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Asia Times Online 2010-01-22
캄보디아 총리 집권 25주년 : 훈센의 공과 과
To live and die with Hun Sen
작성 : Paul Vrieze

(프놈펜) --- 캄보디아의 훈 센(Hun Sen) 총리는 최근 집권 25주년을 맞이했다. 1985년 1월 14일 당시의 국회가 최초로 총리로 지명했을 때, 그의 나이는 33세로 세계 최연소 총리였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그는 공산당 지도자에서 선거를 통한 선출직 국가지도자로 변신했고, 내전과 국내외적 격동, 그리고 평화협상과 민주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겪었다. 훈 센 총리 및 집권당인 "캄보디아인민당"(CPP)은 이러한 과정에서 스스로를 안정과 질서를 부여했다고 자평한다.
지난 25년간 까다로운 캄보디아 정치의 운전대를 잡은 채로, 그는 세계에서 11번째로 장기집권하는 국가지도자에 속하게 되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지난 1967년 집권한 부루나이의 술탄을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그외의 9명의 장기집권자 중 5인은 아프리카 국가 지도자들이고, 4인은 중동국가들에 포진해있다.
훈 센 총리는 1월 12일 프놈펜의 "국립사범교육원"(National Institute of Education)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자신의 기나긴 정치역정과 출발을 회고했다.
저는 27세에 [외교부]장관이 되었고, 29세에 부총리, 그리고 33세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
훈 센 총리는 170여만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을 전복시킨 후, 1979년 1월 베트남의 지원을 얻어 수립한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에서 총리로 지명되었다. 그는 자신이 1970년 4월 "크메르루즈"를 포함해 몇몇 반군들이 구성한 "마퀴스"(maquis) 무장투쟁운동에 가담한 일을, 당시 론 놀(Lon Nol) 장군의 쿠테타로 실각해 해외에 망명중이던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국왕의 호소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40년간 저는 모든 종류의 맛을 보았습니다. 저는 내 지휘관이 어떤 방식으로 군대를 지휘하는지 알았고, 그를 위해 어떤 식으로 차를 타야 할지도 알았고, 그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세탁을 해야 할지를 알았습니다. |
훈 센 총리는 이미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직설적 연설어법을 통해 이같이 말했다. 그는 2013년 총선에서도 뛴다는 것을 전제한 채로 자신의 정치적 장래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우리 당(CPP)의 회의는 이미 저를 다음 선거의 총리후보로 내정했습니다. 그리고 ....... 지난 주 찌어 심(Chea Sim) 당의장 역시 제 지도력을 재확인한 상태입니다. |
그리고나서 야당에 대해 초첨을 겨눴다. 그는 청중들에게 자신의 여당이 의석 3분의 2를 획득하며 기록적인 승리를 거둔 2008년 선거를 통한 임기가 아직도 3년 반이나 남았음을 상기시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발 좀 총리 권한을 제한하려 하지 좀 말아요. 지금 나한테 모든 걸 잃을까봐 염려해서 그런 규정을 도입하려는 것 아니오. |
훈센 총리는 1977년 크메르루즈 정권 하에서 지신이 지휘관으로 근무하던 지역을 포함하는 동부구역(Eastern Zone)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자 베트남으로 탈출했다. 이후 1978년 "캄푸치아 구국민족 통일전선"(FNUFNS) 당원이 되면서 그의 정치경력은 시작되었다. "캄푸치아 국국민족통일전선"(FNUFNS)은 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주로 전직 크메르루즈 출신 인사들로 구성됐고, 이들이 크메르루즈 정권 붕괴 후에 투입될 새로운 지도부로서 준비를 했던 것이다.
1978년 크메르루즈가 베트남 영토 내로 침입해 유혈사태를 일으키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1978년 12월 베트남 군대와 FNUFNS는 캄보디아로 진격해 "민주 캄푸치아"(크메르루즈 정권)을 공격했고, 1979년 1월 7일 프놈펜을 함락시켰다. 이후 새로운 정부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을 수립한 FNUFNS는 조직을 재정비했고, 그때 훈 센은 외교부장관으로 취임했다.
생애초기

훈 센의 청년기 혹은 공산당원 초기의 활동을 기억하고 있는 전현직 관료들은, 캄보디아의 정치적, 이념적 변화 속에서 그가 사용하는 수사학적(표현법) 재능과 학습하고 수용한 후, 지도하고 생존하는 능력이 초창기부터 상당히 특출했다고 말한다.
(사진) 젊은 총리 훈 센.
훈 센은 1952년 8월 5일 껌뽕 짜암(Kompong Cham) 도의 삐엄 꺼 스나(Peam Koh Snar)에서 훈 분날(Hun Bunnal)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삐엄 꺼 스나는 메콩 강 제방 근처에 위치하여 주로 담배 농사를 짓는 지역이다. 어린 시절 훈 센 총리의 친구였다는 마을주민 체 노은(Chhe Noeun, 61세) 씨는 놀러나가면 자신보다 더 어린 친구(훈 센)의 이야기를 듣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며, 다음과 같이 전해주었다.
그는 다른 아이들보다 영리한 아동이었죠. 그가 이야기를 하면 그 표현법이 기가 막혔어요. 농삿일할 때도 그는 이야기를 즐겼고, 농담도 아주 잘했습니다. |
체 노은 씨는 훈 센이 16세경에 수도 프놈펜의 파고다(사찰)로 들어가기 위해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훈씨 집안은 1963년경에 베트남 국경에 위치한 메못(Memot) 군으로 이주했고, 1969년경 캄보디아 동부에 대한 미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체 노은 씨는 훈 센이 고향을 떠난 후 1974년경에 크메르루즈 당원이 되어 AK-47 소총을 소지한 채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온 것을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만났다고 한다. 당시 훈 센은 그에게 "오늘 막 도착했다. 하지만 이후 살아있을지 죽을지 모르고 다시 돌아 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캄보디아인민당"(CPP)의 고참 국회의원인 찌엄 유입(Cheam Yeap: 당서열 23위) 의원은 지난주 인터뷰를 하면서, 훈 센 총리가 초창기부터 뛰어난 학습능력과 지도력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찌엄 유입 의원에 따르면, 훈 센이 가진 그러한 능력이 자신의 부하들로부터는 물론이고,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캄보디아에 주둔군을 두었던 베트남으로부터도 신뢰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로 인해 현 CPP의 전신인 "캄푸치아 인민혁명당"(KPRP)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찌엄 유입 의원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저는 1979년에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그는 세계 최연소 외교부장관이었죠. 비록 저보다 나이는 5살 밑이었지만, 일처리는 대단했습니다. 반군운동에 참여했을 때 그는 초등학교 3-4학년 수준의 학력밖에는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무지하게 빨리 배우더군요. 그는 인민들과 소통하길 좋아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경험많은 이들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
젊은 훈 센과 그 권력의 승천기에 대해 보다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 중 한 사람은 바로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 초대 총리를 지낸 뻰 소완(Pen Sovann)이다. 그는 1981년 단 몇개월동안만 총리직을 수행한 후, 체포되어 베트남 정부에 의해 하노이(Hanoi)에서 9년간 가택연금 생활을 했다.
베트남이 나를 체포하라고 했고, 12명의 병사들이 찾아왔다. 훈 센이 나에 대항해 이 병력을 인솔했다. |
뻰 소완 전 총리는 따께우(Takeo) 도의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뻰 소완은 자신이 독자적인 정치적 지도력을 행사하고 베트남이 제안한 많은 정책들을 거부하자 숙청을 당한 것이라 말했다. 그는 훈 센이 1985년 총리에 지명될 수 있었던 것은 "[베트남 당국이] 훈 센을 믿었고, 그가 베트남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뻰 소완 전 총리는 훈 센 총리가 베트남에서 FNUFNS에 가담했을 때부터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약간 망설이면서도 훈 센에 대해 평가하기를, 영리하며 연설을 잘 하지만 권위주의자라고 평가했다.
그는 매우 빨리 배웠고, 얼마가 지나면 그것을 강의하기까지 했다. 그는 뛰어난 인물이다. 그는 매우 지적인 인물이지만, 그에 걸맞는 윤리를 갖고 있진 못하다. |
뻰 소완 전 총리는 훈 센 총리가 정치적으로 장수하는 것에 대해서도 "별로 놀랄 일이 아니"라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훈 센은 권력을 좋아한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길 원한다. 그는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 그를 비판한다면, 그는 자신의 권력을 방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다. |
1991년 <파리평화협정>(Paris Peace Agreements)이 조인되고 "국제연합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UNTAC)가 들어서서 베트남이 후원하던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 정부를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시키는 과정을 진행시켰다. 이때 훈 센은 캄보디아의 대규모 농민 및 교육받지 못한 대중들에 잘 호소할 수 있는 영리한 정치인이란 점을 잘 보여주었다. 그후 10년간 항복자들에 대한 사면조치를 취하면서, 그는 크메르루즈를 조금씩 조금씩 약화시킨 후 최종적인 항복도 받아냈다.

(사진) 라이벌이었던 노로돔 라나릿 왕자에게 훈 센 총리가 넉살좋게 인사를 올리고 있고, 라나릿 왕자가 이를 제지하는 모습이다.
자신이 가진 정치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훈 센은 정적에 대한 폭력사용도 불사했다. 1997년 그는 "유혈 쿠테타"를 통해 정권을 독식했다. 미국 "의회조사국"(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CRS)이 2008년도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훈 센 측이 약 100명을 살해했고 희생자 대부분은 경쟁정당인 "푼신펙당"(FUNCINFEC) 소속 인사들이었다. 이 보고서는 당시의 쿠테타를 "불법적인 권력쟁취"라고 평가했다.
이 군사쿠테타가 발생하기 직전에는 프놈펜에서 야당집회에 대한 "수류탄 투척사건"이 발생하여 어린이를 포함하여 16명의 남녀노소가 사망했고, 1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최근 캄보디아에서 발행되는 영자지 <캄보디아 데일리>(The Cambodia Daily)는 미국 "정보공개법"(Freedom of Information Act: FOIA)에 따라 요청된 자료를 근거로, 이 사건을 조사했던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자료내용을 폭로했다. 당시 이 사건에서 미국인 피해자가 발생하자 FBI가 수사에 참여한 바 있다.
이 보도에 따르면, FBI 요원들은 훈 센 총리의 "경호부대"와 CPP가 이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됐다는 결정적 증거에 접근했지만, 주요 증인들이 증언을 거부하고 FBI 요원들에 대한 위협도 가중되면서 수사가 중단됐다고 한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이 사건과 관련해 10년동안이나 캄보디아에 대한 직접 지원을 중단했다.
미의회 조사국의 보고서는 "훈센 총리 정권의 독재적 경향으로 인해, 외국인투자가 줄어들고 미국-캄보디아 관계도 위축됐다"고 지적했다.
엇갈리는 평가
훈 센 총리의 지난 25년간의 집권기에 대한 평가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견해를 보여준다. 가장 많이들 인정하는 것은 그의 집권기 동안에 캄보디아가 전쟁의 암운에서 벗어나, 보다 개방적이고 성장지향적 경제와 더불어, 안정되고 평화로운 국가로 변신했다는 점이다. 최근에 나온 "월드뱅크"(World Bank: 세계은행)의 자료에 따르면, 세계경제위기의 여파로 작년(2009)에 성장율이 후퇴하기 전까지, 캄보디아는 2002년부터 2008년 사이에 연평균 9.5%씩 성장했다.
하지만 국내 및 국제 인권단체들도 말하고 있듯이, 인권침해, 토지수탈, 정부관료들 사이의 만연한 부정부패, 독립성을 지닌 사법부의 부재, 야당인사들에 대한 위협 역시 훈 센이 집권하는 캄보디아의 일상 중 하나이다. 특히 2009년도에는 훈 센 총리를 비판하는 야당 인사들 및 재야 비판자들에 대한 사법조치가 많이 증가했다.
야당 총재인 삼 랑시(Sam Rainsy) 의원은 현재 프랑스에 머물고 있는데, "베트남과의 국경표식을 뽑아낸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있다. 삼 랑시 의원은 훈 센 총리가 기나긴 집권기를 통해 자신의 이익만 추구했을 뿐 캄보디아의 보통 국민들을 위해선 일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메일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훈 센 총리의 유일한 목표는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권력을 유지하는 것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권력은 모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권력이 의미하는 바는 자기 자신과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는 면책특권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생존이 삶의 목표가 되면 더 이상의 비전을 가질 수는 없다. 그렇기에 능력있는 공무원들과 헌신적인 시민사회, 풍부한 천연자원에도 불구하고, 부정부패와 가난, 그리고 인권침해의 길 외에는 훈 센 정권 하의 캄보디아가 갈 수 있는 곳이라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훈 센이 자신의 정적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은 2가지 뿐이다. 하나는 매수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신체적 공격과 수류탄 공격, 혹은 군사쿠테타나 사법처리를 통해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지난 수십년간 이 지구상에서 이런 유형의 최고지도자가 다스린 나라로서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번영을 구가한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
2003년 <크메르루즈 이후의 캄보디아>(Cambodia After the Khmer Rouge)를 출간했던 에반 고스만(Evan Gottesman)은 훈 센 정권의 지속성에 대해 그 자체로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메일을 통한 답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85년에 캄보디아를 이끌던 동일한 사람이 2010년에도 캄보디아를 이끌고 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훈 센의 최대 치적은 고립된 공산국가였던 캄보디아를 역내의 비공산권 국가들과 경제 정치적 통합을 할 수 있도록 한 점이다.
하지만 그는 사법부 독립, 책임을 지는 군대, 전문성을 가진 공무원사회와 같은 민주주의적 제도를 스스로 기꺼이 갉아먹음으로써 가장 큰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
고스만은 다음의 3가지가 훈 센 권력에서 가장 중심적인 요소라고 말했다.
첫째는 이념적 유연성으로, 이는 그가 1980년대말에 변화되는 상황에 따라 신속하게 교조적 공산주의를 버린 데서 나타난다.
둘째는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경우 정적에 대해 가차없고 무자비하다는 점이다.
셋째는 자신을 지지하기 위한 보호장치를 구축한 점이다. |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앞에서 말한 사법부 독립, 책임을 지는 군대, 전문성을 가진 공무원사회 같은] 이들 보장들이 영원히 권좌에 머물고 싶어하는 지도자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독립된 사법부이나 인권침해에 대한 책임 부재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
고스만은 1980년대 공산정권을 회고하면서, 당시의 많은 관료들이 아직도 정부에 남아 캄보디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캄보디아 정부는 아직도 훈 센을 정점으로 하고 최고위 관료들을 지지해주기 위한 보호장치를 건설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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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삼랑시당) 2008년 총선 이전에 만남을 가졌던 훈 센 총리(좌)와 야당 지도자 삼 랑시 의원(우). |
공과 과
국제적인 정의감시단체인 "글로발 위트니스"(Global Witness)는 2009년 2월에 <국가 판매중>(Country for Sale)이란 보고서를 발행했다. 성장 중인 캄보디아의 석유산업 및 광업을 연구한 이 보고서는 관료들의 부패 네트워크로 인해 국부가 유출되고 있다고 했다. 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캄보디아 정부는 이러한 수백만 달러의 세수를 국민들을 가난으로부터 건져내기보다는, 이웃한 미얀마(버어마)의 선례를 좇을 수도 있다. 미얀마에서는 국가의 천연자원에서 발생하는 수입을 독재정권의 집권층들이 헐벗은 대중들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 |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동남아시아팀의 재니스 빈랜드(Janice Beanland) 씨는 이메일을 통해, 1985년 공산정권 이래로 훈 센 치하의 캄보디아에서 인권을 보호한다는 것은 "너무도 머나먼 길"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책임소재의 결여와 면책의 문화는 [1980년대의] 잔재를 아직도 일정 정도 남겨놓고 있다. 사법개혁은 계획뿐이고, 대다수 캄보디아인들을 위한 법치주의는 아직도 정착하지 못했다. 인권의 보호도 매우 제한적이다.
만일 훈 센 총리가 사법체계를 통한 인권보호를 제도화시키고자 한다면, 정부의 행정조직이 구축될 수 있고,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사법체계가 지속적으로 통합성과 독립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은, 현 정권의 인권침해 제한에 대한 참여의지의 정도를 말해주는 것이다. |
정치분석가인 찌어 완낫(Chea Vannath) 씨는 훈 센 총리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캄보디아에 평화를 회복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경제의 관리능력 결여와 유아 및 산모건강율을 개선하지 못한 것이 그 지도력의 가장 단점이라고 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치적은 캄보디아에 평화를 정착시켰다는 것이고, 그 점은 매우 가치있는 업적이다. 그의 결점은 경제이고, 조금 움직이다 장애물에 걸려 있는 형국이다.... 경제가 더 나아져야만 유아 및 산모건강도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
찌어 완낫 씨는 변화되는 정치적 상황과 체제를 잘 극복하고 적응하는 것과 권력을 타인과 공유할 줄 아는 점, 그리고 자신의 월계관이 불안정해지지 않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는 점 등이 그의 장점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가 아직 건강하다는 것도 축복 중 하나이다. |
1990년대부터 "왕립 프놈펜대학"(RUPP)에서 강의한 역사학자 앙리 로카드(Henri Locard) 씨는, 훈 센 총리의 주요한 능력 중 하나가 캄보디아 대중을 매료시키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훈 센은 수사법(표현력)을 지배하는 데 대가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실과 매혹적인 언어를 구사하여 국민대중을 끌어당긴다. |
로카드 씨는 캄보디아인들이 크메르루즈와 공산정부의 암울한 시대 이후 주어진 "새롭게 획득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면서, "한 가지 예외는 있다. 그것은 바로 그(훈 센)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권력에 도전하는 자유이다...... 이 나라에서는 엄청난 양의 [사전] 자가 검열이 존재하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본 기사를 작성하는 동안 국내외의 여러 시민단체 회원들과 연구자들에게 이 기사에 대해 자문을 구했지만, 훈 센 총리의 지도력에 관해서는 언급을 회피했다. CPP의 찌엄 유입 의원의 경우에도 인권침해 사례와 부장부패의 묵인, 정적에 대한 위협에 관한 기록에 대해 비판을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정부패와 싸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유럽과 미국에도 이런 문제는 있어요. 삼 랑시 의원은 법을 위반했습니다. 기소를 당하자 그가 한 말이 "위반은 자신의 권리"라고 하더군요. |
찌엄 유입 의원은 크메르루즈 정권 이후에 훈 센 총리와 CPP가 국가를 재건했다고도 주장했다.
난 되묻고 싶어요, 그럼 누가 국가를 재건했단 말이요? [야당 지도자들인] 삼 랑시 의원이 했소? 아니면 라나릿(Ranariddh) 왕자요? 아니면 [인권당의] 껨 소카(Kem Sokha ) 총재가 했단 말이요? ...... 그들은 나중에 귀국했어요. 그러고서는 이래라 저래라 요구했죠. 그들은 모든 이들을 공격하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바라고 있어요. 하지만 CPP는 이런 일을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
2009년 12월 27일, 훈 센 총리는 자신의 총리서리 취임 25주년을 기념하여, 프놈펜의 한 호텔에서 "대규모 가족친지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캄보디아 총리가 아닐 날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훈 센 총리는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것이고, 이 막강한 권력을 지닌 방계 가족들이 캄보디아의 보통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되면, 언젠가 그날이 왔을 때 저항에 직면하게 되리라고 말했다.
만일 내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는다면, 언젠가 이 훈 센이 권력을 잃으면 바로 너희들이 공격대상이 될 것이다. |
훈 센 총리는 TV 방송까지 된 가족모임에서 친인척들에게 이같이 말하고, 약한 이들을 위해 자선을 행하라고 충고했다. 이것은 권력의 최정점에 선 강력한 지도자에게서 들어보기엔 좀처럼 쉽지않은 발언이었다.
본 기사의 저자 폴 브리즈(Paul Vrieze)는 프놈펜에 본사를 둔 <캄보디아 데일리>의 기자이다. 동 신문의 기자인 판 아나(Phann Ana)도 취재에 참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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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훈 센 총리의 공과 과를 객관성있게 잘 분석한 보고서로 보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사법부 독립의 부재, 권력층의 부정부패보다.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언론을 정권의 나발수로 적극 활용하는 부분입니다.
아무래도 그런 부분이 있죠... 그것은 아마도 훈센 총리 개인이 쇼를 잘하는 배우이자 흥행사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캄푸치아인민혁명당"에서 시작된 "캄보디아인민당"이라서 그런지... 선전선동(홍보)에다 상당한 중점을 두고 있고... 비교적 그 테크닉도 뛰어난 편으로 보입니다... 저는 마지막에 나오는 저 가족모임을 TV에 공개한 부분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을 갖게 되더군요,,,,
(1) 환갑줄에 이른 초로의 훈센 총리가 참으로 인생에 대해서 성찰을 하고... 후손들을 걱정하는 진정성 있는 마음도 있다고 생각되고...... (2) 이제 저런 내용을 공개 안하면 안될 정도로... 혹시 캄보디아 국민들의 기층정서에 상당한 반감이 형성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도 있고..... (3) 이런 상황 반전을 위해.... 솔직한 고백 자체를 고도의 선전술로 활용하고자 한 측면 등등.... 복합적인 선전효과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여간 덕분에 우리 카페는 이번 기회에 훈센 총리 집안에 대한 좀더 큰 족보를 만들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만.... 뭐, 여러가지 감상을 갖게 만듭니다...
저는 훈센 총리가 인간적으로는 상당히 많은 매력을 지닌 영웅급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영웅신화에는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바로 공과 사의 구분, 공명정대한 태도인데.... 조카들 건만 해고, 초기에 한 녀석만 징영살이 한 1년 반 정도 혹독하게 시켰더라면... 그 다음 애들 저절로 다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여간 이후로도 국민들의 심금을 울리려고 하는 이런 신파극을 할게 아니라, 공명정대하게 선례 몇 건만 남기면.... 집안 뿐만 아니라 나라가 다 태평해질겁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겠죠... 따지고 들면,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정부를 청부살인한 분 라니 여사까지 다 걸려드는데...
이것이 업보라서... 아마 이 생에는 청산하기 쉽지 않을듯 합니다..... 여러가지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많은 인물로 생각됩니다....
한국의 과거를 생각하면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역사는 점진적으로 어쩌면 나선형씩으로 얼키고 설켜서 발전하는 것이 아닌지, 이런 정치지도자의 뒤에서 비판어린 마음으로 미래를 바르게 준비하는 젊은이들이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