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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 트레킹(2015.6.26.~7.5)
1일째
머나긴 항로를 거쳐 모두들 캐나다 산골 마을 캘거리로 모두 모였습니다. 하늘이 시샘하는지 비행편 취소. 연착등의 불운을 딛고 결국은 밤 11시에 공항에 내리고 산장으로 내달리니 새벽 1시가 훌쩍 넘어버렸습니다. 방 배정하고 대충 짐 정리하는 동안 한편에서 야식과 안주 준비로 부산하고...
바리바리 싸가지고 온 밑반찬 들. 어림잡아도 100여병은 넘을듯한 패트병 소주. 한살림 냉장. 냉동고에 가득 채워지니 쌀 두주에 하얀쌀이 가득해 행복에 겨워하는 빈처가 된듯합니다. 열흘동안 힘차게 명산을 종주할 힘을 북돋아줄 우리 먹거리들입니다.
첫 참가자들은 서로 자신들을 소개하고 혹은 오래된 분들은 반가운 인사로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웁니다. 함께 오랜 시간 동고동락을 할 미더운 동행들... 북반구에 위치한 산촌은 5시인데도 벌써 동녘에 해가 차고 오르고 있습니다. 그제서야 하나둘 잠자리에 들고 산장은 잠시 고요속에 잠겨듭니다.
2일째
아침은 이미 열려 있었고 기나긴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로키의 품에 안기기 위해 겨우 서너 시간의 취침으로도 가뿐하게 첫산행에 나섭니다. 아점으로 콩나물 해장국 끓여 칼칼한 식성 부드럽게 보듬고 간식거리와 물등을 챙겨서 길을 떠납니다. Glacier National Park 내에 있는 Abott Ridge Trail이 오늘 우리가 기쁨을 나눌 산길입니다. 1천 미터의 고도를 높이고 6시간 정도의 걸음을 요구합니다. 만년 설산들이 병풍처럼 드리운 숨막히는 비경들이 눈에 가득 밟혀옵니다.
페북 친구 성기영씨. 마당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캐나다 캘거리에 사반세기를 살아온 동포입니다. 공항에서 산장까지 14명 참가자들의 짐도 손수 개인차로 실어다 주며 도움을 주신 고마운 페친인데 산행동료 뭉게 구름과 동행하게 되어 16명이 산행에 참여하였습니다.
측백 편백의 Pine Trees 들만 빼곡히 채워진 그러나 하늘 향해 늘씬하게 쭈욱 뻗은 상록수로 채워진 산길을 따라 등산을 시작합니다. 첫 산행 첫 출정. 트레킹 폴을 하늘로 향해 맞대며 홧팅을 외칩니다. 중간에 아담한 Marion 호수가 있는 지점에서 수목한계선이 그어집니다. 기나긴 여정에 지친 몇사람이 휴식을 결정하고 나머진 정상을 향해 진군합니다. 검푸른 수목들 사이로 숨바꼭질 하는 설봉들이 참으로 미웁도록 아름답습니다.
청아한 물소리 퍼지는 산정 부근에서 휴식을 취하며 절경을 감상합니다. 힘이 넘치는 적토마 둘은 더 연장해서 연봉 릿지까지 침범해 버립니다. 남은 이들은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고 천하제일경을 가슴에 담습니다. 맥주 담가두면 이내 차게 식혀지는 실개천 주변에 둘러 앉아 정상주로 서로 격려와 찬사의 인사를 주고 받습니다. 수만년 세월이 녹은 차디찬 물도 한잔씩 권합니다. 이상 기온. 너무 따뜻해 더워져버린 로키의 오늘. 그래서 맥아더 마운틴 산정이 더욱 찬연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3일째
몇십년만에 찿아온 이상 기온으로 캐나다 로키의 아침이 뜨겁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세계 10대 비경에 랭크된 Louise 호수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 더위 쯤이야 아랑곳하지 않고 흥겨운 음악과 함께 반프 국립공원으로 내달립니다. 가는 길 양편으로 펼쳐지는 산과 구름과 하늘의 공연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너무도 맑고 푸르러 빠질것만 같고 구름은 희디흰 색으로 한가로이 떠있고 이들을 받치고 있는 거대 직벽의 산들. 로키라고 명명케한 구성 요소들입니다.
루이스 호수에 이르렀습니다. 빙하의 석회질이 녹아들어 녹색으로 물든 호수. 그 뒤를 받쳐주는 빅토리아 만년 설산. 늘 아련한 구름안개에 가려 신비로움을 주는데 오늘은 속시원히 베일을 벗고 머나먼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코리언 방문객들을 위해 나신을 그대로 드러내 보입니다. 옥색 호수 물에 풍덩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제하며 등정을 시작합니다. 예쁜 산정호수 아그네스를 지나 여섯개의 빙하가 도열한 Six Glacier 를 만나고 돌아오는 아름다운 길입니다. 고도를 올릴 때 마다 변해가는 루이스 호수의 미려한 자태를 확인하며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열심히 오르고 올라 아그네스 호수에 다다라서는 지친 몸 달래려 20여가지의 로키의 야생화로 달인 차를 한잔씩 음용합니다. 얼마나 진한지 몇번을 우려내도 맛과 향이 변하지 않아 숫제 산장으로 담아와 몇번더 우려내 마시기도 했습니다. 또 다시 등정을 시작하고 전망 좋은 시내 곁에서 점심 도시락으로 꿀맛을 찬으로 즐깁니다. 이때 우리와 비슷한 규모의 한인 트레커들이 지나가며 부러운 시선을 던지는데 혜초 여행사를 통해왔는데 밥과 김치가 그립다 했습니다.
종착점이자 전망대인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전방에 펼쳐진 거대한 빙하산. 두텁게 쌓이고 쌓인 빙하가 장엄하게 흐르고 바람도 없는 그 차디찬 얼음산에 얼어붙어버린 구름이 정지한채 있으니 이 순간 모든 시공이 멈춰버린듯 열반에 듭니다. 하나 아쉬운 것은 예년에 비해 빙하들이 많이 녹아버려 남루한 행색인데 지난 겨울 눈이 별로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아무래도 지구 온난화의 부작용이 아닌가 하여 마음이 아픕니다. 언젠가는 다시는 저 장관을 더 이상 볼수 없으려니 하고 여기니 말입니다.
저녁. 카나다 청정 목초지에서 방목되어 키워진 앵거스로 바베큐 파티를 엽니다. T자 형태의 뼈가 있다고 해서 T Bone Steak 라 불려지는 깊은 맛의 소고기에 로키산 레드 화이트 와인으로 정찬을 즐깁니다. 야채 샐러드도 곁들여서 말입니다. 뒷풀이 거하게 하고 조금은 무거워진 몸들을 달래주려 노천온욕탕에 나른하게 담궈줍니다. 맑고 밝은 로키의 별이 총총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하루의 피로가 한잔 로키의 와인에 녹아드는 시간입니다.
4일째
너무 뜨거워진 로키를 식히려는 듯이 이른 아침부터 세우가 내려 산하를 촉촉하게 적시고 있습니다. 산꼭대기에 위한 산장 숙소. 로키에서 가장 스릴감 넘치게 탈수 있는 그래서 초보자는 엄두도 낼수 없는 스키장이 있는 resort 입니다. 오늘 걷고 즐길 Bow 폭포와 산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서니 눈아래 가득 펼쳐진 안개구름에 골든이라는 소읍도 낮은 산들도 가려져 무척 몽환적인 풍광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가는 길마다 오르고 내리는 고갯길 마다 운해가 깔려 저마다 한계령이니 대관령이니 하며 자신들이 가진 기억속의 명풍경을 꺼내봅니다.
보우 호수에서 시작하여 로키내 가장 아름다운 폭포 중 하나라는 보우 폭포를 조망하고 보우산 정상을 올라 산정 빙원을 감상하고 돌아오는 산행입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보우 호수의 빛깔이 오늘은 고즈넉한 청자색으로 단아하게 누워있습니다. 남티자 라는 독특한 이름의 산장 롯지를 지나며 시작되는 산행로. 호수를 끼고이끼가 더덕더덕 로키의 세월 만큼 붙어있는 고송들을 지나고 함초롬히 피어난 들꽃들의 환대를 받으며 걷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흠. 청정지역인데도 무슨 연유로 이렇게 모기가 많은지... 모포도 뚫고 군화도 뚫는다던 포항 모기보다 더 질긴 Canadian Mosquito. . 장난이 아닙니다. 고인 물들이 많아서 그런지 떼로 달려드는 그 매몰스런 모기떼들은 그냥 서있을 때 뿐만이 아니라 걸을 때 조차도 달려들어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냥 재빠르게 바람처럼 걷는 것이 최상의 길. 신속하게 그 지옥의 길을 벗어납니다. 조금은 지루하여 강변에서 함께 산장에서 함께 배우고 연습한 라인댄스 (일종의 꼭지점 댄스)를 열을지어 춤추며 다리를 풀어줍니다.
산행을 마치고 반프로 이동하여 Sulphur 산 정상으로 오릅니다. 반프를 굽어보는 앞산 격인데 로키의 첩첩산봉을 감상하기 좋은 곳으로 물론 곤돌라를 타고 하늘을 날아 오릅니다. 정상에 서니 여기는 이승이 아닌듯 별천지의 풍광을 선사합니다. Summit Loop를 휘이 돌며 바라보는 선경.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변화무쌍한 운해의 배치가 산인지 절벽인지 가늠키 어려운데 비끼는 석양에 황홀경을 만들어내 우리를 들뜨게 합니다. 자욱한 비의잔해가 이토록 비경을 만들어 낼줄이야...
그 품에 안겨 유황 노천 온천장에 몸을 담궜습니다. 풀장식으로 만들어 유황 냄새 폴폴 풍기며 방문객들을 유혹하는데 적당한 온도에 맞춘 물의 촉감이 오늘 하루 모기떼들에 시달리며 걸은 우리를 달래주기에 충분하도록 아늑합니다. 해는 뉘엇뉘엇 서산으로 다가가고 하루를 어서 마감하라 이릅니다. 나른한 몸은 꿈결로 들고 로키의 밤은 차분하게 익어갑니다.
5일째(HIKING IN TOP OF THE WORLD, 선샤인 메도우 트레일)
몇 시간의 비행으로 계절 이 이미 바뀌어 버린 캐나다 로키. 가을 날씨처럼 청명하고 쾌청한 바람이 만년설산을 넘어 오고 쪽빛 하늘이 푸르게 드리우고 찢겨진 구름은 그 날카로운 얼음산에 걸려 머물고 있습니다. 오늘은 셔틀버스를 타고 어느 정도 올라가 산정을 휘돌아가며 로키의 연봉들을 감상하고 너른 목초지에 지천으로 만발한 로키의 야생화들과 재잘재잘 대화하며 걷는 길. Top of the would라 불려지는 Sunshine Meadow Trail을 걷습니다.
굽이굽이 비탈길을 해묵은 스쿨버스는 힘겹게 기어가고 30분이 더 결려 산행로가 시작되는 트레일 해드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장시간의 산행 중에 가장 걸림돌인 생리현상을 미리미리 해결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
산등성이에 숨겨져 있을 보물을 찾아가듯 바쁜 걸음으로 비탈진 산자락을 기어오릅니다. 성급한 이들은 이미 산행을 마감하고 돌아오는지 간혹
반가운 인사로 우리 곁을 지납니다. 열네명의 우리 대원들은 길게 행렬을 갖추어 오르는데 일마일은 족히 되어 보이는 기나긴 비탈길이 가슴이 답답하도록 숨이 차오르게 하여 잠시들 발길을 멈추고 심호흡을 통해 폐속 깊숙이 록키의 청정 산소를 공급하며 호흡을 고르고 함께 노고를 달래어 줍니다.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있는 들판을 지나면서 지척에 놓인 높은 산들에는 흰 눈들이 태고의 모습을 간직한 채 쌓여있습니다. 사계절이 그대로 공존하는 기이한 자연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조물주에게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하고 잊을 수 없는 영원한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댑니다. 맑은 호수에는 신기하게도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유영하면서 한가롭게놀고 있었습니다. 비록 작은 생명체이지만 이런 질긴 생명력을 감동으로 받아들이고 두고
떠나기가 너무 아쉬워 휴식을 취하면서 주변의 광경을 즐거이 감상합니다. 참으로 포근하고 행복한 순간입니다.
호수를 지나 앙증맞은 실개천을 넘어 고갯마루 하나를 넘어가니 전방에 펼쳐지는 락키의 준봉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불현듯 가슴 저 언저리에서 북받쳐 오르는 서러움 같은 감흥에 눈물이 핑 돌고 말았습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그 벅찬 기쁨에 심호흡을 하면서 저리도 아름다운 설산들에 빨려드는데 옆에서는 요단강을 건너니 여기가 바로 천국이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극한 표현까지 나옵니다. 깊이 침몰한 계곡에는 침엽수들이 가지런하게 도열해있고 휘하고 돌아가는 강물은 산자락의 만류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데 설봉의 거산들이 흰옷 입고 버티고 있는 장관은 우리가 왜 이곳에 왔는지에대한 답을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검푸른 하늘이 그 깊이를 가늠치 못하게 하고 이에 대비한 구름은 더욱 순백의 순결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여린 갈대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마지막 세 번째 호수를 돌아 다시 시작되는 비탈길을 오르다 잠시 숨을 고르고 휴식을 취하며 뒤돌아보니 우리들 곁으로 더욱 더 많이 모여든 준봉들이 또 다른 풍광을 선사합니다.
나름 지구의 지붕위를 걷는 이 산행에 이 보다 더 훌륭한 가든파티는 없으니 준비해간 음식으로 귀한 성찬의 시간을 즐깁니다. 주변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모진 생명력으로 버티어 있고 부족한 영양 탓인지 성장이 더디어 나지막하게 퍼져있는 낙엽송들, 그사이를 열심히 오가는 작은 고퍼들이 우리의 성찬식을 장식하는 좋은 들러리로 서주고 있었습니다. 비록 허접한 밑반찬에 식은 밥이지만 자연이 베풀어준 천연의 분위기는 황후의 성찬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호수에 비친 피라미드형의 거대 빙산들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아주 기막힌 연회를 이끄는 빼어난 배경을 선사하고 있었습니다.
지나치는 산객들의 부러운 눈길을 느긋하게 만끽하는 성찬을 마치고 최종 등반 지점인 전망대를 다시 오르는데 힘든 대원들은 남아 기다려도 좋다 해도 기어코 모두 따라 나섭니다. 각오들을 새롭게 하고 휜 허리로 반 마장을 힘겹게 올라보니 넓게 퍼져 있는 설원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습니다. 부담 없는 산정목초지를 걸으며 양안에 펼쳐져 있는 온갖 풀과 꽃들의 군무를 보면서 하산하는 길은 경쾌하기만 합니다. 요단강 건너 천국에서 환희와 기쁨으로 한 산행을 마감하고 떠나는 우리의 머리위에는 변덕스런 고산 날씨로 세우가 조용히 이슬처럼 쌓이고 있었습니다. 지척에 머물던 이름 모를 준봉들도 서서히 멀어지는 아쉬움이 자꾸만 우리로 하여금 뒤돌아보게 합니다.
6일째
호수에 걸맞게 원목으로 지어진 산장 로지 끝에서 시작되는 트레일 헤드 고시판에는 재미있는 경고가 씌어져 있습니다. 그룹 4명 이상이 함께 올라가지 않는다면 5천불 까지의 벌금을 메기겠다는.. 그만큼 곰의 출현이 잦고 그로인한 인명사고가 나니 등산객들의 보호차원에서 내린 행정명령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들 곰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하는지의 견해를 피력되는데 동화 수준의 대응 방법부터 기상천외한 아이디어 까지 다양한 이야기로 만들어져 한바탕씩 유쾌하게 웃게 해줍니다. 그런 여유도 잠깐 벨리에 이르는 4백 미터 고도를 올리는 등정길이 벌어진 입에서는 말이 아니라 가쁜 호흡만이 나와 산을 조용하게 해버립니다. 그래도 쭉쭉 뻗은 전나무 사이로 색의 마술사 처럼 변형시키는 모레인 호수를 보며 걸으니 힘든 길이 제법 위안이 됩니다. 혼줄 놓고 비지땀을 쏟으며 한참을 오르니 갈림길이 나옵니다. 왼쪽으로는 Effel호수쪽으로 가는 길인데 이 길도 너무도 고혹적인 트레일이라 욕심 같아서는 둘다 하고 싶지만 여건상 하나를 포기하고 희미한 기억으로 대신하며 센티널 패스로 오릅니다.
한참을 땀에 젖어 오르니 좌우 길섶에 화려한 야생화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이리도 잔혹하고도 척박한 땅에서 또 이렇게 아름다운 색의 꽃을 피워낼수 있는것인지 참으로 경탄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냉혹한 기온, 부족한 일조량, 기나긴 겨울.. 어느 하나 극한적인 것이 없는데 예쁘게 피워내어 짧은 여름 한철 태우니 더욱 꽃빛이 곱습니다. 인디언 페인브러쉬는 온산을 태울듯 붉게 타오르는데 이 페인트 브러쉬 꽃을 볼때마다 비극적인 가련함이 떠오릅니다. 이 꽃 이름은 인디언들이 그 용맹성을 표현하기 위해 이 꽃잎 으깬 붉은 즙으로 얼굴에 치장한다고 해서 붙여졌다합니다. 정복자들에 의해 그리도 무참히 죽어가기 전까지는 인디언들도 저렇게 무수히 많은 페인브러쉬 꽃처럼 서로 어께를 기대어 살아왔을 것이라는 생각에 역사의 잔혹성에 대한 비감과 피지배자들에 대한 연민이 함께 교차되는 순간을 느낍니다. 눈을 다시 들어 주변을 보니 제법 여러 종류의 꽃들이 잔설로 채색된 바탕위에 예쁘게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키 큰 나무들이 사라지고 키 작은 관목들이 나타날 즈음 우리를 덮쳐버리기라도 할 듯이 거대하게 버티어 선 텐 피크의 설봉들이 나타납니다. 열개의 빙하산들이 이어져 만들어 내는 그 거대한 풍경! 아무리 뒷걸음을 쳐도 앵글 속에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숨이 막혀 버릴 듯한 위압감이 기쁨으로 승화되는 순간입니다. 어디서라도 쉽게 볼 수 없는 이 명장면! 등정의 수고를 감내한 자들에게만 내려지는 행복한 보상이랍니다.
푸르디 푸른 로키의 하늘이 흰눈을 더욱 희게 하고 검은 바위산 또한 더욱 무겁게 만들어주니 보는 우리들의 마음을 청정하게 정화를 시켜 줍니다. 이것이 우리가 어렵사리 명산을 찾아 떠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두세 시간을 정신줄을 놓고 걷다보니 어느새 배꼽시계가 꼬로록 하며 시각이 되었다는 경고음을 울립니다. 모두 점심 식사를 하기로 합의를 보고 호수 변 평평한 곳 14명이 편안히 앉을 자리를 정하고 매트를 깐뒤 둥글게 정좌를 합니다. 당연 가장 풍치좋은 명당이어야 하고요. 이 작업은 자칭 풍수지리 역학의 대가라 허풍떠는 임선달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분의 몫입니다. 전 일정 우리는 국이나 찌개와 함께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는데 거의 산행중이기도 하거니와 마땅히 사먹을 곳도 그리고 또 입맛에 맞지도 않아 도시락을 다들 선호하더이다. 등반이라는 기쁘지만 힘든 작업중에 먹는 오찬이라 꿀맛 같아 평소 식사량의 두배 이상을 먹게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앞에는 설산 십봉이 미려하게 이어져있고 뒤로는 센티널 패스가 명경지수 호수를 품고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세상에 어디 내 놓아도 손색없을 최고의 가든에서 우리는 항상 식사를 즐깁니다. 바람을 타고 올라온 신들과 구름타고 온 신선들이 식사를 즐기는 곳에서 함께 하는 우리도 도인이 되고 신이 된듯 합니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로키산 과일을 즐깁니다. 복숭아며 자두며 포도며 딸기며 수박이며 체리며 부족할수 있는 비타민 C의 섭취를 위해 먹어두는데 로키산 체리는 우리에게는 먹지않으면 큰일 날것 같은 필수불가결한 영양품이 되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도 눈앞에 그려진 센티널 패스를 오르는 길. 2백 미터 이상의 고갯마루로 넘어갈 길이 또렷하게 그어져 있고 이리저리 꺽어져 이어진 선위에 작은 점같은 등반객들의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식후라고 마냥 퍼져 있을수는 없어 등반을 다시 시작합니다. 좀 덜 먹을걸 하는 후회가 바로 들도록 부담스런 등정길. 한가지 좋은 것을 취하려면 한가지 나쁜것이 따르는 것이 세상 공평한 이치 아니더냐며 자신을 토닥이며 산을 오릅니다. 이제는 우리도 그 고행의 행렬에 한 점이 되어 정상을 향해 오르는 풍경을 만들어줍니다. 드디어 눈밭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만년설을 밟게 되는 것입니다. 비탈길에 펼쳐진 만년설전. 대부분 아이젠을 챙기지 않아 조심스레 띠를 만들어 수만년 세월 위를 건너갑니다. 장난기 발동한 동행이 눈을 뭉쳐 던지기도 하니 맞대응의 눈싸움이 벌어집니다. 이처럼 대단한 자연은 초로의 나이를 무색케 하는 동심으로 돌아가 천진난만한 어린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마침내 정상에 섰습니다. 고갯마루로 다가설 때 마치 공연 무대의 막이 서서히 올라가며 내용을 보여주듯이 뒷켠에 감추어 두었던 비경을 펼쳐보입니다. 미려한 설봉들이 장구한 세월 다져온 거대 빙원이 기기묘묘한 암봉들이 제각기의 위치에서 최고 아름다운 장관을 만들어내는 퍼포먼스를 합니다. 참으로 행복한 순간입니다. 이 찬연한 로키의 한 산마루에서 좋은 산동무들과 함께 한 이 순간. 삶이 참으로 아름답고 축복받을 일이라 여겨지는 센티널 패스 정상에서의 감회랍니다.
7일째(세계 10대 비경, 루이스 호수와 비하이브 트레일)
오늘은 세계 10대 비경 중의 하나인 루이스 호수를 찾는 날입니다. 3,264m의 빅토리아 빙산과 더불어 6개의 설봉들이 장엄하게 포진한 가운데 신비로운 청록색의 빛깔로 고즈넉하게 누워있는 호반입니다. 백인으로는 처음 루이스호수에 도착한 톰 윌슨이 에메랄드 호수라고 이름 붙였지만 훗날 빅토리아 여왕의 딸 루이스의 이름을 따 루이스 호수라고 개명하였는데 호수의 길이는 2.4 km이고 폭은 300m입니다. 빙하의 침식활동에 의해 생긴 넓은 웅덩이에 빙하가 녹은 물이 괴어서 만들어진 빙하호로, 빙하에 포함 된 자잘한 석회질의 퇴적물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신비한 청록색의 물빛은 그저 신비할 따름입니다. 아마 이 에메랄드 색의 물빛이 있음으로 해서 10대 비경으로 손꼽힐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많은 로키의 호수중에서도 대표적인 호수로 캐나디언 로키관광의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을 들고 서둘러 길을 나서는데 루이스 교차로에 다다를 즈음에 차들이 정체현상을 빚고 있었는데 먼발치로 보니 야생동물의 출현으로 갓길에 차를 중첩해서 임시 주차하고 구경하는 바람에 생긴 현상이었습니다. 곰의 출현이었습니다. 우리도 모두 신기해하면서 사진을 촬영하며 이른 아침 귀한 동물과 조우한 기쁨에 모두들 상기되어 오늘의 산행이 더욱 즐거울 것 같은 예감에 들떠 있었습니다.
주차장에는 이미 차들이 빼곡하게 차있었고 몇 바퀴를 돌다 겨우 얻어 걸린 공간에 차를 세우고 오늘의 산행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루이스 호수를 바라보면서 이에 걸맞는 유럽풍의 호텔 샤토가 함께 있으면서 그 정취를 더해주고 있었고 코발트빛 호수에 점점이 떠있는 작은 배들이 원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구름에 가린 빅토리아산은 신비로울 만큼 그 자태를 감추고 있었고 눈 덮인 주변 산들이 곁에 있어 아름다운 한 폭의 명화를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진정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어휘로도 이 아름다움을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미려한데 완벽한 색의 조화, 산과 호수와 하늘의 기막힌 구도, 과연 비경중의 비경이었습니다.
오늘의 산행은 호수를 에워싸고 있는 산들 중 산정에 아그네스 호수라는 작은 호수까지 오르고 이어서 비하이브 길로 들어 가장 빙하와 가까운 곳까지 이르는 가파른 길입니다. 이 길은 캐나디언 로키의 많은 하이킹 코스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코스로 깊은 침엽수림 속으로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불편 없이 걸을 수 있고 고도가 올라감에 따라 나무 사이로 보이는 루이스호수가 여러 모양새로 변하는 풍광을 즐길
수 있어 각광을 받는 듯 했습니다. 호수와 호텔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 뒤 호수 따라 난 산책로를 잠시 걷다가 본격적으로 경사로가 시작되며 본격 등정이 시작됩니다. 잘 닦여진 산행로 주변에는 아름드리 침엽수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으로 버티고 있고 이끼식물들이 바람에 흩날려 솔잎마다에 걸려 있어 더욱 태초의 신비로움을 더해주고 있었습니다. 먹이를 받아먹는 재미가 버릇처럼 되어버린 작은 다람쥐들이 졸졸졸 우리 곁을 따르고 숲 그늘이 오히려 냉기를 느낄 만큼 시원하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간간이 트이는 시야에 들어오는 루이스 호수는 그때마다 다른 얼굴로 웃고 있었습니다. 조물주의 익살스런 작품으로 어쩌면 저리도 곱도록 물빛을 채색할 수 있었을까하고
감탄해 하지 않을 수 없는....
청정한 로키의 호수들 그 물들
산행에 참여한 이들의 모습도 실로 다양합니다. 우리처럼 본격산행을 위한 채비들을 갖춘 이들도 있었으나 떡본 김에 제사지내는 식으로 시작한 이들도 있어 슬리퍼를 신고 오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마다 가족들과 연인들과 친구들이 함께 한 이 동행길이 참으로 화목하고 즐거워보입니다. “인생 뭐있나? 이렇게 트레킹 여행이나 하면서 건강하고 즐겁게 살다 가면 되지..” 삶을 초월한 듯한 철인의 넋두리가 흘러나옵니다. 득도한 이의 선문답처럼 그렇다는 맞장구가 이어집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가파른 경사로는 한담을 나누던 여유를 빼앗아 가버렸고 더욱 가까워진 빙벽이 장관을 이루어 지척에 나타났어도 그 고달픔에 곁눈만 힐끗거릴 뿐 참으로 고행의 길입니다. 이런 고달픔을 헤아려주는 산길은 잠시 쉬어가라고 미러라는 이름의 작은 호수를 선물로 내어주었습니다. 정말 거울처럼 투명하게 맑은 물위로 뒤 산 봉우리가 예쁘게 반사되어 비칩니다. 그냥 그대로 마셔도 될 만큼 청정한 락키의 호수들 그 물들.. 다시 길을 재촉해 정상을 향해 가는데 말을 탄 관광객 한 무리들과 마주쳤습니다. 따로난 전용 말길을 따라 올라왔는데 어느 구간은 같이 가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장사속도 좋지만 퍼질러 놓은 말의 배설물들이 늘어나면서 괜히 우리가 말 취급 당한 것 같은 불쾌감으로 애꿎게 말 잔등에 앉아 편하게 정상을 오르는 그들에게 불만의 표정을 던지고 맙니다. 진정한 등산의 의미와 땀의 대가를 모르는 처사라고.. 하나도 부러울 것도 없는데 말안장위의 그들은 거나하게 거드름을 피우고 있습니다.
드디어 아그네스 호수에 이르렀습니다. 설산준봉들을 지척에 두고 바라보는 아그네스 호수는 조용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아련하게 내려다보이는 루이스 호수는 아름다운 샤토와 함께 어우러져 기막힌 풍경을 선사하고 있었고 구름 걷힌 설봉에는 빙하가 나신을 드러낸 채 장엄하게 버티어 있습니다. 넘쳐흐르는 호수 물은 작은 폭포가 되어 시원스레 떨어져 저 저 아래 놓여있는 미러 호수로 합류하나 보았습니다. 널빤지를 깔아 산책로로 만들어 놓은 호수 옆에는 소담스런 찻집이 통나무로 지어져 있었습니다. 산객들이 쉬어가는 곳. 아그네스란 이름의 귀족 딸이 처음 발견하였다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었으나 후에 그전에 이미 평민이 다녀갔다는 말에 실망했는데 다행히 그 처녀의 이름도 공교롭게도 같은 아그네스라 개칭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별로 감동적이지 않은
얘기를 안주삼아 가져간 소주도 한잔씩 기울웁니다.
다시 나머지 등정을 위해 몸을 털고 일어납니다. 비하이브산 정상을 향해갑니다. 리틀 비하이브를 거쳐 빅비하브를 오르는데 마치 우리 체력의 한계를 시험이라도 하듯이 가파르게 이어졌습니다. 속도를 늦추고 함께 서로 격려하며 마침내 정상에 이르렀습니다. 함께라서 성공할수 있었던 정상등정의 노고를 하이 파이브로 나눕니다. 평화와 안식의 풍요로움이 산정에 가득하고 이따금 빙산을 건너 불어오는 바람은 깃털을 달고 날아가는 듯한 쾌적함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습니다. 온몸으로 펴져가는 맛사지 효과에 나른한 오후의 졸음이 다가옵니다. 순간 새들의 노래소리도 바람소리도 낙하하는 물소리도 멈추고 정적만이 머무는 열반에 들어갑니다.
8일째(장엄한 빙하가 흐르는 SIX GLACIER)
반프 국립공원지역의 하이킹 코스 중의 하나인 SIX GLACIER(빙하) 트레일을 오르는 날입니다. 여름에 밟아보게 될 만년 빙산이 상상하면 할수록 더욱 그리워지고 가슴 설레던 기나긴 밤을 보내고 까칠한 입맛을 된장찌개로 달랜 뒤 보무도 당당하게 길을 나섰습니다. 루이스 호수로 향하는 캐나다 1 파크웨이 양편으로 스쳐 지나가는 이름 모를 설봉들이 준엄하게 버티어 있습니다. 마를린 몬로가 출연한 ‘돌아오지 않는 강’의 촬영지로 유명한 보우 강이 보우 폭포에서 시원하여 보우 폭포를 채우고 그 특유의 에메랄드 색을 머금은 채 설산 사이로 한가로이 흐르고 열기 머금은 바람은 침엽수 무성한 들판을 넘어갑니다. 짙게 계절이 물든 로키의 산하는 수 억년을 그렇게 장엄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루이스 호수. 트레킹 시작점입니다. 워밍업을 위해 닦아놓은 호수변 길은 쾌적하고 평탄한데 주변을 돌아 후미로 가는 길은 아름다운 호수의 면면을 여유있게 다른 각도에서 감상하도록 해주었습니다. 6개의 빙하 산에서 녹아 흐르는 물들이 모여드는 곳에는 하천의 하류처럼 넓은 모래벌이 되어있었고 크고 작은 폭포랑 어우러져 여기저기 물 흐르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옵니다. 이런 자연의 소리에 발맞춰 걷는 길은 경쾌하기만 합니다. 새소리도 풀벌레 소리도 함께 하니 자연이 시연하는 협주곡 같습니다. 초가을 이른 새벽 차마 떨치고 나오기 싫던 홑이불의 그 산뜻한 촉감처럼 로키의 기류는 온화하게 피부로 전해옵니다. 산기슭에 퍼져있는 노랗고 하얀 그리고 보라색으로 빛나는 들꽃들은 계절을 되돌아가 봄의 향연을 벌이는 양합니다. 아무리 조급한 걸음이어도 이 화사한 꽃의 풍성한 잔치를 외면할 수 없어 한숨 돌리며 쉬어갑니다. 그 소담스런 야생화들은 바람에 산들거리며 해맑은 얼굴로 우리의 대화에 함께 끼어듭니다.
이제 숨 가쁜 오르막길이 이어집니다. 간간히 보이던 활엽수조차도 자취를 감추고 잘 뻗은 침엽수만이 빽빽하게 들어차고 수십 년 수백 년을 그대로 누웠을 고사목들이 나둥그러져 있는 길을 지나갑니다. 직벽들이 도열한 좁은 길에는 기이한 암석들이 저마다의 모양으로 인고의 세월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비틀리고 휘어지면서 그 많은 세월을 버티어 온 장렬한 흔적입니다. 흔치않은 비경을 접하는 우리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게 빛나며 이상 기온 맹더위도 이젠 더이상 짜증스럽게 여겨지지가 않습니다. 발길이 머무는 곳 마다 산길을 돌아가는 곳 마다 시선을 던지는 곳마다 로키의 표정은 사뭇 다릅니다. 봄날 연록의 풀빛이 가녀리고 짙은 녹음이 숲을 이루고 황량한 갈색의 마른 낙엽위로 바람은 소슬하고 눈보다 한 치 높은 거리로 다가온 설산엔 만년설이 자욱한 그야말로 사계절이 한 차원에 공존하는 천의 얼굴을 지닌 캐나디언 로키입니다. 아름드리 고송들이 울창한 삼림 속을 터널처럼 지나니 빛이 가려져 사방이 어두워집니다. 빙원이 가까우면 가까워질수록 발아래 펼쳐진 루이스 호수의 크기는 작아지며 그저 대형 화폭에 찍힌 한 방점처럼 변해갑니다. 에메랄드의 그 빛은 그대로 간직한 채로 말입니다. 등고선이 높아질수록 빙산 뒤에 숨었던 설봉들이 하나둘 새롭게 출현합니다. 주변 기류는 이제 소름이 돋을 만큼 스산해지고 채 녹지 않은 눈 더미 들이 먼지에 덮힌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장난기가 동한 사람들은 눈더미 아래로 흐르는 개천 때문에 생긴 틈에 들어가 이글루속의 에스키모처럼 포즈를 취해봅니다. 이름하여 태고적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는 만년설입니다. 바위처럼 단단해진 빙하. 그 장구한 세월을 접촉하는 생경한 경험은 하나의 작은 충격이기도 합니다.
이어서 나타난 절벽으로 난길. 발아래 수 천길의 낭떠러지가 거의 수직으로 나있고 좁다란 길에는 안전로프가 연결되어 있어 조심스레 서로를 확인하며 건너갑니다. 험준한 고산준봉을 건너며 수행의 길을 마다않던 구도자의 심정으로 그 절벽 길을 넘어가니 고산지대의 특징처럼 수목들의 키가 작아지면서 정상도 가까워집니다. 저만치 소담스레 정좌한 산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일차 정상입니다. 한잔의 차가 그리운 갈증에 한걸음에 달려가 그 품에 안깁니다. 정원처럼 자연스럽게 꾸며진 넓은 메도우에는 온갖 풀과 꽃들이 무성하게 피어나 아름다운 화원을 만들고 여러 지류로 흐르는 도랑물 위로 세워진 조그만 다리들은 무릉도원의 그것과도 견줄만한 명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누각 같은 산장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나누는 한 잔의 차와 소맥은 이 세상 가장 귀하고 맛있는 액체임에 분명합니다. 눈 아래든 머리위에든 사방이든 허투루 봐 넘길 시시한 풍경이 분명 아닙니다. 아마 신선들이 즐겨 찾던 그런 곳이 아닌가 여겨지는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휴식을 끝내고 하산의 유혹을 떨쳐내며 최종 목표를 향해길을 떠납니다. 산자락 하나를 넘어가니 이내 외길로 이어지는 능선이 정상으로 향하여 좁게 뻗어있습니다. 한사람만이 오를 수 있는 좁은 길을 길게 종대로 올라가는데 앵글에 잡힌 동행들의 모습 또한 빙하산을 배경으로 로키에 물들어 함께 거룩하고 장엄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처럼 이 힘겨운 등산길을 이제는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올라갑니다. 산정을 향한 길을 한발 한발 또렷하게 내디디며 힘겹게 고난을 감내하며 오르는 길. 날씨마저 발길을 붙잡아도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산을 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넘는 순간입니다. 이 정도에서 하산할까 하는 방황 같은 흔들림. 표류하는 인생길처럼 혼미하고 주저하게 하는데 산은 포기하지 말라고 미더운 권고를 해줍니다. 그 근엄한 지시를 받아들여 우리는 드디어 정상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주어지는 선물, 산이 주는 포상. 정상에서 바라보는 세상천지의 아름다운 신의 피조물. 검푸른 절벽이 언제라도 덮칠 태세로 무섭게 머리위에 다가와 있고 수십 길의 빙하가 켜켜이 쌓여 내를 이루고 얼어붙은 구름은 움직일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장구한 세월을 지켜온 빙하는 엄숙하리만치 장엄하게 산정을 장식하고 우리는 탄식같은 감탄으로 앓고 맙니다. 그 모진 산행길을 헤쳐 온 우리에게 산은 진정 이에 걸 맞는 포상을 해줍니다. 대 하천처럼 굽이쳐 흐르는 빙하는 넓은 계곡을 하얀 눈과 얼음으로 가득 채웠고 금시라도 쩡하고 깨어져 무너져 내릴 것 같이 무서운 기세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기억속의
명장면을 회상하기 위한 매개로 열심히 사진들을 찍는 동안 어느새 신비의 빅토리아 산이 그 정상의 나신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호위 군단처럼 위풍당당한 나머지 다섯 봉우리들도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신이 축성한 자연의 성. 참으로 장엄한 캐슬입니다. 무아의 경지에서 빠져드는 황홀경에 시공을 초월한 영겁의 세월이 찰나 같은 순간이었음을 인지하게 됩니다. 이제 대자연이 베풀어준 연희는 끝이 나고 자애로운 햇살이 온 누리에 퍼져갑니다. 돌아서는 아쉬운 발길에는 빅토리아 산의 짙은 그늘이 조용히 내려 앉습니다.
9일째(Grey Water Rafting in Horse Kicking River)
캐나다 로키의 설산 미봉에 매료되어 산속을 헤매고 다닌지 일주일. 이제 뻐근한 다리와 부족한 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셔대던 소맥의 후유증으로 몽롱해진 동공에 명경에도 마저 취해버려 이제는 아예 야맹증 환자처럼 비몽사몽이렸다. 잠시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말을 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아버리는 산동무들. 오늘은 산행대신 물놀이를 하기로 했습니다. 트레킹 초반부에는 로키의 이상기온으로 한여름의 열기를 뿜어내더니 이내 원래의 날씨로 돌아가 쾌적하게 산행을 즐길수 있었습니다만 오늘 다시 30도 이상의 최고 기온을 찍는다 하니 마침 잘됐구나 하며 중간 정비를 하며 오후에는 레프팅을 즐기기로 했습니다.
오랫만에 기상 시간이 정해지지 않아 아침 시간을 한없이 향유하는 느긋하고도 자유로운 느낌. 몸에 베인 기상시간 때문에 아무리 느기작대도 7시 일어나 밥하고 찌개 끓이고 불고기 까지 볶아놓고 기다려도 노인성 새벽 기상자만 한사람 기척을 보일뿐 산장이 고요합니다. 많이들 피곤하고 잠이 부족했었나 봅니다. 연일 이어지는 고되지만 그래도 행복한 등산. 아무도 낙오없이 흥겹게 걸었고 밤이면 이런저런 이벤트에 보통 취침시간이 1시에서 3,4시. 철인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견뎌낼수 있겠습니까.. 기다리다 못해 11시 쯤해서야 스스로의 약속을 파기하며 기상을 외치고 말았습니다. 1시부터 레프팅 투어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시간이 빠듯. 서둘러서 센터에 도착. 간단한 안전 사항과 항해 요령 등을 교육받고 다른 곳과는 달리 빙하 녹은 물이 흐르는 강인데 수온이 4도 이하라 모두 스쿠바 다이빙용 파마존스 Wet Suit를 몸에 끼게 입고 위에도 마찬가지로 방수용 자켙으로 중무장을 하였습니다. 물론 벙어리 장갑에 안전용 헬멧도 착용하고요. 이 여정에 죽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이른바 Waiver Form을 작성하고 농담삼아 머리카락 손톱 깍아 제출하라고 지시합니다. 한두사람 제외하고는 레프팅의 경험이 없는지라 반은 모험심에 상기된 모습이지만 조금은 염려의 어두운 그늘이 표정에 지워집니다. 제 2외국어에 능통하지 않은 참가자를 위해 다시 한번 설명하고 경험담을 들려주며 적극적으로 즐기기를 권유합니다. 내가 늘 무대위의 주인공이고 이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고 살아야 생이 즐거운 법입니다.
포말로 부서지는 물쌀을 가로지르며 항해하는 맛. 언제 보트에서 떨어질지 모르는 긴장감. 희박하지만 아예 보트가 뒤집어져버리는 아찔한 맛. 이런 모든 가능성을 정면으로 맞설 준비를 하고 그 도전을 즐기리라는 다짐으로 모두 노를 하늘 높이 들어 홧팅을 외쳐봅니다. 현지 외국인이 무슨 뜻이냐 해서 전열을 가다듬으며 외치는 함성이랬더니 오늘 구호는 모두 홧팅으로 하자며 외국 친구들에게도 따라하기를 종용합니다. 원어명 Fighting이 한국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홧팅으로 바뀌어버린 언어의 변천사를 봅니다. ㅎ
레프팅은 5등급 까지 난이도를 나눕니다. 5등급이 가장 위험하며 대개 댐을 방류시키거나 큰물이 져서 유속이 가장 빠를 때 실시하는 것으로 보트가 종종 뒤집어지기도 합니다만 우리는 3-4등급의 난이도가 포진된 코스를 주문했습니다. 그레이 워터 레프팅이라 이름 지은 이유는 석회질의 빙하 강물이 가까이서는 회색으로 비치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강물도 높은 지대에서 내려본다면 아마 녹색으로 반사되었을 것입니다만. 코스타리카 같은 밀림 정글에서의 레프팅은 그린 워터 레프팅이 되죠. 자. 항해는 시작되고 이제 모두 모험의 여정에 적극적이 되어갑니다. 점점 간댕이가 부어간다는 거죠.. ㅎ 부딪히고 공중 부양을 하고 파도에 온몸이 적셔오고 빙점에 가까운 차가운 물벼락을 맞으며 섬뜩해하고 외침과 비명과 웃음이 마른 로키의 하늘을 공명하며 흩어집니다. 잔잔해진 수면에서는 고의로 물싸움을 걸어봅니다. 노로 뿌려대는 물싸움
한바탕. 여기에는 피아가 존재하지 않는 동심속의 전쟁입니다. 뜨거워지던 한낮 로키의 태양볕이 말뒷발굽질 강물의 차가움에 한풀 꺽이고 마는 오후입니다.
이래저래 대여섯 시간여의 여정을 마치고 우리의 표정들이 그대로 찍힌 사진과 동영상을 담은 USB를 사들고 산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웃도어의 진수를 맛본지라 그대로 이어져 오늘 저녁은 캠프 화이어에 야외 식탁에서 한잔. 결혼 30주년을 기념하여 단 한쌍만이 커플로 참가한 부부를 위해 야생화로 헤드 밴드를 만들어 머리에 씌어주었습니다. 이어지는 축하주와 말씀의 세례. 그런데 축하사가 아닌 악담으로 흘러갑니다. 왜 도시락을 지참해왔느냐? 30년 지겹게도 살았네. 얼마나 매력들이 없었으면 아직까지 그러고 사냐? ... 모두 웃고자 하는 악의없는 농이겠지요. 파안대소 흥겨워지는 연회는 밤이 이슥할수록 익어가고 로키의 청정 밤하늘에는 유난히 커보이는 보름달이 내려다 보며 빙긋이 웃고 있습니다. 무수한 별들이 내려 쏟아지더니 마른 장작으로 활활 타오르는 우등불 속에서 튀어오르며 다시 태어납니다.
( 미주 트레킹 박춘기 대장님 후기 퍼왔습니다)
첫댓글 즐거운 여행이였네요 시간날때 한가히 읽어봐야 되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