 연탄수급이 크게 걱정된다”고 언급하면서 “업계의 경화된 분위기를 해소해야 할 것”이라며 오히려 연탄업계를 감싸는 듯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날 있었던 박 장관의 발언 중 가장 백미는 저질연탄 생산과 관련, 그 원인을 업계의 추악한 사익추구보다 “채탄 심부화(採炭 深部化)”라는 석탄산업의 구조적인 문제로 돌렸다는 데에 있었다. 다시 말해 채탄(採炭) 사정의 악화로 탄광을 깊이 파고들어갈수록 원탄(原炭)의 질이 저하되는 것이 저질탄 생산의 근본원인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박 장관이 동아일보(10월 20일자 5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에 관해 발언한 기사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보자.
“업자들이 거래 금지된 1g에 3천칼로리 이하의 무급탄
을 음성적으로 거래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업자들의 부
당폭리를 용납하거나 감싸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국내 석탄산업이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점
이 노출된 것이며 그렇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
부 여론이 과열된 듯 합니다만 문제의 실상은 그리 간단
치가 않다는 것을 직시해 주십시오. 근본적인 원인은 채
탄(採炭)사정의 악화로 원탄(原炭)의 질이 저하된 것입
니다. 매년 탄광(炭鑛)이 25~30m씩 깊어지고 이에 따
라 열량은 50칼로리씩 낮아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지
난 78년 1g에 4천8백36칼로리였던 민영탄(民營炭) 열량
이 올해엔 4천1백95칼로리까지 낮아졌어요.”
물론 박 장관의 이 같은 지적이 일면 합리적으로 들릴 수는 있다. 그러나 백번 양보해서 아무리 그의 지적이 옳다 해도, 그 또한 자신의 입을 빌어 “업자들의 부당폭리를 용납하거나 감싸서는 절대 안 된다”고 발언한 것처럼, 그 문제와 업계의 부당폭리 수사는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날 이후로 모든 신문보도에서는 저질연탄에 관한 기사가 게 눈 감추듯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만일 박 장관의 검찰 반박이 옳다면 적어도 검찰에서는 이에 관한 해명이나 사과가 나와야 했고, 반대로 박 장관이 틀리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반박이 나와야 옳았다. 정부부처간의 불편한 관계를 고려해 검찰에서 반응이 없으면 신문에서라도 어떤 식으로든 문제제기가 나와야 마땅했다. 적어도 그때까지 여론은 분명 검찰수사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고, 연일 정부(특히 동력자원부)와 연탄업계의 비리에 대해 맹공을 퍼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저질연탄 사건은 마치 어떤 일사불란한 통제에 따르기라도 하듯 모든 신문지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검사들에게 경제공부를 시키라”>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사건이 그처럼 순식간에 유야무야 사라지게 된 배경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우선 큰 테두리에서 살펴보자면, 당시 전두환 정권 아래서는 「언론기본법」이라는 악법을 이용해서 정권의 이익과 상반되는 사건의 경우 무자비한 언론통제가 무제한 가능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겠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현실이지만 그때는 분명히 그랬다. 그렇다면 처음엔 대통령으로부터 격려전화까지 받을 정도로 큰 지지(?)를 받았던 이 사건에 대한 수사가 그로부터 불과 10일 남짓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그만 정권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는 것일까? 그것도 누군가의 로비와 압력에 의해서?
당시의 신문 보도자료에 근거해서는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뒤 실제로 그 배경이 무엇이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관련내용들이 국내 유수의 시사잡지들을 통해서 하나 둘씩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2002년 10월에 발간된 「월간중앙」에 정광섭 한계레신문 기자가 “범죄정보 총괄하는 최정예 수사통의 산실: 서울지검 특수1부장”이라는 제하로 기고한 글이다. 다음은 그 기사 중 저질연탄 사건에 관해 다룬 내용 가운데 해당부분만 일부 인용한 것이다.
(초기에) 검찰수사가 이렇듯 속 시원하게 진행되면서
언론도 크게 호응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연탄은 서
민들의 생필품이어서, 이를 둘러싼 업자와 공무원의 유
착은 국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당연
히 이때까지 검찰수사는 여론의 지지 속에 순조롭게 진
행됐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도 검찰을 격려하고 사건현장인 삼
천리 연탄공장을 직접 둘러보는 장면을 연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한광업진흥공사 이사장이던 이규광 씨
가 대통령을 만나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전 대통
령의 처삼촌으로 석탄업자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이
씨는 대통령을 만나 “(뇌물 수뢰혐의로 구속된) 윤 국장
만큼 청렴한 공무원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동자부장관이던 박봉환 씨도 “우리나라는 탄질 자
체가 낮은데 이를 전혀 모르는 검찰이 무식하게 수사했
다”고 공세를 취했다.
전 대통령의 태도도 급변했다. 느닷없이 “검사들에게
경제공부를 시키라”고 지시하는가 하면 급기야 12월에
는 검찰수뇌부에 대한 문책성 인사를 단행했다. 당시 검
찰총장이던 허형구 씨가 경질됐고, 서울지검장이던 김
석휘 씨는 서울고검장으로 ‘좌천성 영전’됐으며, 수사
를 지휘한 임상현 특수1부장은 서울고검으로 좌천됐
다. 이뿐만이 아니다. 당시 정권은 문책인사를 단행하면
서 특수1부장을 임명하지 않았다. 검찰역사에서 유례
가 없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검찰은 청와대의 ‘하명(下
命)’이 없는 한 경제부처 공무원들의 비리는 보고도 못
본 체 해야 했다.
위 기사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당시 대한광업진흥공사 이사장의 직책을 맡고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삼촌 이규광 씨다. 전두환 씨 일가의 비리는 대한민국의 삼척동자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인 만큼, 우리는 당시 이규광 씨가 맡고 있던 직책이 저질연탄 사건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직책이라는 점에서, 석탄 및 연탄업체들과 그와의 유착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박봉환 당시 동자부 장관의 경우엔 검찰수사와 관련하여 전 대통령에게 간절히 읍소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렇다면 검찰과 언론과 국민의 뭇매 속에 전전긍긍하던 삼천리와 대성을 비롯한 연탄업체들은 그 뒤에서 대체 누구와 무슨 짓을 어떻게 벌였기에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살아남은 것일까? 한 가지 확실한 건, 권력의 비호가 없었다면 도무지 가능하지 않았을 일임에 틀림없었다는 것이다.
<검찰에 휘몰아친 태풍인사>
어쨌든 서슬푸른 기세로 국내 굴지의 연탄업체들을 벌벌 떨게 했던 검찰수사는 “국내 연탄업계를 다 망하게 한다”는 경제 논리에 밀려 더 이상 확대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한달 보름여의 세월이 흘러 저질연탄 사건이 세간의 관심에서 점차 흐릿해져갈 무렵인 12월 15일, 검찰은 “무식한 수사”를 용감하게 저지른 대가로 검찰 30년 사상 최대의 충격이라는 문책성 인사를 당하며 일대 변혁을 맞아야 했다.
당시의 검찰인사는 취임한지 1년도 안 된 허형구 검찰총장조차 자신의 거취를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 임시국무회의를 통해서 느닷없이 결정된, 말 그대로 “전격 경질”이었다. 게다가 후속인사의 폭도 최대였다. 고시 2기인 허형구 총장 후임으로 고시 8기에서 새 총장이 나왔으니 2기에서 8기로 완전한 물갈이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이처럼 보기 드문 대폭 인사를 두고 그 배경에 많은 관심이 쏠렸지만, 당시 신문기사들은 검찰개혁 운운하는 판에 박힌 말들로 온통 지면을 도배할 뿐 정작 그 배경에 대해서는 자세하고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다만 허형구 총장의 경질사유와 관련해서 여러 사건들을 언급하는 가운데 모든 신문이 저질연탄 사건을 빠짐없이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연관성을 짐작할 뿐이다. 여기서 잠깐 그해 12월 17일자 조선, 동아, 중앙의 3대 일간지에 게재된 기사 중 연관 대목만을 발췌해서 그 행간(行間)의 의미를 음미해보도록 하자.
먼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각각 3면에 게재된 분석 기사를 통해 검찰인사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암시하고 있다.
허 총장의 취임직후 있었던 사학부조리 수사, 정인영
씨 구속사건 등이 후유증을 낳았고, 최근에 있었던 저질
연탄 사건은 정부기관간의 불협화음을 초래하기도 했었
다. 당시 저질연탄사건은 소비자들로부터는 크게 환영
을 받았으나 석탄자원의 수급사정을 고려하지 않았다
는 점에서 정부 내부의 강한 반발이 제기됐었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축적이 되어 허 총장은 검찰이
『대통령의 통치권행사의 「칼날」이면서도 그 역할에
미흡했다』는 판정을 받고 물러난 게 아닌가 여겨진다.
(조선일보, 3면)
이번 인사는 종래의 일면적 부분적 사건수사에서 벗어
나 검찰이 국가정책적 차원에서 형사사법을 전면적 종
합적으로 다루어 나가도록 하는 정부고위층의 의지의
반영으로 풀이되고 있다.
지난 3월 허형구 전임검찰총장이 취임한 이래 검찰은
현대양행 정인영 사장 구속과 선인학원 대표 백인엽 씨
구속 등 사학비리수사, 저질연탄 수사, 여대생 박상은
양 피살사건 수사지휘 등 일련의 사건수사에서 관계부
처와 적지 않은 불협화음을 빚어왔고 이것이 이번 검찰
총장 전격경질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다는 것.
(동아일보, 3면)
두 신문기사가 저질연탄 사건을 많은 사건 속의 하나로 끼워 넣어 그 인사배경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것과 달리, 중앙일보는 그나마 11면의 자체 분석 기사에서 가장 작은 소제목 중 하나로 “「저질탄 수사 인책(引責)」 두드러져”라는 글귀를 뽑아 그 연관성을 직접 언급한 것이 눈에 띈다. 비록 관련기사는 4줄에 그친 짧은 내용이었지만 그 기사는 분명히
“저질연탄 사건을 맡았던 임상현 서울지검특수부장, 김
유휴 서울지검 1차장 등이 모두 전보발령 되어 이에 대
한 문책이 두드러진 것도 특징”
이라고 함으로써 이 사건이 검찰 대폭인사의 주요 배경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사건수사의 주역, 아직도 검찰에 몸담아>
이처럼 저질연탄 사건수사는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그 후유증으로 사상 초유의 태풍인사를 검찰에 몰고 왔다.
그렇다면 검찰 내부에서 이 사건수사를 처음으로 기획한 검사는 과연 누구였을까?
「신동아」 2003년 12월호의 ‘인물탐구’란을 보면 그 답이 나와 있다. 「신동아」가 그해 12월호에서 선정한 ‘인물탐구’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2003년 불법대선자금 수사를 지휘하고 있던 안대희 당시 대검중수부장이었다. 안대희 중수부장의 심층취재를 담당한 조성식 기자는 그 기사에서 저질연탄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실감나게 써내려갔다.
초년병인 안 검사는 특수1부에 가자마자 대형사고를 터
뜨렸다. 유명한 저질연탄 사건이 그것이다. 처음엔 안
검사 혼자 맡아 했는데, 사건이 점차 커지면서 특수1부
검사 전원이 투입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특수1부장은
임상현(고시 사법과 16회) 변호사였고 뒷날 국민의 정
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낸 최경원(사시 8회) 변호사와 안
검사의 사시 한 기수 선배인 박주선(사시 16회) 의원이
각각 수석과 차석이었다.(중략)
여론의 지지를 받았던 이 수사는 그러나 “국내 연탄업
계를 다 망하게 한다”는 경제논리에 밀려 끝이 좋지 못
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동력자원부 장관이 전 대통령
에게 읍소한 결과라는 설도 있고, 전 대통령의 처삼촌
인 이규광 당시 대한광업진흥공사 이사장의 로비가 작
용한 결과라는 소문도 있다.(중략)
어쨌든 이 수사를 지휘한 검찰 간부들은 “경제를 망치
는 수사를 했다”는 이유로 화를 입었다. 임상현 특수1부
장은 부임한지 7개월 만에 서울고검으로 좌천되는 불운
을 겪었다. 김유휴 서울지검 차장검사는 부산지검 차장
검사로 밀려났다. 김석휘 서울지검장은 서울고검장으
로 옮겨갔다. 좌천성 영전이었다. 허형구(고시 사법과 2
회) 검찰총장은 취임 1년도 안 돼 옷을 벗어야 했다.
1981년 12월의 일이었다.
이어지는 다음 글에서 당시 특수1부장이었던 임상현 변호사는 사건수사 과정과 함께 오랫동안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회한어린 증언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연탄사건 수사는 안대희 검사가 기획한 것이다. 처음
엔 사건이 될까 싶어 망설였다. 모든 연탄회사들의 연
탄 품질을 조사해야 하는 등 증거확보 작업이 만만치 않
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 검사가 증거자료를 다 수집해
와 ‘사건 됩니다’ 하고 밀어붙여 수사를 시작했다. 검사
들 모두 일주일 이상씩 밤샘을 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수
사했다. 나중에 경제논리로 수사가 더 이상 확대되지 못
하고 문책인사를 당했는데 지금도 납득이 안 간다. 이
수사가 끝난 후 연탄 질이 좋아진 데다 연탄업계도 망하
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저질연탄 사건 당시 안 검사는 ‘주범’임에도 평검사라는 점이 고려돼 인사조치 대상에서는 제외됐었다”고 한다. “선배들에 대한 문책 인사를 지켜보며 입술을 깨물었던 안 검사는 1982년 프랑스 국립사법학교로 연수를 떠났다.”
그리고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는 서울 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서 신임대법관에 제청된 상태다. 2006년 6월 현재 도시가스 특별소비세 탈루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한데 이어 도시가스 부당요금 반환청구 소송까지 당할 위기에 처한 가스회사들 중엔 과거 저질연탄 사건의 주범들도 버젓이 끼여 있으니, 그들이 이 사실을 알면 자다가도 가슴이 서늘해져 소스라칠 일이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이번엔 꼭 뿌리 뽑기를!>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과거 저질연탄 부당폭리 사건과 현재의 도시가스 부당요금 사건은 가해자와 피해자 및 부당이득의 취득방식까지 닮은 점이 너무도 많다. 그러나 현재의 도시가스 사건은 여기에 특소세 탈루 혐의까지 덧붙여졌으니 그 범죄행각은 과거 저질연탄 사건보다 더 교활하고 대담하다 할 것이다.
‘도/부/되 운동’은 지난 6월 1일을 기해 먼저 전국 33개 도시가스회사 중 (주)삼천리, 대한도시가스, 대구도시가스 등 15개사에 대해 2002~2004년간 총 200여억 원의 도시가스 특별소비세를 탈루한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아울러 현재 서울, 부산, 대구 등 지역별로 가스부피를 표준치로 환산하는 온압보정기를 별도로 설치, 기존 가스계량기와의 차이를 계속 확인하고 있으며, 그 결과를 토대로 7월쯤 주민 1,000명의 명의로 도시가스 부당이득 반환청구 소송도 함께 제기할 예정이다.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은, 과거 저질연탄 사건에서 보듯이 가스회사들 중엔 그런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고서도 온갖 연줄과 로비를 통해 검찰의 수사를 방해하고 유유히 수사망을 빠져나간 전력의 회사들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검찰은 안대희 서울고검장이 몇 년 전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한 것처럼 정치권력으로부터 “진정” 독립해 있으니(「신동아」, 2003년 12월호의 “특종인터뷰” 참조), 분명 그때와 똑같은 전철을 되밟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간절히 원하는 것은, 서민들의 등을 쳐서 부당이득을 획책하는 사악한 무리들을 발본색원해서 그 행각을 하나에서 열까지 만천하에 공개하는 일이다. 그래야만 연탄회사에서 가스회사로 얼굴만 바꾼 채 국민을 상대로 부당이득이라는 똑같은 사기행각을 재범하는 따위의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우리 사회에서 영원히 근절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