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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글을 쓰기 전에 주어를 “나” 라고 칭하는 것을 양해 바랍니다. Free writing 을 하다 보면 주어를 “저 ” 대신에 “나 ”라고 칭하면 자기 스스러 검열을 받지 않고 쓸 수 있기에..
나는 병원에서 오래 근무하다 보니 처음 보는 사람마다 머리위에서 발끝까지 위 아래로 일초도 않 걸리게 한 눈으로 슬쩍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아마도 내가 병원에서 오래 근무하다 보니 언젠가 부터 그런 습관이 몸에 베였다. 그래서 상대가 어떠한 병을 갖고 있는지를 대충 가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상대에게 혹 이런 질병을 갖고 있느냐고 물어 본다. 상대는 나에게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어 본다. 그러나 나는 왜 알았는지를 가깝게 지낸 사람외는 알려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짐작이 틀릴 수 있기때문이다. 일단은 의심이 가지만 test를 거치지 아니 하고는 확신의 진단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상대에게 일단 주치의를 만나서 이런 이런 검사를 해 보라고 권 한다.
예를 들어 보곘다. 하루는 은행계좌를 열기 위하여 은행에 들렸다. 나의 직업의식을 집에 두고 나오지 아니 한 것을 느꼈다. 은행원은 나에게 어데다 싸인 할 것을 손으로 가르킨다. 나는 그 사람의 손톱을 보고 그 사람에게 천식과 만성 폐질한 있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다. 한번도 기침없이 근무 하는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하니 주위의 은행원들이 나를 의아한 눈으로 주시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직원이 눈을 크게 뜨며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어 본다. 그래서 나는 증세와 치료 방법을 알려 준다. 그리고 나는 주위에서 함께 근무하는 운행 동료에게 박수를 받으면서 은행 문을 나온다.
한번은 나의 아파트에 일본 3세인 하와이 대학에서 학장 했던 사람이 나를 방문 하였다. (여러분도 Google 들어가 Victor Noburo Kobayashi 를 검색 해보세요, 아래 하와이 집과 그분 사진 참조)
나는 카네기홀의 총 지배인인 사람을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다. 그 분한테 소개로 이 분을 알게 되었다. 그 분은 나를 알게된 이후 하와이에서 뉴욕에 오면 그의 친구 집에 머물지 않고 나의 아파트에 있다가 돌아 갔다. 아마도 나하고 함께 지내는 것이 편 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하루는 내가 화장실에가는 길에 이분의 숨소리가 고르지 않음을 보았다. 그래서 그 분의 잠시 숨소리를 관찰 해 보았다. 그 분은 sleep apnea (수면 무호흡증)이가 있음을 보았다. Sleep apnea는 숨을 10초 이상 쉬지 않다가 갑자기 숨을 몰아 쉬는 것이다. 이런 증세를 보인 사람들은 고혈압, 관상 동맥 질환, 뇌졸중, 심장 부정맥, 폐고혈압, 당뇨병, 감염, 심장 박동 중단등을 일을 킬 수 있다. Sleep apnea이가 시작되면 뇌의 동맥과 뇌 자체에 피의 흐르는 방해를 하여 잘 못 하면 삼장 마비로죽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증세가 있으니 하와이에 가거든 주치의에게 가서 sleep apnea test를 받아 보라고 권해 주었다. 그 분은 나에게 시쿵등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삼일 후 저녁을 함께 할때 다시 내가 우려 하는 것을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나에게 왜 나한테 이야기 한것을 다시 이야기 하냐고 하면서 심장마비로 죽으면 그만 아니냐고 하면서 어짠은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분에게 말이 씨가 될 수 있으니 빈말이라도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된다고 해 주었다. 이 분이 나의 손님이기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아니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한국에 갈 기회가 있으니 혹 뉴욕에 오면 나의 아파트에 있다가 즐기고 가라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내가 광주에서 열리는 문화행사 비엔나(???)를 관람하고 있는데 뉴욕의 친구로부터 문자가 왔다. 당시에 그 분은 나의 아파트에 머물고 있었다. 하와이학장 했던 분이 뉴욕의 길에서 쓰러져 응급 처치를 했지만 회복 하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갔다고 한다. 그 소식에 나는 하늘이 무너지고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참으로 좋은 분이고 나를 아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말에 좀 귀를 기울여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아니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분이 사는 하와이 집에 가서 한줌의 재로 돌아온 그 분 앞에 두 손 모아 부디 편안한곳에 가시라고 기도 밖에 할 수 없었다. 그 분 아들은 내가 뉴욕으로 돌아 올때 그 분이 직접 빚은 도자기를 나에게 주었다. 나는 그 분의 정성과 땀이 어린 도자기를 나의 응접실에 모시고(?)가끔 그 분을 생각 날때 마다 쳐다 보곤 한다.
한번은 코비드 팬더믹이 점점 낮아 지고 있을때 병원에서 타주를 방문 하는 것을 허가를 해 주어 시카고에서 차로 댄버까지 혼자 여행을 3주에 걸쳐 해 보았다.
중간에 내가 North Dakota (ND)수도인 Bismarck를 방문하여 주 청사를 방문 하였다. 이 주는 대부분 공화당이라 공화당 출신은 막대기를 꽂아도 무조건 당선 되는 주이다. 당시에 공화당출신들은 마스크와 백신 맞지 않는 것이 당연한 걸로 알고 있었다. 주 청사에 들어 서니 마스크를 쓴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청사에서 주 검찰총장과 이야기를 할 기회를 가졌다. 미국은 투표로 검찰 총장을 선출한다. 이 분은 나에게 주 의회를 보여 주면서 자신이 하원과 상원 의원 할때의 그가 앉아서 업무를 보았던것을 가르키며 자세하게 그가 했단 의정 할동에 대하여 이야기 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사무실에 가서 함께 커피를 들면서 뉴욕의 팬더믹 이야기와 어떻게 병원에서 보냈는지에 대하여 주로 이야기를 나누 었다. 다시 나의 직업의식이 그의 머리에서 부터 발끝까지를 검사아닌 체크를 해 보았다. 그런데 얼굴에서 피의 흐름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감지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분에게 청진기 한번 대 보지 않고 나의 의심성의 질병을이야기 할 수가 없었다. 경동맥은 뇌에 혈액을 공급하는 주요 혈관이기에 청진기로 들어 보면 무슨 문제가 있는가를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분은 막강한 정치적 파워가 있는 사람에게 나의 의견을 들여 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그분의 건강에 대하여 숙제로 남기고 일상적인 병원일에 매진 했다.
작년에 카르비인 크루즈에 내 몸을 맡겼다. 혼자갔기에 저녁을 먹을때 원탁에 여러 승객과 함께 했다. 우리는 누가 이야기 하지 아니해도 각자의 소개를 한다. 그런데 바로 옆에 ND에서 온 은퇴한 부부교수가 있었다. 나는 내가 ND 주청사에서 검찰 총장과 함께 있을 때 느낀점 특히 그이 혈액 순환이 좋지 않았던것 같았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런대 놀랍개도 작년에 심장 마비로 사망 했다는 것이다. 구글에 들어가 north Dakota attorney general heart atrack을 쳐 보시라. 그러면 그 분의 삼장 마비 소식을 접하기 될것이다.
내가 그 분을 보고 느꼈던것을 그 분에게 심장 전문의사에게 가 보라고 권하지 아니 한 것에 후회가 막심하고 안타 까울 따름이다. 다른 사람 즉 평범한 사람들이 볼때는 건장한 체구이기에 튼튼하게 보이지만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아니했다.
지금까지는 경험담을 예를 들어 보았고 이제 부터 본론으로 들어가 본다. 나는 경찰에 체포된 기록이 있었는데 어떻게 시민권을 획득 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 할련다.
나는 영주권을 획득 할때 많은 고초를 당하면서 겨우 받았다. 그애기는 추후에 올리겠다.
하루는 영주권 받은지 10년이 지나 시민권을 신청해서 심사 받으러 갔다. 필기 시험을 끝낸 후 심사관 앞에서 면접을 받게 됐다. 그런데 뜸금없이 심사관이 나에게 경찰에 체포된 경력과 범칙금 $25,000을 낸 기록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체포 된지를 물아 보았다. 나로서는 아닌 불도 때지 않는 굴뚝에 무슨 연기가 나는 듯한것을 느끼면서 화두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한번도 경찰과 마찰로 마주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김씨 성이 많아서 그럴 수 있을 수도 있다고 심사관에게 이야기를 했다.
아시나요. 미국 법이라는 것이 코에 걸면 코거리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된다는 것을…. 나는 실제로 잘 알고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내가 테니스를 마치고 돌아 오니 parking violation 딱 지가 나의 차 앞 유리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 공원 파킹장에 여러번 했기에 아무 생각 없이 주차를했던 것이다. 아무리 찾아 봐도 파킹하지 말라는 팻말이 없었다. 가만히 파킹 티켓을 보니 장애인 파킹장에 했다는 것이다. 장애인 파킹장에 파킹하면 엄청 큰 벌금을 받는다.그런데 이곳에서는 장애인 파킹장라고 쓰인 간판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appeal을 했다. 심사관은 나에게 분명 파킹하지 하지 않는 싸인이 있을 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상급에 appeal을 신청 하였다. 받아 들여서 다시 그곳에 찾아가니 바닥에 희미하게 닳아진 페인트로 장애인 마크가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것을 사진과 비데오를 담고 인텃넷에 나와 있는 그곳의 파킹 현황등을 첨부하야 갔다.
이번에는 세명의 백인 심사관이 내가 제출한 증거를 돌려 보면서 내 말이 맞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나에게 이곳 사진에 공원이 이름이 없다고 하면서 다른곳에서 찍은 사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파킹장에서 다리를 향한 곳이 트라이보로 브리지 (TRI borough bridge 는 뉴욕시 세개의 보로를 걸치기에 그렇게 명한다) 밑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 다리는 바로 그 공원 중간을 꿰뚤어 가는 다리 였다. 그러나 그들은 공원이름이 없다고 하면서 나의 어필을 받아 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은 Central Park 방문할때 Central Park 싸인을 본적이 있냐고 하면서 나는 그들에게 내가 주차 금지 티켓 준 사람이 왜 내가 주차 위반을 했는지를 그 증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말에 귀 기울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곳을 나가면서 왜 사람들이 “NO JUSTICE, NO PEACE”를 외치는 것을 깨닫게 해 주어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가거나 형을 받는다고 하면서 평생 법기술자로 지내기 바란다 하고 문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미국에서는 파킹 티켓은 두번째 appeal 이 최종이고 더 이상 가지 못한다.) 그리고 나서 경호원이 나를 따라와 법정 모독죄로 잡아 올까 했는데 아무도 따라 오지 아니 했다.
그 뒤로부터 난 미국법의 정의를 믿지 않기로 했다. 나 역시 한국에 있을때 군에서 법과에 편입하여 장학금을 받고 공부를 했고 사시에도 두번 도전 했지만 실력 부족으로 턱걸이 가까이 점수를 받았지만 포기를 했다. 당시에 일차 시험이 팀스트리트와 겹쳐서 지휘관 몰래 시험을 보았기에 마음이 진정 하지 못했다. 나는 2 사 출신의 설움을 사시로 뚫어 보려 했지만 못 했고 전역후에는 방통대에 적을 두고 사시를 준비 하다가 소위 사랑했던 여자 찾으러 미국에 왔다가 이렇게 미국에 눌러 앉을 줄 몰랐다. 나랑 함깨 대학에서 공부했던 친구는 군 법무관 차석으로 합격하여 현재 변호사로 근무를 하고 있다. 자기 자랑하면 칠푼이라고 하던데 한번 오늘 칠푼 한번해 보았다.
애기가 샛길로 들어 가게 되어 미안하다. 나는 미국 법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기에 내가 전과자로 둔갑하여 추방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도 나의 직업의식이 나로 하여금 심사관의 머리에서 발까지 흩어 보게 하였다.
가만히 보니 그의 손 가락을 보고서 그가 Rheumatic arthritis(RA) 즉 류마티스 관절염이 있는 것을 알았다. 내가 심사관에게 손에 통증이 많을 텐데 어떻게 하루를 보내냐고 엉뚱한 (?) 질문을 심사관에게 던져 보았다. 심사관은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서 이 질병에 대하여 많은 질문을 나에게 쏟아 붓는 것이다.
이런것을 두고 주객 전도 라고 하나요? 나는 심사관에게 어떻게 하여 RA가 생기는지, 어떤 사람이 많아 걸리는지, 병에 걸리면 증세는 어떠한지, 이 질병의 위험 요소는 무엇인지, 어떤 질병이 이 병과 비슷한지, 어떤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치료방법등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 나는 그의 질문에 상세히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심사관은 내가 그의 손에대하여 이야기 한 후로는 한번도 나의 신상 정보에 물어 보지 아니했다. 그러면서 나를 엘리베이트까지 와서 버튼을 눌러 주면서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나한테 숙이고 자기가 책임지고 어떻게 되었는지 빨리 조사해서 알려 주겠다고 했다.
이주후에 나는 이민국에서 우편을 받았다 가슴이 덜컹했다. 혹 잘못 되어 심사를 다시 받으러 오라고 해서 추방 할려고 할려나 하는 생각등 온갓 생각에 내 머리를 스쳐 지나 갔다. 나는 물한모금 마시고 흥분을 가라 앉히고 조심스럽게 우편을 열어 보았다. 편지 내용은 나에게 선서를 하러 오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나는 땅속 깊숙히 쳐 박을뻔 했던 기분이 하늘로 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늘은 이상입니다. 다음에는 펜더믹을 이 곳 병원이나 미국에서 어떻게 대처 했는지를 올려 볼까 합니다. 끝까지 긴 문장 읽어 주어서 감사합니다.
PS: 아래 사진은 처음 화와이 대학 학장이 돌아 가셨다는 문자를 받았을때 제가 방문했던 광주 비엔나 사진 입니다. 그때 저의 제수씨와 함께 갔는데 대부분 어데를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방문하면 마직막으로 안내 하는 곳은 선물 가게 입니다 그런대 깜짝 놀라운 것은 비엔나 책자 첫 페이지에 저의 동생이 운영하는 광주 한옥 호텔이 있는 거예요. 나중에 알았지만 광주에서 가장 귀하게 가고 싶은 곳이 이곳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답니다. 한번 구글에 “오가헌” 한번 쳐 보세요 이것은 광고가 분명 아니라는 것을 알려 드립니다. 거기 책자에 나온 것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그리고 하와이 친구 분이 돌아 가신 뒤 그 분 집에서 담은 사진과 그분 그리고 North Dokoda 주 청사와 attorney general (검찰총장) 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여러분과 공유 해 봅니다.
제수씨와 함께 광주 비엔나 행사장 정문 앞에서
광주 비엔나 행사의 책장 첫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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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4: 하루는 신입 광주 공무원을 상대로 광주를 가장 알 릴 수 았는 곳을 투표 핬는데 이 오가헌이 일등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하와이 교수님 집에서 본 호누루를 시내
교수남이 돌아 가신 후 뉴욕에서 화장 한뒤 memorial service 하기전의 모습
교수님이 직접 빚은 옹기들
교수님의 서재
교수님의 뒷 뜰
North dakota 주 청사
주 청사 앞에 있는 한국 전쟁때 전사한 North Dakota 출신 병사들 명단
주 청사 . 거의 미국 주 청사는 돔 형삭인대 이곳은특이하게 현대식 건물
검찰 총장 사무실 바닥에 새겨진 문호
주 검찰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