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교수는 한국 진화 심리학계(또는 사회생물학계)에서 가장 유명하다. TV에도 상당히 자주 나와서 이제는 대중에게도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것 같다.
최재천 교수가 한국의 진화 심리학계 또는
동물 행동학계를 위해서 여러 가지로 애써 왔으며 그것이 상당한 성과로 이어졌다는 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 치고는 이상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고 다닌다.
나는 지금까지 최재천 교수의 글과 번역(그리고 번역감수)를 비판한 글을 여러 편 썼다.
『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도정일∙최재천)』 비판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C80/7
어느 극좌파가
본 최재천 -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 비판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C80/12
어느 극좌파가
본 최재천 - 『여성 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비판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C80/13
어느 극좌파가
본 최재천 -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비판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C80/15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최재천 옮김)』 번역 비판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2Xi/49
『붉은 여왕(김윤택 번역, 최재천 감수)』
번역 비판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2Xi/39
최재천 교수와
한의학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SjO/302
이번에는 교과서 시조새 삭제 논란과 관련된
최재천 교수의 인터뷰를 비판하겠다.
"힘얻는 창조론, 내가 카이스트에 있었다면..."
[인터뷰]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창조론은 이론 아냐"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50445&CMPT_CD=P0001
최재천 교수는 창조론(창조설)이 검증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최재천 교수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에서 '이론'이라는 건 검증 가능한 것을 말해요. 실험을 하고 검증을 해야 비로소
하나의 이론이 되는 거죠. 창조설은 믿어야 할 성격의 것이지 과학의 영역에 가져다 댈 게 아니에요.
하느님을 대상으로 창조를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실험할 수 있겠습니까? '이론'이라는 단어가 원래 정의보다
폭넓게 쓰이는 경향이 있지만, 창조론은 이론이라기보다 창조 '설화'라는 이름이 적당한 게 아닌가 싶어요."
("힘얻는 창조론, 내가 카이스트에 있었다면...")
창조론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저명한 과학 철학자인 Larry Lauden의 이야기를 보자.
At various key points in the
Opinion, Creationism is charged with being untestable, dogmatic (and thus
non-tentative), and unfalsifiable. All three charges are of dubious merit. For
instance, to make the interlinked claims that Creationism is neither
falsifiable nor testable is to assert that Creationism makes no empirical
assertions whatever. That is surely false. Creationists make a wide range of
testable assertions about empirical matters of fact.
Thus, as Judge Overton himself
grants (apparently without seeing its implications), the creationists say that
the earth is of very recent origin (say 6,000 to 20,000 years old); they argue
that most of the geological features of the earth's surface are diluvial in
character (i.e., products of the postulated Noachian deluge); they are
committed to a large number of factual historical claims with which the Old
Testament is replete; they assert the limited variability of species. They are
committed to the view that, since animals and man were created at the same
time, the human fossil record must be paleontologically co-extensive with the
record of lower animals. It is fair to say that no one has shown how to
reconcile such claims with the available evidence—evidence which speaks
persuasively to a long earth history, among other things.
(“Science at the
Bar—Causes for Concern”
Larry Laudan
https://webspace.utexas.edu/kal698/science%20at%20the%20bar.pdf)
창조론은 온갖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들 중 일부는 검증이 가능하다. 예컨대 창조론자는 종이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종이 변할
수 있으며 변해왔다는 진화론자의 주장과 충돌한다. 따라서 과학의 영역에서 논할 수 있다. 다만 오래 전에 이미 확실히 반증되었기 때문에 현대의 과학자들이 별로 관심이 없을 뿐이다. 하지만 대중과 학생들에게는 여전히 의미 있는 논쟁이다. 왜냐하면
여전히 대중 속에서 창조론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재천 교수는 창조론자들을 아예 상대해
주지 않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한다.
최 교수는 주변에서 통섭원의 심포지엄 주제로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을 다뤄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반대했다고 밝혔다.
"현대 진화론의 두 거장, 리처드 도킨스와
스티븐 제이 굴드는 학문적으로 앙숙이었지만 딱 한 가지 합의에 도달한 게 있었어요. 바로 창조론을 배경으로
하는 지적 설계론자들의 주장에 반응하거나 행동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지적 설계론자들이 아무리
논의의 판을 키우고 싶어도 진화론자들이 아예 상대를 해주지 않으니 이슈가 안 될 수밖에요."
논쟁이 계속되면 사람들이 진화론을 '검증된
과학적 사실'이 아닌, 창조론과 동일 선상에 놓고 다뤄져야
할 이론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힘얻는 창조론, 내가 카이스트에 있었다면...")
내 생각은 조금은 다르다.
물론 창조론자들과 저명한 과학자들이 토론을
벌이면 이용만 당할 가능성이 있다. 창조론자들이 “거 봐라. 저명한
과학자들도 이런 토론에 관심을 보이지 않느냐? 여전히 진화론/창조론
논쟁은 과학계의 이슈다”라는 식으로 광고할 가능성이 있으며 외국에는 그런 전례가 있다.
하지만 국민의 상당 비율이 진화론보다는
창조론을 믿는 상황에서 저명한 과학자가 나와서 국민을 계몽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다만 방식을 잘 골라야
한다.
최악의 방식부터 이야기하겠다. 저명한 과학자들과 창조론자들이 아주 소규모 토론회에서 토론을 하고 이 토론은 수십 명의 방청객만 볼 수 있게
하는 방식이 최악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창조론
논쟁에 저명한 과학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을 광고할 수 있으며 이 토론의 내용은 고작 수십 명의 청중들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최선의 방식은 무엇인가? 토론 과정을 공중파에서 생중계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 토론의 내용을 볼 수 있다. 창조론자가 과학자에게 무참히 깨지는 모습이 생중계되면 “과학자들이
여전히 진화론/창조론 논쟁을 유효한 논쟁이라고 본다”는 식으로 떠들고 다니기 힘들 것이다. 물론 그런 생중계를 통해서 커다란 계몽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생중계를
하지 않더라도 “편집 없이” 방송하기로 계약을 해야 한다. 만약 창조론자들이 방송 내용을 편집하면 토론
내용이 엄청나게 왜곡될 수 있다.
아래 내용은 이번 인터뷰에서 가장 걱정스럽다.
'가장 강한 종자가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 개념은 영국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의
최적자 생존(survival of the fittest) 개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이 개념이 다윈의 것으로 잘못 쓰이고 있다. 다윈은 가장 강한 개체만 살아남는다고 말한
일이 없고, '더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는다(survival of
the fitter)'고 주장했다고 한다. 최 교수는
"최고가 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수준의 적응력만 가지면 모두 공존하고 배려하며 살 수 있다는 게 진화론에 담긴 교훈"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다윈의 이론은 남을 이해하고 손을 잡은 개체들이 경쟁에서 이겼다는 것을 알려주죠. 공생하지 않는 생물이 살아남은 경우가 없습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공존의 지혜를 아는 것입니다."
("힘얻는 창조론, 내가 카이스트에 있었다면...")
스펜서가 먼저 그런 표현을 썼다 하더라도
“NATURAL SELECTION; OR THE SURVIVAL OF THE FITTEST”는 『종의
기원』 6판 9장의 제목이다. 즉 다윈이 그런 표현을 받아들였다. 물론 “survival of the fitter”로 해석하는 것이 다윈의 이론에 더 부합하겠지만 다윈이 “survival of the fittest”라는 표현을 썼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최고가 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수준의 적응력만 가지면 모두 공존하고 배려하며
살 수 있다는 게 진화론에 담긴 교훈”이라는 말은 정말로 걱정스럽다.
이 문장은 과학의 교권과 도덕 철학의 교권을
부당하게 짬뽕하고 있다. 즉 사실 영역의 명제에서 당위 영역의 명제를 부당하게 도출하고 있다. 최재천 교수는 이전에 호주제 문제와 관련하여 비슷한 오류를 범한 적이 있다.
「어느 극좌파가 본 최재천 - 『여성 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비판」를 보시라.
“일정한 수준의 적응력”을 가지지 못한
장애인의 경우에는 공존과 배려에서 제외해도 된단 말인가? 그것이 진화론의 교훈인가?
최재천 교수는 진화론과 관련하여 온갖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최재천 교수를 보고 진화 심리학자들의 수준이 그것 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대체로 최재천 교수처럼 바보 같이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지는 않는다.
최재천 교수는 개미학자이며 그 분야에서
상당한 업적을 쌓은 듯하다. 하지만 진화 심리학은 제대로 배운 것 같지 않다.
이덕하
2012-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