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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 |
천연기념물 제152호 |
명칭 |
남해 화방사 산닥나무 자생지(南海 花芳寺 산닥나무 自生地) |
분류 |
자연유산 / 천연기념물/ 문화역사기념물/ 생활 |
수량/면적 |
9,917㎡ |
지정일 |
1962.12.03 |
소재지 |
경남 남해군 고현면 대곡리 산99 |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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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자 |
화방사 |
관리자 |
남해군 |
일반설명 / 전문설명 산닥나무는 일본 및 우리나라 남해, 진도, 강화도에 분포하고 있다. 산과 계곡의 나무 밑에 자라며, 특히 물기가 있는 곳과 비옥한 곳에서 잘 자란다. 나무껍질과 뿌리의 섬유질은 종이의 원료로 사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희귀한 나무로 주로 절 주변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는 조선시대에 종이 만드는 일이 대개 절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를 위해 산닥나무를 일본에서 가져와 절 주변에 심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남해 산닥나무 자생지는 화방사(花芳寺)라는 절 입구의 왼쪽 언덕과 계곡을 따라 자라고 있다. 주변에 소나무가 드문드문 있고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등이 자라고 있는데, 소나무와 잡초 때문에 산닥나무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남해 산닥나무 자생지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그 수가 대단히 적은 산닥나무들이 제한된 지역에 분포하는 희귀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종이를 만드는 원료로 사용된 문화적 자료가 되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산닥나무는 남쪽 해안지대 그리고 경기도 강화도에 자라는 낙엽활엽관목인데 높이는 1m쯤에 이르고 줄기나 잎에 털이 없으며 줄기는 적갈색으로 잎처럼 대생한다. 잎은 길이 2.5-4.5㎝, 나비 1-2.5㎝이다. 잎은 난형 또는 난상타원형이며 양면에 털이 없고 뒷면은 약간 흰빛을 띤다. 가는 가지 끝 쪽에 총상화서가 나와 노랑색의 꽃이 8-9월에 핀다. 꽃받침은 통행(筒行)이며 길이6-7㎜로서 끝이 4개로 갈라진다. 열매는 난상 장타원형이며 9-10월에 익는다. 수피는 제지원료로 숭상된다. 팔꽃나무과에 속하며 일본에도 분포한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닥나무를 제지원료로 했는데 그것보다는 산닥나무의 섬유로 종이를 만들면 지질이 더 뛰어나고 평활하며 광택도 있다 해서 일본에서 수입해서 증식을 도모했다 한다. 그리고 산닥나무의 적지로 생각되는 따뜻한 남쪽 해안지방에 심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종이 만드는 일은 승업(僧業)으로 되어 있어서 산닥나무도 주로 사찰주변에 심어진 것으로 믿어지며 그 흔적이 지금에도 남아 있다.
남해의 산닥나무 자생지는 배수가 잘 되는 계류의 옆쪽이고 그늘진 곳이다. 산닥나무는 다른 큰 나무밑에서 자라는데 억눌려서 그 자람이 좋은 편은 못 되고 있다. 그 주변에 자라는 나무들은 제거해서 산닥나무에 더 넉넉한 공간을 준다는 것은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산닥나무는 그 수가 대단히 적은 희귀종수에 속한다. |
쉼터
들머리 입구에 이정표(←대계마을, 망운산 정상→)도 세워져 있다. 극락암 가는 포장도로와 작별하고 좌측의 잘 정비된 넓은 등산로를 따라 오르막을 올라간다.
얼마간 올라가니 우측 계곡 너머로 극락암이 보인다.
계속해서 오름길을 따라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들머리에서 15분을 올라가니 의자 등이 설치되어 있는 쉼터에 닿는다.
망운암 가는길의 약수쉼터. 시멘트포장이 되어 있다. 능선길이 온통 철쭉꽃이다.
쉼터를 지나니 이제 정비된 넓은 등산로에서 다소 좁아진 전형적인 등산로를 따라 계속 오름길을 오른다. 7분을 더 오르니 주능선안부의 화방고개에 닿는다.
아무런 표시가 되어 있지 않는 화방고개에서 우측으로 4분을 더 올라가니 이정표(←망운암, ↑망운산정상, →화방사)가 세워져 있는 망운암 갈림길에 도착한다.
망운암 갈림길에서 계속해서 6분을 더 올라가니 약수가 조성되어 있는 넓은 공터에 닿는데 시멘트포장도로가 가로 지르고 있다.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계속 진행하면 망운암에 닿는다. 결국 망운암 때문에 포장이 되어 있는 셈이다.
이제 배낭을 벗어놓고 잠시 쉬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승용차 한 대가 망운암을 향해 지나간다. 어쩐지 기분이 꼭 속은 느낌이다. 그래도 화방사에서 이곳까지의 등산로를 경험한 것으로 위안을 삼고는 11분의 휴식을 끝내고 망운산을 향해 올라간다.
망운산 전위봉에서 바라본 망운산의 모습
철쭉보호시범지역의 푯말도 세워져 있는 공터 입구에 약수가 조성되어 있는데 겨울철이라 수도꼭지에 물이 나오지 않고 있다.
굵은 로프로 잘 정비된 계단식의 오름길을 올라간다. 좌우로 철쭉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있다. 철쭉 철에 맞추어 오면 멋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16분 걸려 망운산 정상 직전의 전위봉에 닿는다. 다소 좁은 공터이지만 조망이 좋다. 바로 앞에 망운산의 돌탑(케언)이 잘 보인다.
망운산 정상에서 바라본 조망
망운산 정상에서 바라본 조망
전위봉에서 내려갔다가 올라가면 이내 망운산 정상이다.
786m, 남해 최고높이를 자랑하는 망운산 정상에서 보는 주변 바다 위에 점점이 떠있는 자그마한 섬들과 강진만, 연죽저수지, 청정해역의 서상 앞바다, 멀리 지리산, 여천공단, 여수, 삼천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동화력발전소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가 보이고 그 옆으로 금오산이 멋지게 보인다.
바로 밑에 망운암의 암자가 너무나 잘 보이고 불경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남해읍내도 잘 보인다. 어제 산행한 설흘산~응봉산의 능선도 잘 보인다. 중계탑 봉우리도 잘 보인다.
정상에는 기우제를 지냈던 흔적인 듯, 평평하게 북쪽을 향하도록 되어 있고, 옆에는 제관이 앉을 수 있도록 돌로 된 의자가 놓여있다.
남해에 비가 오지 않을 경우 제일 먼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않을 경우 상주리 앞바다 세존도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정상 반대편에 있는 연대봉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남해의 최고봉 망운산 정상에는 두 개의 정상석이 있는데 1984년 8월 15일 남해산악회에서 세운 작은 정사각형 대리석의 정상석(높이 785m)과 비교적 최근인 2003년 2월 9일에 세운 작은 직사각형의 정상석(높이 786m)이 한 쪽 구석에 세워져 있다.
망운산 정상
정상에서 바라본 바로 밑의 망운암의 모습
정상에서의 조망(설흘산~응봉산 능선이 잘보인다)
정사에서의 조망
무척이나 좋은 날씨에 조망도 좋아 망운암이 바라보이는 쪽에서 25분간 휴식을 하고 다시 화방사를 향해 내려간다.
역시 내려갔다가 올라가면 전위봉이 나오고 이제 완만한 능선길로 진행을 하다가 철쭉나무가 도열되어 있는 다소 급한 내리막을 내려가면 약수광장(공터)의 시멘트도로에 떨어진다.
다시 화방사를 향해 내려간다.
망운암 갈림길을 지나 화방고개에서 좌측의 급한 내리막을 내려가면 쉼터가 나오고 계속 내려가면 산행들머리인 산닥나무 군락지 안내문이 나오고 이내 화방사 경내에 떨어진다.
화방사를 다시 구경하고는 주차장에 도착함으로써 너무 멋진 망운산 산행을 마쳤다.
남해 12경: ⑨망운산과 화방사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사에 몸과 마음이 지쳐 그냥 편안히 쉬고 싶은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의미 있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우리에게 산사(山寺)는 삶의 고향이고 위안이기 때문이다. 여초 김응현 선생의 일필휘지가 오직 한마음, 일심으로 정진하라는 일주문을 가로지르고 있는 망운산 화방사는 채진루의 이름이 그렇듯이 삶의 진실을 캐는 이들의 땅이다. 1981년 화재로 소실된 이충무공 목판 묘비가 복원되어 있는 화방사는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임진왜란 때 순국한 장병들의 영혼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호국사찰이다. 법전사물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 화방사 주변에는 천연기념물인 산닥나무 자생지가 있어 교육의 장이 된다. 화방사에서 망운암으로 오르는 아침 숲길 등반은 산사체험을 곁들인 멋진 산책 코스로도 유명하다. 망운암은 정상 가까이에 있는 조그만 암자이다. 그냥 아무렇게나 세운 듯한 돌 일주문을 무심으로 지나면 중병을 낫게 한다는 영험의 기도도량 망운암이 나온다.
남해바다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망운산(786m). 이 산을 오르는 사람은 이곳이 알려지길 두려워한다. 화방사의 정적을 뒤로 하고 산길을 올라 정상에 오르면 점점이 떠있는 작은 섬들과 강진만, 청정해역의 서상 앞바다, 지리산, 여천공단, 여수, 사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는 기우제를 지낸 흔적이 남아있으며 옆에는 제관이 앉을 수 있도록 돌로 된 의자가 놓여있다. 남해에 비가 오지 않으면 가장 먼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면 상주 앞바다의 세존도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정상 반대편 연대봉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남아있다. 5월에는 철쭉군락지의 꽃들이 만개해 붉게 타오르는 화려한 면모를 선보이며, 등산객을 현혹한다. 최근에는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으로도 인기를 얻고 있어 전국 동호인들이 줄을 잇는다. 화방사에 차를 세우고 정상까지 등반할 수 있으며, 망운암과 정상까지 갈 수 있는 임도가 있어 차를 타고도 갈 수 있다.
(관광포인트)
망운산은 5월 어린이날을 전후로 철쭉이 만개한다. 가족의 달을 맞아 온 가족이 남해스포츠파크와 철쭉 그리고 이충무공의 역사체험교육을 같이 견학한다면 좋은 여행코스가 될 것이다.(남해군청 홈피에서 발췌)
천연기념물 느티나무
산행을 마치고 나니 12시 36분이다.
이제 이충무공 관음포 유허지를 향해 출발한다.
점심때가 돼서 어디 식사할 곳이 없나 유심히 살피면서 진행을 한다.
해안도로를 따라 진행하는데 고현면 갈화리에 천연기념물 안내문이 세워져 있어 잠시 구경을 한다.
남해 고현면의 느티나무(南海 古縣面의 느티나무)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 276호
지정일자 : 1982. 11. 4
소재지 : 남해군 고현면 갈화리 733
시대 : 약 500여 년 전
고현면 소재지인 탑동마을에서 서면 방향 지방도 도로를 따라 약4km 가면 갈화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왼쪽 들판 한가운데에 키 큰 느티나무가 있다. 높이는 17.5m, 수관은 동서가 27m, 남북이 25m나 되며 밑동 지름이 10.6m, 사람 가슴 높이의 둘레는 9.3m나 된다. 몸통에는 큰 공동(구멍)이 2개나 있다. 수령은 500년이 넘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1988년 태풍에 의해 부러진 가지와 썩은 부분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5백 살이 넘은 나무에게 어찌 사연이 없으랴? 약 500년 전에 마을 촌장이면서 논과 밭을 많이 가지고 있는 유동지(劉同志)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자기 논의 한 가운데이고 옆에는 냇물이 흐르는 좋은 장소인 이곳에 나무를 심고 여름 농사철에는 그늘 밑에서 휴식을 했다고 한다. 나무가 자라면서 나무 밑에서 지친 몸을 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났고, 마을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갈화리의 천연기념물 느티나무를 보고는 얼마안가 이내 관음포 주차장에 도착한다.
그런데 눈을 씻고 봐도 식당이 없다. 결국 관음포 유허지를 보고 나서 식사를 하기로 하고 가장 먼저 거북선 형상의 이순신 영상관으로 간다.
지난해 12월 개관 운영하고 있는 경남 남해군의 이순신 영상관이 관광객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면서 보물섬 남해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6일 군은 지난 4일까지 이순신 영상관을 다녀간 관람객만 해도 7,600여명으로 주말에는 하루 600여명의 관람객들이 다녀가 입장수입만 해도 1340만원을 올렸다고 밝혔다.
이순신영상관은 고현면 차면리 일원에 2만3000여㎡의 부지에 148억 원을 투입해 최첨단 첨단 영상관과 전시관, 관광안내소와 농산물 판매대, 주차장, 공원 등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138석의 최고급 관람석을 갖춘 국내 최초의 돔형 입체영상관은 벽면과 지붕 전체가 스크린으로 기존의 평면 스크린에서의 입체 영상보다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였던 노량해전의 치열한 격전 현장을 3D입체로 제작해 생동감 있는 화면들을 관람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했다.
영상관의 3D입체 효과는 상영되는 영상물의 화면은 모든 것들이 내 앞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이 바닷물에 있는 것처럼 배가 자신의 눈 위로 지나가거나 포탄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것처럼 파괴되는 배들의 파편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 같은 현상을 실감있게 느낄 수 있는 시스템은 많은 관광객들이 선호하기에 충분할 것으로 보여진다.
관음포는 임진왜란 노량해전 전투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영구를 맨 처음으로 육지에 안치했던 곳으로서, 대성운해(大聖隕海) 라는 편액이 붙은 묘비각이 있으며 묘비각에는 홍문관 대제학 홍석주가 비문을 짓고 형조판서, 예문각 제학 이익희가 쓴 유허비가 있다.(이순신 영상관 남해군 보도자료에서 발췌)
영화가 시작되려면 아직 30여 분의 시간적 여유가 있어 이순신영상관의 2층으로 올라가 차례로 전시물을 구경한다.
입구에 위치한 추모의 다리를 지나 노량해전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만약 저 원수들을 섬멸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지금 전쟁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두 명언이 적힌 추모의 글을 읽을 때 가슴이 찡해온다.
추모의 문을 지나면 관음포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전이의 장이 펼쳐진다.
동서양의 유명한 명장인 버나드 몽고메리, 빌라드, 도고 헤이하치로, 진린 등이 불멸의 신화를 만든 충무공에 대한 평가와 고서적이 전시되어 있으며 관람객을 위한 휴게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이순신장군과 임진왜란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당시를 이해하게 하는 이해의 장도 구경한다.
그리고는 체험의 장으로 넘어간다.
왼쪽에는 조선, 명, 일본군의 갑옷과 활 등의 무기가 전시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판옥선 모형 등이 현실감있게 재현되어 이순신 장군의 전략전술을 이해하고 느끼게 하는 공간이다. 마치 바다에 떠 있는 전함들이 실제 움직이는 듯하다.
감동의 장으로 들어가 두 개의 스크린 사이로 들어서니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의 함포 사격이 시작된다. 한 쪽에서 포를 쏘면 포가 날아가는 시간에 맞쳐 반대쪽의 전함이 폭파되거나 물에 떨어진다. 임진왜란 격전의 현장을 알 수 있는 공간이다.
2층의 전시실을 구경하고는 1층으로 내려와도 시간이 남아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넓은 데크가 조성되어 있어 관음포의 바다를 구경하니 시간이 되서 1층으로 들어와 줄을 서서 영화를 보려고 기다린다.
영상관 문이 열리고 입체영상을 보기위한 안경을 받고 영상관 안으로 들어가니 처음 접하는 구조물에 다소 의아해 한다.
돔형으로 되어 있는데 스크린이 보이지 않는다. 좌석도 누워서 하늘을 보게 되어있다.
아주 편하게 반 쯤 누워서 입체안경을 쓰고는 영화를 관람한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노량해전이 가슴을 뛰게 한다. 이순신 장군에 관한 영상은 어려서부터 수차례 보아 왔지만 지금 보는 입체 영상은 새롭게 느껴진다.
장군의 나라 위하는 마음에 가슴이 저려온다. 마지막 순국하는 장면에서는 눈물까지 나온다.
암튼 흥미있고 재미있게 영화를 본 후 이락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관음포 이순신 장군 전몰 유허지 모습
1998년 12월 16일 이충무공 순국 40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유삼남 해군참모총장이 쓴 유언비 「지금 전쟁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는 뜻의 한자가 음각되어 있는 대형 표지석이 우측에 세워져있다.
이락사로 가는 길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반송들의 운치가 멋지다. 반송길을 따라 얼마간 진행을 하니 이락사가 나온다.
관음포 앞바다 해안에 위치한 이락사는 이충무공의 영구를 맨 먼저 육지에 안치했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지 234년 후인 1832년(순조 32)에 공의 8대손 이항권이 황명에 의해 단을 모아 제사하고 비와 비각을 세워 이락사라 칭하였다.
이락사 누각 내부에 있는 빨간색의 비문이 적혀있는 삼도수군 통제사 이순신비를 보고는 첨망대를 향한다.
2층 누각의 첨망대에 올라가니 노량해전의 격전지인 관음포만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때의 처절했던 전투 장면을 상상해본다.
조망이 좋은 첨망대에서 내려와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남해 12경: ⑤이충무공 전몰유허
남해대교에서 섬의 한가운데를 향해 4Km 들어오면 사적 제232호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가 자리 잡고 있다. 일명 이락사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유해가 맨 처음 육지에 오른 곳이다. 이락사 앞뜰에는 충무공 순국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유언비가 역사를 증명하듯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아 있다. 이락사가 순국성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장군이 전사한지 234년이 지난 1832년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8대손으로 통제사가 된 이항권이 이곳에 나라를 지켰던 장군을 기리는 유허비와 비각을 세웠다고 한다. 이곳에는 전국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사철 푸른 육송이 404년 전의 그 날을 되살려내고 있었다. 많게는 10개에서 적게는 4개의 가지가 땅에서 바로 가지를 벌린 채 4,50미터의 오솔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조국을 향한 애타는 마음이 소나무에도 투영된 것일까? "이락사" 현판이 걸린 문을 들어서면 바로 "대성운해"라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필 현판이 걸린 비각이 있다.
"大星隕海"라. "큰 별이 바다에 잠겼다" 뜻이다. 비각에서 첨망대까지 연결된 솔밭길은 500m에 이른다.
길의 좌우에는 솔가지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정취를 더 한다. 첨망대에서 바라보면 노량해전의 전장이 한눈에 보인다.
(관광포인트)
남해대교와 충렬사로 여행하려면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4월초에서 중순까지가 가장 좋다. 하얗게 핀 벚꽃과 함께 푸른바다를 달려보면 남해만의 색다른 문화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노량마을 선착장에서 관광유람선으로 다도해의 비경을 구경하는 것도 바다를 찾은 또 다른 기쁨.(남해군청 홈피에서 발췌)
왕지마을 가는길의 해안도로 모습(풍광이 멋지다)
이제 다음 행선지인 왕지마을을 향한다.
남해대교 앞에서 충렬사 방향의 해안도로로 접어든다.
배가 고파 충렬사 앞의 식당가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는 이내 왕지마을을 향한다. 충렬사는 몇 번 본 적이 있어 이번 여행에서는 겉만 보고는 그냥 통과한다.
남해 12경: ②남해대교와 충렬사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 큰 섬. 창선·삼천포대교 개통 이전까지 남해의 관문은 동양 최대의 현수교라 불렸던 남해대교이다. 남해대교는 길이 660m, 높이 80m의 아름다운 현수교로 1973년 개통된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일컬어지고 있다. 남해대교가 가로지른 노량해협의 거센 물살은 남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산 증인이요, 역사의 마당이었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시작된 곳으로, 또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무수한 유배객들이 자신의 적소로 건너오기 위해 나룻배를 탔던 한맺힌 곳이었다. 남해대교가 놓여지기 전, 남해사람들은 나룻배를 타거나 도선으로 노량의 물살을 가로질러 다녀야 했지만 30년 전부터는 승용차로 1~2분이면 거뜬히 물을 건넌다. 남해를 육지와 연결한 남해대교를 건너면 벚꽃터널이 반긴다. 봄이면 하늘이 보이지 않는 벚꽃의 터널이 장관이다. 벚꽃터널을 지나 노량마을로 내려오면 충무공 이순신이 관음포에서 전사한 후 시신을 잠시 모셨던 충렬사와 바로 앞 바다에 떠 있는 실물 크기의 거북선이 있다. 남해충렬사의 가장 큰 특징은 이순신 장군이 3개월간 묻혔던 자리에 아직도 가묘가 남아 있다는 점이다. 1598년 11월 19일 돌아가신 충무공의 유해는 충렬사 자리에 안치되어 있다가 1599년 2월 11일 전라땅 고금도를 거쳐 외가동네인 아산 현충사 자리에 운구되어 안장되었다. 충렬사의 역사는 장군이 돌아가신지 34년이 지난 1633년에 한칸의 초사를 건립하여 제사를 봉행하면서 시작된다. 남해충렬사는 규모가 통영충렬사 등에 비하면 매우 작지만 1973년 6월 11일, 사적 233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우암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쓴 이충무공묘비와 사우 그리고 충무공비와 충민공비, 내삼문, 외삼문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청해루와 장군의 가묘가 잘 정리되어 있다.
남해대교와 충렬사로 오시는 분은 왕지마을 쪽 해안과 벚꽃길이 관광객의 발길을 끌고 있으며 노량 앞바다에 정박해 있는 거북선은 어린이들에게 큰 인기다.(남해군청 홈피에서 발췌)
충렬사를 지나 본격적인 해안도로에 접어들었다. 바다 건너 금오산이 멋지게 보이고 왕지마을 진입로의 해안도로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금산의 정기를 마시며 기도를 마친 이성계는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풍광이 빼어난 왕지마을의 정취에 취해 이곳 굽은 고개를 넘어가 임금이 되었다하여 「굽을 왕, 땅 지」를 써서 왕지마을이라고 한다는 왕지마을에 도착하여 잠시 바다 구경을 한다.
여행님을 내려주고는 잠시 차 안에서 다음 행선지를 물색한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무제님이 돌아온다. 민박집의 민박요금을 물어보니 6만원이란다.
「헉!」
원래 농촌체험마을([갯벌, 바다 체험]해바리, 바다낚시, 바지락캐기, 개우럭잡기, 털개잡기, 굴캐기. [농산물체험] 유자, 시금치캐기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인 왕지마을을 찾아가 어떻게 체험하는 가를 확인하고 싶었는데 그만 민박요금에 정이 뚝 떨어졌다.
마늘나라 모습
해안가의 왕지마을을 벗어나 남해읍을 거쳐 마늘나라에 도착한다.
보물섬 남해는 겨울이 따뜻하고 여름이 서늘한 해양성기후로 마늘의 생육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고, 해풍을 먹고 자란 남해마늘은 그 성분 중 알린, 알리티아민, 스코르지닌, 게르마늄 등 다양한 무기질을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으며, 색택은 유백색을 띄며, 알싸하고 매운맛과 단맛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명품 마늘로 2007. 5. 1일 제28호 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지리적 특성을 인정받았다고 남해군농업기술센터 소형안내책자에 적혀있다.
대형 마늘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마늘나라의 넓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는 이내 안으로 들어가 구경을 하니 선입견에 잡혀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마늘이 전시할 것이 있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늘 문외한인 필자가 한마디로 공부할 것이 많은 곳이었다.
처음 주차장에 도착해서는 뭐 볼 것이 있나 하는 선입견에 그냥 차 안에 있으려고 했는데 이웃님들이 지체없이 차에서 내려 전시장 건물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이거 아니다 싶어 얼른 쫓아간다.
결국 마늘에 대해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되었고 공부도 많이 하게 되었다.
전시시설도 매우 훌륭하다.
재미있는 글귀가 있어 옮겨본다.
나도 여자지만 뽀얀 속살 훔치는 재미가 무슨 재미냐 그런 말은 차마 못하겠다
벗겨보면 안다 쪽마다 반들반들 모두 예쁘다
제 아무리 예쁜 애첩도 질투의 독기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인지
그녀를 벗긴 손톱 밑이 알싸하니 맵다
그러나 갈치국 한 대접 후루룩 해치운 후에야 알 것 같다
그 탱탱하고 말간 것이 으깨져 곤죽이 되면서도 제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열녀였음을
(김인자 님 글에서 발췌)
1월 2일의 일몰
마늘나라에서 나와 멋진 일몰을 구경하고는 팬션에서 잠자기 위해 숙박지를 물색하는데 첫 번째 팬션은 원래 15만원인데 10만원에 해준다는 말에 기겁을 하고, 두 번째 전화의 팬션은 6만원 달라는 말에 한숨을 쉰다.
가는 길에 호텔이 보여 잠시 호텔에 가보니 주말은 7만원이고 주중은 5만원이라고 하는데 금요일은 주말로 들어간다고 해서 아무 소리 못하고 다시 나와 금산 쪽 방향으로 진행을 해본다. 아무래도 팬션과 호텔은 비싸서 못 자겠고 그래서 모텔을 물색해본다.
결국 3만원짜리의 모텔로 자리 잡고 바로 옆 건물에 식당이 있어서 모텔에 짐을 풀어놓고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에 들어간다.
8천원짜리의 해물된장을 시키고는 기다리고 있는데 계속해서 손님들이 들어온다.
결국 50여분을 기다려서 해물된장을 먹고는 모텔로 되돌아와 행복했던 남해에서의 이틀째 여정을 마감한다.
둘째날 일정
남해읍에서 숙박(장수여관)→망운산(화방사)산행→관음포유허지(영화관람)→충렬사근처에서 점심→왕지마을→마늘나라→일몰→상주면에서 숙박(모텔).
첫댓글 행복이 있는 여행이 있는 인생 되시길........
여행은 늘 저에게 많은 가르킴을 줘서 참 좋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