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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미국 메릴랜드 주의 한 마을에 남루한 복장의 고학생이 나타났습니다.
서적 외판원인 청년은 더위와 굶주림에 지쳐 있었습니다. 그는 마을 입구의 허름한 집을 방문하여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한 소녀가 나와서 "우리는 너무 가난해서 책을 살 수가 없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책을 팔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몹시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그러니 우유 한 잔만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소녀는 시원한 우유 한 잔을 이 청년에게 대접했습니다.
청년은 아주 정중하게 인사하고 나서 너무 고마운 나머지 이름이나 기억해 두겠다고 수첩에 소녀의 이름을 적고는 그 집을 떠났습니다. 그 후로 20년이 흘렀습니다. 메릴랜드 병원에 한 여성 중환자가 실려 왔습니다.
병원장 하워드 켈리 박사는 의사들을 총동원해 환자를 살려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1만 달러가 넘는 치료비 청구서를 받아 들고는 걱정이 되어 한숨만 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청구서 뒤에 붙어 있는 병원장의 짤막한 편지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20년 전에 저에게 대접한 우유 한 잔이 치료비입니다."
남을 대접하는 자가 축복을 받고 보상을 받습니다.
***원스턴 처칠이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생활해 가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남에게 줌으로서 생명을 살아간다." 우리가 일상 생활하는 것은 벌어서 살 수 있지만 인생에 참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내가 남에게 나누어 줄 때에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나누어주는 교회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은 "그대가 남을 위하여 착한 일을 할 때에는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가장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남을 위해서 좋은 일을 했더니 결국 나에게도 좋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남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자기도 행복하고, 남을 성공시키는 사람이 자기도 성공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움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또 도움을 주겠다는 그런 헌신적인 마음의 자세를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은 우리가 물질을 쓰는 곳에 있습니다. 입으로만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됩니다. 물질을 통해서도 하나님 앞에 헌신해야 되고 하나님을 섬겨야 됩니다.
청교도 신학자 토마스 아담스(Thomas Adams, ?∼1653)는 "상인이 장사할 때 다른 나라에서는 자기 나라의 돈을 외환으로 바꾸어 가지고 다니듯이 우리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의 재물을 선으로 바꾸어 죽을 때 천국에서 다시 그것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 우리가 천국 가는 데 재물이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그 재물은 우리에게 그렇게 큰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 중에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78.9%, 새벽기도와 수요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각각 13%, 24% 라고 합니다. 이렇게 주일날만 나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물질을 드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간까지 드려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갑부 알버트 구베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영국과 미국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해서 재산이 4억 5천만 달러, 원화로 약 5천 9백억 원을 모은 재산가였습니다. 처음 그는 수중에 1백 파운드밖에 없는 가난뱅이 였습니다. 사업 시작은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 만일 부자가 되도록 도와주신다면 전 재산의 절반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그때서부터 시작해서 그는 경이적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청년 시절의 약속대로 재산의 50%를 드리고,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게 된 것입니다.
***러시아의 소설가 레오 N. 톨스토이(1828∼1910)는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한다는 것은 행복을 얻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이기심과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모든 불행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거대 체인망으로 거부를 이룬 J. C. 페니는 은퇴한 후에는 사회사업 재단을 만들어 많은 일을 했습니다. 한낱 판매원이었던 그가 대재벌이 된 비결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다만 성경에 있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 6:31)'는 구절을 그대로 실천했을 뿐입니다."그는 물건을 만들 때, 남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물건을 만들고 또 팔고, 사업을 했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성공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남을 행복하게 만들고 남을 대접하고 남을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골든 룰(Golden rule),' '황금률(黃金律)', 곧 삶의 법칙이 되는 것입니다. 정치가가 돼도, 사업가가 되어도,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삶 자체가 남을 도와주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그런 말씀에 기초하는 사람은 영광과 존귀와 성공과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워너 메이커(John Wanamaker, 1838∼1922)는 필라델피아 YMCA 회장을 지내고, 미국 최초의 백화점을 설립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대통령이 워너 메이커를 불러서 우체국 장관을 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워너 메이커는 대통령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내가 장관이 되어도 교회 출석이 보장되고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면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장관이 되어서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고 주일학교 교사를 할 수 없다면 나는 장관을 사양하겠습니다." 장관 자리보다도 하나님을 섬겨야, 물질보다도 명예, 권세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섬겨야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습니다. 대통령이 되었다고 교만하고 교회도 나오지 않고 불순종하고 불신앙에 빠지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 사람을 더 크게 사용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전도의 사명,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치고 전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과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의 원로 목사님 중의 한 분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어떤 수양회에 가셨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어떤 할머니가 성경을 열심히 읽고 있는 것을 보니 성경책에 줄이 많이 그어있었다고 합니다. 더 자세히 보니 'P'자와 'T'자가 적혀있더랍니다. 그래서 그 사연을 물었습니다. P자는 proof의 약자인데 그 말씀대로 살았더니 그대로 되었다. 즉 증명이 되었다는 뜻이요, T자는 Try의 약자인데 지금 그 말씀을 지키어 살려고 노력 중이라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할머니입니다. 성경을 하루 아침에 모두 다 지키어 실천하려면 잘 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믿음이 자라나는 만큼 또는 할 수 있는 만큼 지키어 실천하다보면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이르게 됩니다. 즉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천이 하나도 없는 교인이라면 어디에도 쓸데가 없고 실천이 없는 교회라면 존재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죤 웨슬레는 그 감리교를 창설한 자로서 그 어머니가 자녀를 낳았는데, 아들을 열 둘 낳고 딸을 일곱 합쳐서 열 아홉을 낳았답니다. 그런데 그 자녀가 자라다가 일곱 명은 사망하고, 열 두 명을 그 어머니 수산나가 기르는데 어떤 자녀가 똑같은 질문을 20번이나 했을 때 죤 웨슬레 아버지가 그 자기 아내 수산나에게 "여보, 똑같은 질문을 20번이나 하는데 일일이 그것을 어떻게 대답하느냐" 고 했습니다. 그때 수산나가 얼마나 참 교육적인 말을 했는지 모릅니다.
"만일 이 자녀가 한 가지 질문을 20번이나 했는데 알기까지 가르치지 아니하면 열 아홉 번은 무효가 되잖아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알기까지 대답해주고, 알기까지 깨우쳐주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그리고 그는 자녀들에게 항상 이런 교훈을 남겼습니다.
"약속을 반드시 지켜라. 남의 물건은 절대 사용하지 말아라. 언제나 순종과 감사를 잃지 말라."평범한 우리 생활 속에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그런 내용이지만 부모의 한 마디 두 마디 교육은 자녀들의 장래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은 이 수산나의 집에 큰 화재가 나서 집이 다 타버렸습니다. 그의 재산이 다 순간에 없어졌습니다.
그 때에 다른 사람 같으면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하고 원망 불평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산나는 감사하면서 죤 웨슬레를 붙잡고 "너를 타죽게 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너를 쓰시려고 한 연고인 줄 믿어라."고 말합니다.그때부터 이 죤 웨슬레를 하나님께 바쳐서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큰 인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좋은 환경에서도 부르지만 때로는 어려운 환난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절대로 우리는 어떤 역경이 있다고 좌절하거나 거기에서 실패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도 때로는 환난과 역경을 주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에게 대한 교육 중에 신앙의 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어느 날 에디슨의 친구가 자기 아들을 데리고 찾아 왔습니다. 그 친구의 아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뭔가 일을 시작하기 위해 준비중입니다. 그 친구는 "여보게 에디슨 이 녀석이 학교를 졸업하고 뭔가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 중일세 자네에게 인사도 드릴 겸 이 녀석 장래에 도움이 될 만한 말을 들려주기 바라서 데리고 왔네. 좋은 덕담을 해 주게나" 라고 말했습니다.
에디슨은 묵묵히 친구의 아들을 바라보다가 "결코 시계를 보지 말게 이것이 젊은이들에게 주고픈 나의 충고일세"라고 대답했습니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습니다. 일하는 동안 사장은 시계를 보지 않지만 월급장이는 연신 퇴근시간을 드려다 보기 마련입니다.
***어느 날 영국군 장교가(1759년) 길거리에서 북을 치며 신병 모집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인디언에게 "군인이 되지 않겠는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인디언은 "저는 이미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느 부대 소속이며 대장은 누구요" 라고 묻자, "나는 매우 용감하고 위대한 대장을 모시고 있습니다. 나는 그 대장님을 위해 생명을 바쳐 싸울 것입니다."
"그 대장이 누구요?"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예수를 위해 살고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승리하고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815년 6월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이 워털루에서 해전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무선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배에서 신호를 보내는 것을 확인함으로 전세를 육지에서 판별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국민과 왕실은 해전을 치르고 있는 웰링턴 장군이 보낼 신호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신호가 왔습니다. 그것은 "웰링턴이 패배하였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 국민과 왕실은 울음 바다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다시 신호가 왔습니다. "웰링턴이 적을 패배시켰다." 이 소식 역시 전국에 퍼졌고 전국은 감격과 환호의 도가니를 만들었습니다. 도처에 축제가 벌어 졌습니다. "예수 십자가에 죽었다" 이 소식은 절망과 슬픔을 준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다시 살아나셨다. 부활하셨다." 이 소식은 승전보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도 행복한 것입니다.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된 것을 기뻐합시다. 감사합시다.
***27살 때에 선교하기 위하여 영국에서 중국으로 머나먼 바닷길을 건너온 토마스 선교사, 그러나 중국으로 건너오자마자 꽃다운 나이에 아내를 잃었습니다. 아내를 잃고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그는 중국 한 모퉁이에 붙어 있는 한반도에 사는 조선 민족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민족은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고 있으며 복음을 들은 일이 없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말로 된 성경책을 배에 싣고서 대동강을 따라 올라 왔습니다. 그때는 대원군이 한참 쇄국 정책을 펴고, 카톨릭 신자들을 잡아죽이는 살벌한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성경을 전해 주려고 노력을 하다가, 결국 우리 관군들의 공격에 의해 배가 불타게 되고, 그는 강변으로 끌려 내려 칼날에 맞아 순교를 했습니다. 순교하는 그 순간에 그는 자기 목을 치는 사람에게 성경을 던져 주며 "이것을 읽어보시오" 라고 소리치고는 죽었습니다. 그를 칼로 친 사람이 그 성경을 주어서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읽고는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 젊은이의 피가 그 강변에 흘렀기에 그 피 값으로 오늘 우리가 존재하게된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면부지의 이 땅에 와 쏟은 수많은 벽안의 선교사들의 피와 땀을 먹고 우리의 생명은 싹텄고, 한국교회라는 나무는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기초하고 있는 이 희생의 반석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양화진에 가면 많은 사람들의 비석들이 서 있습니다.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1세기 전에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풍토병에 걸리고 적응하지 못해서 죽은 어린 아이들의 무덤과 어떤 선교사 부인의 무덤이 있습니다. 명대로 살지 못한 젊은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무명의 선교사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한국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빚진 감정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희생 없이는 생명이 살아나지 못합니다. 희생 없이는 지옥으로 가던 영혼이 천국으로 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희생하셨는데 어떻게 희생 없이 전도가 되겠습니까?
***예전에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쓴 『Why not the best?』(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라는 글을 읽고 깊은 도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수십 년 전에 자기 교회의 전도집회를 10년 동안 참가했었다고 합니다. 매년마다 전도집회가 열렸는데 매년마다 14가정을 꼭 책임지고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10년 동안 그 전도집회에 참석했으니까 140가정을 전도한 것입니다. 매우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나는 10년 동안 140가정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였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예수 믿은 사람도 있다.'라는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66년도에 주지사로 출마를 하여 선거운동을 하였는데, 3개월 동안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악수를 했다는 것입니다. 주지사에 당선된 뒤 그의 마음에는 부끄러운 가책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를 위해서는 3개월에 30만 명을 만나보면서 하나님을 위하여서는 14년 동안 겨우 140가정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니... 이것은 보통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이것이 카터 전 대통령이 느낀 가책이었습니다.우리에게는 이러한 가책을 받아야할 부분은 없을까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온갖 정성을 다 쏟아 붓고, 없는 시간도 억지로라도 만들고, 돈도 아낌없이 쓰며 전력을 다 기울이면서,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잃은 양, 기회 놓치면 영원히 망할 수밖에 없는 그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는 시간도 별로 안 드리고, 돈도 안 쓰려고 하고 관심도 별로 기울이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하기에는 참으로 부끄러운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한 희생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사랑이라는 나무는 희생을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선교사로 일하다가 생을 마친 아프리카 선교의 선구자요, 대영 제국이 자랑하는 위대한 아프리카의 개척자 리빙스턴이 16년간 밀림에서 선교하다가 잠시 영국에 귀국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27번째 말라리아에 걸려 사선을 헤매다가 아직 회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연약한 몸을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사자에게 물린 한쪽 어깨와 팔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마치 썩은 나무토막 마냥 몸에 힘없이 달려 있는 나약한 모습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설교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는 설교에서 이렇게 도전하였습니다."나는 하나님께서 아프리카에 들어가 그곳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일, 그 일을 위해서 나를 불러 주셨다는 것을 놓고 즐거워하지 아니한 날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그곳에서 많은 희생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도무지 갚을 수 없는 하나님께 진 큰 빚의 작은 부분을 갚았을 뿐인데, 이것을 어찌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장차 영광스러운 소망과 복된 상급을 약속 받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희생이 되겠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한다라는 말과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것은 절대로 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특권이라고 말하십시오. 모든 것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위해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결코 희생하지 않았습니다."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런 심정을 가지고 전도하고, 선교해야 합니다.
***슈테른베르크가 그린 유명한 예수님의 그림이 있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빌라도와 유대인들 앞에서 조롱을 받으면서 서 있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 그림의 제목은 "이 사람을 보라" 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 밑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 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
이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은 하버겔이 쓴 찬송가가 185장입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주님의 은혜에 감동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이 구원을 받도록 조그마한 수고로부터 큰 희생에 이르기까지 값을 치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처럼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사랑과 열정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이처럼 자기 자신 전부를 불태울 수 있는 열정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날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구주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랑이 사람들로 하여금 어두움에서 깨어나게 합니다.
그 사람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게 합니다. 그 사람들의 눈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합니다. 부활의 영광 앞에서 환희하는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즐겁게 희생할 수 있는 사람되기를 바랍니다.
***목욕탕에서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키가 작은 사람이 눈을 감고 비누를 잡으려다가 옆의 사람 비누를 집어 쓰게 되었습니다. 비누의 주인인 체격이 좋은 청년이 버럭 화를 내며 욕을 퍼부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눈을 감고 쓰다보니...용서하십시오."
"뭐, 용서? 너 이리 나와, 내가 누군 줄 알아?"체격이 좋은 젊은이는 먼저 나가서 옷을 입었습니다.
그는 군인으로 육군 중위 계급장을 번쩍였습니다. 키가 작은 사람도 나와서 옷을 입었는데 우연히 그도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육군 소령이었습니다. 자, 이때의 육군중위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겉모습만 보고 남을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육군 중위와 같은 못난 사람이 아닐는지요?***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영적 호흡이다. 기도는 생명선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요 교제이다. 기도는 사랑의 고백이다. 기도는 하늘 문을 열고 하나님의 보고를 여는 열쇠이다. 기도는 은혜의 방편이다. 기도는 세상과 사탄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는 비결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체험케 하고 하나님의 눈과 방법으로 보고 문제를 풀게 하는 비결이다. 헤레 포스터 박사는 그의 저서 '기도의 의미'에서 '기도는 기독교의 중심으로서 영적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잠시도 쉴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곧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획을 알며 그를 영화롭게 하게 된다.
***미국의 역사물을 아주 흥미롭게 저술하는 작가로서 라이프리 Ripley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작가가 쓴 책 가운데 "믿거나 말거나(Believe it or not)"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속에 보니까 한 미국인에 대하여 이렇게 아주 흥미롭게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최초의 미국인 철학자였다. 그는 최초의 미국 대사였다. 그는 하모니카를 발명했다. 그는 또한 가로등을 발명했다. 그는 최초의 정치만화가였다. 그는 당대의 최고의 수영 선수였다. 그는 이동 순회 도서관을 처음으로 제도화했다. 그는 걸프 해류를 발견했다. 그는 피뢰침을 발명했다. 그는 섬머 타임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이었다. 그는 펜실바니아주 지사를 4번이나 역임했다. 그는 우편을 통한 신문 배달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그는 미국 동북부 지역 태풍 경로를 처음으로 그려 냈다. 그는 거리에 청소과를 처음으로 창설했다. 그리고 마지막이 재밌어요. 그는 진실로 부지런했다. 그의 이름은 벤자민 프랭크린이다. 정말 부지런한 사람이죠. 부지런하지 않았다면 그가 만약 게을렀다면 이런 어마어마한 업적들이 그리고 생산적인 일들이 가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이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 정도가 아니라 죄악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초대교회 그리고 중세기를 거치는 동안에 일곱 가지 대표적인 큰 죄악을 말할 때 게으름을 포함 시켰습니다.
***세상을 바르게 살아감에는 역사를 아는 일이 중요합니다. 한 개인에게도 한 나라에게도 역사를 알고 거기서 바른 교훈을 얻어 실천하여 나갈 때 번영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역사도 알아야겠지만 다른 나라 다른 백성들의 역사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스위스의 역사를 한번 살펴봅시다. 불과 백여년전만 해도 스위스는 심히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심지어 먹을 것이 없어 자녀를 외국에 파는 경우도 흔하였습니다. 나라 안에 일자리가 없어 남자들은 외국에 용병으로 나가 피를 흘린 댓가로 돈을 받아 고향으로 송금하였습니다. 그 돈으로 아내들은 자녀를 기르며 푼푼이 저축하였습니다. 그렇게 모인 돈이 산업 자금이 되어 시계산업이 번성케 되었습니다.
1970년에는 세계 시계산업의 65%가 스위스인들의 몫이었고 시계산업 이익금의 80% 이상이 스위스인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불과 10년 지난 1980년에는 스위스 시계산업은 완전히 몰락하여 세계 시계산업의 10%를 차지할 정도에 머물렀고 이익금 역시 20% 미만이었습니다. 10년 안에 스위스인들 중에 시계업의 전문기술자가 50만여명 중에 5만명이 일터를 잃고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바로 변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스위스인들이 게을러져서도 아니었고 낭비하여서도 아닙니다. 시계산업이 기계 메타니즘에서 전자시계로 바뀌는 시대적인 변화를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앞을 내다보지 못했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공교롭게도 세계에서 전자 시계 기술을 처음 발표한 것은 스위스의 회사입니다.
1967년에 스위스의 뉴가텔(newchatei) 연구소가 전자시계의 아이디어를 고안하여 스위스 시계제조업자들에게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위스 회사들은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일본의 세이코사가 관심을 기울여 즉시 계약하였습니다. 그후로 10년만에 세계 시계 제조업의 주도권을 스위스에서 세이코를 선두로 하는 일본으로 바뀌었습니다. 앞을 내다보지 못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못하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가 됩니다. 신앙의 바로 앞을 내다보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과거에 매이는 신앙에 머물러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신앙을 미래를 바라보고 앞으로 나가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모세가 그러하였고 느헤미야, 바울, 베드로, 모든 신앙의 선배들이 그러하였듯이 우리도 내일을 바라보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그런 신앙은 비젼 있는 신앙이라 일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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