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담>-황홀한 공포의 미학
1979년 10월.
한 의대 강의실.
스크린에 오래 된 뇌수술 장면이 비춰지고 있다.
(감독 정가 형제는 리얼리티를 위해 1941년 기록 영상을 당시 사용되던 16mm카메라로 직접 촬영했다고 한다)
영사기가 멈추고 강의를 시작하는 박정남 교수(전무송 분).
영상 속 일본군 대장을 수술한 집도의는 신경외과 최고의 권위자 김동원 교수(김태우 분).
(박교수 가슴의 상장이 눈에 띈다. 그는 얼마 전 두 번째 아내를 잃었다)
강의가 끝나고 그는 잡초 무성한 안생병원을 찾는다.
몇 십년 동안 폐허로 방치되었던 병원은 오늘 저녁 헐릴 예정이다.
집으로 돌아와 딸(엄지원 분)과 식탁에 마주앉은 박교수 옆에 옛 일본식 교복 차림의 소녀가 다가와 앉는다.
(바로 이어지는 컷에서 그녀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37년 전 겪었던 단 나흘간의 기이한 체험은 그의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를 따라다닌 것이다.
'그 날 저녁, 나는 죽었다'
1942년 2월.
경성 최고의 서양식 병원인 안생병원.
의대 실습생 정남(진구 분)은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병원장(예수정 분)의 딸 아오이(여지 분)와의 정략결혼을 앞두고 있다.
혼인을 서두르는 병원장의 태도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정남은 후견인인 병원장의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병원장은 온화하게 미소 띤 얼굴로 그의 삶을 결정해 버리고 정남은 무기력한 표정으로 그 '온화한 폭력'을 받아들인다)
심약한 정남은 홀로 시체실 당직을 서다 천재 의사 이수인 교수(이동규 분)의 장난으로 거울을 깨뜨리는 실수를 하고 만다.
(시체실에서는 절대 거울을 깨뜨려선 안 된다는 속설이 있다. 불길한 징조다)
그리고 그 때 '선녀를 박제해놓은 듯' 아름다운 여고생의 시신을 본다.
(이 영화의 효과음은 '청각적 공포'가 주는 긴장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활로 금속을 긁어대는 듯한 마찰음은 시체실의 섬뜩한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얼어있던 소녀의 시신이 녹으면서 그녀의 손가락에 끼어 있던 반지가 마룻바닥에 툭 떨어진다.
정남은 그 반지를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다시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준다.
(원치 않는 정략결혼을 해야 했던 그녀는 정인과 함께 강물에 몸을 던짐으로써 자신을 옥죄는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그리고 밝혀지는 충격적인 진실.
자살한 소녀는 정남의 약혼녀 아오이였고, 병원장은 정남 몰래 두 사람의 영혼 결혼식을 올려버린다.
딸은 죽어서도 어머니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자정을 알리는 괘종시계소리와 함께 정남은 섬뜩한 환상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소녀의 영혼과의 첫날 밤, 함께 살면서 겪을 평생의 경험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표현 된 인생의 4단계)
소름끼치는 서사 속에 지극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황홀한 공포의 미학.
그 즈음 병원에 여자아이가 실려들어온다.
교통사고로 가족이 다 사망한 가운데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아사코(고주연 분)가 보는 공포스런 환상은 다름 아닌 어머니(박지아 분)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여전히 회자되는 '엄마 귀신'의 존재는 <링>의 사다코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강렬하다. 공포영화의 미덕은 뭐니뭐니해도 '무서운 귀신'이 아니던가!)
어린 시절 사고로 다리 한 쪽을 저는 수인은 아사코를 위해 약물과 정신과 치료를 병행한다.
수인이 아사코에게 느끼는 공감은 어릴 적 자신 때문에 죽은 형으로부터 기인 된 죄책감이다.
아사코와 어머니, 그리고 새아빠(데이비드 맥기니스 분)의 감정은 묘한 삼각관계를 이룬다.
(엘렉트라 콤플렉스, 아이의 질투심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죽이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어머니는 죽어가면서 속삭인다.
"괜찮아, 아사코 잘못이 아니야"
아사코의 죄책감은 결국 외상 하나 없이 멀쩡한 그녀를 죽음으로 이끈다.
그리고 아사코의 영혼에 붙들린 수인도 그녀의 새아빠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
외과의사 김인영 교수(김보경 분)는 경성 살인사건 피해자인 일본 병사의 시신을 부검하고 있다.
동경 유학 중 귀국한 그녀는 최근 남편 동원과 함께 새로이 경성 생활을 시작한 참이다.
그들 부부가 머무는 목조 저택은 이국적이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동원이 인영에게 보여주는 그림자 놀이 장면은 꿈을 꾸듯 아름다우면서도 두 사람에 얽힌 슬픈 비밀을 풀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한다.
'난 그 때까지도 아내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놀이 도중 인영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동원은 아내를 범인으로 의심하지만 '절대로 헤어지지 말자고, 귀신이 되도 그녀 옆에 있을 거라고' 약속한다.
어느덧 피해자는 세 명으로 늘어나고 동원은 점차 자신의 다중인격을 의심하게 된다.
동원의 자수 전화를 받고 저택에 도착한 아키야마 소좌(김응수 분)가 인영에게 그의 소재를 묻자 그녀는 남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미쳤어, 완전히 미쳤어"
인영은 아키야마를 밀치고 도망친다.
편의상 세 가지 에피소드를 각각 나누어 서술했지만 이 이야기들은 모두 나흘이라는 시간과 안생병원이라는 공간 속에서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히 얽혀 있다.
딸의 영혼 결혼식을 마친 병원장은 원장실에서 목을 멘다.
피를 흘리며 병원으로 실려 온 수인은 죽음에 이르기 직전 아사코의 환상을 본다.
'아저씨, 사랑해요'
새아빠를 향하던 아사코의 집착이 수인에게로 옮겨진 것이다.
동원은 자신 안에 죽은 인영이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 1년 전 동경에서 죽은 사람은 인영이 아니라 동원이다.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인영은 자신의 인격 속에서 스스로를 죽여 사랑하는 동원을 되살리고 무의식중에 일본 병사들을 살해했던 것이다.
"쓸쓸하구나"
죽어가며 내뱉는 인영의 낮은 탄식은 사랑하는 남편의 존재가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허무한 깨달음이다.
인영의 죽음 위로 흐르는 슈베르트의 가곡 '들장미'는 쓸쓸하면서도 숭고한 느낌을 준다.
"여보게, 이렇게 날 외롭게 만들거였다면 차라리 그 때 날 데려가지 그랬나"
37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아오이에게 늙은 정남은 슬픈 목소리로 말한다.
안생 병원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외로운 두 사람의 영혼은 비로소 다시 만난다.
<기담>은 아름다운 공포영화다.
혹자는 이 작품이 '왜색이 짙다'고 표현하지만 일제강점기 말기의 시점이니 그리 무리한 일도 아니다.
화가로서의 꿈이 박제 된 정남의 무기력함은 제국주의에 주눅 든 시대상을 반영한다.
무의식중에 일본군을 살해하는 인영의 파괴된 인격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미장센은 고풍스럽고 우아하다.
탄탄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선혈이 낭자하지 않아도 충분히 공포스럽다.
내 마음 속에서 <기담>은 어떤 면으로는 <장화, 홍련>의 완벽함을 능가한다.
멋진 영화다.
글/배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