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인들의 여론은 이미 무르익은 상태였다. 당시 왕국의 정치적 통합력과 도덕성이 의문시되고 있었는데, 물질적 이익이나 권력에 집착하지 않고 사회적 평안을 부여해주는 이 새로운 신앙에 대해 캄보디아인 전체가 한꺼번에 귀의했던 것이다. 겸허한 승려들도 왕궁의 오만하고 부유한 사제들로부터 권력이 이동하는 것을 환영했다. 새로운 승단의 수행자들은 단순한 가사 하나만 몸에 걸칠 뿐이었다. 그들은 귀족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한 의무를 수행했다. 마침내 그들은 "신왕"(deva-raja, 神王)만큼이나 존경을 받게 되었고, 상좌부 불교도들 스스로가 [자신들] 신앙의 보호자가 되었던 것이다."(주8)
다른 학자들은 고전적인 앙코르제국(크메르제국)이 내부로부터의 황폐화와 밖으로부터의 공격이 겹쳐 붕괴했다고 추정한다. 당시 욱일승천하던 시암(태국)과 베트남이 외부로부터 위협과 공격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앙코르 시대에는 동남아시아에서 빨리어 경전에 기반을 둔 상좌부 불교가 급속한 성장을 보였고, 바라문교와 대승불교는 동반 쇠퇴하던 때였다. 1423년에 작성된 태국 사료를 보면, 스리랑카로 파견된 전법단 속에 8명의 크메르인 승려가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들이 다시금 정통적인 대사파(Mahavihara order)의 전통을 캄보디아로 전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특별한 사건은 상좌부 국가 속에서 사제계급으로부터 촌락에 기반한 승원체계로 심오한 사회적 변동이 있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승원 수행을 고수하는 가운데, 승단은 그 종교적 도덕성뿐만 아니라 민중들을 위한 교육제도, 사회복지시설, 그리고 문화센터 역할까지 제공하게 되었다. 와트(Wat: 사찰)는 대중 교육과 학습의 주된 장으로 변했다. 초창기에 버어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및 베트남을 방문했던 서양인 탐험가와 거류자, 그리고 선교사들은 남성 인구 중 상당수가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고 보고했다. 상좌부 국가들 모두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19세기까지는 문자해독률에서 유럽을 능가하는 수준을 갖고 있었다. 특히 캄보디아에서는 불교가 크메르어 및 그 문화의 전수자 역할을 담당했다."(주3)
그리하여 힌두교 및 대승불교의 "신왕" 종교를 유지하려는 강력한 공세에 대해 상좌부 불교 혁명은 크메르 민중들의 풀뿌리 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이들을 노예노동 상태로 몰아넣었던 거대한 사원조성 사업도 점진적으로 정글 지역에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서쪽에서는 시암의 세력이, 그리고 동쪽에서는 베트남 세력이 흥기하면서, 고전적인 앙코르 제국은 사라지고 근대 캄보디아가 시작된다. 정부의 수도도 오늘날 프놈펜에 인접한 캄보디아 중앙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캄보디아는 상좌부불교 국가로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이 나라에서 이전에 번성했던 다른 모든 종교들과 달리, 상좌부불교는 위로부터 전파된 것이 아니라 민중들에게 먼저 전파되었다. 이 종교는 단순하여 값비싼 사제들의 집전비나 사원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의례도 별로 많이 거행하지 않았다. 그 승려들도 수행하는 고행자들이었고, 고독하고 소박하며 검소했다. 이러한 그들의 본보기는 민중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낡은 국교 및 그에 의지하던 사원들의 기반을 잠식했던 것이다. 1975년까지 상좌부불교는 크메르 민중의 위대한 신앙이자 안식처였다."(주9)
이 시기에 캄보디아 왕국을 방문했던 중국사신 주달관(周達觀, Zhou Daguan)은 앙코르 말기에 상좌부불교의 승려들이 존재했음을 기술하였다. 원(元)나라 성종(成宗, 테무르 칸-쿠빌라이 칸의 손자)의 사신이었던 그는 앙코르 톰(Angkor Thom)에서 1년 동안 머물렀다(1296-1297).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한 작은 책을 저술했는데(진랍풍토기), 여기서 상좌부 승려들에 관해 기록했다. 주달관에 따르면, 상좌부 승려들은 삭발을 하고 노란 가사를 둘렀으며 어깨를 드러낸 모습이었고, 캄보디아 전역에 걸쳐 맨발로 걸어다녔다고 기록했다. 또한 그들의 사찰들은 석가모니 부처(Sakyamuni Buddha)의 불상 하나만을 모신 단순한 형태라고 하였고, 그 불상은 노란 천을 두르고 있었다고 했다.
상좌부 승려들은 고기나 생선을 먹기도 하지만, 술은 마시지 않는다. 그리고 식사는 오직 하루에 한끼만 먹는다. 사찰 안에서는 요리를 하지 않고, 신도들이 보시하는 음식만을 먹도록 되어 있다.
"그들이 암송하는 경전의 양은 엄청나다. 이 경전들은 야자수 이파리를 엮어 만든 것으로, 검은 먹물로 필사되어 있다. 일부 승려들은 국왕의 자문으로 위촉되어, 황금색 혹은 은색 천산(양산)이 드리워진 가마를 타기도 하는데, 이 가마의 손잡이들도 금장으로 되어 있다. 이 나라에는 비구니(여성 승려)는 존재하지 않는다."(주6)
(주7) Keyes, Charles. The Golden Peninsula.
(주8) Becker, Elizabeth. When the War Was Over.
(주3) Gyallay-Pap, Peter. "Notes of the Rebirth of Khmer Buddhism," Radical Conservativism.
(주9) Shawcross, William. Sideshow.
(주6) O'Murray, Stephen. Angkor Life. |
6. 암흑기의 불교
<지나깔라말리>(Jinakalamali)는 15세기의 캄보디아와 스리랑카 사이의 문화교류에 대한 설명을 포함한 문헌이다. 이에 따르면, 붓다가 반열반(Mahaparinibbana: 서거) 후 1967년이 지나서 마하나나싯디(Mahananasiddhi) 비구가 이끄는 8인의 캄보디아 승려들이 태국의 납비스뿌라(Nabbispura)에서 온 25인의 승려와 함께 싱할리(스리랑카)의 대화상들만이 줄 수 있는 구족계(具足戒, upasampada-sila)를 받기 위해 스리랑카로 건너왔다고 한다.
당시에는 앙코르가 이미 붕괴하여 정글 속에 묻히고 난 후였으므로, 캄보디아 상좌부불교의 중심축도 오늘날의 프놈펜이 있는 남쪽으로 이동했다. 프놈펜은 원래 강변에 있는 조그마한 시장이 있던 곳으로, 여기서 메콩 강과 떤레 삽 강이 합류한다. 프놈펜은 "뻰"(Penh)이란 이름의 여인이 홍수 때 코키나무(Koki tree) 위에 놓인 채 떠내려오는 4면 불상을 발견한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그녀는 이 불상을 건져내 "왓 프놈"(Wat Phnom)이란 절을 짓고 그곳에 모셨다고 한다. "4면 붓다"(네 방향을 바라보는 얼굴을 가진 부처)는 지금도 크메르 불교 도상학(圖像學, iconography)의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4면 불상은 미래에 불국정토(佛國淨土)를 세워줄 붓다인 미륵보살(彌勒菩薩, Maitreya)을 상징하는데, 종종 캄보디아 고유의 불왕(佛王)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1431년에 캄보디아 국왕(뽄히어 얏)은 시암의 침입으로 포기했던 앙코르 지역을 영구히 포기하고 현재의 프놈펜에서 몇 마일 떨어진 우덩(Udong) 산으로 천도했다. 서쪽에서는 시암이 침입하고 동쪽에서는 베트남이 침입해 들어오면서 크메르 제국의 국력은 쇠퇴하였다. 특히 베트남의 침입은 상좌부불교를 탄압하고, 크메르인들로 하여금 대승불교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반면 주기적으로 침공을 시도한 태국의 경우, 상좌부불교를 보호하기 위해 "불신자"(不信者)를 가려내기도 했다. 새롭게 흥기하던 이 두 강대국 사이의 권력투쟁은 유럽인들이 도래하는 16세기까지 계속된다.
7. 식민지 시대
16세기에도 캄보디아에서 불교는 계속해서 성행했다. 담마라자(Dhammaraja, 法王) 국왕의 친척이었던 엉 쩐(Ang Chan: 1516-1566) 국왕은 불교에 귀의했다. 그는 자신의 도성 안에 파고다(pagoda: 절)들을 세웠고, 캄보디아 각지에 많은 불당을 창건했다. 바롬 리어찌어(Barom Reachea) 국왕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사타(Satha: 1576-1594) 국왕은, 불교를 대중화시키기 위해 앙코르와트(Angkor Wat)의 대탑들을 복원시켜 불교사원으로 만들었다.
서양의 상인들과 성교사들이 최초로 캄보디아에 도래했을 때, 그들이 발견한 사회적 계급에는 3종류가 있었다. 첫째는 귀족이고, 둘째는 주로 농민들로 구성된 평민,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메르 문화와 정체성의 담지자들인 불교 승려들이었다. 주로 가톨릭 신부들을 통해 유럽인들은 연속적인 영향력을 미쳤지만, 상좌부 승려들은 크메르인들을 개종시키려는 시도를 놀라울만치 잘 막아낼 수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1556년 포르투갈의 선교사 가스파르 드 쿠르츠(Gaspar de Cruz)는 캄보디아에서 약 1년을 지냈고, 짬(Cham) 궁왕이 통치하던 도성인 로웩(Lovek)도 방문했다. 이 선교사는 크메르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킴에 있어서 통렬한 자기 무능력을 고백하고, 자신이 실패한 것이 불교 승려들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크메르인 불교 승려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들은 극도로 자부심과 허영에 가득차 있다....... 이들은 신들을 숭배하며 살아가는데, 그들 중 일부는 축원을 해주거나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신들과 마찬가지로 숭배받고 있다. 일반 신도들을 이들에 대해 대단환 신뢰를 갖고 있어 예경과 숭배를 바친다. 그렇기에 어떤 점에서든 이들에 반하여 행동하는 자가 한 명도 없다. 때때로 내가 설교를 하고 있노라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내 설교를 잘 귀담아 듣고 또 내가 하는 말에 만족하기도 하지만, 그러다가도 만일 승려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이 가르침(기독교)도 좋지만 우리 것(불교)이 더 좋네요"하고는 모두 내 곁을 떠나가버린다."(주10)
식민지 시대에는 종교적으로 고무된 폭력이 발생해 평화를 깨뜨리곤 했다. 자칭 성자라고 주장하거나 카리스마를 가진 승려가 이끄는 천년왕국설 교단들이 주기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1820-1921년 사이에 발생한 반란은 "까이"(Kai)란 이름의 전직 승려가 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성자라 칭하고 초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바 파놈"(Ba Phanom)에 있던 자신의 은둔처에서 나와 베트남 통치자들에 대항하는 반란을 조직했다.
17, 18, 19세기에는 태국이 그 영향력을 확대해 캄보디아 정치에 깊이 관여했고, 이러한 영향은 종교계에까지 미쳤다. 1855년 노로돔(Norodom) 국왕은 태국의 담마윳띠까 니까야(Dhammayuttika Nikaya, 法集派)(역주) 종단의 승려들을 초빙하여 지금의 캄보디아 "담마윳띠까 니까야 종단"을 설립했다.(주11) 그리고 태국의 몽꿋(Mongkut, 라마 4세) 국왕과 동문수학한 크메르 승려 마하 빤(Maha Pan)이 이 새로운 크메르 "담마윳띠까 니까야 종단"(일반적으로는 "텀마윳"[Thommayut]이라 부름)의 초대 승왕(僧王, sangha-raja)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프놈펜의 왕궁 근처에 새로운 사찰 "왓 보텀 와더이"(Wat Botum Vaddey)를 창건한 후 그곳에서 주석했다.(주12) 새로이 창종한 "텀마윳" 종단은 국왕의 보호를 받는 우월적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기존에 존재하던 "마하니까야"(Mahanikaya, 大派: "머하니꺼이"[Mohanikay]라고 부름)(역주) 종단과 갈등을 빚곤 했다.(주13) 텀마윳 종단은 때때로 크메르 종단이 아니라 태국 왕실에 충성한다는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주14)
(역주) 캄보디아 및 태국의 불교 종단에 관한 번역사례가 아직 한국어권에는 드문 것으로 보인다. 간혹 "담마유티카"와 같이 빨리어 발음대로 음역한 사례만 눈에 뜨이고 의역한 사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온라인상으로만 한정한다면, 이러한 상황은 중국과 일본어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일단 첫 표현은 빨리어 발음에 따라 "담마윳띠까 니까야"로 표기했다. 크메르인들은 그냥 "텀마윳"이라고만 부른다. 참고로 태국인들은 이 종파를 "탐마윳"이라 부른다. 괄호 속의 한문 의역은 "크메르의 세계"가 첨가한 것이다. 빨리어 "dhamma"(담마)는 산스끄리뜨어 "dharma"(다르마)와 마찬가지로 "진리", "가르침", "의무"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불교에서 일반적으로 가르침이나 교설을 의미하는 사례를 좇아 "法"(법)이란 글자를 선택했다. "yuttika"(윳띠까)는 "매달리다", "확고하게 묶는다", "끌어 안다" 등을 의미하는 어근 "yuj"(유즈)에서 파생된 말로, 산스끄리뜨어의 경우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요가"(yoga)라는 말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붙잡다"는 의미를 살려 "集"(집)을 선택했다. 한문 "集"은 "모이다"는 의미가 더 강한 말이지만 불교 용어인 "집착"에 이미 사용되고 있고, 잡을 "執"자가 일반인들에게는 보다 생경할 수도 있어서 모을 "集"자를 선택했다. "yuttika"의 마지막에 붙어 있는 "-ka"라는 접미사는 영어의 "er"과 같이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마지막의 "nykaya"(니까야)는 "집?#34; 혹은 "더미", "집단" 혹은 "종파"를 가리키는 말이다. "ka"와 "Nikaya"를 아울러서 물갈래 "派"(파)로 의역하였다. 이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진리(가르침에)에 확고하게 기반한 사람들의 종파"를 의미하니, "法集派"(법집파)라는 명칭이 과히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마찬가지로 마하니까야(Maha-nikaya)는 "큰", "위대한"을 의미하는 산스끄리뜨어 및 빨리어의 접두어 "maha"와 "집단"을 의미하는 "nikaya"가 결합한 것이기에 "大派"(큰 분파)로 번역하였다. 향후 캄보디아 불교를 전문적으로 다루게 될 경우엔 발음에 따를 경우엔 크메르어식으로 "텀마윳"과 "머하니꺼이"를 사용하고, 의역으로 할 경우엔 "법집파"와 "대파"라는 용어를 사용토록 할 것이다. |
1867년에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주15) 일련의 과정에 따라 베트남과 캄보디아는 차례로 "보호"(protective) 조약에 서명했고, 태국으로부터는 양허조약을 확정하여, 지금의 캄보디아 영토는 이후 40년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French Indochina )에 편입된다.(주16) 프랑스 식민통치자들에 대항하여 불교의 지도자들이 이끄는 폭력소요가 주기적으로 발생하기도 했다.
프랑스 식민통치기에 캄보디아 승려의 교육제도가 괄목할만한 진보를 이룩한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 불교에 관한 학습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현대 학문들에 관해서도 동시에 발전했다. 1941년 프놈펜에 승려들을 위한 "빨리어 고등학교"(Pali high school)가 설립되었다가, 이후 대학으로 승격되었다.(주17) 이 4년제 대학은 빨리어와 불교 경전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현대적인 세속 학문들도 가르쳤다.(주18) 그보다 이전인 1933년 초에는 빨리 학교들(Pali schools)이 개교하여 신입 승려들에게 단기 빨리어 강좌를 제공했다.(주19) 이들 학교들은 이후 보다 큰 승원학교들로 발전했고, 모든 승려들이 교법(敎法, dhamma-vinaya)에 대한 기초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주20) 1961년에는 "쁘레아 시하누크 랏 불교대학"(Buddhist University of Phra Sihanu-Raja)이 강좌를 개설하기 시작했다.(주21)
캄보디아 어린이들에 대한 초등교육은 계속해서 사원학교들이 담당했다. 승려들은 또한 지역공동체의 발전계획에도 참여토록 독려받기도 했다.(주22)
(주10) Chandler, David. A History of Cambodia.
(주11) Ian Harris 2001, p.83
(주12) Ian Harris 2001, p.83
(주13) Ian Harris 2001, p.83.
(주14) Ian Harris 2001, pp.83-84.
(주15) Wyatt 2003, p.180.
(주16) Wyatt 2003, p.189-191.
(주17) Rajavaramuni 1984.
(주18) Bapat & Takasaki 1959
(주19) Bapat & Takasaki 1959
(주20) Bapat & Takasaki 1959
(주21) Rajavaramuni 1984. |
8. 크메르루즈 시대
1975년에 크메르루즈(Khmer Rouge) 공산정권이 캄보디아 전역을 장악했다. 이들은 캄보디아의 불교를 거의 완전하게 파괴하려 했고, 거의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1979년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했을 때, 거의 대부분의 불교 승려와 종교적 지식인들이 살해됐거나 국외로 망명한 상태였다.
불교에 대한 크메르루즈의 정책은 승려를 환속시키고 사찰들을 파괴하며, 비협조적인 승려들은 처형하여 궁극적으로는 캄보디아에서 불교라는 제도를 말살시키는 것이었다.(주23) 도망치지 못한 승려들은 속인들 틈에 숨어서 살아남았고, 병자나 신기가 있는 이들이 있을 경우 비밀리에 불교의례를 집전하기도 했다.(주24)
크메르루즈가 정권을 잡기 전까지, 캄보디아의 승려들 수는 65,000-80,000명으로 추산되었다.(주25) 하지만 1980년대 초 다시금 불교가 복원되었을 무렵,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캄보디아 승려의 수는 3,000명 미만으로 파악되었다.(주26) 캄보디아 양대 종파(nikaya)의 승왕들 역시 그 법맥이 끊어진 상태였고, 그들이 어떻게 사망했는지조차 파악되지 않았다.(주27) 태국과의 관계를 고려해본다면, "텀마윳" 종단의 승려들이 더욱 특별한 처형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주28)
(주22) Rajavaramuni 1984.
(주23) Ian Harris 2001, p.74.
(주24) Ian Harris 2001, p.74.
(주25) Rajavaramuni 1984, pp.78-82.
(주26) Ian Harris 2001, p.75-76.
(주27) Rajavaramuni 1984, pp.78-82.
(주28) Ian Harris 2001, p.84. |
9. 크메르루즈 이후의 시대
오늘날의 캄보디아 불교계는 파괴된 세를 복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불교학자와 지도자들이 부족하고 불안정한 정치적 환경의 영향을 받아 이 일이 쉽지만은 않은 상태이다.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크메르루즈 정권이 몰락한 후 수립된 위성정권(캄푸치아 인민공화국: PRK)은 최초에는 불교를 공식적으로 탄압했다.(주29) 하지만 베트남의 위성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들이 이어지자, 1979년(?) 여름부터불교를 자유화하기 시작했다.(주30) 이로부터 외국에 망명 중이던 승려들과 크메르루즈 집권기 동안 베트남에서 수계를 받은 승려들이 캄보디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주31) 1981년에는 기존의 "텀마윳" 종단과 "머하니꺼이" 종단의 구분을 파기하고, 뗍 웡(Tep Vong, 텝봉) 대종사가 새로운 통합종단 최초의 승왕으로 추대되었다.(주32) 정부는 새로운 승려들의 수계식을 관용 조치를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쇼로서 지원했고, 출가를 제한하던 조치도 철폐했다.(주33)
베트남군이 철수한 후에는 새롭게 당명을 개정한 기존의 여당 "캄보디아인민당"(CPP)은 1991년 "불교는 캄보디아의 국교"라는 정책발표를 하며 먼저 불교계에 손을 내밀었다.(주34) 1991년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국왕이 해외 망명에서 돌아와 다시금 "텀마윳" 종단과 "머하니꺼이" 종단의 새로운 승왕들을 각각 추인해주면서 1981년 베트남 영향 하에서 탄생한 통합종단은 공식적인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주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