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영일시: 1971년
제작사: MBC방송국
출연진: 최불암, 김상순, 조경환, 김호정, 남성훈
'수사반장'은 1984년 10월에 종영됩니다. 종영의 이유로는 '선정성'때문이었지만 5공 정권 하에서 가당찮게도
'범죄없는 세상이 되었는데 이런 프로그램은 필요없다'고 압력을 가해서 종영되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다시 1985년에 수사반장은 부활되지만 예전의 인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1989년 완전히 종료되죠. 그래도
5년이나 끈걸 보니 아주 막장은 아니었나 봅니다.
기억은 안나지만 마지막 회에서 수사반장의 반장이던 최불암씨의 마지막 대사에 이런게 있었답니다.
'빌딩이 높아지면 그림자도 길어진다'
빈부의 격차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누군가 잘살게 된 만큼 더 어려운 사람들이 혼재하는 지금. 위대한
작품의 마지막에 어울리는 경구였던듯 싶네요.
MBC-TV의 주간 단막극 수사반장이 시작될 무렵(72년)에는 전야제라는 절차가 있었다. 주간극 일일극
할 것 없이 새드라마가 시작되면 으레히 전야제라는 것을 가져 선전부터 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나는 그 시간에
나가서 사회자 곽규석(후라이보이)씨가 왜 범죄물을 쓰려고 하느냐고 묻길래 주저없이 대답했었다.
범죄의 세계에는 인생의 단면들이 있지 않느냐며, 난 그 단면들에 대해 작가로서의 욕심이 생긴다고 큰 소리쳤다.
그러나 그후 치안본부에서 제공되는 자료들은 하나같이 범행동기가 단순했다. 아무리 잔인한 엽기적인
사건이라도 동기는 단순한 몰욕 아니면 추하디 추한 치정, 그 두가지 뿐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도 종결도
지극히 간단했다. 이래 가지고는 작품이 안된다. 될 수가 없다. 그래서 머리를 싸매고 범죄의 창조에 달려들었다.
즉 이때부터 난 잔혹한 범법자, 살인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에서 나는 또한 수사를 하는 경찰의
입장에서 수사를 해 나가야만 했다. 그런데 말은 이렇게 쉽지만 어디 그렇게 뜻과 같이 되는 일인가.
여기에다 수사극의 생명인 치밀한 수학적 공식과도 같은 극적구성까지 맞추어 나가자면 작가는 마침내는
탈진하여 완전히 뻗어버려 사지만 버둥거리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일이 이렇게 되다 보니 연출자(허 규 씨)와는 만나면 싸움질(?)뿐이었다. 내 말은 옳고, 네 말이 틀렸다.
이렇게 끝도 한도 없는 수사물 작법과 전형적인 한국적 인물창조론을 가지고 언쟁을 하다보면 작품은
하늘로 뜨기도 하고 땅속으로 꺼져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거듭되는 언쟁 속에서도 횟수는 30여회에
이르러 어느 정도 작품의 틀이 잡혀가자 허 규 씨는 방송가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되고 연출을 넘겼다.
그리하여 그 후 박철, 유홍렬, 이효영, 유길촌, 이연헌으로 이어지는 약2년 반 동안 필자는 악전고투를 하게
되었는데 제일 기억에 남는 상대가 나로서는 마지막에 손잡은 이연헌 씨로 기억된다. 이연헌 씨는 수사반장이
시작될 때 조연출이었는데 그동안 세월은 흘러 이제 당당한 연출자로 거보를 내딛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작품에 쏟는 열정이 대단했으며 따라서 지독히도 까다로웠다. 팔자가 작품을 써주면 마음에
안들 때는 원고뭉치를 까불며 들었다 놓았다 입맛만 짭짭 다시었다. 그리고 필자가 원고를 두고 도망이라도
나오면 그날 저녁으로 집에 쳐 들어와 아예 이불과 요를 깔고 누워 밤새 내게 작품 개작을 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열정이 있기에 그 후에도 그는 오로지 수사반장 하나에만 매달려 장장 5년이라는 장수 프로로 만들어
놓지 않았던가. 20년도 더 넘은 지금 와서 돌이켜 보건대 이것은 좀 무리가 아니었나 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느 장르에서 보다도 기동성(씬 전환)을 요하는 방송극수사물에서 야외촬영이 일체 허용되지 않는 조건이었다.
당시에는 야외촬영이라면 아이모 카메라를 한 대 들고나가 수동으로 16mm 필름으로 찍어 간단히 삽입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이것은 톤(화조)이 튄다고 일체 허락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어쩔 수 없이 부득불 야외촬영 장면을
넣으면 연출들은 고생해서 효과도 없는 이런 억지작업을 왜 시키냐고 화를 내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드라마는 세트 7, 8문으로 한정시켜 이야기를 끌고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보니 씬 전환에 무리가 생기고
대사만 주고받는 무대극 같은 냄새를 면할 길이 없었다. 또 50분이라는 런닝타임의 제한으로 형사 4명의 극중
분담역할을 제대로 해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형사는 이번 편에서는 쉰다는 가정하에 구성을 해나가니
어디엔가 루즈한 구석이 생기게 마련이다. 어쨌든 수사반장은 총 18년간이라는 기록적인 장수를 누리며
장안의 인기를 차지해왔는데 그 원천을 가만히 생각해 볼 때 이 드라마가 단순히 사건의 스토리텔링에
머물지 않고 인간들을 끄집어 내고 인간성을 부각시키는데 작가들과 연출이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하는데
있었다고 본다. 편편이 나갈 때마다 반응은 민감했다. 하루는 영화계의 조감독들이 MBC로 몰려와서 최불암씨를
두들겨 패고 연출이 도망가는 소동을 빚은 적이 있었다. 그날 저녁에는 작가인 우리 집에도 조감독들이 몰려와
작가를 잡아 죽이겠다는 바람에 일시 피했다가 겨우 손이야 발이야 빌며 사과를 하고 술을 한잔 잘 산일이 있었다.
이유는 드라마에서 어느 영화계 조감독을 용의자로 몰아가며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주었다는 주장이었다.
또 어떤 때는 청와대에서 대통령 내외분이 보시다가 저런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가 있느냐며 당장
집어치우라는 엄명이 있어 MBC에 대소동이 벌어졌던 일이 있었으며 그 후에도 순경들의 머리카락이
너무 길다. 당장 잘라라 그리고 어린이 유괴사건은 절대 다루지 말라는 영부인의 분부가 있어 혼난 적도 있었다
. 동네극장과도 같은 이런 간섭을 지금 와서 씹어보니 고맙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여 만감이 교차한다.
김정환 작가
MBC를 통해 방송된 수사반장은 1971년 3월 13일(토)에 첫 전파를 탄 이래 1989년 10월 12일 880회 서울은
비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시추에이션 드라마였다. 처음에는 논픽션 드라마로 출발하여 서울시경
강력계 베터랑 형사 최중락 씨로 부터자료를 얻어 수사반장 역에 최불암 씨, 형사역에 김상순 씨, 조경환 씨,
김호정 씨 등 4명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됐다. 김영애 씨는 여순경 역을 맡게 돼 고정배우로 처음 데뷔하게
되었다. 자료 제공, 촬영협조 및 연기자문 등 경찰서로부터 많은 협조를 받았고, 출연자 중 최불암 씨는
경정으로, 김상순 씨 등 형사 역을 한 배우들은 순경으로 명예경찰직을 부여받는 등 긴밀한 관계 속에
드라마를 제작하였다. 나는 당시 드라마부장이었기 때문에 수사반장의 출발로부터 후임 연출자에게 바통을
넘기는 날까지도 정신없이 지나갔다는 기억밖에 없다. 작가 김정환 선생도 원고 집필에 무진 애를 먹은 걸로
기억이 난다. 요즘 같으면 다수의 작가와 연출자가 팀을 구성해 교대로 제작할 수 있겠지만 당시로선
그럴 여유가 없어서 1명의 PD가 매주 1편 또는 2편씩 말들 수밖에 없었고 이는 실로 벅찬 일이었다.
당시 제작여건은 지금과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열악하였다. VTR 등 기자재도 없었고 거의 생방송에
가까울 정도로 FILM과 스튜디오를 연결해 가며 녹화를 떠서 방송했다. 야외촬영에는 16mm FILM을 이용했고,
빠듯한 제작비로 야외촬영을 한다는 자체도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당시의 범죄사건은 살인, 강, 절도,
사기 사건 등이 대부분이어서 크게 제작비를 투여할 만한 성질의 사건을 찾기가 쉽지도 않았다. 그래도 기억에
남은 사건은 70년대 초반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고재봉 사건을 들 수 있다. 요즘말로 간 큰 남자 사건이라
할 수 있는데, 강원도 일대에서 도끼로 여러 사람을 살해한 엄청나고 대담한 살인사건으로 당시 범인의 대담성과
무자비함으로 인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범인의 간장을 연구하기 위해 보관한 정도였으니. 당시만 해도 스폰서를
붙이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시청률 문제, 스폰서 오너의 구미에 맞느냐의 문제 등 범죄사건이 기업이나 제품에
부정적 이미지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들 조심스러워 했다. 한번은 밀수 사건을 다룬 2부작 특집을 만드는데
헬리콥터가 동원 되고, 제주도 부산 고속도로 등 엄청난 분량의 야와 촬영이 필요했다. 지금처럼 지방촬영이
수월하지도 못했고, 스폰서가 잘 안 붙어서 제작비, 출연자는 물론 연출을 맡은 나도 무척 힘들었다. 오죽하면
유량극단 방송 중에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막을 내린 기억도 있다. 한편 드라마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범행자체뿐만
아니라 범행동기의 연구가 필수적인데, 범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이 이유를 발견하고 연민의 정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를 처벌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은 심한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방송규제를 많이 받던 시절이어서 범죄
장면 등 영상 구성에 있어 오늘날 모래시계 같은 영상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고 자연 작품의 리얼리티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요즘 느끼는 TV방송 드라마는 사극, 현대물, 청소년물을 막론하고 전부 평준화되는 느낌이다.
어느 방송사의 작품인지도 구별 못할 정도로 유사한데 이는 긍정적인 면도 있을 수 있으나 작가나 연출 모두
Easy going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연속극의 경우 좀 더 드라마로서의 긴장감을 갖고
밀도 있게 진행되어야 하는데 너무 한가하고 방만하게 진행 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불필요한 언어의 유희,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상황과 사건, 20~30분물에 수십 명이 등장해서 주연과 조연의 구별이 없는 구성이
어쩌다 한번 봐도 별 낯설지 않은 느낌을 주고 언제고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드라마를 양산하고 있다.
드라마에는 일상적인 진실이 있어야 하고, 공중을 상대로 하는 매체인 만큼 방송의 사회성과 공공성도 고려해야 한다.
시청률과 작품의 완성도는 항상 별개로 생각하는 문제도 있는데 연출자, 작가, 배우의 호흡이 언제나 잘 맞을 수만은
없다. 시청률을 의식해 계속 있기 있는 배우와 작가만을 고집하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우려도 있다.
1960년대 후반 KBS시절 김희창 선생의 탑을 연출했는데 지금껏 최선을 다한 작품이라고 자부한다. 물론
작가와 배우도 최선을 다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시청률을 형편없었다. 당시 상대 방송사인 TBC의 동일 방송시간대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된 것과는 비교가 되었다. 후에 조선일보에 문화면 한 면 전체를 통틀어 선우휘 씨가
탑을 TV드라마의 금자탑이라 격찬한 기억이 난다. 인간사는 냄새가 솔솔 풍기는, 현실 생활이라는 상황에
발붙인 우리들의 이야기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나아가 세계시장 지향적인 프로그램의 제작도 생각해야 하는 단계이다.
허규 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