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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스님 自警文
자기를 돌아보는 마음 11 강
其六(기육)은
切莫妄自尊大(절막망자존대)하고 輕慢他人(경만타인)이어다
修仁得仁(수인득인)은 謙讓(겸양)이 僞本(위본)이요
親友和友(친우화우)는 敬信(경신)이 爲宗(위종)이니라
四相山(사상산)이 漸高(점고)하면 三途海(삼도해)가 益深(익심)하리니
外現威儀(위현위의)는 如尊貴(여존귀)나
內無所得(내무소득)은 似朽舟(사후주)니라
官益大者(관익대자)는 心益小(심익소)하고
道益高者(도익고자)는 意益卑(의익비)라
人我山崩處(인아산붕처)에 無爲道自成(무위도자성)하나니
凡有下心者(범유하심자)는 萬福(만복)이 自歸依(자귀의)니라
頌曰(송왈)
驕慢塵中藏般若(교만진중장반야)요
我人山上長無明(아인산상장무명)이로다
輕他不學躘踵老(경타불학룡종노)하면
病臥辛吟恨不窮(병와신음한불궁)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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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六(기육)은 그 여섯째는
切莫妄自尊大(절막망자존대)하고 輕慢他人(경만타인)이어다.
자기가 제일이라고 남을 무시하는 사람을 妄自尊大한다고 그러지요.
망령되이 스스로 자기가 존대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我相(아상)을 딱 갖고 ‘내가 제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나만이 대통령 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대통령 감 아니다. 오직 내가 대통령을 해야 된다.’
이것이 妄自尊大입니다. 미국에 카네기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지요?
대 재벌이지요?
카네기 묘소에 가면 묘비에 ‘자기보다 훌륭하고, 자기보다 덕 높고 공부 많이 하고 잘난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많이 자기 곁에 모아 둘 줄 아는 사람, 여기 잠들다.’←이렇게 써 놨답니다. 카네기처세술 이라는 책이 있지요.
카네기처세술의 요점이 친절하고 겸손하고 어쨌든지 간에 저 사람한테 잘 보이고, 또 그 사람 이름을 잘 외우고 그런 것이 다 처세술에 속 하거든요.
자기를 칭찬하고 다른 이를 헐지 말라는 戒法(계법)이 보살계에 있는 데요.
바로 그 말과 같은 것이지요.
보살계에 이런 얘기가 있지요.
비둘기 떼들이 날아가는데 콩이 널려있는 겁니다. ‘저것이 웬 콩인가?’
한 비둘기 봤어요.“콩 봐라.”하니까, 비둘기가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콩 먹기를 제일 좋아하는데 콩이 많이 널려있으니까 그 소리 듣자마자
“어디?”하면서 좍~~ 먹으러 내려갑니다. 그 가운데서 영리한 비둘기가 있다가 하는 말이
“여러분 잠깐 참으시오. 인가도 없고 밭도 없는 벌판에 콩이 저렇게 널려 있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입니다. 혹시 그물이 쳐져 있지 않은가? 덫이 있지 않은가? 우리를 잡으려고 포수들이 일부러 콩을 깔아 놓은 것은 아닌가? 단단히 살펴보고 갑시다.”
“앗따, 넨장 맞을 배고픈데 언제그것 살펴볼 여가가 어디 있냐?”고 먹고 보자고 와~~ 하고 군중심리로 내려가니 할 수 있나요? 자기까지 다 같이 내려갔지요.
한참 콩을 찍어 먹는데 아니나 다를까 하늘이 침침해지더니 큰 그물이 와서 폭 덮어씌우는 겁니다. 그야말로 일망타진입니다. 수많은 비둘기가 큰 그물에 탁 걸리니까 그 때쯤 되니까 서로 원망을 하는 겁니다.
“내 여기 오기 싫었는데 아무개란 놈이 자꾸 가자고 해서, 나는 본래 이런데 오기 싫어하는 사람이거든. 엊저녁 간밤에 꿈이 안 좋더니 안 올려고 했는데 이놈이 자꾸 가자고 해서 이런 일을 당 했다,”고 서로 원망을 합니다.
“아 나도 본래 올 생각이 없었는데 아무개가 가자고 했다.”고,
아무개가 가자고 했다고, 결국에는 “콩 봐라.”한 놈이 어떤 놈이냐 이겁니다. 그 놈이 가자 소리 아니 했으면 우리가 다 안 죽었을 것 아니냐 이겁니다.
그 놈의 자슥이 눈깔이 너무 밝아서 콩 봐라 해서 우리가 다 죽게 되었다 이겁니다. 그래가지고
“그 놈을 잡아 죽여야 된다.”
“네가 그랬지?” 제일 마음 약한 놈을 지적하니,
“내가 안 그랬는데...”
“안 그랬다니? 네가 그랬다 이 눔아.”덮어놓고 장본인이라고 한 놈을 잡아서 바윗돌에 앉혀놓고 저 놈 때문에 우리가 다 죽게 되었다고 저 놈을 찢어 죽여야 된다고 재판을 했습니다. 비둘기들이 전부 달려 들어가지고 놈을
“죽이자~”하고 전부 발톱을 세워 달려들려고 하는데, 그 영리한 비둘기가 떡~ 한다는 소리가
“여러분들, 그 비둘기를 죽인들 무슨 영검이 나겠소? 우리가 먹고 싶은 그 생각 하나가 죄니까 그러지 말고 우리가 날카로운 주둥이와 발톱을 한데 모아가지고, 그물구멍 하나에 총공격을 합시다. 그 말이 옳다 하고 전체 뭉쳐서
“하나 둘 셋”하고 힘을 주니까 그물이 탁 터져가지고 다 살았다 이겁니다. 이렇게 親友和友(친우화우). 서로 화합할 것 같으면 힘이 생기고, 서로 나는 잘 했고 너는 잘 못했고 이러면 다 파탄이 온다 이 말입니다.
妄自尊大해가지고 輕慢他人. 다른 사람을 輕慢히 여기지 말아라. 가벼이 여기고 업신여기지 말어라.
修仁得仁(수인득인)은 謙讓(겸양)이 僞本(위본)이요. 仁을 닦고 仁을 얻는 것은, 이 어질 仁자가 말하자면 儒學(유학)에 있어서 유학의 근본이 어질 仁자거든요.
인을 얻는데 있어서 五德(오덕). 다섯 가지 덕이 있다고 그랬지요?
1 溫(온). 2 恭(공). 3 謙(겸). 4 讓(양). 5良(양). 따뜻하고 공손하고 겸손하고 양보하고 어진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이 5덕이라고 그랬지요.
이것이 仁을 닦고 仁을 얻는 근본이 謙讓이라는 말입니다.
溫ㆍ恭ㆍ謙ㆍ讓ㆍ良이 5덕이거든요. 5덕이 근본이라는 말입니다.
親友和友(친우화우)는 벗을 친하게 하고, 벗과 화합한 것은,
敬信(경신)이 爲宗(위종)이니라. 공경하고 믿는 것. 서로 공경하고 믿는 이것도 겸손하다는 것이지요. 친하다고 해가지고 “이 새끼 저 새끼, 이 자식 저 자식.” 하고 욕 친구는 그것은 오래 못갑니다. 친할수록 공손한 말을 자꾸 써 버릇해야 됩니다.
제가 모스님하고 젊은 때는 너 나 그랬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안 그러지요. 늙어서는 서로 예를 쓰지요. 아이들이 보더라도 하대를 하는 것은 못쓴다고요. 그래서 서로 존경하는 공대말을 써 버릇 하고요. 또 서로 신용 있게 행동을 해야 됩니다. 실없는 짓 하면 안 됩니다.
서로 믿음을 줘야 된다 말입니다. ‘그 사람에게 맡겨 놓으면 틀림없지’그리고 또 설사 한 쪽에서 조끔 어겼다 하더라도 이해해야 되고요.
‘모르고 그랬는가 보다.’‘바빠서 그랬는가 보다.’이렇게 양보도 해줘야 되고요. 敬信(경신)이라. 그것이 가장 근본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 성격 따라서 각각 다르기는 좀 달라요. 갑스님하고 을스님하고 평생을 도반은 도반인데 요만치도 서로 어긋지를 않거든요.
“1시에 어디서 만납시다.” 했으면 정각 1시에 만나야지 5분 지났다고 안 만나고 가버리고... “스님, 스님 내가 왔어요. 거기 서계셔요.”하고 불러도 오늘은 필요 없다고 안 만난다고...ㅎㅎㅎㅎㅎㅎ
성격이 너무 그런 것도 우리는 겁나더군요. 갑스님이 농담을 되게 잘하는데요. 농담을 되게 잘해도 겁나요. 속에 없어야 되는데‘저러다가 무슨 꼬투리를 잡을 랑고?’싶어서... 노장이 꼭 고양이 같이 생겨가지고 노장이 고양이 노장이라고요. 어떤 때는 말도 아니하고 뚫어지게 쳐다보거든요.
四相山(사상산)이 漸高(점고)하면 三途海(삼도해)가 益深(익심)이라.
사상산이 점점 높으면 三途의 바다가 더욱 깊어진다 이 말입니다.
我相(아상)ㆍ人相(인상)ㆍ衆生相(중생상)ㆍ壽者相(수자상)이라는 말이지요.
아상이라는 것은 저 잘난 맛. ‘내다.’하는 생각. 저 잘난 맛으로 산다고 하듯 말입니다. ‘내가 제일이다.’ ‘내가 제일 잘 났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我相인데요.
이 몸뚱이로 말할 것 같으면 한 가지 물질이기 때문에 아무리 잘난 놈이라도 별 수 있나요? 김아무개가 지아무리 잘 났다 해도 몇 해 있으면 골로 가는 것이지, 나이 80이 넘었는데 별 수 있나요?
물질은 아무래도 오래 될 것 같으면 멸하고 마는 거니까요.
또 정신도 그렇지요. 이 정신 작용이라는 것도, 마음이라는 것이 나가지고 가만히 있나요? 한 생각났으면 그것이 금방 옮겨지고 금방 달라지고 금방 없어지고 또 딴 생각 나고 그렇지요. 이 몸에는 생로병사가 있고, 마음에는 生住異滅(생주이멸)이 있다 이겁니다. 생하고 주하고 달라지고 멸하고요. 그러니까 다 무상하고 허망한 것이거든요. 우리가 어쨌든 간에 아상을 없애는 공부. 이것이 첫째이기 때문에 출가한 사람은 걸식하는 것으로서 아상을 없애 버려야 되는 것이다 이랬거든요.
걸식하는 사람이, 밥 얻어먹으러 간 놈이 아상 피우면 누가 밥 주나요?
아상이 없어야, 굽신굽신해야 한술 주든가 말든가 하지요. 부처님이 만승천자의 지위를 버리고 떡 출가해 가지고 탁발. 발우떼 하나들고 걸식을 하는 이유가 아상을 없애는 공부의 일종이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중 된 사람은 지금 기도하고 다음에 얼굴 잘 다듬어 가지고 삿갓 하나 쓰고 발우떼 하나들고 요령 하나들고 탁발 해보세요.
탁발도 한번 해볼 만한 겁니다. 준다 안 준다 할 것 없이 턱 하니 집 앞에 가서 반야심경이든지 법성게든지 한 번만 그냥 치는 겁니다. 안 주면 그냥 가고, 주면 받아가지고 가고, 꼭 돈이 필요해서 하는 것은 아니니까 한번 해보는 겁니다. 탁발 몇 번 해보면 상당히 下心(하심)이 되고 좋답니다. 아상이 없으면 대립적인 인상도 따로 내 세울 것이 없는 것이고, 그 다음에 중생상도 생길게 없지요.
중생상이라는 것은 어쨌든지 간에 약한 사람을 억누르고 강한 사람한테는 빌붙는 약육강식하는 그것이 다 중생상이거든요. 자기가 하는 일에 너무나 지나친 애착심을 가지고 남한테 이기려고 하는 그런 것이 다 중생상이거든요.
수자상이라는 것은 생사를 초탈하지 못하고, 몇 해아니면 죽을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천년만년 살 것 같이 생각하는 것이 수자상입니다.
오래 살 것 같이 생각하고 그야말로 장생불사를 계책. 계획 하는 것이 수자상이든요. 이것이 다 생사가 허망하다는 생각. 생사를 해탈하려는 생각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我相(아상)은 원인이요, 人相(인상)은 연이요. 衆生相(중생상)은 업이고,
壽者相(수자상)은 결과입니다. 因ㆍ緣ㆍ業ㆍ果(인연업과)라고 그랬지요.
만약 이와 같은 사상산이 없을 것 같으면 언제나 남을 위해서 진실로 남을 위해서 봉사 할 수 있는 마음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도 편안해지고 내 마음도 편안해짐으로서 남의 마음도 편안하게 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인을 편안한 세계로 인도하면 그것이 대복전이라는 말입니다.
복밭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이 얘기거든요.
사상산이 점점 높아지면 三途海(삼도해)가 더욱 깊어진다.
그러니까 사상산이 낮아지면 三途海는 얕아지는 것이겠지요.
지옥 아귀 축생의 3도의 바다는 얕아진다 이 말입니다.
外現威儀(위현위의)는 如尊貴(여존귀)나 밖으로 威儀를 나타내는 것은, 근사한 체 하고 상을 나타내는 것은 尊貴한 듯하지만, 잘 난 듯싶지만 그러나
內無所得(내무소득)은 似朽舟(사후주)니라 안으로 얻은 바가 없는 것은 썩은 배와 같다 이 말입니다. 썩은 배를 물에 띄우면 푹 가라앉지 별 수 있나요?
官益大者(관익대자)는 心益小(심익소)하고 벼슬이 더욱 큰 자는 마음이 작은 것이고 道益高者(도익고자)는 意益卑(의익비)니라. 도가 더욱 높은 자는 뜻이 더욱 낮은 것이니라. 물은 언제든지 저~ 낮은 데로 흘러내려 가듯이, 곡식은 익으면 자꾸 고개를 숙이듯이, 순경 부스러기나 면서기 부스러기나 변변찮은 것이 지가 무슨 큰 벼슬한 것처럼 고개 뒤로 딱 제치고 딱딱거리지요. 좀 높은 벼슬한 사람들은 사람이 좀 겸손하고 곱신곱신 하고 그러거든요.
人我山崩處(인아산붕처)에 無爲道自成(무위도자성)하나니,
내다 네다 하는 산이 무너지는 곳에 無爲道가 自成이라.
함이 없는 도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함이 있는 有爲(유위)의 도는, 유위의 일은 造作(조작)이거든요. 조작하는 것이 있다 이 말입니다.
조작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조작은 변천하고 유전한다 이 말입니다.
變遷流轉(변천류전)하기 때문에 흥망성쇠가 뒤따라서 결국에는 생사법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無爲道는 함이 없는 도는 本自天然(본자천연)한 경계에 합하기 때문에, 본래 스스로 천연한, 천진한 경계에 합하기 때문에 조작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조작이 아니기 때문에 常住不變(상주불변).
常住不滅(상주불멸). 그러니까 생사가 없는 세계다 그 말입니다.
그것이 無爲道(무위도)거든요. 無爲道가 바로 無漏道(무루도)라는 말이지요.
有爲(유위)는 有漏고요. 무위는 무루지요. 새어버림이 없는 도라는 말이지요.
凡有下心者(범유하심자)는 萬福(만복)이 自歸依(자귀의)니라.
무릇 하심 하는 자는 만 가지 복이 스스로 귀의 하느니라. 그래서 행자실에 下心써이라고 놨잖아요. 제가 송광사 선방 삼일암에서 첫 철 지내고 나오는데 그 때는 기차 곱배위에 사람들 타고 다닐 때입니다. 기차 타기가 참 어려울 때입니다.
기차표를 사기도 어렵지만, 표를 사서도 기차 타기도 어려워요.
저는 바랑을 짊어지고 줄을 서서 순서를 지키고 딱 올라서려고 하는데 저보다 좀 클까 말까한 어떤 사람이 뒤에서 제 걸망을 확 잡아당기거든요.
제 전 살림살이가 다 들었으니까 걸망이 제법 무겁거든요.
한 2~30kg 되거든요.
기차에 떡 올라서는데 확 잡아당기니까 뒤에 추를 달았으니까 벌렁 자빠질 수밖에 별 수 있어요? 저를 자빠뜨려놓고 그가 쏵 올라가는 겁니다.
아이고마 자빠지니까 어떻게 화가 나던지 쳐다보니까 18 ~ 19로 저 보다 한 살쯤 더 먹었거나 저하고 동갑쯤 되는 그런 놈입니다.
그 자식이 확 뛰어 들어가는 겁니다. 어떻게 부아가 나던지 걸망을 벗어놓고 그 놈을 어쨌든지 간에 기어이 잡아가지고 한번 둘러매꽂아야만 내가 살지 안 그러면 못살겠어요. 제가 중학교 때 유도부 했거든요.
유도부 했으니까 그 때는 저하고 같은 또래다 하면 패는 것은 안 되지만 잡혔다하면 지까짓 놈은 둘러매꽂을 자신이 있어요. 무릎팍 밑에다가 엉덩이만 탁 갖다 댔다 하면 지는 가서 거꾸로 떨어지는 겁니다.
그것은 제가 아주 선수거든요.
그러니까 이눔의 자석을 잡아서 한 번 집어 던지려고 바랑 탁 벗어놓고 뛰어 올라가다가 사람들이 있거나 말거나 눈에 안 보이니까요.
뛰어 올라가다가, 한 발짝 뛰어 올라가다가 탁 생각이 나는 것이
凡有下心者는 萬福이 自歸依니라. ←이것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툭툭 털고 바랑 도로 짊어지고, 떡 전봇대 곁에 서서
‘내가 뭣 때문에 부지런히 가느냐? 덕숭산에 만공스님한테 가는 길인데, 가도 참선해야 되고, 와도 참선해야 되고 한 생각 챙기려고 공부하러 위해서 가는데 저 사람들은 모두 생업에 바빠서 저렇게 뛰어 다니지만, 나야 오늘 못가면 내일가고 내일못가면 모레가면 그러지 까짓것 뭐 그리 급하나? 가도 되고 안가도 되는 것이니까, 죽는 일 아니니까 걱정할 것 없다.’싶어서 밀대 모자를 푹 내리쓰고 걸망 짊어지고 전봇대 곁에 가만히 서서, 그렇게 마음을 먹고 화두하고
凡有下心者(범유하심자)는 萬福(만복)이 自歸依(자귀의)니라. ←이렇게 하고 한참 섰으니까
한 10분 섰었을 겁니다. 아직까지 사람들은 아귀다툼입니다.
서로 들어가려고 막 난리 났어요. 한참 있으니까 누가 와가지고
“스님 스님 ”그래요. 쳐다보니까 앗따 금테를 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차장위에 조역인가 하는 사람입니다. 점잖은 사람이 와가지고 스님 어디 가느냐고 그래요. 충청도 천안까지 (그 사람 묻지도 않는데) 만공스님한테 간다고 그러니까 아 그러냐고 “차를 못 타셨군요. 저를 따라 오시라”고, 걸망 벗어 달라고 그래요. 자기가 걸망 들고 따라 오라고 그래요. 저 앞쪽으로 가니까 1등실입니다.
미국인 장교들 몇 외에는 아무도 없어요. 가운데 분재 소나무도 있고 아주 좋은데 였어요. 융단 깔아놓고 아주 좋았어요. 앉아 있으라 해서 가만히 앉아 있으니 사과하고 과자하고 한 봉지 사다주면서 이것 먹으라고 “저하고 얘기 하면서 천천히 갑시다.” 하거든요.
당장 凡有下心者는 萬福이 自歸依입니다. 하하하하하하 ‘참 그렇구나!’
그래 그 사람하고 그날 아주 재미있게 얘기 많이 했어요.
제가 그 때도 얘기하기는 좋아하니까요. 땃따부따하고 얘기 많이 했어요. 그러니까 一忍而長樂(일인이장낙)이라. 한 번 참을 것 같으면 그와 같은 좋은 일이 생긴다 이겁니다.
頌曰(송왈) 노래하여 가로대
驕慢塵中에 藏般若(교만진중장반야)요, 我人山上長無明(아인산상장무명)이로다.
驕慢塵中에 藏般若라. 교만의 참 그야말로 먼지티끌 같은 그 속에 반야를 간직하고 있다. 교만심. 교만도 마음이니까요. 교만 하는 생각. 그것도 마음이잖아요?
그 마음속에 반야를 간직하고 있다. 반야가 숨어있다 이 말입니다.
반야라는 것이 뭐냐? 지혜지요. 지혜는 부처님의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성불을 하려고 하는 것은, 성불이 뭐냐고 할 것 같으면 지혜를 성취하기 위해서 도를 닦는 겁니다. 알 知(지)자는 화살 矢(시)에 입 口(구)했으니까 귀로 들어왔다 입으로 쑥 나가는 것이 알 知자잖아요.
화살처럼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이 알 知자인데 그것이 일월과 같이 밝아진 것이 큰 지혜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반야거든요. 알 知자는 분별심이고, 반야의 지혜는 무분별심입니다. 분별이 없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것이고, 상대가 끊어진 절대이고, 그것은 평등하고 원만한 세계다 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부처님의 지혜는 4가지가 있어요. 四智(사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大圓鏡智(대원경지)ㆍ妙觀察智(묘관찰지)ㆍ平等性智(평등성지)ㆍ成所作智(성소작지). 이렇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大圓鏡智. 크게 둥그런 거울과 같은 지혜라는 말입니다. 圓鏡과 같은 지혜라는 말입니다. 모난 거울은 한 쪽만 비칠 수도 있지만, 둥근 거울은 사방 다 비칠 수가 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래 저 길 코너에 둥그런 거울 볼록 반사경 해놨잖아요. 사방 많이 비추라고 그렇게 해 놓은 것이잖아요. 그것이 大圓鏡입니다. 염라대왕 앞에 가면 그것이 業鏡(업경)이라는 것이 되어 가지고 중생의 마음먹는 것이 거기에 다 나타난대요.
보통 거울은 얼굴만 나타나지만 업경은 마음먹은 것이 다 나타난다니 큰일일겁니다. 마음먹은 것이 착착착 나타나면 되게 부끄러운 것이 많을 겁니다.
양심 속일내야 속일 재주가 없을 겁니다. 그것이 大圓鏡智인데 부처님은 그와 같은 대원경지를 성취했기 때문에 일체의 중생이 마음먹는 것을 동시에 다 보신다 그랬거든요. 일체중생. 우리 인간만이 아니고, 한국 사람만이 아니고, 전 세계 사람만이 아니고, 짐승들 벌레곤충들까지 중생이 마음먹는 것을 부처님은 대원경지로 다 보신다 그랬거든요.
또 어떤 차별심을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차별심을 가지고 보지를 않고 平等性智입니다. 일월광명이 무슨 차별 가지고 비춥니까?
누구는 예쁘니까 비추고, 누구는 안 예쁘니까 안 비추는 그런 것이 없잖아요. 똑 같이 다 비추잖아요. 그와 같이 부처님의 자비광명도 똑 같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벌을 주네. 부처님한테 벌 맞았다. 무슨 부처님이 복을 준다 그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요. 중생이 번뇌의 구름이 벗겨지면 부처님의 일월광명이 비치는 것입니다. 허물은 내 쪽에 있는 것이지, 되고 안 되는 것은 내 쪽에 있는 것이지 부처님 쪽에 있는 것이 아니지요. 미우니까 벌을 주고 예쁘니까 복을 주고 이런다면 그것은 귀신이지 부처님이 아니지요. 大聖者(대성자)가, 大聖人(대성인)이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예뻐하고 그것은 성인이 아니잖아요.日月과 같은 그것이 平等性智입니다. 그런 지혜를 가지고 계시고,
妙觀察智를 가지고 계십니다. 묘관찰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관찰하신다 이 말입니다. 아주 세밀한 것까지 다 관찰을 하신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벌써 미리 다 알고 말씀 하셨잖아요.
물 한 방울을 보고서도, 五觀一滴水(오관일적수)하니 내가 한 방울의 물을 관찰하니 八萬四千蟲(팔만사천충)이로다. 팔만사천 벌레들이 있구나. 부처님이 그런 말씀을 다 하셨잖아요.
我身中有八萬毫(아신중유팔만호)하니, 내 몸뚱이에는 8만개의 털이 있는데,
一一各有九億蟲(일일각유구억충)이라. 그 털구멍마다 9억 마리의 벌레가 있다고 그랬고요. 그것은 지금 과학적으로 다 맞는 말이라고 하잖아요.
부처님이 그것을 묘관찰지로...
그것뿐이 아니고, 과거를 그렇게 아시고 현재를 아시고 미래를 또 그렇게 아신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미래 세상에 내가 죽고 난 뒤에 2500년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이고, 3500년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이고 말씀을 다 하셨잖아요.
대처승 생기는 얘기도 다 하셨거든요. 말씀 안 하신 것이 없어요.
어떤 정도로 말씀 하셨느냐 할 것 같으면, 중생이 손가락만 이렇게 대면 저쪽 사람이 죽는다 그랬거든요. 손가락만 대면 그것이 무기가 돼가지고요.
요새 권총 같은 것이 그런 것이잖아요. 손가락만 대면 죽으니까 말입니다.
전자총 같은 것도 그렇고요. 레이저광선으로 원격조정 하는 것도 그렇잖아요. 그래가지고 나중에는 사람 몸뚱이에 날개가 돋쳐서 막 그냥 난다고 그랬잖아요. 그런 것도 지금 가능하잖아요. 헹글라이더 타는 것도 그렇지만 그런 것 아니라도...
앞으로 원자전자 저것이, 지금 여러 수 만년동안 우리가 땅만 파먹고 살았는데 앞으로는 허공을 파먹고 사는 세상이 나온다 이겁니다.
허공 속에서 음식물을 전부 추출해서 먹고 사는 겁니다.
공장을 만들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담배 물줄기만한 것을 하나 가지고 빨아 당기면 그냥 다 될 뿐 아니라 그저 손만 펴면 그대로 슈퍼맨처럼 그대로 날 수도 있는 그런 일이 생긴다고 그랬거든요.
다 가능한 겁니다. 만화에 나오는 공상과학 공상만화 그것이 다 실지로 된답니다. 옛날 해저2만리 라는 영화. 그것이 50년 전의 공상과학 영화였는데 실지로 그렇게 되었거든요. 잠수함 같은 것도 다 그렇게 만들어졌거든요.
그것이 妙觀察智입니다. 묘하게 관찰한다 이겁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관찰하신다 이 말입니다.
成所作智라. 지은 바를, 짓는 바를 다 완성 한다 이 말입니다.
자기가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은, 한다고 했던 것은 다 되는 것은 成所作智입니다. 이와 같은 四智圓明(사지원명)입니다. 네 가지 지혜가 원명한 것이 부처님의 지혜다 그랬거든요. 그와 같은 지혜가 다 교만 중에 간직되어 있어요.
慢塵中에요. 교만이라고 할 것 같으면 세 가지라고 그랬지요.
我勝慢(아승만)ㆍ我等慢(아등만)ㆍ我劣慢(아열만). 그런 것이 다 교만 가운데 간직되어 있고, 我人山上에 長無明(아인산상장무명)이로다.
내다 네다 하는 我人山가운데, 산 위에 無明만이 잔뜩, 번뇌 업장만이 자꾸 자라나는 것이다.
輕他不學躘踵老(경타불학룡종노)하면 남을 업신여겨서 배우지 아니하고 빈둥빈둥 그렁저렁해서 해서 늙을 것 같으면, 躘踵이라는 것은 “그렁저렁”이라고 해도 되고,“찌뚝짜뚝”이래도 괜찮습니다.
발꿈치 踵자니까 히양대양하다가 늙어빠질 것 같으면, 노인네들의 걸음걸이가 온전치 않거든요. 躘踵이거든요. “비틀비틀.” 아무 것도 배운 것 없이, 공부한 것 없이 늙을 것 같으면, 배운 것이라는 것은 꼭 남한테 배운 것만이 배운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에게 배우는 것. 자기도를 닦는 것이 배우는 것입니다. 주인공한테 배우는 것이지요.
病臥辛吟恨不窮(병와신음한불궁)이니라. 병들어 누워서 신음할 때 한이 다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고 젊은 때 공부 좀 잘 해놓을 걸 갖다가, 젊은 때 내가 기도를 해서 부처님가피라도 입었으면 내가 이런 일 안 당했을 텐데, 젊은 때 참선이라도 잘 해가지고 한 소식 했으면 이렇지 않았을 텐데, 또 그뿐 아니고 기도 하고 참선해 가지고 위신력이 생기면 사람들이 그만큼 자기를 존경하고 받들잖아요.
늙어 가지고 상좌도 맹자도 하나도 없고, 상좌맹자가 한 둘이 있어도 애먹이는 놈이나 몇 개 있고 또 누가 봐 주지도 않고, 신도도 하나 없고, 자기 무시해 버리고 저 눔의 늙은이 뒤지지도 않고 자꾸 비실거린다고 이래보세요 그것 참 그것 기가 막힐 겁니다. 안 그러겠습니까?
타일랜드 같은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님네 라고 하면 무조건 대접받는 곳인데 주지스님이라면 “저쿤”이라고 그래가지고 굉장히 신도가 수백 명이고 주지스님을 부처님 떠받듯이 떠받들고 그러는데 자기가 주지스님 보다 나이가 더 먹고 주지스님이 자기 비구 때 행자로 들어 왔었다는 겁니다.
그랬다는 노장이 신도도 하나 없고 상좌도 없고 비실비실 해가지고 그런 노장들 더러 있어요. 태국에도 그래요. 우리나라도 그럴 수밖에 없지요.
요새 우리나라는 불교정화를 하고 난 뒤에 노장들이 극히 귀해져 버렸거든요.
지금 없거든요. 옛날 노장들은 다 대처승 되어버려서 다 가고 죽고 없어져서 지금 우리나라 종단이 일종의 신생종단처럼 되어 버렸거든요. 40년래에...
그래서 노스님들이 극히 없잖아요. 지금 이 산중에 노스님이라고 해봐야 혜암스님하고 저하고 주지스님하고 셋 밖에 없잖아요.
60넘은 사람 셋 밖에 없잖아요. 옛날에는 70. 80된 노장들이 꽉 찼었거든요.
그 가운데서도 위신이 있는 스님이 있고 위신이 없는 스님이 있는데 위신이 있는 스님들은 학문과 수도가 다 높으니까 배울 것이 있고 존경할 만한, 존경받을 만한 존재기 때문에 존경을 받는 것이고요.
아무리 무식하고, 무식했으면 참선과 수도라도 했으면, 기도라도 했으면 위신력이 생기는 것이거든요.
옛날 동월스님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인데 그런데 해인사의 암자인 希朗臺(희랑대)에서 기도를 하니까 나반존자를 열심히 부르는데 홀연히 그냥 비몽사몽간에 호랑이 한 마리가 입 안으로 탁 튀어들어 가더래요.
이것이 어쩐 일인가 싶고 배가 든든하더래요. 그래서 나와서 희랑대 바윗돌에 서서 “어험”이러니까 원당암 뒷산이 들썩하더래요. 소리가 커가지고요.
이래서 당장에 뱃심이 되게 생기거든요. 뱃심이 생기자마자 ‘내가 큰 절에 가서 주지를 한번 해야 되겠다.’싶은 생각이 나거든요.
그 전에야 감히 주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합니까?
그래가지고 큰 절에 내려가니까 산중공사가 벌어져가지고 지금 주지스님을 뽑는 중입니다. 거기 서서
“어험”하니까 대중들이 깜짝 놀라거든요.
“소승이 한 말씀 하겠습니다.”그러니
“예 예”하며 전부 무릎을 꿇거든요. 그전 같으면 '동월이 저거 무식쟁이저거' 누구 알아주나요? 아무도 안 알아주지요. 기도 신력을 입으니까 전부 무릎을 꿇거든요.
“주지 감을 멀리서 구할 것이 없지요.”이러니까
“예 예 스님이 주지하십시오.”그만 대번에 주지가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일자무식해도 기도 해가지고 그렇게 호랑이 한 마리 입에 들어가니까 그런 위신력이 생겼습니다.
이 만경스님은 희랑대에서 기도하다가 붓을 한 주먹 주더래요.
붓을 한 주먹 받고나니 글씨를 썼으면 싶어서 쓰니까 척척 추사체가 마음대로 써져가지고 이 만경스님이 근세에 해인사에서는 명필이잖아요.
제일 잘 썼잖아요. 본래 글씨 잘 쓴 분은 아닌데... 그런 겁니다.
여러분들도 글을 모르더라도 부처 佛(불)자 하나는 알 것 아닙니까?
부처 佛자 하나만이라도 자꾸 써 버릇하면 부처 佛자 명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없는 것 아닙니다. 다른 것 많이 쓸 것 없어요.
한 자만 쓰면 됩니다. 부처 佛자나 마음 心(심)자나 한참 한 만 번만 써 보세요. 명필이 되지요. 만 번만 쓰면 되는 겁니다.
옛날 스님네들도 글씨를 여러 가지 많이 쓰는 것이 아닙니다.
선사들은 한두 가지만 계속 쓰니까 그 글씨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 하거든요. 부처 佛자만 자꾸 쓰니까 부처 佛자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은 따라갈 재주가 없다 이 말입니다. 워낙 많이 쓰니까요. 능숙하거든요.
기도를 하든지 참선을 해서 턱 하니 수행력이 있으면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데 기도도 아니 하고 참선도 아니 하고 신심도 없고 신앙심도 없고 아무 것도 없으면 누가 알아줄 사람 별로 없지요. 늙어 가면 거치적거리기나 하지요. 빨리 안 죽나 하고요.
輕他不學躘踵老(경타불학룡종노)하면, 그럭저럭 늙으면
病臥辛吟恨不窮(병와신음한불궁)이니라. 병들어 누워서 신음할 때 한이 다 하지 못할 것이다. 病臥辛吟恨不窮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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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 40여년전, 20 쯤의 중이 담배를 사러 오니까 제가 건방지고 당돌하게도 “중이 담배를 왜 사느냐”고 해서 그 분을 당황하게 한 적이 있는데 오늘 저 법문을 녹취 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뒤에서 일타선지식님을 잡아당긴 사람이 또 하나의 저라는 생각이... 그리고 금테모를 쓴 사람은 저의 어머니의 철야정진 기도에 응하시는 관세음보살님이라는 생각이...
그 때 그 스님께 용서를 빕니다. 제주도 서귀포 천지연 입구 구멍가게였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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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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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凡有下心者는 萬福이 自歸依니라. 고맙습니다_()()()_
凡有下心者(범유하심자)는 萬福(만복)이 自歸依(자귀의)니라.ㅡ 무릇 하심 하는 자는 만 가지 복이 스스로 귀의 하느니라.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凡有下心者 萬福 自歸依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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