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기안리 소재 백천장의 묘>
시도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 백씨 29개파 중에서 수원백씨들이 언제부터
수원이라는 본관을 사용했는가 하는 문제가 최근에 대두되었는데
그 문제는 고려말 백천장이라는 인물의 후손인 휴암 백인걸선생의
행장에 그의 문인인 우계 성혼이 밝히기를 수원백씨는 개성백씨에서
갈려나와 조선이 건국하자 수원으로 이사하여 호적을 만들고
본관을 수원인이라 하였다고 명시한 바 잠곡 김육도 휴암의 신도비명을
찬술하며 우계의 행장 기록을 참조하여 같은 기록을 남겼다.
즉 수원백씨는 본래 개성백씨이며 조선조 초기에 수원으로
이사를 하여 처음으로 수원이라는 본관을 사용한 것이다.
현재 백씨는 대흥, 남포, 직산, 청도, 문경, 수원, 태인, 임천,
부여, 해미 등 모두 37개 본관을 사용하고 있다.
조선초기의 가장 오랜 기록인 조선실록의 내용을 참고하면
태백산사고본 10책 31권 16장 A면 명나라 외교.무역부분에 분류한
세종31권 8년 (서기1426년 병오년) 2월 15 (기묘)일 2번째 기사에
1. 명나라 사신 윤봉과 내사 백언 등이 오고 있다고 보고를 받다.
평안도 감사가 치보하기를 " 사신 윤봉(尹鳳)과 내사 백언(內史 白彦) 등이
경성두목 지휘 장용(京城頭目 指揮 張勇)과 서반 최진(序班 崔眞) 등 18인을
데리고 칙서(勅書)와 상으로 주는 물품 40상자를 가지고 옵니다" 하였다.
2. 세종31권 8년 (1426년) 2월 15일 4번째기사 의주에 가서
사신을 마중하게 하다.
"명을 내려 수원(水原)에 있는 사신 백언의 본가를 수리하고
윤중부(尹重富)와 친형 백용(白龍)에게 의복과 갓과 신을 내리고
의주에 가서 사신을 마중하게 하였다." 하였다.
3. 세종 31권 8년 3월 12(丙午)일 명나라 사신 윤봉과 백언을 임금이 모화루
(慕華樓)에 거둥하여 맞이하며 칙서를 받들다.
"사신 윤봉과 백언 등이 서울에 입경, 임금과 문무백관이 모화루에 행행하여
칙서를 맞았다. 경복궁에 이르러 예의를 행하여 끝나자 사신을 오시(午時)에
태평관(太平館)으로 행행하고 말에서 내려 잔치를 연 후에 궁으로
환궁하였다.
지신사 곽종중에게 명하여 두 사신에게 겨울 옷과 갓과 말안장 신 등을
나누어 주고 장용과 최진 등에게도 각각 같이 나누어 주었다.
하양 등 22명에게도 각각 같은 물품을 내렸다"
4. 세종31권 8년 3월 13(丁未)일 윤봉과 백언이 각각 왕과 중궁, 세자에게
가지고 온 물품 단자를 진상하였다.
말과 양, 향, 사리, 귤, 비단 등을 진상하였다.
5. 세종31권 8년 3월 16(庚戌)일 백언의 모친에게 비단과 옷과 신과
허리띠를 내렸다.
6. 세종 32권 8년 4월 2(乙丑)일 우대언 김맹성이 두 사신에게 문안하다.
우대언 김맹성이 두 사신에게 문안하니 백언(白彦)이 말하기를,
" 형 백중량(白仲良)과 아우 백인우(白仁雨)와 생질 김기(金琦)와
외숙부 황보경(黃補敬) 등을 데리고 돌아가서 어버이를 뵙도록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아마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서 감히 청하지 못하오" 하므로 맹성이 이 말을 아뢰니
왕이 중량 등에게 명하여 역마를 타고 따라가게 하였다.
7. 세종 32권 8년 4월 17(庚辰)일 백언이 수원에서 오고 윤봉을 한강에서
맞이하였는데 임금이 참찬 허조(許稠), 판서 정진(鄭津), 좌대언 조종생
(趙從生) 등을 보내어 잔치를 베풀고 위로하였다.
8. 세종8년 4월 26(기축)일 백언이 또 수원으로 그 어버이를 뵙고자 하니
임금께서 총제 원민생(摠制 元閔生)과 지신사 곽존중(知申事 郭存中)을
보내어 머물게 하였는데 언이 말하길 " 사람은 언제나 어버이와
2~3일만 떨어져도 늘 그리는 것을 이기지 못한다. 내가 소시에 명나라에
입조(入朝)하여 지금 25세가 되었다. 그간에 전하를 우르러 향하는
마음과 부모를 사모하는 정이 순간도 잊은 적이 없거늘 다행히 이제
전하의 성덕으로 돌아왔으니 기쁘기 한량없다.
또다시 후일에 돌아올지 못 올지는 모른다. 그 전에 아침 저녁으로
받들고져 함이다....(중략)
9. 세종 36권 9년 5월 6(癸巳)일 백언이 부친의 묘에 성묘하러 감에,
창성이 한강까지 배웅하고 찬성 권진(權軫), 호조판서 안순(安純) ,
좌대언 김맹성(金孟誠)을 명하여 한강루(漢江樓)에서 위로하여 보냈다.
10. 세종 36권 9년(1427년) 6월 2(己未)일
윤봉이 청하여 공권(孔權)을 부사정(副司正)으로 삼고,
백언이 청하여 동생 백인우(白仁雨)를 사정(司正)에, 백춘(白春), 박진
(朴眞), 김말(金末)을 부사정를 삼았다.
11. 세종 39권 10년 2월 11(癸亥)일
공조판서 성달생(成達生)이 사신 백언이 찬여(饌女)로 하여금
과실주를 빚어 두부와 올리니 황제가 심히 기뻐하며 즉시 백언을
어용감소감(御用監小監)에 제수하고 관대를 하사하였다는
명나라 조정의 소식을 보고하였다.
이상과 같은 조선실록 세종조의 기록으로 본다면 백언(白彦)은
본래 수원이 고향이나 어떤 연유로 명나라에 갔고 그곳 명나라 조정에
벼슬한 인물인데 세종 8년 2월에 25세의 나이로 조선으로 사신의
명을 띄고 왔으며 체류하는 동안에 고향인 수원에 가서 부친의 묘에
성묘하고 모친을 조석으로 시봉하엿으며 다시 명나라로 돌아가
황제의 명으로 어용감 소감에 제수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형은 백중량(白仲良), 백용(白龍)이며 동생은 백인우(白仁雨)이고
모친은 황씨(黃氏)이며 외숙부는 황보경(黃補敬)이라는 사람이며
누이는 김씨에게 시집가서 김기(金琦)라는 자식이 있었다는 가계를
대략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씨대동보에는 수원백씨 본관시조라는 백천장(白天藏)의 계통에
백언(白彦) 가문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그의 형과 동생들이 있었지만 가계에 대한 고증할 전거(典據)가
아직 밝혀진 바 없다.
백천장 또한 고려조에 정당문학을 했다고 하지만 고려사엔 이름조차도
없으며 수원백에 봉해졌다는 것은 족보상에 후손들의 기록일 뿐이다.
특히 원나라 조정에서 광록대부 우승상을 지냈다고 하지만 고려인이
원나라 조정에서 우승상을 지낼 수도 없거니와 그런 경우는 없다.
만약 백천장이 원나라 조정에서 이부상서와 우승상을 지내고
다시 고려로 돌아와 정당문학과 수원백에 봉해졌다면 이와 같은
사실이 고려사와 같은 정사에 명백히 기록되었을 것이다.
백천장이 본래 원나라에서 온 사신이었는지 백언과 같이 원나라에
끌려간 고려인 중에서 출세하여 다시 고려에 사신의 신분으로 온
사람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1630년대에 그의 묘를 추심하여 찾을 적에 표석에는 천사 백천장
(天使 白天臧)이라는 다섯 글자와 배전씨지묘(配全氏之墓)라는 자획을
확인했다는 당시의 기록을 볼 때 지금처럼 부인이 경주최씨인 것과는
전혀 다른 기록이다.
감출장 장(藏)이 아니라 착할 장(臧)이었다고 한다.
백언에 대한 조선실록 세종대의 기록은 여러모로 수원백씨들의 상계
계통을 밝혀주는 좋은 자료로 보인다.
첫댓글 수원백씨장흥제산문중 카페에 이런 내용이 수록 되어 있었어 참고자료로 활용하고져 옮겨 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