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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를 위한 법화경강의 제11강 1
(無比 큰스님, 문수선원, 2008년 11월 7일)
2. 방편품 64-67
부처님의 많은 가르침 중에서 법화경은 부처님 가르침의 완성이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짧은 이야기를 한 마디 하더라도 우리가 서론이 있고 본론이 있고 결론이 있고 그렇지요. 법화경은 그런 서론 본론 결론에다가 비교를 하면은 결론에 해당되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의 팔만대장경 그 많고 많은 가르침 중에서 완성단계에 이른 가르침이고 그래서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결론의 내용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그 결론이며 또 부처님 교설의 완성이 무엇인가?
매 시간 우리가 법화경 공부할 때마다 말씀드리는 것이고 또 되뇌어 생각을 합니다만은 이것이 우리가 자꾸자꾸 말로 하고 귀로 듣고 들은 것을 사유하고 명상해서
그것을 생활에 적용시켜 보는 것 그것이 이제 문(聞) 사(思) 수(修) 삼혜(三慧)라고 그러지요.
듣고 들은 것을 깊이 사유하고 명상하고 그게 참선입니다.
그 내용을 깊이 사유하는 게 그게 참선이거든요.
그 다음에 수(修)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그건 이제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그렇게 삼단계를 이야기 하죠.
그러면은 결론으로써의 법화경의 종지(宗旨)
그것은 곧 회삼귀일(會三歸一)이다.
그동안 팔만대장경에서 많고 많은 가르침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삼승이다. 그런데 그 삼승의 가르침을 일승 일불승으로 귀결시키는 것이
말하자면 법화경의 종지고 또한 팔만대장경의 결론이고 또 부처님께서 열반을 앞두고 최후로 우리 인류에게 던져주고자 하는 마지막 한 마디 말씀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일불승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결국은 이제 “사람이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그것 밖에 달리 다른 것 없어요. 그리고
사람이 부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아는 데는 다른 방법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슨 참선을 한다고 그게 특별히 알아지는 것도 아니고 또 무슨 육바라밀을 오랜 세월동안 닦아야 된다고 하는 그런 것도 결코 아닙니다.
물론 그런 조건을 필요로 하는 교설들이 많지요. 그동안 많았습니다. 그러나 법화경 공부를 하는 입장에 와서는 이제 그런 근기들을 상대하는 것들이 아니라
교보살법 (敎菩薩法) 불소호렴(佛所護念) 법화경을 가르치는데 그런 말씀을 해요.
최고 수준에 이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법화경이고 그것은 부처님께서 정말 가슴에 묻어두었고 아껴두었고 정말 언젠가 이 이야기를 할 때가 무르익어야
내가 이야기를 할 그런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하고나서 비로소 하게 되는 그런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동안은 이제 섣불리 그런 이야기를 못했고
그래서 여기 와서 이야기를 한다 하는 것인데.
가을이 되니까 그런가, 내 주변에 오늘도 범어사 스님인데 지금 큰절에서는 영결식을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 어제 그저께는 내가 이 주변에 선지식으로서 옛날에 범어사 내원암도 오래 계셨고, 범어사에 오시면 꼭 연세는 나보다 많이 높지만은 꼭 내한테 찾아오셔서 이런저런 말씀도 나누시고 그러던 대덕사 지원스님께서 그저께 또 열반을 하셔가지고 영결식에도 갔다 오고 그랬습니다.
그 스님은 설봉스님의 제자로서 그야말로 설봉스님의 아주 대표되는 제자이신데.
상당히 지견이 높으신 분이었어요 설봉스님 하면은 정말 그 당시 선지식으로서는 누구도 당해낼 수 없을 정도로 지견이 높았고, 학식이 풍부했고 그랬던 분입니다. 설봉스님이라고 그 스님이 지금 지원스님의 스승 되는 스님이신데
설봉스님에게는 참 따라다니는 이야기가 많아요. 머리도 참 총명하고 학식도 풍부해가지고 선문염송이라고 하는 아주 어려운, 최고로 어려운 그런 어록을 현토, 토를 전부 달고, 그 토 단 것을 가지고 출판하는 데 교정을 누가 보는고 하면은 탄허스님 하고 운허스님 하고 관응스님 이 분들이 그 교정을 볼 정도로 뛰어난 분이예요.
먼저 현토는 설봉스님이 하셨고, 그 현토한 것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그런 천하의 대강백들이 교정을 봐야할 정도로 그렇게 뛰어난 선지식의
제자였어요 지원스님께서.
그래서 선문촬요도 출판하고 이런 저런 업적도 남기시고 그랬는데 어쨌든 그렇게 모두들 때가 되니까 시절인연이 도래해서 그렇게 한 분 두 분 가시는데
요컨대 이제 모든 사람이 다 그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좋든 싫든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든 안하든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런데 이제 단 조건은 법화경을 우리가 만나고 부처님 법을 만나고 부처님 법 중에서도 최상승법을 만난 이상은 자신이 부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는 그거예요. 그거 하나 알고 가면은 괜찮아요.
자신이 부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가지 못하면은 그건 불행하다. 만약에 어떤 처지에서 살더라도 자기 자신이 부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가면은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성공한 인생이고 누구보다도 정말 다행한 사람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간곡하게 중생들에게 일러주기를
'너희들은 본래 거부 장자다. 그런데 왜 거지로 사느냐? 거부장자이면서 거부장자인 줄 알고 살아야지 왜 거지인 줄 알고 그렇게 사느냐 그게 안타깝다.'는 거지요.
그런 비유가 여기 뒤에 나옵니다.
나오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거부장자'라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아주 훌륭하고 위대한 능력을 갖춘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에 비유를 했고, 거지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 인간을 아주 못난 존재 뭐 어떤 ‘하나님의 종이다’ 라고 하는 그런 존재, 또 ‘업장 많고 죄업 많은 중생이다’ 라고 하는 그런 존재로 이해하고 사는 것을 ‘거지로 산다’고 하는 거예요.
물론 방편으로 그런 이야기 잠깐 할 수는 있습니다. 또 방편으로 한 그런 말이 사이사이에 있어요 사실은. 경전 속에도 많습니다. 여기도 보면은 부처님의 방편을 제외하고는 말하자면 일불승을 가르쳐야 된다 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수차 나오는데,
그래요 방편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은 있지만은 정말 제대로 진리를 깨달으신 부처님이시고 또 진리를 깨달은 선지식이라면은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알고
그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이해시킬 줄 아는 사람이 진짜 부처님이고
그게 진짜 선지식이예요.
또 그 사람이 진짜 불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 사람은 불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니고 진짜 선지식이 아니예요. 그걸 가지고 판단하면 됩니다.
내가 가끔 비유를 들지만은 고려청자를 가지고 수 억짜리 고려청자를 가지고 눈이 어두우니까 개밥그릇으로 사용하거든요. 그래서 알루미늄 장사한테 그걸 맞바꿔 버려 그걸. 돈을 몇 푼 더 얹어주고 바꿀 정도야. 눈이 어두우면 그런 거야.
이제 우리 중생들을 정말 죄업 많고 업장이 많고 지금 현재 눈앞에 벌어져 있는 어떤 그런 상황들만을 보는 거야. 그래서 이건 뭐 누구의 종이니 죄업 많은 인간이니 이런 식으로 아주 낮춰보고 천시하고 그 가격을 낮춰서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보는 것은 이건 이제 삿된 견해고 정말 잘못 보는 것이고 전도된 견해다.
그걸 그렇게 보지 않고 그야말로 개밥그릇으로 취급하던 것을 고려청자, 수 억짜리 고려청자인 줄로 아는 사람이 그 사람이 눈 밝은 사람이야. 그 사람이 불교를 아는 사람이고 진짜 선지식이고 그 사람이 진짜 부처님이야.
그래서 그런 교설을 법화경은 가득 담고 있는 거죠.
시종일관 그 이야기인데 그래서 저 뒤에 가면 오불장이라고 하는 데가 있죠. 오불장 나왔나? 오불장이라는 게 뭡니까?
과거부처님도 그렇게 이야기 했다.
현재부처님도 그렇게 이야기 했다.
그리고 미래 부처님도 그렇게 이야기 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그렇게 이야기 했다. 그리고 그 외 제불장 모든 부처님이 다 똑같이 그렇게 이야기한다 이거거든요.
오불장의 의미가 상당히 그게 뜻이 깊습니다. 그렇게 다섯 종류의 부처님을 거론해 버리면 끝나는 거예요.
과거, 현재, 미래, 이 세상 모든 부처님은 모든 깨달은 사람들은 그 속에 다 포함되니까. 그럼 이제 그 분들이 한결같이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일깨워주는 거야. 그렇게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은 진짜 부처님이 아니야.
간혹 부처님이 방편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실 수는 있어. 그건 경우에 따라서 그런 방편을 썼지만은 그건 부처님의 속마음은 아니거든요? 속마음은 아니란 말예요.
어린아이 우는 것을 달래기 위해서 당신은 한 번도 호랑이 보도 못했으면서도 밖에 호랑이 왔다 라고 하는 그런 부모의 마음으로 그렇게 방편을 쓸 수는 있어.
그런 방편을 제외하고는
정말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일깨워 줄 줄 아는 사람이
그 사람이 진짜 선지식이고 진짜 불교를 아는 사람이고 진짜 부처님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어요.
그게 이제 뭐 여러 가지로 비유를 들고 내가 전번에도 말씀을 드렸는가.
우리나라 대표 선사, 국민선사, 성철선사는 이 세상에 누구보다도 정진을 피나는 정진을 하셨고 또 책을 읽은 것으로 치면은 이 세상 역사상 어떤 사람보다도 책을 제일 많이 읽었습니다.
머리가 얼마나 영리한고 하면은 한 번 보면 그냥 다 외워요. 서울에서 어떤 학생이 육조단경을 세 번 읽고 외웠대. 세 번 읽고 외웠는데 그걸 수좌들에게 이야기 하면서 “저 놈이 육조단경을 세 번 읽고 외웠는데 크게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런대로 머리 괜찮제?” 우리 보고 이러는 거야. 그런대로 머리 괜찮제 이래. 세 번 읽고 외웠다니까 당신 마음에 썩 차진 않는 거야 세 번 읽고. 당신은 그런 사람이라.
그런 머리를 가지고 팔만대장경 다 외우고 당신 시대에 오기 까지 온갖 서적들,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서적들, 조사스님들의 어록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문학전집도 다 읽었고, 무슨 뭐 서양철학자 아리스토 텔레스나 무슨 뭐 칸트나 니체나 이런 사람들 다 읽었고, 또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대적으로 불교를 잘 정리한 사람들이 일본학자인데 성철스님보다 조금 선배되는 사람들이예요. 우정백수라는 사람들 영목대졸이라고 서양에서는 달마대사 같이 취급하는 스즈끼라는 그런 분이 있어요. 그런 분들 다 읽었지.
그분들의 업적이 훌륭한 것이 안목이 높다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은 서양학을 공부하고 불교를 이 동양학을 서양의 학문으로 최종정리한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야, 그래서 업적이 상당히 있는 거야. 그래서 불교학을 연구하는 데는 일본사람들의 연구를 따라갈 수가 없고 또 그 분들이 연구한 것을 그대로 답습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런 업적이 있는 학자들이라. 대단하거든요.
내가 그 전에 ‘불교공부를 하는데 무슨 책 읽어야 됩니까’ 하니까 ‘우정백수의 불교대전을 읽어라.’ 내가 그 책을 구했는데 이렇게 두꺼운 거야. 700페이지인가 800페이지 깨알 같은 글씨로 그렇게 되어 있는 거야. 그걸 읽으라고 하더라고. 그런 정도로 당신은 그거 다 독파해.
뿐만 아니라 연령소급하는 최면술에 대해서도 박사야. 얼마나 거기에 취미가 있는지. 또 물리학에 대해서 또 아주 취미가 있고, 책을 얼마나 많이 봤는지 몰라. 상대성 이론 같은 거 뭐 이거 거의 박사경지에 이른 정도야. 그래 물리학 서적이라든지 최면술 이론이라든지 이거 다 섭렵한 분이야.
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에서 새로운 발명이라든지 발견 그것이 전부 캐논보고서라고 하는 책에 다 실리거든요. 캐논보고서를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받아보는 분이 또 그 스님이야. 그런 정도로 현대서적이라든지 중간시대의 서적이라든지 서양 철학자 서적이라든지 심지어 세계문학전집까지도 그건 내가 직접 도서관에 가서 내가 같이 당신 도서관을 이렇게 돌면서 세계문학전집이 있어서 보고 “스님 저거 읽었습니까?” 내가 평소에 문학전집에 취미가 있어가지고 나도 내 딴에는 읽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거기 떡 있더라고요. 그래 물어보니까 “뭐 쫌 읽었지.” 뭐 쫌 읽었지 하는 정도면 당신은 다 읽었다는 뜻이라고요. 그런 정도예요.
그런 분의 결론이, 정진 피나게 했지. 또 온갖 옛날 경전 어록 그리고 동서고금의 철학서적, 문학서적 심지어 심리학 칼 융 이니 무슨 꿈 해몽한 사람 누구야? 그 사람이니 전 번에도 이야기 했지만은 그런 등등 서적 전부 싹 섭렵합니다. 섭렵않고는 못배기는 사람이라. 성격이 그래 돼 있어. 워낙 총명하고 영리하고 책보기를 좋아하고. 새로운 어떤 학설이 있다든지 학문이 있다든지 하면 그거 안 보고는 잠을 못자는 분이니까.
공자 맹자 노자 장자는 말할 것도 없고 그거야 기본이고
그런 분의 결론이
결국은 사람이 부처님이다 하는 거예요.
여러 번 당신 종정되고 초파일 봉축 법어에 보면은 거의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어요. 교회에서 찬송가 부르는 부처님 공장에서 땀 흘리는 부처님 저 저 밭에서 일하는 부처님 한결같이 부처님이라고 모든 사람을 조건 없이 부처님이라고 한 거예요.
그 분들이 무슨 불교 알아듣는다고 해서 부처님이고 육바라밀 닦았다고 부처님이고 참선해서 도통했다고 부처님이고 아니야.
그런 조건 없이 현재 그 모습 그대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 스님이 평생공부로써 최고 공부 많이 하신 내가 알기로는 최고로 공부 많이 하신 분이라.
그분의 결론으로써 그렇게 사람이 궁극적으로 부처님이다.
아무 조건 없다. 이게 그 분의 평생 공부의 결론이고 부처님 평생 설법의 결론이 역시 법화경이요 법화경 한 마디는 사람이 부처님이다 하는 그런 내용이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이제 우리가 얼마만치 가슴에 와 닿고 나의 인격이 되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이게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해요.
그러나 그것이 결론인 것을 우리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법화경은 그러한 것이 우리가 쉽게 마음에 와 닿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폭탄선언을 하는 데 있어서 오천 명이 자리를 물러 박차고 나갔잖아요. 여기 중송에도 금방 곧 나옵니다만은
그게 쉽게 마음속에 와닿지가 않는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오천 명이 부처님이 설법하는 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하는 그 이야기는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지요.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오근(五根)으로 오천 명이라고 하는 그 의미를 뜻을 풀이하자면은 오근으로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코에 냄새 맡는 것, 비 설 혀로 맛볼 수 있는 것, 몸으로 닿는 촉감, 감촉할 수 있는 것, 그건 어떤 바보도 그거 다섯 가지 감각은 다 가지고 있고, 다섯 가지 감각을 통해서 다 보고 듣고 느끼는 거거든요.
이렇게 눈으로 보고 저 사람 잘났다 못났다 크다 작다 흐렸다 개었다 다 아는 것 아닙니까? 이런 것만을 가지고 분별 하고 거기에만 인간의 모든 가치를 두고 살았던 사람들은 이거 “사람이 부처님이다”라는 거 이해 못한다 이거예요.
차라리 나무로 깎아낸 부처를 부처라고 볼지는 몰라도 살아있는 사람은 진짜 부처는 부처로 볼 줄 몰라.
저 법당에 부처가 부처지 왜 내가 부처냐, 이렇게 나오는 거지. 지금까지 우리가 거의 그렇잖아요 사실은. 거의 그런 수준이거든. 그러니까 이제 오근으로 밖에 어떤 삶의 가치와 인간의 가치를 알 수 밖에 없었던 그런 수준의 사람들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이해가 안 된다 그런 뜻으로 봐야겠지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는 법화경이 다할 때까지 아니 불교가 다 할 때까지 이 이야기는 계속 해야 돼. 이게 불교의 처음이고 중간이고 사실은 끝이야. 처음도 그것이고 중간도 그것이고 끝도 그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이것이 우리 가슴에 언젠가 와 닿아야 되고 또 이것이 내 살림살이가 돼야 되고 이 사실 하나 알고 죽자 이거야. 이 사실 하나 알고 죽으면은 억만장자가 억만장자인 줄 알고 죽는 것이고 고려청자를 고려청자인 줄 알고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부처니까 부처인 줄 알고 살아가고 또 남도 그렇게 대접하는 것이 된다. 결코 우리는 종도 아니고 죄업 많고 업장 많은 중생도 아니다.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말자 이거야. 불교를
불우한 가정에서 인생의 온갖 우여곡절을 다 겪으면서 그 중에서도 천시받는 흑인으로 대통령이 될 줄 누가 알았어요?
15프로 밖에 안돼 흑인이, 80프로야 백인은 그 다음에 5프로는 동양인, 멕시칸 이런 식으로 구성이 돼 있거든요. 미합중국이라는 나라가.
그런 나라에서 그동안 천시받고. 인간 취급도 안했어. 인간 취급도. 그렇게 무슨 뭐 정상적인 가정도 아니잖아요. 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럼 뭐가 들어서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이게 부처의 능력이 아니고 뭐냐 이거야. 대단하잖아요. 이런 사실들이 사실은 부처님이 3천년 전에 이미 모든 인간들은 평등하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라고 하는 그 사성계급을 타파하고 인도사회에 사성계급이 엄연히 있는 그 시대에 반기를 들고 혁명적인 말씀을 하셨던 부처님이 참 대단하신 분이야.
아무리 당신이 진리를 깨달았고 인간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손 치더라도 그런 사회에서 그런 소리 할 수 있다고 하는 게 이게 목숨 내놓지 않으면 못하는 거예요.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그러니까 날이 갈수록 물리학이 발달하면 물리학이 발달할수록 또 민주사회가 더욱 민주적으로 갈수록 부처님의 그 위대한 깨달음의 진리의 말씀이 더욱 더 뚜렷해지고 더 분명해지고 자꾸 증명이 돼 가는 거죠.
그런 것들도 사실은 그게 증명이 돼 가는 거 아닙니까?
그 사람 처지가 어떻든지 뭐 흑인이 됐든지 백인이 됐든지 인간은 동등한 부처의 소질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의 능력만 발휘하면 다 뭐 부처도 되는데 그까짓 거 무슨 대통령은 못돼?
이걸 이제 일찍이 3천년 전에 이미 부처님은 선언하셨던 것들이 정말 증명되어지는 그런 하나의 사례다 라고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절대평등을 선언한 그런 내용들이죠. 그게 역시 법화경 내용이기도 한데
오늘 공부는 64번부터 할 차례인데
고 위에 바로 보면은
사리불아 이와 같이 다 일불승과 일체종지를 얻는 연고니라.
그래놓고 사리불아 시방세계 가운데 오히려 이승도 없거늘 어찌 하물며 삼승이 있겠는가? 이건 그야말로 인간의 절대평등을 선언한 내용이야.
시방세계는 이승이 없다. 그런데 삼승이 왜 있겠느냐?
흑인 백인 무슨 뭐 황인 그게 어디 있겠느냐?
그냥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 말이예요.
그걸 이제 다른 말로 하면 부처가 있을 뿐이다.
부처가 있을 뿐이고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걸 이 시대에 증명한 것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그렇게 했고 그 다음에
64. 舍利弗아 諸佛이 出於五濁惡世하나니 所謂劫濁 煩惱濁
사리불 제불 출어오탁악세 소위겁탁 번뇌탁
衆生濁 見濁 命濁이라 如是하야 舍利弗아 劫濁亂時에 衆生이
중생탁 견탁 명탁 여시 사리불 겁탁난시 중생
垢重하야 慳貪嫉妬하며 成就諸不善根故로 諸佛이 以方便力으
구중 간탐질투 성취제불선근고 제불 이방편력
로 於 一佛乘에 分別說三이니라
어 일불승 분별설삼
사리불이여, 부처님이 다섯 가지 흐리고 나쁜 세상(五濁惡世)에 출현하였으니, 이른바 겁의 흐림, 번뇌의 흐림, 중생의 흐림, 견해의 흐림, 수명의 흐림이니라. 이와 같이 사리불이여, 겁이 흐리고 어지러운 시대에는 중생들의 번뇌가 많아 아끼고 탐하고 시기 질투하여 나쁜 근성을 이루고 있으므로 부처님들이 방편력으로써 일불승에서 쪼개고 나누어 삼승을 설하느니라.
舍利弗아 諸佛이 出於五濁惡世하나니
사리불아 모든 부처님이 오탁악세 가운데 나와 가지고
오탁악세(五濁惡世) 세상은 참 험하다 이거죠. 오탁악세라는 걸 불교에서 험한 세상을 오탁악세라 그럽니다.
所謂劫濁 煩惱濁 衆生濁 見濁 命濁이라
소위 겁탁(劫濁) 번뇌탁(煩惱濁) 중생탁(衆生濁) 견탁(見濁) 명탁(命濁) 이렇게 하는데 겁탁은 자꾸 이제 크게 보면은 자꾸 수명이 줄어드는 시대다.
증겁(增劫)과 감겁(減劫) 이렇게 따지는데 감겁에 있어요 우리는. 증겁은 이제 탁이 아니라, 이렇게 봅니다.
그 다음에 번뇌탁은 사람들 머리가 자꾸 갈수록 복잡해지죠. 단순해지지 않고 그래서 번뇌가 더 많다. 그 다음에 중생탁은 중생적인 요소, 악하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그런 것들, 무슨 부모와 자식간의 문제, 이것도 어떻게 된 심판인지 가족이니 부모자식이니 하는 그런 데 대한 관념들이 옛날보다 우리 어릴 때보다 훨씬 더 못해가는 그런 것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중생적인 요소예요.
그리고 견탁이라고 하는 것은 소견 사상 견해 이런 것들이 자꾸 흐려가고 그래서 인간의 가치에 대한 말하자면은 잘못 보는 것 그런 것들이 견탁에 다 해당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바른 견, 정견(正見) 인간에 대한 지고한 가치를 바로 볼 줄 알고 또 그것을 드러내는 이런 운동, 이런 운동이 크게 펼쳐져야 돼요 사실은.
그 다음에 명탁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법답지 못한 어떤 방법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그런 사례들.
이런 것들도 갈수록 자꾸 늘어난다는 거죠. 그런 것들이 명탁이다.
如是하야 舍利弗아 劫濁亂時에
이와 같아서 사리불아 겁탁난시(劫濁亂時)에 겁탁이 어려울 때에 겁이 탁난 할 때에
衆生이 垢重하야 慳貪嫉妬하며
중생이 구중(垢重)하여 중생의 때가 무거워서 간탐하고 질투해 아끼고 탐하고 질투해서
成就諸不善根故로
여러가지 불선근(不善根)을 성취하는 까닭으로
諸佛이 以方便力으로 於 一佛乘에 分別說三이니라
모든 부처님이 방편력으로써 일불승(一佛乘)에서 분별해서 나누어서 삼승(三乘)을 설했다. 할 수 없이 사람들의 상황과 사회적인 조건들이 그렇게 어지러워지다 보니까 할 수 없이 방편으로 이런 저런 방편의 이야기, 있지도 않는 방편의 이야기를 근기에 맞추어서 해준다고 하다 보니까 방편의 이야기를 자꾸 이제 하게 됐다.
일불승에서 나눠 가지고 삼승을 설했다. 이 말이 그 말이야.
그 앞에 방편력으로 그랬잖아요.
모든 부처님들이 방편으로써 할 수 없이 나누어서 이야기를 했다. 그래가지고 또 시대가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자꾸 방편을 또 만든다 방편을.
부처님이 만들어 놓은 건 세 가지야. 방편이 세 가지 인데 그 외 부처님 이 외에 시대적으로 흘러가면서 방편, 별의별 방편을 다 만드는 거야 온갖 방편을.
방편 낱낱이 다 지적할 수는 없지만은 어쨌든 그래서 거품이 너무 많고 지금 불교에는 방편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요런 올곧은 말하자면 대승경전 법화경 같은 이런 경전을 공부를 하는 그런 운동이 많이 일어나야 되고 또 이것을 또 이걸 방편으로 활용한다. 또 잘 못 너무 또 법화경을 또 이상하게 풀이해가지고 방편을 배제하자고 법화경을 공부하면서 또 법화경을 가지고 방편으로 또 활용을 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참 시대가 요상하게 돼 가지고 그런 현상도 있습니다.
요 구절 우리가 잘 생각해야죠. 시대가 상황이 그렇다 보니까.
모든 부처님들이 방편력으로써 일불승에서 하나의 부처의 삶 속에서 그것을 쪼개가지고서 삼승 성문 연각 보살이라고 하는 세 가지 방편설을 이야기 했다.
65. 舍利弗아 若我第子- 自謂阿羅漢 辟支佛者- 不聞不知
사리불 약아제자 자위아라한 벽지불자 불문부지
諸佛如來- 但 敎化菩薩事면 此非佛第子며 非 阿羅漢이며 非
제불여래 단 교화보살사 차비불제자 비 아라한 비
辟支佛이니라
벽지불
사리불이여, 만일 나의 제자로서 스스로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경지를 얻었노라고 하는 이들이 부처님 여래가 보살들만을 교화하는 줄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의 제자도 아니며 아라한도 아니고 벽지불도 아니니라.
舍利弗아 若我第子- 自謂阿羅漢 辟支佛者- 不聞不知
사리불아 만약에 나의 제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아라한, 벽지불이라고 하는 자가
諸佛如來- 但 敎化菩薩事면
제불여래가 다만 보살을 교화하는, 보살을 교화하는 일을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했을 것 같으면은
此非佛第子며 非 阿羅漢이며 非辟支佛이니라
이 사람들은 불제자가 아니야. 아라한도 아니야, 벽지불도 아니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부처님의 진의는 참다운 뜻은 오직 보살들을 교화한다. 단교화보살(但敎化菩薩)이라 했잖습니까. 다만 보살들을 교화하는 일이라고 하는 이 사실, 만약에 우리 불자로서 그런 내용을 제불여래는 단교화보살 한다고 하는 이 사실에 대해서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했다면 이 사람은 불제자 아니라고 했잖아요.
차비불제자(此非佛第子) 비아라한(非阿羅漢) 비벽지불(非辟支佛) 불제자도 아니고 아라한도 아니고 벽지불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야 그거는.
그렇게 까지 이야기 해놨습니다. 그래 법화경 모르면 불제자 아니예요. 아무리 지가 뭐 절에 가서 잘 하고 무슨 뭐 먹물 옷으로 그냥 온통 그저 무슨 방석이고 이부자리고 무슨 옷이고 저 속옷까지 먹물 옷으로 해 입었다손 치더라도 그건 불제자 아니다 이거야.
불제자냐 아니냐 하는 조건은 부처님의 진의를 파악해야 되고 진의는 단교화보살이라. 모든 여래는 보살들을 교화해서 어떻게 해? 일불승 부처의 삶을 살도록 하는 그것이 부처님의 참뜻이다. 사람이 부처님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아는 것으로써 부처님의 제자냐 아니냐 하는 것을 우리가 판가름하면 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66.又 舍利弗아 是諸比丘 比丘尼- 自謂已得 阿羅漢이라 是
우 사리불 시제비구 비구니 자위이득 아라한 시
最後身 究竟涅槃이라하야 便 不復志求 阿縟多羅三藐三菩提라
최후신 구경열반 변 불부지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하면 當知此輩는 皆是增上慢人이니 所以者何오 若有比丘-實
당지 차배 개시증상만인 소이자하 약유비구실
得阿羅漢하고 若 不信此法이 無有是處니라
득아라한 약 불신차법 무유시처
또 사리불이여, 이 비구, 비구니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이미 아라한의 경지를 얻어 최후의 몸이 되었으니, 마침내 열반에 이르리라.’하고, 더 이상 최상의 깨달음을 구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들은 모두 교만심이 높은 사람인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만일 비구로서 참으로 아라한의 경지를 얻고도 이 법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옳지 아니하니라.
又 舍利弗아
또 사리불아
是諸比丘 比丘尼- 自謂已得 阿羅漢이라
이 비구 비구니가 스스로 말하기를 이미 아라한을 얻었다
是最後身 究竟涅槃이라하야
또 그리고 최후신(最後身)인 구경열반 이제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게 최후신이야 마지막 몸. 그리고 최후의 열반, 구경의 열반을 얻었다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서
便 不復志求 阿縟多羅三藐三菩提라 하면
변불부지구(便不復志求) 더 이상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최상정각 최상의 정각을 뜻으로 구하지 아니한다면은
當知此輩는 皆是增上慢人이니
마땅히 알아라 이러한 무리들은 이러한 무리라고 해버렸어요. 비구 비구니를, 이러한 무리들은 다 증상만인(增上慢人)이다. 증상만인, 지 혼자 잘난 체 하는 사람이다.
所以者何오 若有比丘-實 得阿羅漢하고
까닭이 무엇인가? 약유비구(若有比丘)가 실득아라한(實得阿羅漢) 하고 만약에 어떤 비구가 진실로 아라한을 얻고,
若 不信此法이 無有是處니라
만약에 이 법 일승도리입니다. 일불승의 가르침,
사람이 부처님이라고 하는 이 가르침을 믿지 아니하는 것은 무유시처(無有是處)니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대로 불교공부를 한 사람이라면은 이 법 일승도리, 일불승의 도리를 반드시 믿게 돼 있다. 제대로, 이 일불승을 믿지 아니하고는 아니하면은 그건 뭐 아라한이라고 할 수가 없다. 어떤 비구비구니고 막론하고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무슨 아라한이다 불제자다 벽지불이다 비구다 비구니다 하는 이 조건 속에 다 들어 있지요? 부처님 제자 하면 우리 모두 다 들어 있죠?
비구 비구니 하면 또 출가한 스님들 다 들어있죠?
또 공부 꽤나 했다는 사람들은 아라한 벽지불에 다 들어 있는 거야. 큰스님 도인 선지식 하는 것도 이 속에 다 포함돼 버려. 그러면 큰스님이다 도인이다 요즘 뭐 대종사다 종사다 원로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은 등등 그런 모든 사람과
청신사 청신녀 불제자 뭐 비구 비구니 이 모든 존재들은 한마디로 법화경의 일불승 사상을 알아야 이게 불제자고 큰스님이고 종사고 대종사고 비구고 비구니고 아라한이고 벽지불이라고 할 수가 있지 그 외에는 깡그리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이거야.
이 법 불신차법(不信此法)하면 무유시처(無有是處)라 이거야. 이 법을 믿지 못할 것 같으면 안 된다. 무유시처라 옳지않다 그랬어요. 해당이 안 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여기 법화경 공부 그리고 법화경의 내용을 요렇게 샅샅이 속뜻까지 확 드러내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은 사람만이 진짜 불제자야.
불제자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래 뭐 딴 조건 있는 것도 아니예요 또. 요러한 이치를 들은 사람만이 불제자야. 그리고 듣고 놀라지 않고 또 저 밖으로 안나가는 오천 명에 해당되지 아니하면은 그 사람은 진짜 불제자야.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67. 除佛滅度後 現前無佛이 所以者何오 佛滅度後에 如是等經
제불멸도후 현전무불 소이자하 불멸도후 여시등경
을 受持讀誦解義者는 是人難得이니 若遇餘佛이면 於此法中
수지독송해의자 시인난득 약우여불 어차법중
에 便得決了니라.
변득결요
다만 부처님이 열반한 뒤에 부처님이 없을 때는 제외하느니라. 왜냐하면 부처님이 열반한 뒤에는 이런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뜻을 해석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우니라. 이 사람이 만일 다른 부처님을 만난다면 이 법문 가운데서 곧 확연히 통달하게 되리라.
除佛滅度後 現前無佛이
제(除) 이거 뭐 제한다 그랬어요. 불멸도후(佛滅度後)에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 현전무불(現前無佛) 현전에 부처님이 없을 것 같으면 깨달은 사람이 없을 것 같으면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요. 현전에 부처님이 없을 때는 제한다.
所以者何오
왜냐? 이제 그런 경우가 또 있다고요.
왜냐?
佛滅度後에 如是等經을 受持讀誦解義者는 是人難得이니
불멸도후(佛滅度後)에 이와 같은 등경을 수지독송해의자(受持讀誦解義者) 수지하고 독하고 수하고 뜻을 아는 사람은 시인난득(是人難得)이다. 참 얻기 어렵다. 그랬어요. 시인난득이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는 이 경전을 법화경 같은 이런 도리를 수지독송해의 하는 사람은 정말 없다, 어렵다 이거야.
그래서 부처님이 안 계실 때는 제한다. 제할 제(除)자를 고렇게 말하자면은 어떤 여백을 좀 주고 말하자면은 그 어떤 공간을 좀 마련해 둔 거죠.
若遇餘佛이면
약우여불(若遇餘佛)이면 만약에 다른 부처님을 만날 것 같으면은
於此法中에 便得決了니라.
어차법중(於此法中)에 이 법가운데서 변득결요(便得決了)니라
그렇게 하다가 딴 부처님을 만나서 제대로 불법을 설명하는 것을 듣게 되면 그 때는 완전히 해결하게 된다.
변득결요(便得決了)라고 하는 말은 완전히 깨닫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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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큰스님의 법문을 잘 요약 녹취해 주셔서 머리에 속속 들어오네요. 慧明華보살님은 염화실의 보배입니다. _()()()_
會三歸一.....혜명화 님! 수고하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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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일깨워 줄 줄 아는 그 사람이 진짜 선지식이고 진짜 불교를 아는 사람이고 진짜 부처님이다.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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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_()()()_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慧明華님.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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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사람이 부처다. 이 것 하나 알고 죽자.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고맙습니다-나무묘법연화경-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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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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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읍니다
5천명 퇴석
;안이비설신 5감각으로 인간의 가치를 판단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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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_()()()_
고맙습니다 _()()()_
큰스님. 감사합니다. 성불하소서...()()()...
혜명화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2번째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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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묘법연화경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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