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위키피디아 영문판 (번역) 크메르의 세계 (문서 최종수정일) 2009-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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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크메르 제국 (앙코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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អាណាចក្រខ្មែរ 크메르 제국 Khmer Empi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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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도 |
Hariharalaya
(802-889)
Yasodharapura
(889-1431)
Kor Ker
(928-944) |
언 어 |
크메르어 |
종 교 |
불교, 힌두교 |
정 체 |
군주제/ 신권정치 |
주요황제 |
- 802-850 |
자야와르만 2세 |
- 889-900 |
야소와르만 1세 |
- 1002-1050 |
수랴와르만 1세 |
- 1113-1150 |
수랴와르만 2세 |
- 1181-1218 |
자야와르만 7세 |
역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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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야와르만 2세가 사일렌드라 왕조의 영향 하에 있던 스리위자야(Srivijaya)로부터 독립 선언. 스스로를 깜부자의 신왕(神王)으로 칭함. |
802년 |
- 최초로 앙코르가 함락됨 |
1352-1357 |
- 두번째로 앙코르가 함락됨 |
1393 |
- 타이의 앙코르 침입 |
1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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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자야와르만 7세 때(1200년경)의 세계지도
크메르제국(Khmer Empire)은 캄보디아에 기반을 둔 동남아시아 최대의 제국이었다. 이 제국은 첸라왕조를 계승한 나라로, 현재의 라오스,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일부까지 지배하거나 조공국으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형성기의 크메르 제국은 문화, 정치, 무역에 있어서 자바(Java)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보다 후대에는 크메르 남부 건너에 있었던 스리위자야(Srivijaya)와 접촉을 가졌다.
현재의 앙코르 문화유적은 이 제국 전성기의 수도로서 크메르 제국이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앙코르 유적은 크메르 제국의 국력과 부(富)가 얼마나 강성한 것이었는지 잘 말해주고 있으며, 다양한 신념체계들이 보호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에는 힌두교와 대승불교가 있었으며, 13세기 스리랑카의 상좌부불교가 전래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오늘날의 위성사진을 보면 앙코르 지역이 현재의 뉴욕보다 넓은 지역으로, 산업화 이전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도시 지역이었다. 깜부자(Kambuja)의 왕조 역사에 있어서 앙코르는 중심적 정착 지역으로, 9세기부터 15세기 사이 크메르 역사의 중심이 되고 있다. 하지만 금석문(비문)을 제외하고는, 깜부자인들 스스로 작성한 것이든 앙코르 유적에서 발견된 것이든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크메르 문명에 대한 현재의 역사적 지식들은 다음과 같은 자료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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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 발굴 : 그 재구성과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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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石柱)와 사원의 석탑에 새겨진 금석문들 : 왕들의 정치, 종교적 행위들을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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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의 벽에 새겨진 부조들 : 군대의 행진, 왕궁의 생활상, 시장의 모습, 사람들의 일상생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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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신이나 상인, 여행자들의 연대기와 보고서.
전통적으로 앙코르의 크메르제국의 역사적 기원은 802년으로 보고 있다. 이해는 자야와르만 2세가 스스로를 “전륜성왕(轉輪聖王)”(짜끄라와르띤[Chakravartin])이라 칭하기 시작한 때이다.
목 차
- 1. 역 사
- 1.1 자야와르만 2세 : 앙코르의 개조
- 1.2 야쇼다라뿌라 : 앙코르의 첫번째 도시
- 1.3 수랴와르만 2세 앙코르 와트
- 1.4 자야와르만 7세 : 앙코르 톰
- 1.5 주달관 : 마지막 번영기
- 1.6 앙코르 제국의 쇠퇴와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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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 사
1.1. 자야와르만 2세 : 앙코르의 개조
자야와르만 2세(Jayavarman II)는 자바(Java)의 사일렌드라(Sailendra) 왕국 궁전에서 왕자 시절을 보냈다. 그가 그곳에서 볼모로 지냈는지 아니면 유학을 했던 것인지 – 혹은 양자 모두였는지 -- 는 아직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한 영향으로 사일렌드라 왕조의 자바 문화가 그를 통해 캄보디아로 유입된다.
이전 첸라 왕조였던 고국으로 귀환한 직후 그는 영향력을 확대해, 일련의 경쟁국들을 차례로 굴복시켜 790년에 “깜부자”(Kambuja)라는 크메르 민족국가를 건설한다. 이어지는 수년간 그는 계속해 영토를 확장했고, 마침내 오늘날 캄보디아의 롤루오(Roluos: 현재의 시엠립 동쪽) 근처에 “하리하랄라야”(Hariharalaya)라는 새 도읍을 건설했다. 그리하여 그는 앙코르의 토대를 닦았는데, 앙코르는 그 도읍에서 서북쪽으로 약 15Km 떨어져 있었다.
802년에 그는 인도의 힌두교적 의례를 통해 스스로를 “전륜성왕”으로 칭하기 시작한다.
[역자주] “전륜성왕”(짜끄라와르띤)이란 전통적으로 인도에서 세속적인 왕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성군의모델을말한다.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그를 방문한 아시따 성인이 “이 왕자가 출가하지 않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출가를 하면 붓다(깨달은이)가 될 것이다”고 예언했다는 이야기는 불교전통에서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후 역사적으로 이러한 이상을실현하려고 한 인도의 왕은 마우리야왕조의 아쇼까 대왕이다(기원전 3세기). 아쇼까왕은 광대한북인도 영토를 통일했으나, 형제들간의 전쟁과 수많은 인명의 살상에 회의를 느껴 병원과 복지시설을 건립하고 학문과 종교를 보호하는 등 성군으로 변신했다. 아마도 자야와르만 7세의 모델이 아쇼까 왕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야와르만 2세는 자신의 권위를 신적인 기반에 확립시켜 경쟁 불가능한 통치권을 확립시키고, 동시에 자바의 왕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자야와르만 2세는 834년에 사망했다.
1.2. 야쇼다라뿌라 : 앙코르의 첫번째 도시
자야와르만 2세의 계승자들은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인드라와르만 1세(Indravarman I : 877-889년)는 별다른 전쟁 없이도 왕국을 확장했고, 무역과 농업을 통해 얻은 부의 축적을 감사하는 의미로 광대한 건설계획을 시작했다.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업적은 쁘레아 꼬(Preah Ko) 사원과 관개수로 건설이다.
그를 계승한 인물은 아들인 야소와르만 1세(Yasivarman I : 889-915년)이다. 야소와르만 1세는 “야소다라뿌라”(Yasodharapura)라는 새로운 도읍을 건설했고, 이것이 바로 앙코르의 첫번째 도시가 되었다. 이 도시의 첫번째 사원은 주변의 앙코르 지역 평원보다 60미터 정도 솟아 올라 있는 바켕 산(Phnom Bakheng)에 건설되었다. 야소와르만 1세 치하 때 폭 1.8Km 길이 7.5Km에 이르는 광대한 저수지 “동 버러이”(The East Baray)도 건설되었다.
[사진] 12세기~13세기에 조성된 바이욘 사원의 회랑에는 참 왕국으로 출정하는 크메르 군대가 조각되어 있다.
10세기 초에 왕국은 분열한다. 자야와르만 4세는 앙코르에서 동북쪽으로 100Km 떨어진 지역에 새로운 도읍 “꼬 께”(Koh Ker)를 건설한다. 그러나 라젠드라와르만 2세(Rajendravarman II : 944-968년)는 다시 야소다라뿌라로 천도하였다. 그는 다시금 이전 왕들의 건설계획을 이어받아 앙코르 지역에 일련의 사원들을 건설한다. 동 버러이 가운데 있는 섬인 “동 메본”(East Mebon)에만 그치치 않고 불교의 절 및 승원들을 건설한다.
950년에 깜부자와 동쪽의 참파 왕국(Champa: 현재의 베트남 중부) 사이에 최초로 전쟁이 발생한다.
968년부터 1001년까지는 라젠드라와르만 2세의 아들인 자야와르만 5세가 통치했다. 그가 다른 형제들을 제압하고 새로운 왕이 된 후 평화가 도래하여, 번영과 문화적 발전이 활짝 꽃피게 된다. 그는 야소다라뿌라 근처에 새로운 수도인 “자예나나가리”(Jayenanagari)를 건설한다. 자야와르만 5세의 궁전에는 철학자와 학자들, 그리고 예술가들도 거주했다. 새로운 사원들도 건설됐는데,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사원은 “번띠어이 스레이”(Banteay Srei)로 앙코르 지역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예술적인 건축물로 꼽히고 있다. 또한 “따 께오”(Ta Keo)는 앙코르 지역에서 전체가 사암으로 건축된 최초의 사원이다.
자야와르만 5세가 죽자 약 10년간에 걸친 권력투쟁이 이어졌다. 불과 수년 사이에 여러 왕들이 바뀌었고, 최종적으로 수랴와르만 1세(Sryavarman I : 1010-1050년)가 등극할 때까지 무력에 의한 왕위찬탈이 이어졌다. 그의 재위기간 동안, 그의 반대파들은 지속적으로 그를 위협했고 무력에 의한 반란도 이어졌다. 수랴와르만 1세는 서부지역에서 현재의 태국 롭부리(Lopburi)까지 영토를 확장했고, 남쪽으로는 끄라 협부까지 진출했다. 수랴와르만 1세치하에서 전대의 동버러이에이어폭 2.2Km 길이 8Km에달하는 저수지 “서버러이”(West Baray)의건설도시작된다.
1.3. 수랴와르만 2세 : 앙코르 와트
11세기는 혼란과 과격한 권력투쟁의 시대였다. 수랴와르만 2세(재위: 1113-1150년)에 이르러서야 왕국이 통일을 이루고 영토도 확장할 수 있었다. 그의 치세에서 앙코르의 가장 큰 사원이자 위쉬누(Vishnu) 신을 모신 앙코르와트가 37년만에 완공될 수 있었다.
수랴와르만 2세는 서쪽으로는 하리뿐자야(Haripunjaya, 하리푼차이: 오늘날의 태국 중부)의 몬족(Mon) 왕국을 정복하고, 그 경계를 바간(Bagan) 왕국 국경까지 밀고나갔다(오늘날의 버마). 또한 남으로는 말레이반도의 그라히(Grahi) 왕국 아래로 진출했다(오늘날 태국의 Nakhon Si Thammarat). 그리고 동으로는 참파의 몇몇 지방과 오늘날 라오스 남부 국경지역의 몇몇 나라들도 정벌했다.
수랴와르만 2세의 생몰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그의 이름을 언급한 마지막 비문은 베트남 지방에 대한 공격을 기록한 것으로 1145년경 제작된 것이다. 그는 1145-1150년 사이의 군사적 정벌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사망 이후 다시 한번 캄부자 왕국은 무력에 의한 권력투쟁이 이어진다. 결국 참파의 공격을 받아, 1177년 떤레 삽 호수에서 벌어진 수군들 간의 전투에서 패해 참파의 지방 봉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1.4. 자야와르만 7세 : 앙코르 톰
[사진] 프랑스에서 제작된 크메르 제국 지도
후대의 왕 자야와르만 7세(재위: 1181-1219년)는 이미 부왕 치하의 왕자 시절부터 군사적 지도자였다. 참 왕국이 앙코르를 정복한 이후 그는 군사력을 결집했고, 결국 1181년에 수도인 야소다라뿌라를 탈환한다. 1181년에 왕위를 물려받은 그는, 동쪽의 이웃나라 참파를 격퇴시켜 그 영토의 상당 부분을 정복할 때까지 이후 22년간 전쟁을 계속한다.
자야와르만 7세는 앙코르의 마지막 위대한 왕으로 기록되는데, 참파와의 전쟁에서 성공적인 승리를 기록한 일 뿐만 아니라, 그 계승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이룩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제국을 통일했고 각종 건설계획들도 그의 치세기간 동안 수행되었다. 그는 “앙코르 톰”(Angkor Thom: 직역하면 “위대한 도시”라는 위미)이란 이름의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대승불교도였던 그는 이 도시의 중앙에 국사(國寺)인 “바이욘[Bayon] 사원”을 건립했는데, 이곳의 탑들에는 관세음보살(Avalokiteshvara-boddhisattva)의 얼굴이 일정한 간격으로 조각되어 있다. 또한 “따 쁘롬”(Ta Prohm), “번띠어이 끄더이”(Banteay Kdei), “네약 삐언”(Neak Pean)과 같이 또 다른 중요한 사원들도 자야와르만 7세 치하에서 건립되었고, “스라 스랑”(Srah Srang)의 저수지도 건설되었다.
한편 제국의 각 도시들을 연결하는 도로망도 건설되었다. 이 도로에는 무역상과 관리들, 그리고 여행자들을 위한 121개의 객관이 설치되었다. 또한 그는 적어도 102개소 이상의 병원을 건립했다고 한다.
1.5. 주달관 : 마지막 번영기
자야와르만 7세 사후, 그의 아들 인드라와르만 2세(Indravarman II : 1219-1243)가 왕위를 계승한다. 부왕과 마찬가지로 불교도였던 그는 부왕 시대에 시작된 몇몇 사원들의 건립을 완공시켰다. 그는 군인으로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1220년, 크메르 제국은 이전에 정복했던 참파의 여러지역에서 철군해야만 했다. 서쪽에서는 태국 민족이 반란을 일으켜 최초의 태국 왕조인 “수코타이”(Sukhothai)를 개국하고, 계속해서 크메르 제국을 압박해왔다. 이후 200년 동안 태국은 깜부자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남아있게 된다.
인드라와르만 2세를 계승한 이는 자야와르만 8세(재위: 1243-1295)이다. 그의 선임자들과 달리 그는 힌두교도였고 불교의 탄압자였다. 그는 제국 내 대부분의 불상을 파괴했다. 고고학자들의 추정으로는 적어도 1만 기 이상의 불상들이었다고 하며, 현재는 극히 일부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또한 불교의 사찰들을 힌두교의 사원으로 전환시켰다.
외부적으로 쿠빌라이 칸이 파견한 장군 사가투(Sagatu)의 군대로 인해 몽골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결국 자야와르만 8세는 중국 전체를 지배하던 강력한 경쟁자와의 갈등을 피해, 조공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자야와르만 8세 시대는 1295년 자신의 사위인 스린드라와르만(Srindravarman: 1295-1309)에게 양위를 하면서 끝나게 된다. 새로운 왕은 상좌부불교(Theravada Buddhism:소승불교)의 신봉자였다. 상좌부불교는 스리랑카로부터 동남아 각지로 전파되어온 것이다.
1296년 8월에 원나라 사신 주달관(周達觀, Zhou Daguan: 1266-1346)이 앙코르에 도착하여, 스린드라와르만 왕의 궁전에서 1297년 7월까지 머물게 된다. 깜부자를 방문한 중국 사신 중 그가 처음이나 마지막은 아니지만, 앙코르에 대해 상세한 보고서를 남겼다는 점에서 그의 행적은 두드러진다. 그의 기록은 오늘날 앙코르 역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여러 대형 사원들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 여기에는 바이욘, 바푸온(Baphuon), 앙코르와트 등에 대한 기록이 나오며, 바이욘 사원의 탑들이 한 때는 금으로 장식괴어 있었음도 알려준다 --- 앙코르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관습 등 가치있는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1.6. 앙코르 제국의 쇠퇴와 멸망
스린드라와르만 이후에 대해서는 역사적 기록이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마지막으로 알려진 금석문은 1327년에 세워진 석주에 새겨진 것이다. 또한 더 이상 대형 사원들도 신축되지 않았다. 역사학자들은 아마도 왕이 상좌부불교를 수용한 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 추정할 따름이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을 “신왕”(deva-raja)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그를 위한 거대한 사원들은 필요가 없어졌고, 단지 이미 존재하는 신들의 가피를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아마도 “신왕” 개념의 철회는 왕실의 권위를 약화시켜 인적 손실을 가져왔을 수도 있다. 치수관리 또한 쇠퇴했는데, 이는 홍수나 가뭄에 의해 수확이 줄어듦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전에 1년 삼모작이 가능했던 시스템은 깜부자 왕국의 번영과 국력에 기여했는데, 곡물수확의 감소는 곧 제국의 역량 약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이었다.
서쪽의 이웃국가인 태국 민족의 수코타이는 앙코르 제국의 헤게모니를 격퇴한 직후 또 다른 태국 민족의 국가인 아유타야(Ayutthaya) 왕국에 1350년에 의해 병합되었다. 1352년 이후 아유타야가 앙코르 제국의 새로운 라이벌로 등장한다. 아유타야는 비록 실패하기는 하지만 수차에 걸쳐 깜부자를 공격한다. 그러나 1431년 너무도 강력한 아유타야의 군대가 앙코르를 정복한다.
잔존한 크메르 왕국의 세력은 현재의 프놈펜 지역인 남부로 새로운 거점을 옮기게 된다. 하지만 앙코르 지역 역시 완전히 소멸한 것이 아니었다. 크메르 왕가의 한 일파가 그곳에 남아있었고, 다른 한 파가 프놈펜에 복수 왕조를 세웠던 것이다. 앙코르의 최종적 멸망은 경제적 --- 그와 더불어 정치적 --- 거점의 이동 때문이었는데, 프놈펜이 메콩 강의 무역 중심지로 부상했기 때문이었다. 소모적인 건설계획과 왕족 간 권력투쟁은 크메르 제국의 종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크메르 제국의 쇠퇴 원인에 대해서는 생태학적 실패와 사회간접자본의 붕괴에서 새로운 해답을 찾을 수도 있다. 위대한 앙코르 유적은 크메르 제국이 무역, 여행, 관개수로로 사용하기 위해 저수지와 운하시스템에 공을 많이 들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운하는 곡물의 생산에도 활용되었다. 인구가 증가하자 물관리 시스템에 압박이 가해졌다. 그들은 물 부족과 홍수 양자 모두에 시달렸다. 이러한 인구를 지탱하기 위해 꿀런(Kullen) 언덕에서 나무를 벌채했고, 새로운 논을 만들기 위해 개간을 해야만 했다. 그 결과 비가 오면 침전물들이 운하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치수체계에 어떤 충격이 가해지면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 된다.(주)
어찌되었든 앙코르 지역이 그 이후에도 존속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존재한다. 바롬 리어찌어 1세(Barom Reachea I : 제위 1566-1576) 시대에 일시적으로 태국으로부터 앙코르를 탈환하여 왕가가 그곳으로 천도를 한 적이 있다.
17세기 경의 비문에는 이들 크메르 잔존 지역에 일본인 이주자들이 들어와 살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에 관한 가장 유명한 기록은 우콘다후 카즈후사(Ukondafu Kazufusa)의 이야기로, 그는 1632년에 크메르 신년을 축하하러 그곳을 방문했었다.
[사진] 일본인 방문자가 그린 앙코르 와트 (1623-1636년경)
소장처 : Shohohan Museum in Mito, Japan
참 고 문 헌
- Michael Freeman, Claude Jacques: Ancient Angkor, Asia Books, ISBN 974-8225-27-5
- Vittorio Roveda: Khmer Mythology, River Books, ISBN 974-8225-37-2
- Bruno Dagens (engl: Ruth Sharman): Angkor - Heart of an Asian Empire, Thames & Hudson, ISBN 0-500-30054-2
- Dawn Rooney: Angkor: Cambodia's Fabulous Khmer Temples, Odyssey Publications, Ltd., ISBN 962-217-727-1
- David Chandler: A History of Cambodia, Westview Press, ISBN 0-8133-3511-6
- Zhou Daguan: The Customs of Cambodia, The Siam Society, ISBN 974-8359-68-9
- Henri Mouhot: Travels in Siam, Cambodia, Laos, and Annam, White Lotus Co, Ltd., ISBN 974-8434-03-6
- Benjamin Walker, Angkor Empire: A History of the Khmer of Cambodia, Signet Press, Calcutta,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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