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산연씨와 강원도
1. 정후공과 강원도
우리 문중과 강원도의 첫 인연은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세종8년(1426년)에 김도련에게 노비를 증여 받은 대신들이 문제가 되어서 대간의 탄핵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이 때 관련된 대신이 3명인데 조연(세종조 우의정), 조말생(세종조 병조판서)과 정후공(연사종)이다. 이 때 조연은 황해도 수안, 조말생은 충청도 회인, 정후공은 강원도 인제에 중도부처(벼슬아치에게 일정한 장소를 지정하여 머물게 한 형벌. 귀양보다는 가벼운 징계임)되었다. 그러나 조연과 정후공은 공신에 대한 예우로 곧 복귀되었으며, 조말생만 직첩이 회수되었다.
즉, 아름답지 못한 인연이기는 하지만, 우리 문중의 태두이신 정후공께서 강원도 인제 땅에 잠시 거처하신 것이 역사에 나타난 우리 문중과 강원도의 첫 인연이었다.
2. 상주공과 강원도
세종 14년(1432년)에 강원도 흡곡현령으로 있던 상주공(연비) 선조가 최치의 양곡 부정 사건을 조사하는 문초관으로 등장한다. 흡곡은 지금은 북녘에 속하는 강원도 통천군으로, 상주공 선조께서는 이곳에서 현령으로 재임하신 것이다.
한편 상주공 선조는 세조 6년에는 흡곡현령으로 재직할 당시의 공적으로 인해 청백리로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3. 입향조 부사용(태조)공과 부호군(영노)공
곡산연씨 19세 大宗孫인 연여옥(관직 부사직)은 슬하에 두 형제를 두었으니 장남이 만갑(萬甲)이고, 차남이 만을(萬乙)이다. 두 형제분의 묘소는 서울 하계동 정후공(연사종) 산소 경내에 있다. 그로 보아 우리 문중의 20세 대종손까지는 서울에 거주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21세 大宗孫인 연태노(관직 부사용, 연만갑의 장남)의 묘소는 강원도 원주 유곡에 있고, 연영노(관직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 연만을의 장남)의 묘소는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에 있다. 이후 태노 선조의 후손들은 원주(원주화수회의 뿌리)에, 영노 선조의 후손들은 홍천(강원도화수회의 뿌리)에 세거하게 된 것이다.
즉, 연태노․연영노 형제분들은 각각 원주와 홍천에 곡산연씨의 뿌리를 내린 입향조(入鄕祖)이다. 관직에 있던 두 형제분이 함께 서울을 떠나 아무 연고가 없는 강원도에 정착한 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300여 년 전의 일이고 기록을 찾을 수 없으니 자세한 내력을 알 수가 없다.
문중의 전승에 의하면 선조들께서는 사화(士禍)를 피해서 피신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화가 무엇인지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태노 선조의 출생한 연도인 경인(庚寅)년이 서기 1650년이나 1710년이라고 가정할 때, 아우 분의 연치도 비슷하리라고 유추하고 그 무렵의 역사를 상고하여 추측해보겠다.
숙종 19년(1693년)에 의민공(연최적 1663~1693년. 조선 숙종조의 문신)께서 숙종이 구언교(求言敎 : 임금이 신하들의 조언을 듣겠다는 교시)를 내리자, 이에 인현왕후 페위의 부당성과 당시 화를 입은 자들의 용서를 상소한 사건이 있었다. 의민공께서는 장희빈을 총애하던 숙종의 노염을 사서 심한 국문을 당한 끝에 옥사하였다. 역적은 삼족을 멸하는 당시의 사회에서 문중의 동량이 어전에서 고문 끝에 돌아가신 것은 두려움을 느낄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태노․영노 선조와 사촌 형제분들의 낙향 원인이 되어, 강원도에 곡산연문이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으리라고 본다.
4. 부사용공과 원주 문중
강원도 원주에 자리잡은 태노 선조의 후손들은 자손이 번창하지도 못했고, 종손이 연이어 절손이 되어 충청도 문중에서 입양을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31세 종손 일가가 문중세가 강한 증평으로 이전하는 등 크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1997년 7월 8일 연규성 씨의 발기로 10명의 문중 인사(규성, 명식, 정만, 준흠, 창희, 영흠, 일모, 흠석, 성진, 성모)가 곡산연씨원주화수회를 창립한 이래 10여년을 넘기는 연륜을 쌓아왔다. 곡산연씨원주화수회는 월례회를 비롯하여 화수회보를 통해 문중사를 연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5. 부호군공과 홍천문중
홍천에 터를 잡은 부호군공(영노) 선조의 후손들은 나름대로 문중을 형성하며 뿌리를 내렸다. 기미만세운동 때 동창 팔열사(八烈士)의 일인인 의진(일명 의희), 정후공 영당 건립을 주도했고 한학(漢學)으로 문명을 떨쳤던 본원문예박사 규식, 서석천주교회의 초대회장으로 신앙의 씨를 뿌렸으며 금강운수․대한교통․강원운수 서석 종합영업소장을 지낸 규필, 내촌․서석․창촌․두촌 우체국장을 역임한 두흠, 강원도화수회의 산파역을 맡았고 삼척맹방․홍천서석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재흠씨 등이 나름대로 지역에 알려진 인사이다.
특히 홍천 문중은 우리 연문(延門)으로서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홍천 문중의 선조들은 정후공의 종손이라는 긍지를 갖고 정후공의 영정을 황해도 곡산에서 1933년에 모셔와서 영당(影堂)을 설립하고 1950년대까지 시제를 봉행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문중세가 약해지자 시제마저 제대로 모시지 못했고, 끝내 영정은 금당서원으로 옮겨졌다. 즉 정후공의 관향인 곡산에 있던 영정이 현재의 금당서원에 안치되기까지 홍천 문중의 큰 역할을 한 것이다.
6. 곡산연씨와 춘천화수회
강원도의 수부인 춘천에는 홍천과 외지의 문중인들이 터를 잡기 시작하였다. 이에 초대 회장 연봉희 씨 등이 주축이 되어 1990년대를 전후하여 춘천화수회를 설립한 뒤 현재에 이르고 있다.
7. 강원지회의 발족
강원도 원주는 100여 년에 걸쳐서 대종손이 거주했던 곳이다. 아울러 불미스런 기록이기는 하지만 정후공 선조께서 1426년에 유배생활을 하시던 곳이 강원도 인제군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 강원도는 문중 역사에 있어서 연구할 가치가 높은 지역인 셈이다.
한동안 어려움에 처했던 홍천문중은 1982년 1월에 총회를 소집하여 임원진(회장 재흠, 총무 규봉)을 구성하면서 홍천문중을 <강원도화수회>라고 정하고 1986년에 숭조각(崇祖閣) 건립 및 합동시제 봉행․합동 벌초일 지정․애국지사 의진묘소의 성역화․종친 상호간의 친목행사와 대동종친회와의 연대 등의 사업을 전개하며 숭조상문의 마음을 다져 왔다.
그러던 중 2007년에 곡산연씨 강원지회(초대지회장 연재흠)가 강원도화수회, 춘천화수회, 원주화수회를 모태로 발족되었다. 강원지회는 각 화수회와 유기적인 협조와 지원 속에서 팔열사로 이름 높은 애국지사 의진공 묘소의 성역화를 추진하는 등 힘찬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첫댓글 연 제철(천리향님)! 이렇게 귀중한 문건을 잘보고 보관하겠습니다.
현재의 금당서원에,,,,,,,,,는,,,,,,,, 충북 증평군 도안면 도당리 금당에 있는 정후사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